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왕의 간음죄와 살인죄로 무너진 후, 안타깝게도 그 아버지의 살인죄와 간음죄가 자녀들을 통해 집안에 반복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말씀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큰아들 암논을 통해 간음죄가 일어났고, 2년 후에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압살롬을 통하여 살인죄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오늘은 압살롬의 살인 죄가 일어난 후 그 사건 마무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겉으로는 여동생의 안갚음을 위해서, 여동생을 그렇게 상처 준 사람을 가면 두면 안 된다는 복수심으로 형 암논을 살해했지만, 사실 압살롬은 원래 암론을 죽이고 싶고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왕이 되고 싶어하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에 그 형이 있으면 자기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여동생 다말의 사건을 통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동생의 상처를 이용하여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갑니다. 도망간 곳은 어머니의 친정집, 즉 외가집으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살아남은 다른 왕자들을 다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왕자들이 돌아오는 걸 보고 왕자들도 대성통곡했고 다윗왕도 대성통곡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큰아들 암논이 죽은 것은 때문에 대성통곡을 하는 건지, 압살롬이 이렇게 배신을 해가지고 형을 죽인 것 때문에 통곡을 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 왕자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그나마 한 왕자만 죽고 나머지는 살아 와서 대성통곡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 세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죽은 줄 알았던 왕자들이 돌아왔을 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모두 대성통곡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윗왕이 그렇게 슬퍼하고 대성 통곡하고 끝났다는 겁니다. 암논이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다윗왕은 심히 노하고 화를 내고는 끝났습니다. 징계하지도 치리하지도 않은 채, 그 큰 아들을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직면하도록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 압살롬으로 향하여 복수와 분노의 칼을 더 갈게 만드는 일이 됐는데 압살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큰 형을 살인하고 도망갔는데 그냥 슬퍼하고만 있지 징계하거나 치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압살롬을 위해서 그냥 슬퍼만 하는 거예요. 다른 기준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바른 우선순위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죠. 지금 압살롬은 세자를 죽인 반역에 왕명을 어긴 반역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인한 자입니다. 그러면 그 잘못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용서함을 받도록 도와 줬어야 되는데 압살롬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직면하도록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암논에게서도 그 일을 하지 않았고 압살롬에게서도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다윗의 큰 실수였습니다. 다윗은 그저 압살롬을 슬퍼하면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들에게 죄를 위한 연결 고리로 계속 이용되는 영적으로 둔감한 왕, 영적으로 둔감한 아버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되는 건 이 세상에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죄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없는 척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직면하여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그 바른 기준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강함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나의 약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강함에 연결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 끊임없이 고백하며 살아가는 게 하늘을 위로를 받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이것을 하지 않은 겁니다. 그냥 화만 내고 끝내고 그냥 슬퍼만 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망간 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놔두고 방치한 채, 그저 슬퍼만 하고 그리워만 하는 아버지 다윗왕의 영적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윗의 잘못된 마음을 지금 콕 집어서 얘기하면서 이게 다윗왕의 매우 심각한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 의도적으로 세번이나 압살롬이 도망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압살롬이 세자를 죽이는 큰 살인죄를 범하고 아버지에게 반역한 대역 죄인으로서 압살롬은 도망했습니다. 1차적으로는 어디를 도망한 것인가 하면 아버지 다윗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것입니다. 근데 그건 표면적인 도망감이고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도망은 뭡니까? 그렇게 죄를 짓고 살인을 하고 나서 압살롬은 어디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간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직면하여 서는 대신 하나님 아버지 낯을 피해 숨고 도망가는 그 모습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죄를 진 인간들이 하는 보편적 무너짐의 패턴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간 아들을 치리하거나 바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 채 그냥 슬퍼만 하고 그냥 그리워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망간 압살롬이 과연 회개를 했을까요? 절대 안 했을 겁니다. 핑계와 정당화의 논리로 아담과 하와 같이 있었을 겁니다. 나와 우리 집안은 피해자라는 논리를 가지고, 여동생의 앙갚음을 한 것 뿐이라며 자기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었을 겁니다. 압살롬은 살인 죄를 지은 후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고 죄에 직면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결국은 더 큰 문제로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죄에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채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압살롬은 나중에는 더 크게 무너지고 더 크게 집안을 풍지 박산으로 만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암논의 간음과 압살롬의 살인을 바라보면서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가 그 집안을 얼마나 흔들고 힘들게 했는지를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너희 집안에서 영영이 칼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신 그 경고대로 그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이 안타까운 모습을 거울로 삼기 원합니다. 우리가 압살롬과 같이 이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넘어지고 무너진 그 현장에서 우리가 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늘 하나님 앞에서 피하고 도망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낯을 피하고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도망가는 것입니다.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나는 억울하다고 피해자 멘탈리티에 사로잡혀 핑계대고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파괴적이고 심각한 죄의 권세가 나에게 역사하려 내 인생을 사정없이 흔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죄에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채 숨고 도망가는 인생은 반드시 망합니다.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반드시 더 큰 문제로 터지게 됩니다. 이 시간 죄를 지은 현장에서 도망가지 말고 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아와 회개하며 그 죄 씻음 받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들 새 출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잊지 마십시오. 숨거나 도망가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주님 앞에 순전하고 깨끗한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12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