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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셉 목사의 새벽묵상

​새벽묵상 "예수 보혈 대신 회칠해서 죄를 덮으면 망한다." 에스겔 22,23-31 | 9-30-2026

9/30/2026

 
하나님은 어제 말씀에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찌꺼기가 된 보석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원래 보석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이 세상에 보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찌꺼기가 되어버렸다고 선포하셨죠. 본래 가치를 잃어버리고 본래 사명을 잃어버리고 죄로 말미암아 찌꺼기가 된 남유다와 예루살렘. 오늘 말씀은 그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지 못한 땅과 비를 얻지 못한 땅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땅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오염되어 죄로 말미암아 그 땅 자체가 더러워진 게 바로 정결하지 못한 땅이죠. 주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린다고 오는데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이 정결하지 못한 땅이 되어 버리고 그 땅 자체가 더러워졌다는 것이죠. 진노의 날에 은혜의 단비를 얻지 못하는 땅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는 땅이 되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목이 곧아지고 교만해 져서 주신 비를 이렇게 담아야 되는데 거꾸로 놓은 그릇과 같이 은혜의 비를 담을 수 없는 땅이 된 것이죠. 이렇게 정결하지 못한 땅, 은혜를 얻지 못한 땅이 돼 버린 찌꺼기와 같은 남유다와 예루살렘, 그 본질적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지도자들의 죄로 돌리고 계십니다. ​ 왜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약속의 땅이 이렇게 정결하지 못한 땅이 되고 은혜를 얻지 못하는 땅이 되었는가? 바로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의 타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 지도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고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향력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셔서 백성들을 섬기라 그랬는데 하나님이 주신 영향력과 권한을 망각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심판과 멸망으로 질주하게 만든 책임이 분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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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종교 지도자들인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선지자들은 영적 지도자로서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 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킨 것 같았다는 것이죠. 그들의 모든 관심이 하나님 나라의 추수가 아닌 그저 세상의 이익에 쏠린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살려야 될 사람의 영혼을 삼켰다는 겁니다. 그 영혼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그들의 재산과 보물을 탈취했다고 엄중히 지적하십니다. 제사장들의 죄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계신데 바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성물을 더럽히며 거룩함과 속된 것, 부정함과 정한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죄와 죄가 아닌 것을, 이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구별하지 않고 살게 만든 겁니다. 또한 그들에게 안식일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통하여 쉼을 통하여 충전 받고 나가야 되는데 그 하나님과의 안식일이 다 무너지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거 망각하고 그냥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게 만든 겁니다. 열심은 있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이 사라진 백성들이 되어 버리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의 불 가운데 질주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지도자들인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엄중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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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치 지도자들은 좀 낫는가?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것이죠. 백성들을 섬기려고 세워진 정치 지도자들이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백성들을 통하여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포악해지고 잔인해지고 피를 흘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정치 지도자들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정의롭게 치리해야 하는데, 정의 대신 불의를 행하며 이익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어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죠. 의인지 불의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익인지 불이익인지가 중요한 자들, 부당 이득을 끊임 없이 취하며 백성들이 피눈물 나게 만들어 그들의 영혼을 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고관들에게 기생충과 같이 아첨하는 자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불의한 고관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했습니다. 회를 칠한다는 건 벼락에 결함이 있는데 회를 칠해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고관들에게 회를 칠한다는 건 죄를 그냥 포장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덮어 버리는 겁니다. 죄가 있을 때 예수 보혈로 죄를 덮어야 사는데 스스로 회칠해서 죄를 덮으면 망하게 되는데, 죄에 회를 칠하여 죄를 짓고도 죄악의 실상을 가려 버리게 만든 겁니다. 그리고는 덮어 놓고 괜찮다고 위로하며 거짓 평안을 선포하는 겁니다. 몸에 암이 자랄 때 빨리 그 암덩어리를 발견해서 수술을 하든 항암을 하든 해야 사는 것이지 암덩어리가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데 그냥 덮어놓고 괜찮다고 얘기하는 건 그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암 덩어리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무서운 죄덩어리가 계속 자라고 있어서 영혼을 몸을 파괴하고 있는데 그냥 회칠한 무덤과 같이 덮어 놓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 이처럼 정치 지도자들도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같이 소망 없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런 사람을 좋다고 쫓아가는 백성들은 같이 망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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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비극은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 남은 자가 없고 의인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도 다 무너지고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고관들도 다 무너지고, 백성들을 심판으로 질주하게 만드는데 그 아픈 현실 가운데 무너진 성을 다시 막아서며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중보 기도하며 매달리는 의인이 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죠. 결국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이유와 결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로 타락해서 망한 것도 있고 그 세상이 죄 가운데 있어서 심판 당한 것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땅을 위해 중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기를 간구하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망했다는 것이죠. 결국 의인의 무재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남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 임하게 되었다는 게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이자 진단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제대로 세우며 그 지도자의 영적 지도력에 따라 백성들이 바른 길을 인도함을 받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 영혼들이 삼켜지게 되고 그들이 죄를 망각하게 되며 하나님이 주신 안식과 예배가 다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오는 백성들이 정결하지 못한 땅이 되며 비를 얻지 못하고 은혜를 얻지 못하는 땅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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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벽에 우리가 나와서 새벽 기도하고 새벽의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그저 내 개인이 하나 잘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는 거고 기도를 포기하면 죽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 사람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도 전혀 모르는 이 중요한 영적 본질,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나만 사는 게 아니라 나의 기도로 우리 교회가 살고 이 세상이 산다는 걸 분명히 믿기 때문에 하루에 첫 시간, 이 새벽에 나와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 내가 기도를 멈추면 나도 죽고 이 세상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그 간절함을 가지고 믿음의 용사,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살기를 소망하는 그 믿음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새벽 기도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이 시간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그 고백,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 고백이 있기에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이 새벽에 나와 주의 은혜를 구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결하지 못한 땅, 은혜의 비를 얻지 못하는 땅이 되어 버린 이 참담한 상황을 바라보며, 주의 은혜를 구하며 무너진 데를 막아서며 살려 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백성,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의인이 되어 이 세상의 영적 파수꾼으로 오늘도 뚜벅뚜벅 그 믿음의 길을 걸어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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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보석과 같은 주의 백성이 찌꺼기가 되었다." ​ 에스겔 22,17-22 | 9-29-2026

9/29/2026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안타깝게도 찌꺼기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보석과 같이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찌꺼기가 되었다고 선언을 하시는 하나님의 무너지는 마음이 구구절절 느껴지는 게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찌꺼기가 되었다는 언급이 오늘 말씀에만 세 번이나 등장하는데, 찌꺼기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찌꺼기의 정의는 필요한 성분이나 유효한 성분을 걸러내고 바닥에 남은 부산물이나 불순물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걸 다 걷어내고 바닥에 남은 쓸모 없는 불순물, 걸러내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바로 찌꺼기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금과 은으로, 보석 같이 존귀하게 만드셨는데, 아우라가 있는 오리지널의 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찌꺼기가 되어 버렸습니까? 그렇게 보석 같은 존재가 찌꺼기가 되어 버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죄로 말미암아 그들이 본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들에겐 하나님이 심기워 놓으신 본래 가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이 있는 이 본래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금과 은과 같이 존귀한 그의 백성들이 불순물과 찌꺼기가 되어 버리며 본래 가치를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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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을 찌꺼기가 되게 만든 죄를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로 지적하시는데 바로 우상숭배와 음행입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금과 은과 같은 보석이 찌꺼기가 되어 버렸다고 탄식하고 계신 것이죠. 또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은 본래 가치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본래 사명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보석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며 반사체로서 빛을 내며 온 열방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복의 통로로 세워 주신 게 그들의 본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본래 사명을 잃어버리고 온 우주와 온 세계 하나님을 자기들 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우리만 축복하는 존재로 여겨버린 겁니다. 하늘의 복을 받음을 하나님이 아닌 내 자신에게서 이유와 원인을 찾고, 우리가 우월하고 우리가 특별한 DNA를 가진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복의 근원인 하나님조차도 눈에 보이는 우상으로 변질시켰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려 죄에 빠져 살게 되었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붙들며 섬기는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죄를 제거하고 그 죄를 회개하고 없애는 것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품고도 아무 문제가 없다며 착각하며 삽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본래 가치도 잃어버리고 본래 사명도 잃어버리고 찌꺼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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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결이 비슷한 말씀을 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비유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소금은 가치가 금과 은과 같이 비싼 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런 비싼 가치의 소금이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 소금의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맛을 내야 되는 사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린 소금, 본래의 사명을 잃어버린 소금은 어떻게 되느냐? 던져서 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엄중히 선포하신 것이죠. 너희가 세상에 소금인데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나, 보석이 찌꺼기가 되어 버렸다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이 비슷한 겁니다.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있으며 이 시대에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본질적인 도전과 문제는 보석이라는 본래 가치, 소금이라는 본래 가치를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찌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겨 주신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본래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찌꺼기와 같이 불순물과 같이 그냥 거추장하게 살고 있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원래 너희는 금과 은과 같이 존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너희는 맛을 내는 비싼 소금으로 만들어졌는데 죄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말미암아 너의 본래 가치를 잃어버리고 너의 본래 사명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며 던져지기 일보 직전이구나….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말씀의 결론이 똑같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직면하게 된 우리의 본질적 문제라고 성경은 엄중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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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은 가슴을 치는 안타까움으로 심판의 불을 내리시는 겁니다. 먼저 그의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 안에 다 모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 성 자체가 풀무불이 된다는 것인데 이 풀무불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 단어는 바로 용광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아서 예루살렘 성 자체가 용광로가 되어 거기서 불을 부어 모든 찌꺼기들을 다 태우고 녹여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결과이며 우상숭배와 음행의 결과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결과입니다. 용광로 안에 불을 부어 모두 녹이는 심판은 단순한 파괴, 존재 자체를 다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제련하고 정화의 작용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풀무불 속에 놓고 찌꺼기와 같이 된 그의 백성을 녹이는 것이 구원과 심판의 이중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악인들에게는 심판이 존재 자체를 다 태워 버리는 사건이 되어 버리고 의인에게는 이 불이 정금과 같이 만드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기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불로 씻으시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혹독하죠. 중요한 거는 죽을 거 같은데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을 거 같은데 그 가운데 반드시 살려 내신다는 거예요.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기시고 살려 내신다는 겁니다. 풀무불 속에 넣고 불을 넣어 녹이는 것 같이 찌꺼기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녹여 모든 불순물을 녹인다는 겁니다. 너희가 찌꺼기로 더 이상 살지 않도록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본래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지 않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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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이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과연 다르게 말씀하실까? 솔직히 돌아봐야 되고 주 앞에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가치를 잃어버리고 찌꺼기가 되어버리지 않았는지…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지…말씀을 비추어 보며 돌아보기 원합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지 못하고 본래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본질적 이유는 바로 죄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찌꺼기와 불순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쌓아 둔 그 죄에 대해 하나님이 반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직면 반드시 반응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존귀하게 창조되어 이 세상에 보내진 성도들이 찌꺼기가 되어 버렸다…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다….탄식 하시는 주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찌꺼기가 되어 버린 하나님 백성들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풀무불 속에 용광로 속에 다 녹여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모든 죄를 제거 하시겠다 말씀하시는 주의 엄중한 선포가 이 시대와 우리를 향한 선포임을 잊지 말고 나의 본래 가치와 본래 사명으로 회복을 원하시는 주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께 돌이키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정화를 위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기는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죄만 쌓인다." 에스겔 22,1-16 | 9-25-2026

9/25/2026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가증한 두 가지 일이 결국 그들에게 심판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정말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해 주시는데도 듣지 않는 그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을 직면하게 만드는 두 가지 가증한 일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피를 흘린 성읍이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피 흘린다는 말이 일곱 번 이상 나올 정도로 너무나 많이 등장합니다. 피를 흘린 성읍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찾아 부당 이득을 취하며 피 눈물 나게 만든 것과 자기 자녀들을 소원 성취를 위해서 불로 지나가 죽이는 몰렉의 제사의 재물로 드리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들의 피 흘린 죄악이 고관들 소위 말하는 힘 있는 자들을 통해 선명히 드러납니다. 고관들이 각기 권세대로 그 당시에 나그네나 고아나 과부는 가장 힘이 없고 빽이 없는 자들인데 그들을 학대하면서 그들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면서 부당 이득을 취하고 살았습니다. 가진 힘을 가지고 백성을 섬기도록 주님께서는 주셨는데 그 주신 권세와 힘을 가지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며 그들을 통하여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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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백성들은 좀 괜찮았느냐? 백성들도 똑같이 그 나물의 그 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익을 탐하며 이웃을 속이고 뇌물을 받고 고리대금을 하며 이웃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일들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힘 있고 권세 있는 고관들이나, 백성들이나 하나같이 무정하고 잔인하게 약한 자들을 억누르며 부당한 이익을 취하며 약한 자들의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만든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피 눈물나게 하는 일을 절대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와 주께 들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이걸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죠. 그들이 저지른 가증한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며 그들이 주변에 이웃에 피눈물 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주님께 심각한 범죄인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남 유다와 예루살렘은 결국 심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엄중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피를 흘린 성읍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던 게 이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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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들의 가증한 일, 심판을 자초하는 일은 영적 간음과 음행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로 그들의 삶에는 음행으로 범죄하여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며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들고 와서 스스로 더럽히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붙들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동경하며 살면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송두리째 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음행하며 영적으로 간음하게 되니까 그들의 삶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타락과 성적인 음행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심각한 성적 음행이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만연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들도 있고, 이웃에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며느리를 더럽게 음행 하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이처럼 우상숭배와 음행인 성적 타락은 늘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셨는데 그들이 하나님만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백성이 되었을 때 그들은 우상숭배로 영적으로 간음하며 성적으로 타락하는 음행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하며 스스로 더럽히고, 성적 타락과 음행으로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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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의 가증한 일,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심판을 부르는 이 가증한 일이 벌어지는 본질적 이유가 있음을 오늘 말씀은 지적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가증한 삶을 살아가는 본질적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씀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렇게 피를 흘리는 잔인함과 무정함이 올라오고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씀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렇게 영적 간음인 우상숭배와 음행이 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바라보며 역겨워서 구토가 올라올 정도인데, 그들의 가증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가증한 일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이제 그들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고 엄중히 선언하십니다. 이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심판을 내리실 때 손뼉을 치신다고 증언하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손뼉을 치신다는 건 잘됐다고 박수 치는 손뼉이 아니라 가슴을 치시는 손뼉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손으로 가슴을 치고 손으로 땅을 치지 않습니까? 이렇게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무너지는 마음이 심판 가운데 손뼉을 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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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잊고 말씀이 사라진 백성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피를 흘린 성읍이 되었고 영적 간음과 음행으로 무너지는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그 역겨움과 구토가 올라오는 삶에서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는 이런 안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피를 흘린 성읍이 되었고 영적 음행과 성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내가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너희의 피 흘린 일과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할 수 밖에 없다는 엄중한 선언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심판의 목적은 그들의 이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멸하고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세대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기 위해 그들은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때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가증한 삶을 피할 수 없음을 잊지 말며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말씀이 사라지지 않는 삶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피 흘리는 삶에서 돌이켜, 영적 음행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는 삶에서 돌이켜, 주의 거룩하고 신실한 백성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이 엎드러질 것이다.” 에스겔 21,18-32 | 9-24-2026

9/24/2026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방을 향하여 주실 불심판이 칼로 망하는 심판임을, 그 칼심판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명시하며 상징이 실체가 됨을 보여주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하나님 심판의 도구가 되었는지, 동시에 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칼로 모든 것이 망하는 불심판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망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칼집에 있었던 칼을 빼시며 칼을 들어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한 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칼집에 넣어 꾹 참으며 기다렸던 그 심판의 칼을 더 이상 빼내지 않으면 안 될 지경, 그대로 둘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죠. 더 이상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은 죄가 만연했으며 영적 타락이 막장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대로 두지 못할 지경이 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서 칼집에 있는 칼을 빼셔서 그 칼을 통하여 선명한 이미지로 칼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죠. 에스겔 21장 말씀에 칼이라는 단어나 15번 이상 등장하는데 그대로 두지 못할 지경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심판, 칼집에서 빼낸 칼은 다시 집어넣을 수 없음을 엄중히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을 행하시는 모습은 안 죽었으면 좋겠는데,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대로 두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러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심판에 직면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슬픈 마음과 참담함이 느껴지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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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라는 도구를 들어 그들을 철저하게 칼로 심판하시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칼 심판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리라고 명하십니다. 두 개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쪽은 암몬으로 향하고 한쪽은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리라 명하십니다. 그 갈림길은 심판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며 심판은 순서만 다를 뿐이지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뿐만 아니라 나중에 암몬에게도 임하게 될 거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에 대한 질문을 위해 바벨론 왕은 그 당시에 미신적인 행위인 소위 말하는 점을 보는 겁니다. 그들은 희생제물의 간을 떼 가지고 그걸 통하여 점을 보는데 그 때에 바벨론 왕의 오른손에 예루살렘의 표를 받은 것입니다. 그 갈림길에서 첫번째 심판의 길로 예루살렘을 치라는 쪽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이런 미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이루어지는 과정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먼저 심판이 진행되도록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갈림길에서 먼저 예루살렘을 향하여 치러 올 바벨론 군대의 모습을 에스겔을 통해 선명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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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은 이렇게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칼을 들어 모든 것을 심판으로 이끄시는 마지막까지 아무 것도 대비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가마솥과 같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는 한 너희는 평안할 것이라며 거짓 점괘로 맹약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사와 예배 드리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도 망하지 않는다고 착각했기에 아무런 영적 대비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칼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무너뜨릴 때에도, 우리를 멸망시킬 리가 없다고 끝까지 거짓 점괘를 믿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날이 되니까 무서운 칼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고, 그 엄중한 심판을 통해 모드느 것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 날이 되니까 하나님의 칼로 말미암아 심판이 임할 때 너희의 숨겨 놨던 죄악도, 너희의 허물도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건 우리의 죄가 다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만이 사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숨기고 가리고 아무 일 없는 척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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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 심판의 칼날 앞에 다 엎드려지게 된다는 겁니다. 바벨론을 통하여 칼심판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엎드려 뜨리고, 엎드려 뜨리고 엎드려 뜨리는 겁니다. 더 이상 그대로 두지 못하고 더 이상 이 상태를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주의 강력한 의지가 뭡니까? 모든 자들을 엎드려 뜨리는 겁니다. 왕의 왕관을 벗기고 그가 수많은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눈이 뽑히고 바벨론에 끌어가게 됩니다.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칼 심판으로 말미암아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엎드려지게 됩니다. 그들의 교만한 목을 꺾으시고, 하나님을 떠나 복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동경하며 기웃거리던 모든 자들을 다 엎드려지게 하십니다. 모든 우상을 무너드리시고, 불순종을 꺾으시고 죄악된 하나님 백성들을 다 엎드려지게 하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다 재편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 때는 하나님께서 칼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과 모든 부끄러운 것과 허물을 다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 그들을 모두 엎드려 뜨리고 무너지게 하신다는 것을 다가올 현실로 직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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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라는 것이 의인, 믿음의 사람에게는 심령 골수를 쪼개서 순수한 것만 남게 하고 불순물을 잘라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믿음의 사람에게는 비본질적인 것을 제거하고 본질만 남게 하는 영적 할례의 기능을 합니다. 반면악인에게는 칼이 악인 자체를 끊어내고 무너뜨리는 심판의 도구가 되는 것이죠. 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푸른나무인 의인들에게는 그것이 불로 정화하고 연단하고 단련하는 순금이 되게 만드는 도구지만 악인에게 불은 그들을 태우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불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신 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이 엎드러지고 무너지고 파괴되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칼집에 칼을 두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것과 같은 평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칼집에서 칼을 여시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며, 그 칼날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때가 임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엎드려 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로서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날을 바라보고 그날을 대비하고 준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마지막 때의 사건을 농담과 같이 여기다가, 거짓 점괘에 빠져 착각하다가, 아무런 대비도 준비도 없다가 철저하게 망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을 반면 교사 삼기 원합니다. ​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그 날이 실체로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고 말씀 가운데 조율되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깨어 있는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칼집에서 꺼낸 칼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에스겔 21,1-17 | 9-23-2026

9/23/2026

 
에스겔 21장 말씀은 20장에 나왔던 남방으로 향하는 삼림에 불이 임할 거라는 비유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실제적 해석을 주시는 본문입니다. 남쪽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큰 불을 내리신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바로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강력한 칼로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의미인 것입니다. 남방으로 향하는 불심판이란 구체적으로 그들이 칼로 망하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비유가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칼을 통해 문자 그대로 이제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의 앞부분 말씀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칼집에서 빼어든 여호와의 칼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칼을 그동안 칼집에 넣고 계셨습니다. 심판이라는 이 칼을 그동안은 칼집에서 빼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은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칼집에 있는 칼을 빼내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신다는 엄중한 경고 말씀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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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것은 한 번 빼낸 심판의 칼은, 칼은 칼집에서 한 번 빼낸 칼은 다시는 되돌리지 못하다는 겁니다. ​ 심판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칼집에 다시 꽂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이 붙는 순간에는 더 이상 불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때가 임하게 되면 심판의 칼이 칼집에서 뽑아지게 되고 한번 뽑아지게 되면 되돌릴 수 없이 전면적이고 피할 수 없는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 심판의 칼로 쓰임 받은 자가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이고 구체적으로는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바벨론 군대가 이 칼을 통하여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되고 소위 말하는 불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이죠. 그동안 참고 기다리고 하나님의 때, 이제 모든 것이 차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게 되는 것이죠. 바벨론이 남유다를 침공하여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불심판은 겉으로 보면 바벨론이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한 걸음 떨어져 영적 관점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칼집에서 빼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방으로 향한 삼림의 불을 통하여 이루실 불심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실제적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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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이 칼의 심판은 누구를 향하는가 하면 지도자들과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규를 향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보편적으로는 모든 백성에게 다 임하는 심판이지만, 특별히 특별히 이스라엘의 모든 고관들, 즉 그 당시 지도자들과 왕에게 집중되는 겁니다. 칼의 심판은 왕족과 지도자인 고관들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규라는 말은 지팡이로 상징되는 왕권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을 잘 이끌고 섬기라고 맡겨 주신 이 왕권을 규라 그러는데, 하나님이 맡겨 주신 권력과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백성들을 업신여기며 오히려 교만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쫓아가는 대신 세상의 권력과 눈에 보이는 힘 있는 나라들을 쫓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칼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집중적으로 모든 고관들, 지도자들을 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왕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을 무시하고 짓밟으며,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붙들고 살아간 죄를 칼심판으로 엄중히 치리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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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칼의 심판이 얼마나 끔찍하고 심한가 하면 백성이 보는 앞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탄식하게 될 것, 온 마음이 녹에 손이 풀리고 낙담하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칼집에서 빼낸 심판의 칼을 통하여 지도자들과 고관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고 심판하며 모든 방향으로 그 칼이 휘둘러질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어디로 도망가든 피할 곳이 없으며 그 심판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징이 아니고 실체임을, 단순히 그냥 위협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반드시 일어나는 일임을 하나님은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은 심판의 확실성과 절대성을 분명히 보이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경고가 반드시 이루어짐을, 이 칼의 심판을 실체로 너희가 직면하게 될 것을 분명히 알라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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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한 말씀은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씀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고 그 말씀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도 이 에스겔의 경고를 남의 이야기 듣듯했고요. 지금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도 마지막 때의 말씀을 농담과 같이 여깁니다. 왜냐면 칼이 아직은 칼집에 꽂혀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칼을 칼집에서 빼내며 두루마리를 여시며 그 모든 심판을 집행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칼집에서 칼이 빼내어지는 순간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칼집에서 뽑혀진 칼은 반드시 그 심판을 집행한다는 것을, 봉인돼 있는 두루마리를 펴는 순간 다시 봉해질 수 없으며 그 일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며 우리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시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과 같은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내 영이 깨어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지금 이 시간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며 순종함으로 주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 듣고 못 깨달으면 온몸으로 경험하고 깨닫는다." 에스겔 20,45-49 | 9-22-2026

9/22/2026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셔도 그 말씀이 뭔지 모르고 살다 결국 온몸으로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자들입니다. 더 어리석은 자들은 말씀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고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기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돌이키기 원하시는 경고의 말씀을 불타는 숲의 비유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불타는 숲의 비유를 알려 주심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들어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끝없이 확성기를 대고 외치시는 주의 사랑과 그 사랑에 귀를 막고 있는 어리석은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경고하실 때 때로는 전염병으로, 어떨 때는 칼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심판을 반복하여 설명하시는데, 오늘 말씀에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직면하게 될 심판의 모습은 불타는 숲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행하시는 거룩한 심판의 역사를 불타는 산불에 비유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 모두가 바로 숲과 같은 나무들인데 그 숲과 같은 나무들이 모두 불에 타게 된다는 비유를 통해 파멸이 돌이킬 수 없는 임박함에 직면에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불타는 숲의 비유의 대상, 즉 그 심판의 대상이 남유다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 불타는 숲의 비유는 바로 남쪽을 향한 심판의 예언인데, 남쪽이라는 것은 바벨론을 기준으로 남쪽인 바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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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여름에 캐나다 원주민 선교를 가게 됐을 때 캐나다의 산불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저희 눈으로 목도하고 그 안 좋은 공기를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산불도 지금이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시대에도 다 끌 수가 없어서 그냥 그 타는 수풀과 산들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됐습니다. 무섭고 두렵기도 한 통제 불가능한 캐나다 산불을 목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불을 일으켜 모든 것을 태우는 심판이 이런 모습이겠구나…. 생각하며 산불이 잡히도록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수천 년 전에 이 심판의 역사를 통제할 수 없는 산불로 비유하는 것을 통하여 이걸 일으키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심판으로 내리신 산불은 인간이 끌 수 없는 불이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불을 일으키시는 방법은 우리가 다 알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잠시 쓰임 받는 바벨론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군대를 잠시 사용하셔서 이 남쪽의 숲을 향하여 모든 푸른 나무와 마른나무를 없애는 불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일반적으로 푸른 나무는 의인들 남아 있는 그 소수의 남은 자들을 의미하고 마른 나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인 악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이라는 불을 통하여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삼킬 때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모두 없애신다는 겁니다. 푸른 나무에도 불이 붙고 마른 나무에도 불이 붙고, 그 불꽃이 꺼지지 않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을 그슬리게 될 것입니다. 푸른 나무와 많은 나무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고 그 불은 꺼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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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불타는 숲의 비유를 경고의 말씀으로 주시는 이유는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너희들, 하나님이 맹렬한 불을 일으켜 너희 모두를 태우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그 모든 나무들을 태우기 전에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돌아와라…그게 안타까운 주의 마음입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말씀을 통해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북 이스라엘이 갔던 길을 가면 ​ 남유다와 예루살렘 땅도 결국 하나님의 불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계신 것이죠.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고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돌이키면 사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 이들은 건짐 받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맹렬한 불꽃이 의인인 푸른나무에게는 정결하게 하고 불순물을 태우는 정화 작용으로서의 불이겠죠. 그런데 마른 나무인 악인에게 불은 그들 전체를 태우는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불이 의인에게는 정결하게 하는 불인데 악인에게는 그 사람 자체를 태워버리는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할 때, 의인과 악인이 갈라지는 것이죠.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가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무엇에 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냐? 입지 않고 있느냐? 에 따라 갈리는 겁니다. ​ 죽음의 심판이 찾아올 때 문설주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른 집은 넘어가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 말씀만 듣고 회개했으면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으로 건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엎드렸다면 그들에게는 마지막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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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들의 비극은 하나님이 이 정도로 긴급하고 급박하게 말씀하셨음데도, 이 정도로 극적인 방법을 동원하시며 경고하심에도,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들을 마음도 의지도 없으며,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전하는 심판의 말씀을 지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심각성을 축소하고 있고 심지어 누구의 얘기로 듣고 있습니까? 남의 얘기로 듣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하..” 이렇게 얘기하고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나를 향한 경고 말씀인 줄 모르고 그냥 남의 이야기 같이 흘려 듣는 겁니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 않은 말씀으로 흘려 보내고 있는 그들의 어리석음, 영적인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죽기 직전에 강도가 주님을 만나 주님을 고백함으로 그가 낙원에 들어간 것 같이 마지막 기회가 남은 것인데, 그들은 이 경고의 말씀조차도 남의 이야기로 흘려 들으며 대수롭지도 않게 그냥 귀를 닫아 버리게 되는 겁니다. 결국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나무와 마른나무가 타고 나서야, 그 끔찍한 불심판이 임하고 나서야, 맹렬하게 타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무너진 그 현실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불을 일으킨 분이 하나님이심을 온몸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온 도시가 불바다가 된 후에야 이 불을 일으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은 인생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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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는 심판과 죽음 이후에 일어날 엄중한 일들을 미리 알려주셔서 죽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예수님 앞에 돌아올 지어다…주의 사랑을 담은 초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주신 그 이유는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산다는 그 음성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으로 깨달으면 여러분들은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이 멈추기 전에 주님 앞에 돌아와 그분을 영접하고 예수 의의 옷과 그의 이름을 의지하여 나아가는 주의 백성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경시하고 이 말씀을 농담같이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고 나서야 맹렬한 불꽃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심판을 일으킨 분이 하나님이신지 깨닫고 후회하고 땅을 치며 이 시간 돌이키려 해도 할 수 없는 그 어리석은 인생 되지 말고, 지금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 먼저 돌이키고 회개하고 엎드리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잊지 마시고 가능하면 지금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깨닫기를 원합니다. 어리석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길이 아닌,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되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이 말씀에 순종하여 엎드리며 주님 말씀 가운데 깨닫고 변화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주의 막대기와 언약의 줄로 단단히 메어 주신다." 에스겔 20,33-44 | 9-18-2026

9/18/2026

 
오늘 말씀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예배 타락을 엄중히 지적하며 진정한 예배로의 회복을 원하시는 주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대로 살지 못하는 본질은 결국 예배 타락에 있음을 분명히 하며, 예배 타락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라 명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예배 타락과 예배 회복의 본질적 차이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서 우리 가운데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며 다시 세워지기 원하시는 주의 뜻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기 원합니다. 첫 번째로 예배의 타락과 회복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내가 믿고 살아가는가 살아가지 않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는 자들은 예배를 드리는데 주의 통치와 다스림을 망각하며 살아가고요.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내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질은 내 인생뿐만 아니라 온 세상과 우주를 주께서 통치하고 다스리심을 분명히 믿는데 있습니다. 그의 능한 손과 편 팔이 통치와 다스림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현장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타락하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과 편 팔은 망각하는 겁니다. 대신 눈에 보이는 능한 손과 편 팔을 찾아 헤매고 눈에 보이는 세상 왕들과 힘의 다스림에 나를 묶으려 그러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 그들의 조상이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같이 망하고 무너지는 길을 갔는데 하나님의 이 통치와 다스림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능하심 손과 편 팔을 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망각하기 때문에 자꾸 세상의 다스림에 나를 묶으려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 타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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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무너진 예배가 회복됨을 통해 발견하기 원하시는 중요한 핵심이 있는데 그 날이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바로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신다는 선언입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예배가 회복되는 자들은 반드시 그 날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늘을 살지만 그 날을 바라보고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 날에 일어날 일은 바로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날이며, 구원받는 자들을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신다는 것을 예배를 통해 깨닫는 겁니다. 막대기 아래로 지나간다는 건 목자가 양들을 줄을 세워서 우리로 들어가도록 하나 하나씩 영적 건강 상태를 살피고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서 우리로 들어가게 합니다. 언약의 줄이라는 것은 바로 변함없는 주의 약속으로 단단히 매게 되는 것이죠. 무너진 예배가 회복 된다는 것은 내가 주의 막대기 아래로 들어가 구원을 받게 되며 주의 변하지 않는 언약의 줄에 매어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겁니다. 예배의 타락은 껍데기로는 예배를 드리지만 이 막대기 아래 언약의 줄로 메이지 않다가 결국 심판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는 주의 말씀을 분명히 믿고 주의 편 팔과 능하신 손에 나를 묶어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심을 것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예배 회복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망각하고, 그 날에 막대기 아래 언약의 줄로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경고하시는 주의 말씀을 깨달아 예배의 타락으로부터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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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예배의 타락과 회복을 나누는 결정적 차이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로 부르심을 깨닫는 유무에 있습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예배 타락은 겉으로는 예배 드리고 제사 드리러 왔는데 주의 말씀을 들을 의지와 마음이 전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 거절하고,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 말씀 안 듣고 내 말만 들어 달라는 겁니다. 그 결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는 뭡니까? 그럴 거면 각각 가서 너네 우상 섬기라는 겁니다. 내 앞에 와서 예배 드리지 말고 각각 너네 우상 원하는 우상 섬기지 뭐 하러 왔냐는 것이죠. 예배 타락이란 예배 드리러 왔는데 내 말만 하고 가고 하나님 말씀 들으려 하지 않는 겁니다. 예배 타락이란 하나님만 예배하는 대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예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히는 겁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십니까?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정말 사모하십니까? 이것을 망각하면 우리가 예배 타락의 길로 간다는 겁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도, 포로로 잡혀온 남유다와 예루살렘도, 이 시대 많은 성도들도, 예배 타락을 지적하는 주의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겁니다. 우리가 예배를 사모한다는 거는 겉으로 화려한 예배,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말 아는 데 있습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며 예배와 회복되는 그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누리기를 주님은 원하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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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예배의 회복과 타락을 나누는 갈림길은 바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혀진 행위에서 돌이키느냐 돌이키지 않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배가 회복되는 부분은 바로 내가 현재 있는 삶의 자리가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살고 있음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이탈되어 있는가를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가를 깨닫고 내 길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가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게 예배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배 타락은 예배 드리러 와서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내가 얼마나 더럽고 악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나 괜찮다고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이죠. 예배의 타락은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고, 말씀을 듣지 않으며 이탈하고 살아가는데도 괜찮고, 제자리로 찾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착각하는 자들만 무한 양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거룩한 산, 높은 산에서 첫 열매를 드리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첫 시간, 첫 예물, 높은 산이 중요한 이유는 그걸 통하여 내 삶에 하나님이 넘버원임을 고백하는 내 고백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넘버원이라는 고백과 함께 첫 예물을 드리는 것이고 첫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예배로의 회복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악한 길과 더러운 길에 살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이탈되는가를 깨달으며 주님 내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진정한 예배를 통해 회개로 나를 이끌어 제자리를 찾게 하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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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타락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주의 말씀에 깊이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예배 타락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내 예배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온다면 내가 주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를 사모합니다…라는 이 본질에 붙들려 예배 회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다스림과 통치를 분명히 믿으며 하나님께서 구원의 심판의 길로 나누는 그 날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 날에 오직 순종하고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가는 것 이게 예배 회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진정한 예배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제자리를 찾는 것이며 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가를 깨닫고 하나님만 예배하기로 두 손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분명히 있음을 믿으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언약에 단단히 묶여 살아가는 예배 회복, 하나님만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예배 회복,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진정한 예배 회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고백 되며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네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에스겔 20,27-32 | 9-17-2026

9/17/2026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시절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한 때까지 대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는 죄악을 통하여 안식일을 더럽혔다는 내용을 소개하시면서 현재 남 유다와 예루살렘 또한 반복되는 불순종을 답습하고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이 나에게 찾아와 물어보는 것을 용납치도 아니하고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이루지도 못할 것을 경고하시며 말씀을 결론 맺고 있습니다. 과거에 광야를 건너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너희 조상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출애굽 하게 하셔서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왔는데 그들이 했던 일은 은혜를 까마귀 고기를 먹듯 망각하며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베풀어서 인도했는데 정작 그 땅에 들어가니까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부터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겸하여 섬기며 범죄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범죄함으로 안식일을 더럽히게 한 것은, 단순히 율법을 어기거나 단순히 좀 잘못한 것을 넘어 하나님 자체를 욕되게 중범죄 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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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만 기억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축복과 그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되는데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했던 삶의 행태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모든 높은 산과 무성한 나무에서 우상의 제사를 드리고 우상에게 재물을 올리고 분양하고 전재물을 드리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망각하고 우상숭배하고 이방신들에 빠져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누리지 않고 그것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죠.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이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누려야만 사는데 축복 받아 놓고 은혜 받아 놓고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축복의 땅에서 가나안의 신을 섬기고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에 빠져 행음하고 살아간다면 지금 너희에게 이 축복의 의미가 뭐냐는 것이죠. 하나님 백성으로서 걸맞게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에 헛된 것을 구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었고 결국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너희 조상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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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뒷부분에는 지금 현재에 있는 그 유다 포로 세대로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신 거예요. 너희 조상들이 이렇게 해서 망했는데 지금 너희는 어떻게 하겠냐는 거예요. 너희는 어떻게 할 거냐고 지금 물어보시는 것이죠. 너희는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똑같이 더럽힐 것이냐? 조상들의 가증한 우상을 따라 똑같이 행음하고 살아갈 것이냐? 이 질문을 통하여 가나안 세대에 똑같은 악을 답습하며 현재 너희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며 하나님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히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엄중히 지적하고 계신 것이죠. 그들은 오히려 그 과거 세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거예요. 항상 우상 숭배의 현장은 가장 높은 곳, 가장 알짜배기 땅이었습니다. 그 높은 땅, 비싼 땅에서 우상숭배를 위해 그들이 세운 산당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그 비싸고 높은 곳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너희 자신을 더럽히고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계신 겁니다. ​ 심지어 그들은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했습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소원을 위해 하나님이 제일 혐오하시는 몰렉의 제사, 자녀는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일들을 통해 그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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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에 이을 소원만 이르려고 오는 것 이거 절대 내가 용납하지도 않고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마음의 소원이 아니고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됨을 망각하고 이 시대의 풍속을 쫓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가증한 것으로 행음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1번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 말씀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데 그 위에 소원이 이루어지면 뭐 할 것이며 그 위에 예언을 들으면 뭐 할 거냐는 겁니다. 무당에게 찾아가면 무당은 회개하라는 말 전혀 없고 내 삶을 돌이키라는 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라는 윤리 같은 거 없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거기서 내가 품은 것을 이루고 싶은 계단과 사다리만을 원하는 게 바로 점쟁이들이고 무당이죠. 그래서 그런 점쟁이들에게 돈 내고 묻듯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물어보는 것, 이제 진절머리 난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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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질문을 똑같이 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똑같이 이 질문을 물어보실 것 같아요. 너희는 지금 자신을 우상으로 말미암아 더럽히고 있느냐? 너희는 지금 내게 묻기를 용납하겠느냐? 너희 또한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 우리는 혹시 하나님의 백성이다는데 안식일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를 예배함을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존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를 더럽히며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게서 돌이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안식일의 정신으로 돌아와 나에게 생명 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 하나님만을 붙들고 나아가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아가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이런 삶에서 멈추고 주 앞에 돌아와 회개함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늘의 생명과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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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원하는 대답 나올 때까지 묻는 게 불신앙이다." 에스겔 20,1-9 | 9-15-2026

9/16/2026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또 에스겔을 찾아와 여호와께 물으려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장로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찾아온 게 첫 번째가 아니거든요. 8장에서도 찾아오고 14장에도 찾아오고 오늘 말씀 20장에 또 찾아오는 겁니다. ​ 그러니까 그 사이에 한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찾아왔음을 에스겔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 소위 말하는 민족 대표라는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 와서 물으려고 에스겔을 찾아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에도 그들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묻는 태도와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8장과 14장에선 그래도 장로들이 물어보려고 하는 기회를 주셨는데 오늘 20장 말씀을 보면 그 장로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질문도 하기 전에 먼저 자르시는 겁니다. 질문도 하기 전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 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을 찾아와서 물어보려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들의 태도와 자세가 얼마나 잘못됐으면 하나님 앞에 물어보기도 전에 딱 자르시는 거예요. 내 앞에 와서 물어보려고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묻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자르시며 딱 선을 그으시는가? 왜 장로들에게 질문조차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의 단호함을 이렇게 보이시는가? 그들의 태도와 자세를 엄중히 지적하시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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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하나님이 거절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때가 되니까 의례적으로 와서 묻는 질문들 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뭐 순종할 마음이나 하나님께 진짜 뜻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온 게 아니라 그냥 때가 되니까 1년에 한 번 두 번 정도 찾아와서 묻는 겁니다. 아, 물을 때가 됐으니까 하나님한테 좀 물으러 와야지….그러니까 여름도 지나가고 계절도 바뀌는데 한해가 다 저물어 가고 있는데, ​ 한 번 하나님께 나아가서 물어볼까? 마치 심심하면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내년에 운세가 뭐냐고 물어보는 거와 똑같은 태도로 지금 주님께 물어보고 있는 겁니다. 때가 됐으니까 하나님 한번 좀 찾아가서 뭐라 그러시나 들어나 보자….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물으니까, 그 속마음을 다 아시고 중심을 아시니까 그들의 질문 자체를 듣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고 이 힘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가를 물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종교 의식과 같이 점쟁이 찾아오듯 그렇게 오는 걸 딱 막으시고 질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 그런 마음으로 오면 뭐가 되겠냐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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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들이 몰라서 하나님께 물으러 온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장로들과 온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미 다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도 반복하여 말씀해 주셨고 비유로도 말씀하셨고 에스겔이 연극도 하고 별의별 행동을 다하면서 다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실 땐 다 어디가 있다가, 안 듣고 귀를 막고 있다가 마치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것처럼 우리가 찾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는 것처럼 와서 지금 물어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의 묻는 태도에는 언제까지 하나님께 묻는다는 겁니까?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냥 나와 묻기만 하는 거예요. 오늘 이 점쟁이한테 들었는데 내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옆에 있는 점쟁이한테 가고 그 사람도 마음에 안 들면 또 건너편 점쟁이에게 가듯, 이런 태도로 하나님께 물으러 오니까 이게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주의 말씀의 귀를 기울이며 나와야 하는데, 내 뜻과 생각을 관철하려고 나아와 하나님께 계속 물어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게 무엇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를 거절하고, 순종할 마음도 하나도 없고 그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오는 그런 반복적 불신앙에 손사래를 치시는 겁니다. 그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아오지 않으면, 내 앞에 나올 생각도 하지 말라며, 물어보기도 전에 딱 자르시는 겁니다. 너희가 나에게 물어보는 거 자체를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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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분명히 너희의 조상대로부터 내가 원하고 내가 기뻐하는 게 무엇인지 선명히 말씀해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너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에 이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조상 대대로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가증한 것을 버리고 애굽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않는 겁니다.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고 가증한 것을 버리고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가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살아가라. 이걸 이미 분명히 나아갈 길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뭐라는 겁니까?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해 주셨고, 분명히 나아갈 길을 보여줬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들을 마음도 들을 의지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금 에스겔을 찾아온 건만 벌써 몇 번째 입니까?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 나오는 거 원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가증한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애굽의 우상을 떠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가증한 것을 버리지도 죄악을 버리지도 우상을 떠나지도 아니하고 그냥 와서 물어보기만 하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겠다는 거죠. 내가 원하는 길만 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나아와 질문하는 것 조차도 듣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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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 나아와 기도 제목을 아뢰고 주의 뜻을 구할 때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우상을 버려야 되고 가증한 것을 떠나야 되고 스스로 더럽혀지는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나 지금 포로로 잡혀 와서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애굽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않고 가증한 것을 버리지도 않고 그냥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는 겁니다. 죄를 그대로 붙들고 우상을 떠나지도 않으며 가증한 것을 버리지도 아니하면서 그냥 내가 원하는 것 듣겠다는 자들, 우리에게 더 큰 것으로 주신다는 것은 아멘을 하는데 내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는 기도 응답에만 열광하는 자들, 내가 원하는 응답 들을 때까지 나오는 이 사람들 꼴도 보기 싫으시다는 겁니다. 너희 속이 뻔히 다 보인다… 여전히 죄를 품고 나와서 본인들이 원하는 것만 듣겠다고 한 너희들 내가 너희들의 질문 자체를 더 이상 듣지 않겠다….하나님의 반응은 진노와 분노밖에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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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품고 가증한 것을 품고 죄를 버리지 아니하고 주께 나아와 물어보기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항해 엄중히 경고하시는 단호한 주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몇 번이나 나오고 하나님에게 어떻게 나오는가 중요하게 합니다. 물론 안 나오는 거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오는 거보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나오냐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쏟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응답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정말 듣기를 원하는 것이죠. 주께서 말씀하실 때 그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주님이 원하심을 내가 귀 기울일 순종이 준비 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주 신비적으로 모르게 알려주신 게 아니라 너무나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상들을 버리고 가한 것을 버리고 죄를 버리고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 그래야 너와 나와의 관계성이 생기기 때문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지는 데서 벗어나라…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 남유다와 예루살렘과 같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주 앞에 우상을 버리고 죄된 행동과 가증한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오는 영적 겸손과 엎드림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과 원하시는 뜻에 조율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을 알게 하여 생명과 복을 누리도록 하신다." ​ ​에스겔 20,10-26 | 9-16-2026

9/16/2026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불순종과 반역의 대표인 안식일을 더럽히는 문제를 엄중히 지적하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타락은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 앞에 몇 가지 잘못했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깨고 더럽힌 심각한 영적 간음의 문제라는 것을 엄중히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문제가 그렇게 심판으로 망할 정도의 문제인가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안식일을 더럽히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명하신 안식일이 무엇이며 안식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방식이 바로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즉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를 삼았다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첫 번째 주신 언약, 십계명을 주시는데 그 십계명의 가장 핵심부분이자 노른자는 바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죠. 수많은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데 그 모든 정신은 안식일 정신에 귀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주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표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킴으로 언약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방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간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언약의 표징이 바로 안식일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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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출애굽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노예의 삶에서 해방만 주신 것만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 광야의 삶을 잠시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영적 질서를 주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여 생명과 복을 누리기 위함… 그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광야에서 누리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언약 백성으로 그들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생명과 복을 누리며 사는 백성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 정신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안식일의 핵심은 노예와 같이 동물과 같이 못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먼저 쉬는 것이고 먼저 멈추는 겁니다. 그리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께 예배하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가치로 두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사는 삶입니다. ​ 일주일 가운데 6일은 열심히 일하는데 하루는 멈추고 하루는 숨을 고르고 쉬며 하늘을 바라보고 주께 예배하면서 나의 존재 목적을 다시 깨닫는 것입니다. ​ 거룩한 하나님을 알아 그분이 주시는 생명과 복을 누려야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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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타깝게도 그 하나님의 안식일 정신을 깡그리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례와 법도를 반역했다는 겁니다. 오늘의 긴 말씀에서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13절과 16절에도, 21절과 24절에도 반복해서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을 강조하시고,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엄중히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약속의 징표가 안식일인데 광야에서 그들은 이 원리를 무시하고 안식일을 크게 더럽히며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겁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복의 길을 거절하고 안식일을 더럽힘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어기고 지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을 통하여 생명과 복을 누려야만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안식일 정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음으로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결국 우상숭배인 영적 간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엄중히 지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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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가슴을 치시며 물으십니다. 지금 현재 삶의 자리에서도 너희에게 본질적 문제가 뭐냐?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 그게 영적 간음이자 안식일을 더럽히는 삶이라는 것을 모르냐는 겁니다. 옛날에 `너희 조상이나 지금 너희나 어쩜 그렇게 망하는 길로 가는 게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지 않고 율례를 멸시하면서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다는 거예요. 그 안식일의 정신이 더럽혀지고 나니까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쉴 줄 모르고 멈출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하여 예배 드리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지도 않고 율례를 따르지도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며 여전히 세상과 함께 우상을 붙들고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그 삶의 막장이 바로 자녀를 불에 들어가게 하는 만행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히면서 우상을 사모하는 것도 모자라 세상에서도 짓지 않는 범죄인 자기 자녀를 화제로 불로 드리는 끔찍한 몰렉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맡겼는데 내 자녀라고 착각하고 내 소유라고 착각하며 그 자녀를 불에 던지고 불에 지나가게 하는 이런 끔찍한 만행을 벌이고 있는 게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하나님의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솟아 멸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쏟으며 이 모든 것을 정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아래 그 죄악된 선택이 가져온 필요한 필연적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심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통하여 그 심판을 내리시고 그걸 통하여 깨닫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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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들도 남유다와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거룩하게 하기 위한 표징으로서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우리는 노예가 아니고 이 땅에서 천년만 년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주일을 한번 안식의 정신을 통하여 멈춰야 되고 숨을 고르고 쉬어야 되며 하늘을 바라보고 예배해야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통해 생명과 복을 공급받아야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생명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안식일 정신입니다. 우리가 그 안식일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안식을 더럽히는 자가 되며 그 결과 내 삶에 쉼이 사라지고 안식이 사라지고 멈춤이 사라지고 예배가 사라지면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과 남 유다와 예루살렘에 그 심판을 자초했던 불순종과 불신앙의 일들을 반복하게 될 수 있음을 엄중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의 삶에서 건져서 구원해 주셔서 참 자유를 주시고 해방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광야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안식일을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 안에서 멈추고 주 안에서 쉬고 주 안에서 예배 드리는 안식일 정신의 회복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과 복을 공급받아야만 사는 존재임을 잊지 않고 언약 백성으로 주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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