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마지막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온 북 이스라엘의 국운이 다해서 거의 끝나기 일보 직전 마지막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급격히 기울어 멸망을 향해 질주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죄악과 잘못된 것이 한결같이 고착화되고 패턴화 되어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 북 이스라엘 왕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한결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겁니다. 이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 반복되다 보니 고착화되고 하나의 패턴으로 정착하여 버렸고, 빠져나올 생각 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너무 일반화되고 자연스러워져서 아예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쌓아두면 이렇게 비슷한 패턴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죄를 지을 수 있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죄가 너무 싫어서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쳐야 하고 죄와 싸우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무너진 자리에서 고착화되고 패턴화 되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고 아예 죄에 대해서 싸울 마음조차 없는 겁니다.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냥 고착화 되어 멸망으로 파멸로 질주하는 것입니다. 이게 북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의 모습이고 망하기 직전의 교회의 모습이고 망하기 직전의 개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패턴화되고 무감각해진 왕, 하나님과 무관한 삶으로 질주하는 대표적인 예로 말씀에 등장합니다. 지금 앗수르라는 큰 나라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내려와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 고착화된 므나헴 왕은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풉니까? 큰 어려움과 고난이 국가적으로 찾아왔음에 불구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는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고난과 어려움에 개입하기를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계산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를 스스로 골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결정, 내 스스로 계산하고 머리 굴린 결정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북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려고 므나헴 왕이 썼던 묘책이 바로 강대국 앗수르에게 은 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는 겁니다. 은 천 달란트는 34톤 정도 하는 어마어마한 양인데, 그 은 34톤을 모아서 앗수르 왕에게 주는 겁니다. 은 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는 방법도 국가가 마치 조직 폭력배와 같이, 그냥 억지로 힘으로 뺏어 버리는 강탈입니다. 그렇게 강대국에 기대서 은 34톤의 조공을 바치며 그것도 강탈하여 백성들에게 뺏는 방법을 동원해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한 겁니다. 국가적인 큰 위기와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에게 나아감으로 나라를 굳게 세우려 하는 대신 강대국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그것도 백성들에게 강탈해서 모은 은 34톤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서 굳게 세우려 한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내가 풀 수 없는 큰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그 때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가 그의 이름을 붙드는 것을 통해 일이 풀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왕으로서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하나님을 배제하며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결정을 반복하는 겁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 왕은 좋은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큰 기쁨이 있어도, 큰 성공이 있어도 큰 실패가 있어도 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치고 질주하는 마지막의 안타까운 평가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패턴화 되고 고착화되고 나니 북 이스라엘에 배신과 반역이 패턴화되고 고착화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인 스가랴는 므나헴에게 배신당해 살해되고, 므나헴의 아들은 배신으로 베가의 칼에 맞아 죽고요. 베가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될 호세야의 배신으로 살해 당해 죽습니다. 이런 끔찍한 반역과 배신이 한두 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아예 고착화되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배신하고 죽이는 피비린내의 악순환에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무감각해 그래서 반역과 배신의 역사가 계속되는 것, 패턴화되고 고착화 되는 것이 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 북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야가 배신의 칼을 들어 왕을 죽이고 자리에 올라갔을 때, 이 자리가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가 될 것을 전혀 깨닫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 않고 망하도록 그들을 놔두실 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반역으로 그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반역하고 죽이고 올라가 나는 이제 왕의 자리에서 평생 떵떵거리고 살겠다고 착각하며 앉아있는 호세아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어리석음일 수 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천년 만년 살 거 같이 나에게 기회가 영원히 있는 거와 같이 오늘도 살아가는데 오늘 주시는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게 인생입니다. 오늘 주어지는 그 선택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선택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급격히 기우는 국운,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질주하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주시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의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죄에 이렇게 고착화되고 패턴화되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 경고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성도에게 눈에 보이는 성공은 성공이 아닐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실패는 실패가 아닐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공하고 나서 그 성공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떠나가게 만들면 그 성공은 결국 실패입니다. 반대로 실패와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든다면 그 실패의 어려움은 결국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성공과 실패, 기쁜 일과 슬픈 일, 내 삶의 고난과 어려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만 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에게 복으로 만들어 주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결정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철저히 배제하고 무관한 삶의 결정을 하게 되면 그게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삶입니다. 죽은 낙엽과 같이 흐르는 물에 떠내려 내려가는 신앙생활, 사람과 환경을 붙들고 머리를 굴리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해결하려는 신앙 생활을 경계하십시오. 이 고착화되고 패턴화 된 나의 영적 무감각을 깨고 이 경고의 메시지를 내 마음에 새기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 오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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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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