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원리이자 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내 삶에 거두는 열매를 원인과 결과라는 공식으로 풀려 하는데 일조하는 속담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의 자식 농사가 내 인생의 성적표라고 생각을 해서 콩 심은데 콩이 나와야 한다는, 즉 내가 자식을 위해 이렇게 많이 헌신하고 쏟아부었으니 그것에 맞는 원인과 결과를 통해 자식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아시겠지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는 그게 맞을지 모르나 그 공식에 맞지 않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는 게 우리 인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열왕기하 16장 말씀은 아하스 왕에 대해서 증언하는데 이 아하스 왕이 바로 콩 심은데 콩이 나오지 않는 돌연변이의 대표입니다. 아하스의 아버지는 요담 왕이었고 할아버지는 웃시아 왕이었습니다. 이 두왕 모두 인생의 후반전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인생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받은 왕들입니다. 어떻게 아하스는 이렇게 시작부터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가? 어떻게 신앙의 부모, 신앙의 조부모 밑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왕, 이런 망나니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가 있어도 자녀들이 이렇게 무너지고 심지어 악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하스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쫓아내셨던 이방신들과 우상을 다시 직수입합니다. 우상숭배를 하는데 특별히 어떤 우상들을 숭배하면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한 죄를 지적합니다. 시애틀 주변은 나무가 너무 많아서 푸른 나무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지만 남유다 지역에는 사막과 황무지이기 때문에 푸른 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푸른 나무를 보게 되면 하늘의 복을 받은 나무는 그런 미신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 푸른 나무 안에는 풍요로움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서 푸른 나무는 항상 자신의 소원을 비는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주변에 살고 있었던 이방 나라들이 그렇게 푸른 나무 우상을 섬겼는데, 아하스는 이런 이방의 우상들을 직수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골짝과 동산마다 이 푸른나무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수 있는 게 남유다에도 이런 우상과 산당 문제로 무너지고 안 좋은 왕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왕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최악의 행동을 하는 게 아하스 왕인데 바로 이방신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가장 악하고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왕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우상숭배를 넘어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가며 불태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끝판왕이 자녀를 불살라 자녀를 불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하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골라 한 왕이 아하스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하스 왕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오늘 말씀 열왕기하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평행 본문인 역대하 28을 보게 되면 전쟁에서 12만 명의 군사가 하루만에 전사하고 20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아무리 많이 죽여도 12만 명이 한꺼번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군인 12만 명이 하루에 죽었다는 것을 통하여 이것은 사람이 죽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치신 징계의 결과라는 것을 엄중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의 악을 치시며 영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20만 명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앞에 아하스는 정신 차리고 돌아왔으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임한 전쟁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제한 채, 하나님에게 돌아오거나 회개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여전히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나라의 운명을 다 맡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하스가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와 심판으로 임한 전쟁의 위기 가운데 누구에게 처음으로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는가 하면 앗수르라는 외세의 힘입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적극적 악인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힘 대신 그저 눈에 보이는 대국 앗수르의 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똑같이 앗수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스는 북 이스라엘의 왕들 같이 처음부터 야예 악한 길로 질주한 왕이자, 악한 여인의 대표인 이세벨의 딸 아달라와 쌍두 마차를 이루는 악한 왕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다윗 가문에 모든 씨를 제거하고 무너뜨리며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아달랴 만큼이나 악한 왕, 적극적으로 악의 모습에 동참한 왕이 아하스입니다. 아하스 왕은 바른 신앙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하고 가장 나쁘고 가장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냥 하나님 보시게 악했던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악한 왕의 대표로 증언됩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어 왕 본인 뿐 아니라 남유다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왕이 바로 아하스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잘했어도 아무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했어도 인생의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나는 악인 아하스가 나올 수 있고요, 반대로 망나니 같은 부모 밑에서 믿을 수 없게도 신실한 히스기야 같은 왕이 나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 우리 인생의 신비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는 부모의 인생 성적표가 아님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유다의 반항아, 적극적인 악인인 아하스 왕을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도 있고 내 인생 가운데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콩심은데 콩이 안 나오는 인생, 아무리 좋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어도 이런 자녀가 나올 수 있는 게 설명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임을 인정하십시오. 우리가 콩을 심었어도 콩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생은 계획대로 공식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겸손히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오며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더 선명히 붙들고 하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자녀가 내 인생의 성적표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겸손함과 자유함을 가지고 주님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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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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