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다는 속마음을 읽고 과부 여인을 동원해서 다윗왕의 마음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마음이 향했다는 것은 단순히 도망간 아들이 보고 싶다는 그리움을 넘어서는, 나를 이어 왕이 될 후보 중에 가장 유력한 사람이 아들 압살롬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고 길을 찾는 대신 압살롬에게 마음이 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차린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 같이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다윗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 왕이 눈치채자 과부 여인의 속내가 들어가는 핵심을 드디어 정확하게 말합니다. 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십니까…왜 압살롬을 집으로 돌아오게 안 하십니까…이 여인의 말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압살롬을 다윗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압살롬이 형을 살인하고 스스로 도망갔다는 것을 왜곡하는 겁니다.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알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다윗 왕 앞에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죄를 졌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 죄에 대해 직면해야 하는데, 압살롬은 지은 죄에 대해 직면하지 않고 회개 없이 그냥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죄를 짓고 나서 도망가거나 숨거나 아닌 척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핑계를 대는 그 뻔한 모습을 압살롬이 보인 겁니다. 그런데 마치 다윗 왕이 막은 것처럼, 쫓아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반쪽 진리인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전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비슷한 얘기를 해서 다윗을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영적으로 잠자고 둔감한 다윗에게 찌르시는 말씀으로 진리를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이 여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그냥 다윗 마음속에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속에 있는 것을 꺼내 주는 사람의 뜻과 계획만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 왜 이 여인을 다윗에게 데려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고 압살롬을 데려오게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깨우도록 하게 시키셨는가? 나에게 맡겨 나서게 하시는 일인지, 뒤로 물러나야 할 일인지…전혀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림을 보니까 다윗왕 다음에는 이 압살롬이 왕이 될 확률이 제일 높은 것이 빠삭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차기왕 후보로 압살롬이 1번이라는게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이고, 그 왕의 후보를 내가 데리고 오는데 다리를 놓게 되면 결국 그게 나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게 할 거라는 것을 머리를 굴려서 사람의 뜻으로 이 여인은 고용된 것 뿐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하나님의 방법이라든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려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요압이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했다는 마음을 읽고, 거기에 자기의 공을 얹어서 그냥 사람의 뜻으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이 여인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요압의 정치적 계산 대로, 이 여인을 통하여 결국 다윗의 마음을 흔들게 됩니다. 다윗왕은 이 모든 게 요압이 시킨 거라는 것을 갑을 잡고, 압살롬을 데려와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데려오도록 허락합니다. 결국 속마음이 압살롬에게 마음이 향했는데 혼자 가기는 쑥스러우니까 뒤에서 등 떠밀어 가지고 압살롬을 데려오는 그런 모양새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어렵게 압살롬을 데려왔으면 그 다음에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렵게 데려온 거는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데리고는 왔는데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비대면 아들이 되게 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압살롬은 데려오면 안 되는 아들입니다. 왜 데려오면 안 되는 아들이냐 하면 압살롬은 단순히 그냥 살인한 것이 아니라 왕자를 살인한 살인자였습니다. 왕의 아들을 살해한 자를 다시 왕으로 세울 수 있을까?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다윗은 아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않았고 잘못을 직면해서 죄를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냥 도망가 버렸어요. 그게 다윗이 압살롬을 왕궁에 받아줄 수 없는 본질적 이유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왕궁의 정통성이 무너지며 하나님이 압살롬을 왕으로 세우지 않으실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나는 세우고 싶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이 아들을 세우지 아니하실 것을 이미 다윗은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아들은 왕으로 세우면 안 되고, 마음도 압살롬을 향하면 안 되었는데, 결국 자신의 마음이 향한대로 압살롬을 데려온 것입니다. 왕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실 것을 알면서도 압살롬을 자기 마음에 원해서 요압을 통해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책임을 지고 결단을 하고 영적 다스림을 보여줘야 하는데, 데려왔는데 자기 얼굴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겁니다. 다윗은 정확하게 둘 중에 하나의 영적 지도력을 보여 줬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예 압살롬을 데려오지 말든지, 아니면 압살롬을 데려왔으면 아버지로서 아들과 재를 무릅쓰고 죄에 직면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길을 구하던지….이 둘 중에 하나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고 회개할 기회를 박탈하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직면하고 죄를 회개하여 새출발 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겁니다. 다윗은 그 아들 암논이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도 화만 내고 영적 다스림으로 치리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압살롬이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도 다윗은 슬퍼만 하고 영적 다스림으로 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망간 압살롬을 데려왔는데, 하나님 앞에서 새 출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영적 다스림이 없는 것입니다. 데리고는 왔는데 용서는 없는 아들이 되는 겁니다. 데리고는 왔는데 마음으로 받아주지 않는 거죠. 하나님 앞에 서서, 아버지 앞에 서서 직면하고 회개와 새 출발의 기회를 줘야 되는데 그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것, 이게 다윗왕의 집안 문제에 있어 전반적인 실책이었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맡기신 다스림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다스림의 권세로 첫 번째는 내 마음의 감정이 나를 휩쓸리지 않도록 그 감정을 다스리는 권세와 힘을 주신 겁니다. 감정과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다스림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영적 다스림의 권세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다스림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바로 이끌어 진리 가운데 옳고 그름을 알려주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분별하도록 다스리고, 죄 가운데 숨거나 도망가지 않고, 죄에 직면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적 다스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왕과 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영적으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아이들은 혼란이 오는 겁니다. 데려 오기는 왔는데 용서도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혼란….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혼란…. 데려왔으면 그 죄를 직면하게 하든지 안 되면 아예 데려오지 말든지 정확하게 다스림의 권세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다윗왕의 실책을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내 마음이 향하고, 주님의 뜻에 나의 뜻이 조율되며 영적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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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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