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파괴적인 여러 특징들이 있는데 첫번째로는 죄를 둔감하고 가볍게 여겨서 죄를 지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지은 후에는 죄에 대해서 직면하고 책임져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잘못했다고 무릎 꿇어야 되는데 죄를 지은 후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숨거나 도망가거나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의 파괴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도 동일하게 그 패턴은 등장했고 아버지 다윗이 무너졌을 때도 동일한 패턴이 등장 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의 장자 암논이 죄를 짓고 무너졌을 때도 그 동일한 패턴이 드러나고 있음을 성경은 엄중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차기 왕 후보이자 첫 번째 아들이었던 암논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러 여인들이 있었을 텐데 굳이 하필이면 이복 여동생인 다말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간교한 친구의 악한 꾀를 듣고 귀가 번쩍해서, 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악한 꾀를 동원해 그 다말를 억지로 동침하며 범하게 됩니다.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죄악이었습니다. 여기서 암논이 책임을 지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갔으면 죄가 확산되지 않고 더 깊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는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예전에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겠습니까? 암논이 다말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인 짐승의 음욕이었을 뿐이라는 것이죠. 암논의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은 다말을 범하고 나서 그 사랑은 그렇게 미움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는 죄를 지은 후 왜 그렇게 그 다말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여러 주석들을 찾아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암논의 심리적인 불안 장애, 병적 증상으로 치료 용어와 심리학적인 용어를 가지고 해석해 놓은 여러 추석들이 있었습니다. 암논의 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바로 책임을 회피하는 죄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죄 짓고 책임지기 싫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나는 죄인입니다…내가 잘못했습니다…하나님 앞에 나아가 인정하고 자복하고 죄 용서를 구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 아버지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밧세바를 왕권을 남용해서 집으로 데려와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개하고 죄에 직면하는 대신, 그 간음죄를 덮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복귀 시켜 또 다른 죄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암논이 지금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다말을 쫓아내면서 또 다른 죄를 불러오는 거죠.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이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죠.자신의 죄에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고 숨고 도망가기 위해서 다말을 미워하며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말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더 받게 됩니다. 다말의 입을 통해 그렇게 쫓아내며 버리고 책임 회피하는 죄가, 억지로 동침하는 죄보다 더 크다고 절규합니다. 그 절규에도 암논은 듣지 아니하고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듣지 아니하고 듣기를 거절하는 것이 영적 둔감함의 특징입니다. 계속 주변에서 하나님께서는 찌르는 말씀들을 주시거든요.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계속 말씀하시는데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를 계속 우리 마음에 심기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만들면 그렇게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일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 다말이 스스로 나가지 않으니까 다말을 끌어내서 쫓아내고, 문 빗장을 잠궈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암논이 가지고 있었던 사랑의 끝이었습니다. 악한 꾀를 써서 억지로 동침하여 죄를 저지르고, 책임회피를 위해 미워하게 되고, 그 여인을 끌어내서 문을 잠가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을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데, 암논은 정반대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례히 행하고 폭력적으로 행합니다. 상사병까지 걸려서 그 몸에 반응도 하고 몸저 눕게 만들었던 그것이 본인은 사랑이라 착각했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직면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고 숨고 도망가는 악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친오빠 압살롬은 다말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파악….그리고 나서 압살롬은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찾아왔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 잠잠히 있으라 위로합니다. 그렇게 예뻐하고 사랑하는 여동생 다말이 당한 수치를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오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니 그는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만히 있으라 그랬지만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복수의 칼을 가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형제들 사이에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는 복수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칼 가는 인생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암논을 향한 다윗왕의 반응입니다. 큰아들인데, 차기 왕 후보인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아버지로서 화가 나겠죠. 근데 중요한 건 뭐냐면 화내고 심히 노하고 끝냈다는 것입니다. 암논에 잘잘못을 말하고,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훈계하고 죄를 처리하고 그것을 치리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되는데, 왕인 아버지가 화를 내고 끝냈다는 것이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다윗 자신도 밧세바 사건을 통해 워낙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으니까 엄격하게 치리 하지 못하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암논에게 다말을 보내라고 명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 다윗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자신도 간접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는 다윗이기에 큰 죄를 지은 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 못한 채 화를 내고 끝나는 것입니다. 70인 역이라는 소위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는데, 그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주석을 해 놨다 그래요. 암논이 장자인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그가 큰아들이어서 다윗왕이 그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죄를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이 왜곡되고 변질된 자녀 사랑이, 그 아들을 망치고 무너뜨리는 겁니다. 아버지 다윗의 이 책임지지 못하는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을 보십시오. 그 아들 암논의 이 책임지지 않는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스스로는 사랑한 거 같지만 그건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게 만드는 악한 일이 되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이 선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아버지 다윗의 행동이 압살롬에게는 분노와 복수의 불을 지르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죄를 무겁게 여기며 죄를 심각하게 여기며, 죄를 지었을 때 외면하고 피하고 숨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직면하고 용서를 구하며 서기 원합니다. 죄를 책임지실 분을 앞에 내 인생을 들고 나가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진실하게 섰을 때, 마음을 괴로울 지언정 그것이 사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이 가득한 이 때에 자녀를 사랑할 때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때도 주님이 주시는 사랑 가지고 살아갈 힘을 지금 이 시간 하늘로부터 공급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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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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