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엘리사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 한 직후 직면한 한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여리고에서 물을 달게 하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엘리사를 모욕하고 놀리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의 수제자이자 후계자는 엘리사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외에도 소위 말하는 엘리야의 제자라고, 내가 엘리야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엘리야가 승천한 후 그의 시신을 찾는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찾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굳이 며칠씩 헤메면서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다고 돌아다녔습니다. 왜 그렇게 그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는가? 엘리아의 시신을 찾으면 본인들은 엘리야의 후광을 좀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왜 꼭 엘리사만 엘리야의 직속 선지자냐….우리도 다 엘리야의 제자들이니, 본인들이 리더십을 주장하고 영향력을 주장하면서 엘리사를 압박하기 위함입니다. 엘리야의 시신을 찾아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 뭔가 해보려는 인간적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찾아 헤멘 것입니다. 마치 모세의 가족들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만 하나님이 부르셨나...우리도 부르셨다면서 그의 지도력에 도전을 가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논리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가 봐야 쓸데 없는 일이라고 알려준 엘리사의 말 대로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시신을 찾을 필요도 없고, 엘리야를 기념할 필요도 없고 엘리야를 높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때 잘 쓰임 받고 천국에 들려 올라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냐가 아니고,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쓰임 받고 떠난 엘리야를 이제는 뒤로 하고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쓰시는 선지자인 엘리사를 쓰고 계심을,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되지 말아야 되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만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면,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게 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내려놓고 가지치기 하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높이고 사람들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자꾸 기념비를 세우면서까지 기억하려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에서 물을 달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정복지민 여리고 지역의 문제는 뭐냐면 위치도 좋고 여러 조건들이 좋은데 물이 안 좋아서 농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그 물을 고쳐 주셨습니다. 엘리사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엘리사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엘리사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는 물에서 엘림의 단물로 바뀌지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그 땅에 물을 고쳐주고 그 땅의 물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시는 엘리사를 통해 그 땅에 물을 고쳐 주시고 치유하며 생명을 얻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생명을 주며 쓴물을 단물로 치유하시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기에 이 새벽에 은혜 가운데 우리가 말씀을 먹기 위해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으며 말씀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정반대의 역사인데 엘리사를 놀리고 저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했는데, 이 작은 아이는 어린이기 아니라 청년이라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합니다. 젊은이들과 청년들이 엘리사는 대머리라 놀리고 조롱하며 엘리사의 사역을 방해하는 겁니다. 대머리라고 놀리는 것은 단순히 엘리사에게 머리가 없다는 것을 조롱하는 외모 비하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머리는 부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머리를 놀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모욕이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대머리라고 놀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선지자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지만 저주하고 모욕한 젊은이들을 수풀에서 곰들이 나와 42명을 찢어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모욕하고 저주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가로막은 그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비극적 사건은 마치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의 역사로 즉사한 비극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흔드는 사건을 저질렀기에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큰 일이 아는 거 같지만 그 일이 얼마나 교회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미쳤는지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는 것도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엘리사를 통한 이 두 기적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치유받고 복과 구원을 얻는 역사가 있었던 반면에 그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고 거절하면서 화와 심판을 얻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죽은 땅을 살리며 쓴물을 단물로 바꾸며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끌기도 하고, 동시에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치는 자들을 향하여 이런 화와 심판에 역사를 이끌기도 함을 잊지 마십시오. 본질을 붙들고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사람들이 대단한 게 아니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시간 잘 쓰임 받는 사람들을 높이는 대신, 사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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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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