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아합왕과 이세벨은 나봇을 억울하게 돌에 쳐 죽게 했습니다.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아무도 없이 마무리 되는 듯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합 왕에게 엘리야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시는 이유는 네가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지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나봇에게 흘리게 한 피가 너의 피로 갚아줄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선지자 엘리야를 맞을 준비도, 엘리야의 예언을 들을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가 도착하자 아합왕은 “내 대적자…”라고 선을 그으며 호통을 칩니다. 아합은 스스로 별 잘못 안 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왕으로서 나봇에게 누명 씌워 죽이는 것도, 그렇게 슬그머니 포도원을 차지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전혀 죄가 아닌 것처럼 착각했기에, 들을 귀도 들을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들을 마음이 전혀 없는 아합 왕에게 가서 이 진리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거나 두 손 들고 주님께 나와 살려달라고 하는 자에게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귀를 막고 들을 마음이 하나도 없는 아합왕에게 가서 목숨 걸고 그의 마음을 후벼 파는 전리를 전하라 하신 겁니다.
이세벨이 아합왕을 충동한 본질이 뭡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 한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한 문제 해결이나 삶의 방식입니다. 그냥 내가 보기에 좋으면 내 마음대로 내 권한을 이용해서 짓누르고 빼앗아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세벨이 아합왕을 충동질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왕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희생돼도 상관없다는 논리와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문화나 사람들은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을 지 모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큰 죄악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늘 인식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어떠한가를 늘 민감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괜찮다 그러고 사회가 괜찮다 그래도 하나님이 아니라 그러면 그것은 아니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 어떠한가를 기준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지 못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나봇을 억울하게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에게 선지가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다 모르는 거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하나님 앞에 지은 그 죄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눈감지 않고 넘어가지 않으신다…경고합니다. 아합왕이 직면하게 결과는 나봇을 억울하게 죽은 피값으로 아합의 남자들을 다 멸하게 될 것, 진멸되게 될 것을 선언합니다. 아합왕이 한 일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로 무너지게 만들었기 때문임을 선명히 지적합니다. 귀를 막고 들을 마음이 전혀 없었던 아합왕은 엘리야의 예언을 듣고 정신이 확 들어 말씀에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판의 메시지를 전하니까 아합이 그 마음이 겸비했다고 증언합니다. 겸비했다는 것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온전한 회개가 아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번 무너지게 되고 그 악순환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합의 회개를 받아 주시며 그가 받아야 될 재앙을 그의 시대에는 내리지 않고 아들의 시대로 미루어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한번 참으시며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며 아합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자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왕의 명령도 목숨 걸고 거절했던 나봇,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들을 귀 없는 왕에게 목숨 걸고 전했던 엘리야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결코 낭만적인 삶이 아닙니다. 처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삶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고, 사람들에게 비난과 오해를 받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성도의 분명한 정체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사람들은 전체적 그림을 다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제하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삶,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는 삶,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죄가 무엇인가를 늘 민감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고 세상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큰 문제이고 죄악이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반응해야 하는 성도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문제 없다고 말해도, 아무리 사람들이 문제없다 말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 있으면 큰 문제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틀린 것이면 틀린 것이라는 이 분명한 기준을 붙들고 늘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책망하시고 지적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자비한 뜻이 있음을 깨달아 늘 주님 앞에 겸비하며 엎드리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돌아오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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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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