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2장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라고 부제가 되어 있는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다윗을 향한 사랑의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고백하고 용서 받으면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나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하는 사람이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심령골수를 쪼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심령 골수를 쪼개는 말씀을 하실 때 마음을 찌르실 때, 마음에 담아 회개할 수도 있고 거절하고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 사람들의 심령골수를 쪼개는 마음의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회개 대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찍어 죽였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망을 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다윗 왕은 영적으로 완전히 둔감해져 있고 어두워져 있고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우리아도 간접 살인으로 죽인 왕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의 마음을 찌르는 얘기를 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찔림의 말씀을 주실 때 그는 고꾸라지고 회개했습니다. 다윗 왕이 믿음이 좋아서 즉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 먼 길을 돌아 1년이 넘어서 마침내 이제서야 그가 해야 될 말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다윗은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뭐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저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나 핑계를 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다윗은 완전히 하나님의 빛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회개란 말씀 앞에 내가 서서 말씀 앞에 나의 죄가 선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글씨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팍 박히고 찔려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삶의 흐르게 되는 실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마디가 그 마음을 담은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을 회개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자 마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시고 당신을 죽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회개하기만 하면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맞아 주시고 받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돌아오기만 하면 회개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사한다, 너는 멸망하지 않고 죽지 아니한다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교회 밖에 주님 앞에 돌아와서 회개하고 새 생명을 얻어야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사랑하는 자가 계속 죄 가운데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은 교회 밖 많은 불신자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다윗은 회개함으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지 않게 됬는데 누가 죽는가 하면, 밧세바와 간음을 통해 태어난 아기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돌아가자 마자 아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 아이가 왜 아픈지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밤새도록 땅에 엎드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이 어린 아이 살려주시고,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7일 만에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이가 원해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왜 다윗이 죽지 않고 다윗은 살려주시고 그 아이는 죽게 되는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다윗의 식음을 전폐한 기도가 자기의 원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도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자기가 원하는 뜻은 거절된 상태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가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우리에게는 딜레마이고 고통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그렇게 금식하고 간절히 기도했으면 그 아이가 살아나든지 아니면 어떻게 좀 회복이 되든지 그래야 응답일 것 같은데, 아무리 예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겁니다. 다윗의 범죄와 이 아기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봐야 될 건 이렇게 말이 안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자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죽지 않게 살려 주십니다. 약속으로 주시는 용서를 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아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다윗이 죽지 않고 우리아가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야가 죽은 자리는 사실 누가 죽어야 되는 자리냐 하면 다윗이 죽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근데 왜 마땅히 죽어야 할 다윗이 안 죽고 우리아가 죽었습니까? 말이 안 되고 이해가 안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아기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 아기가 죽은 자리는 사실 누가 죽어야 되는 자리냐 하면 다윗이 죽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마땅히 죽어야 할 다윗은 죽지 않고 그 태어난 아이가 대신 죽었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내가 죽지 않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말이 안되고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가 마땅히 죽었어야 될 자리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대속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말이 안 되는 신비의 사건을 그림자와 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마음에 새기며 묵상하는 이 십자가는 그냥 상징이 아니고 교회의 표식 정도가 아니라, 내가 마땅히 죽었어야 할 자리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될 자리, 내가 당연히 죽어서 대가를 치러야 되는 저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게 십자가입니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됩니다. 그런데 그 죄의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아무 죄 없은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죽어야 될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는 겁니다.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죄를 용서받고 내가 죽지 않은 겁니다. 이 말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는 신비를 감격으로 받아들이고 엎드리는 게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죽어야 자리에서 대신 죽게 하신 그 아들의 보혈로 내가 씻김을 받고 죄용서 받고 새 사람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내가 죽었어야 될 자리임을 마음에 새기시며 그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내가 깨어나고 각성되며 이 시간 십자가 사랑의 주님이 주시는 감격이 나를 풍성히 덮이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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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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