오늘 말씀은 우리가 은혜 받는데 가시와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편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에 역행하는 단어와 가르침이 들어있다고 여겨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편견을 가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뒤로 하고라도 복종이라는 말 자체가 이 시대를 역행하는 단어로 여겨집니다. 복종을 강조하는 곳은 교회와 군대 밖에 없다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할 정도로 이 시대에 인기 없는 단어가 바로 복종입니다. 복종이라는 말도 마음에 부딪치는데 복종을 남편에게 하라고 하니, 이 말씀을 그냥 생선 가시와 같이 넘어가려 한다거나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말씀으로 취급해 버리기도 하고 목회자들도 강단에서 이 부분을 설교하는 부분을 즐겨 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두 가지의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번째 오해는 이 말씀을 그냥 크리스찬 가정에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그냥 부부생활 정도의 가이드로 바라보는 오해입니다. 가정 생활 지침서 정도로,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두번째 오해는 그냥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을 하고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오해입니다. 그렇기에 가정 안에서 복종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영적인 관점에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말씀 기억하시겠지만 이 말씀은 영적 전쟁을 치르듯이 시대가 악한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갈까를 강조하고 있는 그 컨텍스트에서 이 말씀이 주어졌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가정은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냥 사랑해서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비한 하나님의 영적 질서와 은혜가 담기는데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심으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된다고 얘기하는 본질은 그리스도가 남편과 아내의 머리 되는 가정에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고는 남편과 아내가 절대 한 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삼위일체의 신비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고백이 뭡니까? 고백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하나님이 본체로 동등하시고 동질이신 한 분이시지만 역할이 다르다는 거예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하나님과 본체상 동등하신데 그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인간이 되시고 아들이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자녀들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을, 아내를 통하여 그것을 매개하는 그 놀라운 은혜로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현장으로 세워 주신 곳이 가정이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정에 녹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때가 악하고 시대가 악하면서 사단 마귀는 계속 가정을 흔들고 교회를 흔듭니다. 하늘의 복과 능력이 담기는 통로인 가정을 깨고 해체하려는 미혹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정의 모습이 어떻냐면 결혼을 지옥이라 그러고 가정을 권력투쟁의 현장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를, 부모와 자녀 사이를 갈등과 분열하게 조장하고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이 이간질합니다. 가정을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가정하면 모두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인 이미지를 계속 떠올리게 만들어 가정의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다 무너뜨리는 악한 시대를 살고 있고, 그렇게 무너뜨리기 원하는 사단 마귀의 역사가 있음을 잊지 말고 이것을 영적 전쟁에서 가정을 지키고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바라보면서 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당시에 가정은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렇게 우리와 같은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는 교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당시 큰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는 가정은 교회였고 교회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정의 영적 질서를 세우는 것은 교회의 영적 질서를 세우는 거와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질서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가정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가정이 교회였다는 이 컨텍스트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게 있습니다. 이 세상과 다른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들의 삶을 얘기한다면 그 당시에는 이미 문화적으로 남편에게 아내가 다 복종하는 문화였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거의 남편을 주인으로 모시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남편은 아내에게 군림했고 아내를 함부로 해도 상관없었고 심지어 아내를 버리고 싶으면 이혼증서를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는게 그 당시 보편적 문화였습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하는 것은 세상에 당연하고도 보편적 문화였는데 왜 오늘 말씀은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강조하는가…하면 뒷부분의 핵심이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거예요. 이게 단순히 원웨이로 한 사람만 복종하는게 아니라 영적 큰 그림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큰 명령 가운데 남편에게 주께하 듯 복종하라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라 오직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의 주종 관계라던지 서열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아내들은 그 한 특별한 남자인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종이라는 말이 성경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강요하고 억압하고 군림하는 복종이 아니라 이 말씀에서 복종은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도자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기쁨을 동력으로 자신을 자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등한데 동등함을 취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원하는 복종을 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자발적 복종,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한 자발적 복종과 같은 마음으로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복종은 영적인 삶으로써 예수님 같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자발적 순종입니다. 겉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종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복종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능력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겁니다. 동등한데 동등함을 자발적으로 내어 맡기며 이 영적인 질서가 우리 가정에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내 마음에 기쁨으로 하는 복종입니다. 그 당시 세상에서의 복종은 뭡니까? 억압과 군림과 누름에 복종이었습니다. 너는 나에게 무조건 엎드려…강요하고 억압하고 군림하는 복종이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시며 그리스도에게 하는 복종은 억압과 군림의 복종이 아니라 가정을 돌보고 책임지는 대표자로서 남편을 인정하는 복종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군림하시려고 목을 꼿꼿이 세우면서 너희는 다 나에게 엎드려…그렇게 강요하며 누르시면서 머리 되신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 머리 되심은 돌보는 책임과 대표자로서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을 근거로 하게 되는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John Stott라는 유명한 사람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의 머리 되심과 같이 복종한다는 것은 권위를 통하여 억압과 군림을 통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것이며 책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이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남편의 권위를 계속 주장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게 없습니다. 남편의 권위는 스스로 주장하면서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남편의 권위는 누가 세워 주냐면 부인이 세워 주는 겁니다. 동등하지만 동등됨을 내려 맡기며 남편을 세워주는 그 아내에 대한 모습을 통하여 영적 질서가 세워지고 하늘의 축복과 은혜가 가정에 임하게 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할 명령하신 또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는 홀로 신앙 생활 하는 부인들, 즉 남편들이 불신자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남편 아내가 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었지만 대다수는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을 이겨내며 몰래 혼자 신앙 생활하는 부인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거예요. 한국에서도 초기 기독교를 보면 남편과 가정의 핍박을 이기며 혼자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남편 하면 떠올리는 게 그들의 영혼 구원 이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간절히 부르짖는 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남편의 변화와 구원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했던 게 그 남편을 그리스도에게 하듯 자발적으로 마음을 다해 남편을 세워주고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복종하면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죠. 그때 남편이 뒤집어지며 완전히 복음으로 세 사람 된 수많은 간증거리들이 그 초대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맛보아 아는 현장입니다. 창조의 놀라운 역사와 질서를 배우는 현장이자 하늘의 복을 경험하는 현장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습니다.영적인 질서와 순종을 배워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 순종의 은혜를 통하여 영적 질서가 가정 안에 세워지기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하듯 피차 복종하되, 아내는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동등한데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내어 맡기며 남편을 세워주며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며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축복이 담기는 가정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피차 복종하고 피차 사랑한다는 큰 그림 가운데 오늘 말씀이 있기에 항상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시대에 계속해서 영적인 질서와 축복을 무너뜨리며 가정 무너뜨리며 해체하려 하는 사단 마귀의 미혹에서 승리하며 우리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며 성령 하나님에게 충만함을 받아 든든히 가정이 세워 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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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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