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7장 말씀은 남유다 역사에 가장 어두운 왕 아하스의 이야기였다면 열왕기하 18장은 다왕 이후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히스기야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우선 분량이 대단히 많이 증언되어있을 정도로 남유다 역사에 중요한 왕이었고, 영적으로도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로 정직한 삶과 신실한 삶을 살았는가 하면 다윗왕과 견줄 정도로 위대한 왕으로 하나님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는 그가 처한 삶의 조건과 환경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이런 위대한 왕이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왜 히스기야가 이렇게 위대한 왕,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간 게 기적 중의 기적인가 하면, 그의 아버지는 악한왕의 대명사인 아하스였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필적할 정도로 적극적인 악인의 대표 망나니 왕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하스에게서 선한 아들이 태어나 자란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실했던 아버지 밑에 말도 안 되는 망나니 아들이 나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고, 정말 악하고 망나니 같은 아버지 밑에서 이런 신실한 히스기야 같은 아들이 나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환경 결정론에 빠져 살아갑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이 처한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은 인과론에 빠져 있어서 나쁜 부모 밑에서는 반드시 나쁜 자식이 나온다는 이 공식에 눌려 살아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과응보적 숙명론, 환경 결정론을 계속 깨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으심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도전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남유다의 역사는 사람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거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자 기적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관점은 히스기야가 대단한 게 아니라 최악의 가정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히스기야를 그렇게 만드시고 인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적극적 악인과 필적한 아버지일지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붙들려 있으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 히스기야 같은 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붙드는 소망이 되길 원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한 왕이 된 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본 왕이라는 데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서 다 흩어지는 모습을 히스기야는 본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사건은 북 이스라엘에게 충격이었지만 남 유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며 히스기야 왕은 정신이 바짝 들었을 겁니다.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 겁니다. 어떻게 북 이스라엘이 저렇게 멸망할 수 있을까? 그 원인을 무엇에서 찾았냐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한데서 찾은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어 우리도 하나님 말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 말씀을 경외하지 않으면 북 이스라엘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히스기야가 다윗의 필적할 정도로 그렇게 위대하게 정직하고 모든 것을 되돌린 놀라운 왕이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정신이 바짝 들어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된다는 경각심 가운데 그가 했던 놀라운 종교 개혁이 바로 산당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남유다의 여러 왕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했음에도 끝까지 계속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대부분의 왕들이 백성들이 간절히 원하고 좋아했던 산당을 제거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대부분의 왕들이 미뤄왔던 산당들을 모두 없애는 일을 감행합니다.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 드리는 건 너무 멀고 부담스럽고 힘드니까 가까운 데서 대충 드리면 되겠다는 편의주의 실용주의와 함께 백성들의 전통에 뿌리내린 산당, 백성의 이 땅에서의 필요와 원하는 것을 잘 이루어 주는 산당,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편의를 잘 고려한 예배가 드려지는 산당을 히스기야는 과감하게 다 무너뜨리는 겁니다.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열망하며 히스기야 왕은 모든 산당들을 무너뜨린 겁니다. 산당만 부순 게 아니라 여러 우상들, 주상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종교 개혁이 아주 중요한 일인데 히스기야 왕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다 없애 버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들려진 놋뱀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산다는 거룩한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불뱀에 물려서 다 죽어가고 있을 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려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정말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부어주셔서 그들을 기적으로 고쳐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던 역사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을 바라보면 당연히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 구해야 합니다. 죄라는 독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 뱀만 바라보면 살 수 있게 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시대에 사람들이 그 놋뱀을 여전히 분향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첫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본질들을 외면한 채 놋뱀에 전통이라는 옷을 입혀서 그것이 거의 우상화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만큼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신의 그냥 자부심만 갖게 되는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신이 빠지고 내용이 빠진 상징만 남은 것이 바로 모세의 놋뱀 분향을 히스기야는 과감히 없앤 것입니다. 이런 히스기아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가 여호와만을 철저히 의지한 왕, 더 나아가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과 허리띠를 같이 차고 꽉 맬 정도로 하나님에게 묶여 살아간 자, 그게 여호와와 연합한 히스기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절대 뗄래야 뗄 수 없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 같이 허리띠로 꽉 묶여서 하나 관계로 있는 그 연합의 놀라운 역사가 히스기야에게 경험된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에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허리띠를 같이 묶는 연합,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실함 가운데는 하나님의 형통함이 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상황이 어떠하던 간에, 내 주변 환경과 가정 배경이 어떠하던 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커서 환경 결정론을 넘어 이렇게 놀랍고 위대한 히스기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는 눈에 보이는 환경에 모든게 결정되는 인생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처한 상황을 뛰어넘은 인생임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또한 우리는 자꾸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려 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고 하는 볹성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게 죽음이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게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히스기야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묶여 연합하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형통한 인생을 사모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이 닫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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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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