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 중에 압살롬을 상처 입은 아들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원래 괜찮은 아들이었는데 아버지 다윗이 잘 치리하지 못하고 잘 관리하지 못하고 특별히 아들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빗나갔다는 겁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컸는데 그 아들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결국 비뚤어진 아들이 되어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압살롬의 모든 일탈과 잘못들이 마치 아버지 잘못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좀 부분적으로만 지엽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란 생각을 합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잘못 되는데 아버지 다윗의 잘못과 실수, 잘못된 치리와 아들을 인정하지 않은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단순히 말씀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자녀 교육의 문제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전체적인 큰 그림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압살롬과 다윗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증언하면서, 압살롬 인생을 이끼는 치밀한 권력 지향적인 욕구가 이 모든 문제들을 뿌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자리를 자기가 스스로 올라가려고 탐하는 압살롬의 모습은 악한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외적으로 봤을 때 사람들에게 매력 있고 끌리며 호감을 가게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사람들을 끄는 외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름다운 외면과 달리 그의 내면은 완전히 악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근본적으로 압살롬의 마음에 자리잡은 악한 생각은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아도 내가 원하면 왕의 자리 내가 올라간다는 교만입니다. 그 악한 마음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자리를 자기 스스로 올라가 왕이 되려고 하는 그 모든 권력 지향적인 욕구입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치밀하게 권력 지향적으로 살면서 모든 사람을 도구로 삼고 심지어 걸림돌이 되면 가족도 죽여도 되는 인생, 내가 원하면 어떤 사람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권력 지향의 욕구가 가득한 자가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위해서는 모든 것도 할 수 있는 사람, 형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 나중에 아버지를 향하여 등에 칼을 꼽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 악한 생각이 압살롬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이런 내면의 모습은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고, 사람들을 도구로 삼으며, 항상 초 강수를 두는 극단적인 행동을 반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적어도 세 네가지 사건들을 통해 압살롬의 극단적 행동으로 이끄는 깨지고 망가진 내면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첫번째, 압살롬은 자기 딸 이름을 다말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아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그 당시에 일반적인 일인데, 아들 셋의 이름은 하나도 없이 딸의 이름이 다말임을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딸의 이름이 다말이라는 것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증언하는가 하면 딸의 이름이 압살롬의 내면을 드러내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딸의 이름을 다말로 지은 압살롬을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친오빠가 동생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기 딸의 이름을 여동생 이름과 똑같이 지었을까…여동생을 향한 오빠의 사랑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권력 욕구를 감추기 위해서 딸 이름을 다말로 지은 것이지요. 여동생 다말의 욕보인 암논을 죽이게 된 본질적 동기는, 동생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원래 죽이고 싶었던 사람을 동생 사건을 이용해 제거하는 것 뿐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암논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었고, 여동생을 빌미로 이용하여 그것을 좋은 기회로 삼은 것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은 여동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 형을 죽였다고 자기를 정당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자신의 딸 이름을 다말로 짓는 겁니다. 자기 여동생의 이름으로 두는 것입니다. 이게 압살롬의 치밀하고도 권력 지향적 모습이자, 초강수를 두는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두 번째 압살롬의 초강수는 요압의 밭을 불태우면서 의견을 관철시키는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7년동안 비대면으로 다윗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속에 불이 올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돌아오는데 주선했던 요압을 만나기 위해 몇 번 전갈을 보냈는데, 요압이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전갈을 보냈는데 만나 주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또 다시 압살롬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초강수를 드는데 바로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버리는 겁니다. 불을 지르고 나니까 요압이 그제서야 찾아오는 거예요. 이렇게 압살롬은 극단적 방법을 통해 자기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압살롬의 내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을 지르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는 압살롬의 초강수는 사실 압살롬의 마음에 지금 이렇게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언어이기도 합니다. 세번째, 압살롬의 초강수는 자신이 죄가 있으면 죽이라는 선언입니다. 요압에게 나를 왜 여기 데려왔냐고 따지는 겁니다 나에게 길을 놔줬으면 끝까지 중재를 하든지 하라고 압박합니다. 이제는 내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이게 그의 목적이죠.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말하면서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선언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냐 하면 나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말이죠. 나는 죄 없으니까 아버지가 날 치실려면 치시라는 초강수인 것입니다. 압논을 죽인 것은 피해자인 우리 집안에 원수를 갚은 것 뿐이고, 모든 왕자들을 다 죽일 수 있었는데 암논만 죽였으니까 나는 정당하다는 겁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대신 나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며 오히려 큰 소리 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압살롬의 극단적인 성향이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초강수를 두는 그의 지나친 권력욕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압이 중재해서 결국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게 되는데 아무런 영적 다스림을 보여주지 않은 채 만난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죄에 대해 직면하게 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던지, 본인이 말한 것처럼 죄가 있으면 죄값을 받게 하던지, 죄에 대한 치리나 다스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과 입을 맞추는 것을 통하여 아버지 다윗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랐던 압살롬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왕의 권력에 가장 목마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권력에 대한 잘못된 목마름이 온 집안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는 이런 악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압살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직면하고 회개하는 대신, 죄를 덮어버리고 문제 없다고 소리치는 압살롬의 모습이 나의 부끄러운 현주소임을 바라봐야 합니다. 자기의 목적으로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초강수를 두면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그 무너진 내면이 나의 내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고 세우시지 않는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면 망한다는 것을, 죄를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무너지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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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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