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아마샤의 아들, 역대기에서는 웃시야 왕으로 알려진 아사랴 왕에 대해 증언합니다. 아사랴 왕은 무려 52년동안 남 유다를 통치한 대단한 왕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북 이스라엘이던, 남 유다던 모든 왕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가 악한가….그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평가인 겁니다. 모든 왕들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동일하게 인생 평가의 기본 공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 어떠한가…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살아가는 내 인생에서 고려할 가장 첫번째는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하여 내 마음이 들리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고, 그 지혜가 있을 때 나의 삶이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하는 형통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만드시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그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았던 것이 다 망가지고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도 하나님 보시기에 점점 보시기 안 좋은 영적 내리막길, 다 망가지고 깨지는 길로 질주합니다.
아마샤 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기에 온전함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증언합니다. 첫번째 문제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산당에서 여전히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다면 왜 남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하나같이 산당을 없애지 않았는가? 백성들이 자신들의 필요와 원함을 채워주는 산당을 좋아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고, 내 편의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당에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화 되고 도구화되는 것을 너무나 원하기 때문에 결국 백성들이 원하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겁니다. 산당은 제거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별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하나님 보시기에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아사랴 왕의 문제는 인생 후반전에 영적 교만으로 무너지는 문제입니다. 왕으로서 52년의 통치 기간 가운데 후반전은 왜곡과 변질로 무너지는 영적 내리막길의 길을 가게 됩니다. 아사랴왕의 아버지 아마샤, 할아버지인 요아스 왕도 동일하게 용두사미의 길을 갔습니다. 인생 전반전에 하나님께 순전하고 정직했는데, 후반전에 교만으로 넘어지며 무너졌습니다. 그 용두사미의 인생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손자도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아사랴왕의 후반전을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했다는 1절로 매우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6장을 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아사랴 왕을 치셔서 그가 나병환자가 되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바운더리와 경계를 자꾸 허물고 무너지게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제사장이 할 일을 왕이 못할 게 뭐냐며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분향하려 합니다. 제사장들이 와서 목숨을 걸고 아사랴 왕을 막아서자 그들을 밀치고 손으로 향로를 잡으려는 순간 왕의 몸에 나병이 확 퍼졌습니다. 모세 오경을 보게 되면 아론의 두 아들들이 성전에 불을 잘못 만져서 죽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지정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하나님이 치셔서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사랴 왕이 막아서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며 손으로 잡고 분향 하려는 찰나에 나병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치신 징계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일반적으로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다는 것은 영적 감각이 다 무뎌지고 다 사라지는 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먹어야 될 거먹지 말아야 될 것, 찬밥 더운 , 나아갈 때와 머물 때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질서와 우선순위와 바운더리를 다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무너지게 되어 나병에 걸린 아사랴 왕은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하고 그렇게 후반전은 좋지 않은 인생으로 끝나게 되는 겁니다. 아사랴 왕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무너지게 된 이유는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형통함과 강성함을 주셨는데 그럴 때 하나님께 더 매달리며 하나님께 겸손하게 쓰임 받아야 되는데 강성해지고 형통해지자 마음이 교만해 지는 겁니다. 나라가 이렇게 잘되는 게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잘해 가지고 내가 앞서서 헌신해서, 내 리더십이 탁월해서 이렇게 잘 됐다고 자꾸 공로를 취하려 보니까 점점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사랴 왕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하나님 보시게 정직했다고 평가하시는 겁니다. 그런 실수와 과오, 영적 내리막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그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는 겁니다. 반면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남유다 왕들은 용두사미, 즉 전반적에는 좋았다가 후반전에는 변질과 왜곡으로 무너지는 패턴이고 북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전반전부터 무너지는 한결같이 악한 패턴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유다 왕들도, 북이스라엘 왕들도 둘 다 무너지고 안타까운 왕이지만 그나마 성경은 북 이스라엘보다 남유다가 낫다는 겁니다. 남유다가 완벽해서 나은게 아니라 북 이스라엘 왕들이 하도 악하고 안 좋으니까 그나마 낫다는 안타까운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처음부터 질주하는 북 이스라엘 왕은 여섯 달만에 배신이 일어나서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신을 통해 왕위에 오른 다음 왕은 불과 한 달 만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을 견지한 북이스라엘에 반역과 배신과 피바람이 계속 몰아치는 것입니다. 완전한 어둠과 무질서로 나라가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팍삭 주저앉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이럴 수 있습니까? 왕도 하나님의 백성도 이럴 수 있기에 말씀으로 우리는 찌르시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한때 열심히 있고 한때 주님께 순전하고 한때 주님을 바라보고 정직히 살다 인생 후반전에 이렇게 무너지고 타락하고 자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아예 무너지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 전반전은 괜찮다가 후반전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삶은 우리 삶에 반면교사로 주신 경고임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처음부터 비참한 인생도, 처음에는 괜찮다 끝에 가서 비참한 인생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이 새벽에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하루 첫 시간을 드리며 이 자리에 나올 때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귀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 우선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살아가십시오. 이런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영적 감각이 사라지도록 방치하지 말고 영적 겸손함과 민감함을 가지고 주님이 주신 축복이 가운데 나의 인생이 끝까지 머물러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여호와 앞에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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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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