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모든 죄, 그 본질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의 중심에 서셨습니다. 내 인생의 중심일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의 중심으로 계셔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후가 이 세상의 역사와 온 우주 역사를 구별합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십자가에서 지신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선명히 드러내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키시는 보혈의 능력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죄는 우리를 결박해 묶어 버리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들며 죄의 종으로 살게 만들어,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억지로 끌고가는 파괴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죄가 쌓이면 쌓일수록 죄는 더 무겁게 우리를 결박하고 더 억지로 원하지 않는 곳으로 질질 끌고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이 결박으로부터 해방을 주시고, 억지로 끌려가는 사망의 힘으로부터 권세로 부터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신 놀라운 사건이기에,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고 나에게 능력이자 실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모욕하고 희롱하고 비웃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고 계시는 상황은 고통과 피비린내가 가득한 비참한 상황입니다. 사형당해 단두대에서 한 번에 그냥 목이 잘려 나가는 것도 직접 보면 끔찍합니다. 그런데 그런 끔찍함과는 비교할 수 없게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게 바로 십자가형 입니다. 가장 극도의 고통을 느끼고 신음하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게 십자가형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들어 가시는 그 현장 그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아픔 가운데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 아들 되심을 모욕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군생활을 할 때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대 회식을 위해 돼지를 잡는 작업에 차출을 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돼지 한 마리를 손수 잡았습니다. 맨손으로 해머와 긴 칼을 들고 돼지를 싣고 가는데, 4분의 5톤 트럭에 올라 가는데 돼지가 안 올라가려고 그냥 발버둥을 치는데 얼마나 짠하던지요. 그렇게 끌고가서 맨정신으로 잡기는 어려우니까 나머지 병사들은 다 술을 마시고 그 다음 그 돼지를 죽이는 데요. 그 돼지 이마에 해머로 먼저 강하게 때립니다. 그러면 돼지가 큰 소리를 내며 정신 못차리고 쓰러집니다. 그때 목 밑에 긴 칼을 찔러 피를 내는 겁니다. 그러고도 한번에 죽는게 아니에요…그 돼지 한 마리를 5명이 정말 힘들게 잡았는데요. 제가 실제로 동 큰 동물을 그렇게 살생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돼지를 죽이는 그 모습 그 돼지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밥맛이 싹 사라져서 한동안 돼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지요. 심지어 동물을 죽일 때도 그 동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미안해하고 안타까 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적인 마음이죠. 그런데 지금 십자가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지금 피흘리며 신음하며 소리를 지르며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그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이 농담하고 웃고 떠들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찢어 발가 벗깁니다. 완전히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신음과 고통, 피흘림의 십자가 앞에서 옷을 제비 뽑아 나눠 가집니다. 인간성 이 완전히 파괴된 군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잔인함의 극치 이게 바로 죄의 속성이 라는 것이죠.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눈물과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전혀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을 오히려 즐기고 재밌어 하는 모습, 이게 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화인 맞아 양심이 마비된 모습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보면 길가와 같이 딱딱해지 마음에는 말씀이 뿌려져도 마음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 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사단이 딱딱해진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는 이유가 구원을 얻지 못하기 위해서 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어요. 구원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늘도 사단은 사람들이 죄에 빠져서 마음에 화인 맞게 만들어, 다른 사람의 눈물과 고통 과 통과 신음에 공감하지 못하면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이런 끔찍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이죠 군인들만 이런게 아닙니다. 39절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모욕했습니다. 41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했습니다. 44절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 또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욕했습니다. 이게 다 뭐냐면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죄의 속성이 라는 것이죠. 지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희롱하고 모욕하는 내용이 다 하나님의 아들 내심을 모욕하고 희롱하고 욕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과 신음과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그 죽어가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그 모습….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여진 죄패가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렇게 낙인 찍고 규정해버려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척 하는 유대인의 왕 예수, 너는 이런 존재다 라는 죄목을 붙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지금 욕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단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반응 하지 않으셨고 거기서 화도 안 내셨습니다. 이유는 십자가 앞에 그 모든 것들이 다 내려져 해독 때고 치유 받아야 되는 것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서 다 녹아져야 할 죄임을 알고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끝까지 흔들고 모욕하고 희롱하는 사단 마귀 의 계획을 끝까지 거절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온전히 선포하며 이 모든 죄에서 온전한 자유함과 해독을 이루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간성이 다 파괴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문제라는 것을 알고 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그 도둑들이 다 해독의 역사 그게 바로 십자가 우리 해주는 능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꼭 붙들고 십자가에서 주시는 보혈의 능력으로 모든 악한 독이 해독 되며 자유함을 누리며 십자가에 꼭 매이기를 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치유와 해독을 누리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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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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