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들이자 세번째로 왕이 되는 여호람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남유다는 계속해서 여호사밧 왕이었는데 북 이스라엘은 아합왕에 이어 세번째로 왕에 세워집니다. 여호람 왕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평가인 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지는 아니하였으니…” 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히 여호람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악한 자였기에 부정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 만큼 악하지는 않다는 평가, 긍정 평가라고 할 수는 없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평가가 끝나면 되는데 하도 북 이스라엘에 불순종하고 배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그 악한 자들 가운데 이 여호람은 좀 좋은 편에 속하는 악한 자였다고 어떻게든 좀 좋게 평가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한 왕이라도 말씀 가운데 정신차리며 본질로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녹아져 있습니다. 여호람 왕이 그 부모보다 그래도 낫다고 하나님께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주상을 다 없앴기 때문입니다. 주상을 북 이스라엘에서 모두 없앤다는 건 왕이어도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백성들의 함께하는 뿌리깊이 내려오고 있는 우상숭배 근원이 되고 상징이 되었던 것이 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상을 없앤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과 반발을 직면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놀라운 결단을 통해 그렇게 주상을 모두 없앴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람 왕은 부모보다 훨씬 나은 존재이고 훨씬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왕들에 대한 일관적인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이 잣대로 우리 모두를 평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내 인생 평가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 천국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분명히 실체로 함께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분명한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 인생은 어떠한가…를 늘 인식하고 내 삶을 돌아보며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바라보고 계시고 평가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한가…세상 기준으로 어떠한가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정말 중요한 인생 가치로 두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평가를 민감하게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내 삶을 두며 살아갈 때, 아합왕와 같은 부정 평가, 여호람과 같은 씁쓸한 평가를 받지 않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의 길을 동행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 하나 여호람 왕의 평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배반한 모압을 향한 연합군의 전쟁입니다. 여호람 왕이 직면하게 되는 모압과 전쟁, 남유다 여호사밧 왕에 함께 연합군을 조직해 모압과 전쟁을 벌이려 합니다. 모압은 원래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는데 모압이 배신을 하고 나니까 여호람 왕은 그 모압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쟁이 하나님의 뜻에 옳은 지 아닌지, 하나님이 함께 싸우시는 전쟁인지 아닌지 고려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 생각에 배신한 자들을 가만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앞서 전쟁을 밀어 부치고, 하나님을 찾는 대신 눈에 보이는 이웃이었던 남 유다 여호사밧왕을 함께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그 초대에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 심사숙고하거나 하나님께 분별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대신,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전쟁 참여를 결정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성은 당신의 성과 같고, 내 말들은 당신의 말들과 같다면서 적극적 전쟁 참여를 결정합니다. 여호사밧왕의 인생 후반전의 문제는 아합왕으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이 그에게 흘러 들어와서 변질과 왜곡을 지속하게 하는데, 또 한번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유다를 끌어들여서 함께 전쟁하면 겉으로 보면 세가 커져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에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주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은 이렇게 연합군을 조직해 모압을 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전쟁의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 가운데 척척 계산대로 진행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모시지 않은 전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아가는 전쟁길 앞에 그들은 생각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가 하면 떠난지 7일 만에 군사들도 가축들도 먹을 물이 딱 떨어져 목말라 죽게 생긴 겁니다. 전쟁에서 보급은 필수인데 먹을 것은 고사하고 먹을 물이 없으니까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여 위기 속에 갑자기 찾아온 것은 왜곡되고 과장된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당하는 겁니다. 아 슬프다….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모압의 손에 넘기려고 하시는구나…전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목말라 죽겠구나…탄식합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을 그렇게 찾았다고…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 두려움에 빠지니까 다 하나님 탓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자문도 구하지 않고 전쟁에 뛰어 들고서는,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과 위기 속에 하나님을 배제한 자신들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에 보냈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모압의 손에 죽었구나…벌벌 떨고 두려움에 압도당하는 그 때, 남 유다 여호사밧은 또 한번 정신을 차리고 다르게 반응합니다.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지금 물이 떨어져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말라 죽을 것 같은 전쟁터의 절박한 상황 가운데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우리는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말고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볼 수 있는 선지자가 가까이에 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며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 당하여 벌벌 떠는 대신, 늦었지만 회개하는 마음으로 먼저 이 주변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직 살 길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아합 가문과의 결혼을 통하여 안 좋은 영적 영향력이 계속해서 여호사밧 왕에게 젖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의 왕보다 훨씬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민감한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때가 늘 한발 늦습니다. 전쟁 하기 전, 일이 터지기 전 먼저 하나님께 자문하고 갈 길을 어쭙는 영적 겸손이 있어야 사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붙드는 타이밍이 꼭 일이 터지고 나서, 위기와 복병을 만나 두려움에 압도 당하고 나서 찾게 되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여호사밧 왕과 같이 믿음의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눈에 보이는 문제나 어려움을 뛰어넘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며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시고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지 못했다면 인생의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것 만이 회복의 길이고 살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죽겠다고 포기하는 인생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두려움과 낙심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구하며 붙들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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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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