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시아 왕에게는 두 가지 큰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속국인 모압이 배반과 반역을 한 일이고, 또 하나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중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아 왕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는 이런 저런 문제들과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인생에 직면한 어려움과 문제들, 주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엎드려 은혜를 구하는 것 외에 살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것 외에 어떤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아 왕은 처한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고 처리하는 방법이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따라갔고, 이런 왕을 찌르고 깨우기 위해 찌르기 위해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너 지금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찾아가서 문제 해결하려는 것 때문에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쓰리고 아픈 진리에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 진리에 직면해 변화해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씀 앞에, 빛 앞에 직면했을 때, 아하시아왕은 어떻게 하면 사는가? 바로 엎드리고 돌이켜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아하시아 왕이 진리의 말씀에 직면한 후 보인 반응은 말씀 앞에 엎드리고 은혜를 구한 게 아니라 귀를 막고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진리의 소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오십명의 군대를 엘리야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한 마디 하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군사 모두를 살라 버렸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50명을 보내는데 이번에도 동일하게 엘리야가 하나님의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이 다 타 죽었습니다. 이 부분은 묵상하다가 잘못하며 시험 들기 딱 좋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100명이 되는 사람을 그렇게 한번에 불을 내려서 죽이시는가…이런 잔인하고 끔찍한 하나님이신가…라고 잘못 이해하며 성경을 덮어버리는 이런 오해를 갖게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아하시아의 왕명으로 보낸 군대는 진리의 말씀 앞에 그의 불순종과 반역의 반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아하시아가 믿음의 반응을 보였다면 엘리야에게 군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사신을 보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군대를 보냈다는 말은 군대가 왕명으로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엘리야를 체포하러 것입니다. 네가 감히 왕의 명령을 거절해? 당장 그 놈을 잡아 내 앞에 데려오지 못할까… 하는 왕명을 받고 군대가 온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진리의 말씀을 거절하고 충돌하는 불순종, 진리의 소리를 잡아 죽이려 하는 아하시야 왕의 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들이 하늘의 불이 내려서 다 타 죽은 것은 아하시아의 불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자기가 보낸 군인들이 그렇게 모두 하나님의 불로 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아하시야는 믿음의 반응을 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나를 찌르시고 깨우시는 말씀이구나…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사는데 아하시야 왕은 또 다시 군대를 보내는 겁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두번째 보냄 받은 오십 부장은 지금 당신은 왕명을 거절하면 직결 심판 받을 자라는 거 모르냐… 지금 당장 빨리 내려와라…고압적인 자세로 엘리야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다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 명의 군인들을 다 태워 버립니다. 그렇게 두 번이나 큰 일을 당하고도 아하시아는 또 다시 군대를 보냅니다. 세번째 오십 부장이 또 50명의 군사를 데리고 엘리야에게 찾아오는데, 이번에는 매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오십 부장이 엘리야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앞의 두 오십 부장들과 같이 왕명으로 내려진 체포 영장을 일방적으로 내미는 게 아니라,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간구했고 거만하게 엘리야에게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불이 내려 군인들이 태우지 않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강압이 아닌 자발적인 모습으로 엘리야가 아하시아 왕 앞에 나아오게 했습니다. 사실 이 세번째 오십 부장의 겸손한 모습, 진리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하는 겸손함으로 은혜를 구하는 태도가 아하시아 왕이 가져야 할 태도임을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와 태도로 주님 앞에 엎드리면 그가 살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아하시아 왕을 살리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세번째 오십 부장의 호위 아래 엘리야는 내려가 왕 앞에 서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아하시아를 살리려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강력하게 경고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네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찾아 물어보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우상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침상에서 절대 내려오지 못하고 너는 반드시 죽을 거라 선포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경고를 하시는 이유는 이 경고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건데 그 하나님의 마음은 뭐냐면 이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산다… 하나님이 내미신 그 손을 붙들면 산다는 마지막 초대입니다. 너 지금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반드시 죽고 반드시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니까 마지막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잡아라…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 하나님의 초대 손길을 붙들지 않은 아하시아 왕의 안타까운 결론으로 끝납니다. 죽을 때까지 마지막 경고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끝까지 잡지 않은 채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그는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아 왕은 끝까지 돌이키길 거절하고 붙들기를 거절하면 결국 멸망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될 말씀으로 나를 찌르고 깨우며 내 심령 골수를 쪼개시며 내 마음을 때로는 쓰리고 아프게 하시는 이유는, 그 말씀에 직면해서 진리의 소리를 들어야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소리 앞에 내가 엎드려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며 주님이 내미신 손을 붙잡아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그 진리의 소리에 귀를 막고 닫아버리면, 결국 아하시아 왕과 같이 결국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비극이 우리 가운데 경험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 심판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의 손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들어야 될 말씀을 통해 진리에 직면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달아 이 시간 그 말씀 앞에 엎드리며 그 말씀 안에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십시오. 경고와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 가운데 내미시는 그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은혜를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고 죽음에서 건짐을 받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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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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