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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말씀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증언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실천한다는 삶은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을 안 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루려는 삶이 실천이 아닙니다. 물론 내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안 하는 결단이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을 지켜내는 삶이란 내 중심과 내 위주의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위주의 생각으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가 말씀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일하시도록 내 삶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중심, 내 위주의 생각이나 행동을 멈추고 그리스도 위주의 생각과 행동으로 내가 조율될 수 있는 것이죠. 내 중심과 내 위주의 생각과 행동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바라보고 붙드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삶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있느냐?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고 있는가? 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하는 것이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본질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드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살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기적 세 가지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됨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일 좀 더 살펴보겠지만 얼마나 빌립보 교회가 하나가 안 되면 이렇게 반복해서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마음을 좀 같이 해라. 같은 사랑을 좀 가져라. 뜻을 좀 합쳐라. 한 마음을 품으라. 이게 다 똑같은 말이죠. 하나 되라는 거예요. 하나가 얼마나 안 되면 이런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스스로 실천해서 말씀을 지켜서 제발 좀 마음을 좀 같이 해라. 같은 사랑을 가져라. 뜻을 합해라. 한 마음을 제발 좀 품으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면 이 기적이 교회 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한 뜻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같은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기적의 비결은 단 한 가지라는 거예요. 목회자를 표함에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뿐이라는 것이죠. 점점 성도가 하나되는 것은 기적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고요. 요즘에는 다양한 상처들을 가지고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상처를 가진 모여 있는 성도들이 한 마음을 가지고 한 사랑으로 뜻을 합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의 기적,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 뿐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 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다른 것을 녹이고 넘어서서 하나되게 하는 기적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이 하나됨의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거, 십자가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증거로 우리가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두 번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다툼과 허영이 멈춰지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사노라면 다툼과 허영이 계속되는 이유를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각각 나를 남보다 낮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의 다툼, 집안에서의 다툼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내가 너보다 옳다는 거예요. 내 말이 너의 말보다 옳다는 거죠. 이게 싸우는 모든 근본적 이유입니다. 네가 틀렸고 내가 옳기에 이거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모든 다툼의 근원이라는 거예요. 또한 허영은 내가 너보다 낫다는 거예요. 내가 너보다 좋은 차를 가지고, 내가 너보다 좋은 집을 가지고,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벌고, 계속 비교와 경쟁을 통해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모든 게 허영입니다. 이 다툼과 허영은 모든 인간의 죄성으로 나오는 자연적인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싸우며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하고,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허영으로 내가 너보다 낫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도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열심은 있는데 내 일만 하는 겁니다. 말로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나를 드러내고 내가 너보다 낫고 내가 너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기 일을 하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겁니다. 이 다툼과 허영이 멈춰지는 기적은 오직 뭐를 통해서 가능한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 중심으로 내 죄의 본성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 결심이 약하여 늘 쓰러지고 넘어진다는 게 오늘 찬양의 고백 아니겠습니까? 자기 결단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낼 힘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고 끊임없이 내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다 보면, 다툼과 허영에서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는 겁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기쁨 충만한 기적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늘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려 합니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면 이 겸손한 마음의 기적이 풀리는 거죠. 내가 나보다 남을 더 세워 주고 높여 주는 것이고, 나를 증명하려는 삶에서 자유해지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나를 맞추라고 강요하고 내 입장을 맞추고 내 견해를 맞추라고 외치는 것, 이게 죄성을 가진 모든 인간의 삶의 방식이죠. 그런데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나에게 맞추라는 강요를 내려놓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맞춰 주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 주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늘 너와 나의 다른 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다르다는 거예요. 이래서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근데 그리스도 안의 겸손한 마음은 그 다른 점을 넘어 먼저 공통점을 찾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다른 점들을 녹이고 다 흘려 보내는 예수님 위주의 생각과 삶,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풀리는 겸손한 마음의 기적이라는 것이죠. 이런 겸손한 마음에 임하는 축복이 바로 하늘 기쁨 충만입니다. 또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남의 일만 돌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성경적인 가치의 적용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의 기쁨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겸손한 마음은 내 일을 돌보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 것을 내팽겨치는 게 아니라 내 것도 돌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봄으로써 내 삶에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삶의 비결이라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를 따라가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가를 함께 마음에 좀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드는 삶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해법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겁니다. 내가 항상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주님 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비결도 내가 무엇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이죠. 그래서 일보다 사역보다 해야 할 것보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을 소망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하나 되고 겸손한 마음이 누려지는 기적이 경험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나를 증명하고 내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삶이 멈추는 기적이 우리 가운데 경험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있음으로 이 세 가지 기적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이틀 동안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방언의 정의, 방언의 유익함과 방언의 위험함과 함정에 대해서 말씀의 기초를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고 방언 은사도 매우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충만했는데 동시에 문제가 충만했고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충만하면 영적으로 성숙해야 될 거 같은데 은사가 충만했는데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문제가 많았던 교회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방언의 함정과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실천적인 조언을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오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잘 사용하기 위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그 첫 번째는 바로 방언의 은사가 예언보다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늘 영적 우선 순위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방언을 하지 말고 예언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방언은 되게 중요한 은사이고 사모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데 문제는 자꾸 방언이 절대 가치같이, 그것이 마치 영적인 절대 기준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위에 자꾸 특별한 경험이나 이 방언의 은사가 올라가는 게 문제가 되고 영적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방언의 은사, 성경적 은사의 기준은 항상 말씀 위에 통제를 받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원하는데 예언하기를 더 힘쓰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방언의 기초는 항상 예언, 말씀이라는 겁니다.
맡겨 주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방언의 은사라든지 특별한 그런 신비한 은사가 위로 올라가려는 것 이게 항상 위험하기 때문에 방언은 예언보다는 올라가서도 더 좋아해서도 안된다는 겁니다. 예언을 최우선으로 사모해야 되고 예언이 항상 절대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방언은 예언의 통제를 받아야 되고 말씀의 절대 가치와 기준 밑에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예언을 더 사모하고 구하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이 말은 방언이 아무리 좋아도 예언을 넘어서면 안 되고 방언이 아무리 좋아도 예언보다 더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권면을 좀 더 크게 얘기하면 항상 체험은 말씀을 넘어서면 망한다. 우리의 체험과 은사는 말씀 안에 통제를 받아야만 그 우선순위와 질서가 잡힌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권면입니다. 방언이 말씀보다 예언보다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늘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성경적으로 건강한 방언 사용의 기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되 말씀보다 더 사모하지 않고 말씀보다 더 절대 기준이 되지 않는 그 말씀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리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방언의 은사가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도구가 되게 하라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대로 연결되는 것이 바로 성경적 은사 사용이라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유익과 덕을 세울 수 있는데 까딱 잘못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교회에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는 부작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에서 제일 중요한 원리는 성령의 은사를 내 유익과 덕을 위해 사용하면 망한다는 것이죠. 은사를 나를 위해 사용하고 나를 높이려고 그러고 내 덕을 세우려고 그러다가 자빠지고 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늘 자기의 덕과 유익을 세우는데 사용되기 쉽다는 것을 인지하고 늘 성령으로부터 받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최우선이 될 수 있도록 늘 내가 겸손하게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언이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는 나를 위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공동체와 주변의 지체를 위해 주신 선물임을 잊지 않는 겁니다. 주신 분의 뜻에 맞게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고 내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 방언 기도를 통해 나만 신비 체험한다는 것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교회를 위해 더 많이 중보하며 더 교회가 영적으로 든든할 수 있도록 사용되어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그 방언의 은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방언을 성경적으로 잘 사용하는 길입니다. 세 번째는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내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뒷부분에 보면 알아듣기 쉬운 말 대신 방언으로만 말하면 결국 허공에 말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방언의 은사에 빠지고 방언이 절대 가치가 되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교제와 소통이 다 끊겨 버리는 부작용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하고 예언의 말씀으로 분명한 소통을 해야 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해야 되며 복음을 알아듣게 해야 되며 복음을 통해 회개의 열매와 새생명 얻는 역사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언에만 빠지면 그 중요한 사명으로 부름 받은 자임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방언의 은사에 빠지면 영적 전투를 준비하는 그 도구로서 쓰임 받는 것을 망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제 소리를 내도록 주신 것들이 있는데 그걸 통하여 영적 전투를 준비하며 깨어 살아가야 하는데, 성도로서 우리의 영적 사명이 있으며 영적 전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이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자기의 덕을 세우며 그 방언의 은사를 사용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바로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장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주신 분인 성령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공허한 소음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되 동시에 함정과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늘 성경적 바른 사용에 주목하며,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에 조율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 이것을 성경적으로 잘 사용하며 주신 목적대로 사용할 때, 교회에 덕이 되며 주변 사람들은 세워지며 내 지체들이 영적 유익을 얻으며 나는 하 나님과 가까워지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의 통제를 받으며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놀라운 일이 우리 가운데 경험될 줄 믿습니다. 실천적으로 주시는 사도 바울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며 건강한 영성과 건강한 말씀 가운데 통제받으며 우리가 은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내 주변 사람들은 세워지며 나에게는 영적으로 유익이 되며 교회에는 덕이 세워지며 주신 분의 뜻에 따라 나아가는 귀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현재형으로 풀어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방언 은사의 성경적 기초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고 영적으로 뜨거운 교회였는데 동시에 문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은사는 부어지는데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회였고 갈등과 분열과 어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느냐? 그게 고린도 교회의 도전이었고 많은 이 시대의 지상 교회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은사로 말미암아 영적인 혼란과 어려움과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방언 은사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방언에 대한 두 가지 극단에 대해 배웠습니다. 방언에 대한 폐기론자들, 방언에 대한 만능론자들, 이 두 가지 극단을 다 피해야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방언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성경에 등장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사도행전적 방언,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서 역사하신 방언이 있고 동시에 고린도전서적인 방언, 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방언에는 이 두 가지의 종류가 있고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것만이 방언의 전부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방언의 영적 유익에 대해서도 배웠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방언은 기도를 할 때 깊은 기도와 오랜 기도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영적으로 굉장히 유익한 은사이며 도구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방언의 은사가 주신 목적대로 잘 선용되지 못하면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개인도 교회가 어려움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잘못 사용하게 되면 빠지는 부작용이 있고 도전과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잘못 사용하면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는 네 가지의 부작용과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과 문제 네 가지를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네 가지의 부작용이 무엇인가 하면 @방언이 예언보다 위로 가는 부작용. @방언이 은사임을 망각하는 부작용. @방언이 교만과 타인의 멸시 도구가 되는 부작용. @방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부작용입니다. 이 네 가지로 말미암아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부장육이 생겨서 큰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죠.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첫 번째 부작용이 뭡니까? 방언이 예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가 그 어떤 것보다 너무 중요해져서 방언 외에는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신앙의 절대 가치인 예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맡긴 말씀을 전하는 게 예언인데 이 말씀보다 내 영적 체험인 은사가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죠. 이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었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웨슬리 목사님은 끊임없이 성경 아래 이성과 경험과 전통이 통제 받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내 체험이, 때로는 내 이성이 말씀 위로 올라가려 하는 겁니다. 내 이성이 말씀 위로 올라가면 내 이성에 받아들이고 수용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착각하게 되는 게 위험한 겁니다. 내 체험과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과 체험이 말씀 위로 올라가면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가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영적이라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본인들끼리 방언을 가지고 얘기하며 예언은 무시하고 살아가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더라는 겁니다. 많은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체험과 경험이 말씀 위로 올라갈 때예요. 방언의 은사가 예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가 예언보다 위로 올라가게 되면 영적이라는 것을 판별할 때 말씀이 아닌 체험과 은사를 가지고 판별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저 사람은 영적이다 아니다…라는 것을 단순히 방언 하나로 그냥 결정해 버리는 부작용을 낳는 겁니다. 친밀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귀하지만 방언의 은사가 귀하지만 그 방언의 은사가 예언 위로 올라가면 망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언제나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위로 올라가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방언이 은사임을 망각하는 부작용입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신 것이기에 그 목적대로 쓰임 받아야만 삽니다. 성령의 은사는 주신 분의 뜻과 계획대로 사용되어야지 나를 위해 사용하면 망합니다. 나를 위해 사용하면 망하는데도 불구하고 방언의 은사는 특별히 나를 위한 유익으로 왜곡되고 변질되기 쉬운 겁니다. 방언이 마치 훈장과 같이 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어… 내가 이만큼 영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기 너무 쉽다는 겁니다. 방언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방언이 은사라는 것을 망각하는 게 매우 심각한 부작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시작은 좋았는데 결국 은사와 함께 자빠지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겁니다. 이런 일이 고린도 교회에 계속 발생했고 지금도 많은 교회에 계속이 은사주의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방언이 자기 교만과 타인의 멸시에 도구가 되는 부작용입니다. 방언 받은 사람들이 예배 중에 방언 기도를 크게 하면 자기는 기도가 잘 될지 모르겠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렇게 방언 기도한다는 것이 자랑이 자꾸 되어 가는 겁니다. 말로 안 해도 그게 자랑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 버립니다. 저 사람은 방언을 받았나 받지 않았나 그걸 가지고 A급 B급 C급을 나누듯 사람을 자꾸 나누는 것이죠. 방언 못하면 기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고 방언 못 하면 기도를 제대로 못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 여깁니다. 방언 못 받으면 영의 사람이 아니라 육의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 이게 위험한 거라는 거예요. 방언은 절대 구원의 도구도,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도 쓸 수 없는데 여기에 매몰되면 이렇게 부작용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인 방언을 가지고 타인을 멸시하고 자기를 교만으로 세우는 도구로 변질되는 것을 율법화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를 구하는 게 다 율법이 되는 겁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자기는 기도도 한 번도 안 빠지고 금식 기도하고 십일조 다 드리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예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몰아 세우셨습니다. 이유는 바로 그들의 율법 지킴이 자기 교만과 타인 멸시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의식하며 드리는 나의 거룩한 영적 습관이 아닌, 자기 의를 강화하고 교만해지며 타인들을 멸시하는 율법이 되어버린 겁니다. 방언의 은사가 정확하게 그런 율법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자기 교만과 타인 멸시의 도구로 너무 쉽게 방언이 변질되어 버리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의미에 있어서 방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셨는데 아이러니하게 성령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겁니다. 나만 대단해 보이는 거죠. 나만 특별하게 보이는 겁니다. 심지어 그 방언을 주신 분인 성령을 구하지도 않고 예수님 앞에 굴복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리고 뭐만 남는가 하면 나는 방언하는 특별한 사람…나는 방언하는 대단한 사람…. 이것만 남는 거예요. 내가 그만큼 특별하고 내가 그만큼 영적으로 깊고 내가 그만큼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 방언이 이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니까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은 겁니다. 덕이 된다는 것은 내가 그걸 통하여 나도 기쁘고 주변 사람들도 기뻐야 되는 것이고 나에게도 복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를 말하면 말할수록 주변 사람들은 다 힘들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다 갈라지고 무너지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구하고 신령한 것은 구하는데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음에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 본질에 근거하지 않고 은사만을 구하고 신령한 것을 구하니까 결정적으로 교회 덕이 안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시험에 들고 교회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방언의 은사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부작용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방언 은사의 부작용입니다. 잘못 사용하면 성경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하면 나타나는 이 네 가지 부작용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말씀은 이 네 가지의 부작용에 빠지지 않기 위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가 분열하고 갈등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게 되는 것,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직면했던 문제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영적인 은사이며 하늘의 선물이며 신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네 가지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않고 경계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이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훈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주신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나를 대단하게 높이고 타인을 멸시하며 타인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는 부작용을 가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나타나는 이 네 가지의 부작용을 마음에 새기고 그러지 않도록 잘 사용하는 것이 방언의 성경적 사용 방법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성경적인 방언 은사를 잘 사용하여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사랑을 근거로 말씀을 붙들고 성경적으로 잘 조율되어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가 무너지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고요.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따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찾을 정도로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성경적 기초를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놀라운 은사가 충만했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도 충만한 이 양립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영적 은사가 풀어지는 것도 분명했는데 동시에 그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있는 게 바로 이 방언 은사에 대한 문제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혼란했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갈등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오늘과 내일 새벽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사인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가지기 원합니다.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세 가지의 큰 그림을 잡으면서 말씀을 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큰 세가지의 그림은 먼저 방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고요. 두 번째는 방언 은사의 영적인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방언 은사의 도전과 문제는 무엇인가…입니다. 오늘 말씀은 첫 두가지 질문을, 내일 말씀은 마지막 질문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번째,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이란 "Speaking in Tongue" 이라고도 하고 "Glossolalia" 라고도 하는데 많은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종교체험 현상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 여러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많이 발생하고 보여지는 종교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방언이라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현상과 경험을 넘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증언하는 은사로서 주신 방언은 무엇이고 그 방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도하시게 하시는 귀한 은사와 통로 중에 하나입니다. 적어도 성경에는 하나의 방언이 아닌 두 종류의 방언이 등장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두 종류의 방언은 바로 사도행전적 방언이고 또 하나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고린도 전서적 방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서의 방언이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알아들 수 없는 소위 말하는 천상의 기도라고 말하는 방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방언만 진짜다 이러면 안 되고 성경이 증언하는 방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합니다. 먼저 이 사도행전적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 가운데 임한 놀라운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방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을 기도하며 주님께 간구했을 때 오순절날 때가 차매 위로부터 성령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임해 바로 각 사람에게 주신 방언은 16개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외국어를 배워보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외국어로 말하게 되는 그런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죠. 외국을 한 번도 가 보지 않고 외국어를 배워보지도 않은 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는데 외국어로 기도하며 말하더라는 겁니다. 이런 방언의 은사가 바로 사도행전적 방언이라는 것이죠. 그 성령 충만으로 받게 되는 방언은 그럼 어떤 방언이겠습니까? 바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귀한 방언이죠. 그래서 선교적 목적을 따라 강력하게 임하셔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은사를 주셔서 성령 충만한 방언을 하게 하신 겁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적 방언만 있는 게 아니라 고린도전서적인 방언이 있는데 그 방언이 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입니다. 방언 기도를 하는데 본인도 모를 때도 있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 못하는 방언입니다. 요즘에 많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방언을 받았다. 방언 기도를 한다 그러면 대부분이 두 번째 고린도전서적 방언 기도를 얘기하는 경우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의 은사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언의 은사에 대해 교회 역사를 보면 늘 두 가지의 극단이 존재했었습니다. 첫 번째 극단은 방언이 다 끝났다고 여기는 방언 폐기론자들입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는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계시의 종결성이라 그러는데 성경 말씀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 후에는 방언은 필요 없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임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모두 완전하게 주시고 나서는 방언은 필요 없는 것이 됐다고 여기는 방언 폐기론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대표적 근거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듯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이런 말씀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사실 이 말씀을 가지고 방언의 은사가 모두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지나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가 모두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 방언 폐기론자들의 주장이 저는 피해야 할 극단이라고 여깁니다. 정반대의 극단도 존재하는데 바로 방언 만능론자들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특별히 영적 신앙 생활의 모든 게 방언으로 통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방언의 은사로 나누려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방언을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은 거라고 규정하고, 방언을 안 받으면 엉터리 크리스천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외적 증거를 방언으로 여기며 그래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의 증거로서 방언을 들이대는 방언 만능론자들입니다. 방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모든 것을 방언으로부터 결정되며, 특별히 방언 하나 가지고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을 나누는 기준을 삼아버리는 것, 이것 또한 굉장히 위험하다는 겁니다. 방언 만능론으로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 다 문제 있고 둘 다 왜곡되고 변질된 피해야 할 극단입니다. 그 두 가지의 극단을 피하면서 말씀의 기준에 맞는 방언의 은사를 잘 구하며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번째,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가 주시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방언 은사의 유익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는데 두 가지로 오늘 말씀은 기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방언 은사의 유익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체험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한다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구나…이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체험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 없이, 사람들이 보던 말던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게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게 방언의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방언에 지극히 비판적이어서 방언 기도하면 뭔 소린지 본인도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뭐 그런 샬라샬라 하는 기도를 계속 하느냐? 그럼 정반대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게 뭘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이죠. 중요한 건 뭐예요? 하나님이 지금 그것을 알아들으시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니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해도 그건 상관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방언 기도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믿음의 한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명히 믿으며 하나님이 들으시면 된다는 것을 붙들고 나아가는 겁니다. 또 하나 방언의 유익은 깊은 기도와 오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앙 생활에서 기도가 얄팍할 때 늘 우리는 식기도 중심으로 짧은 기도를 합니다. 식사 중심으로 간결한 기도를 하게 되는데 방언의 은사를 받아 기도를 하게 되면 식사 기도를 넘어서 일상에서 시간을 정해두고 충분히 기도하게 되고 깊게 기도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분들은 때로는 기도하다 보면 한 두시간이 그냥 간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많은 겁니다.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들, 기도를 깊게 하는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통해 그 은혜를 풍성히 받게 되는 겁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깊게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구하는 기도가 내 삶에 젖어 들게 하는데 방언의 은사가 큰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방언의 은사는 나의 유익과 덕을 위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기에 보이지 않는 영적 은사를 구하고 사모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분명히 믿음기에, 사랑을 추구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우상 숭배 일을 피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나가고 신전에 나가서 제사도 드리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양다리 신앙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금송아지 신앙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양다리 신앙과 금송아지 신앙이 왜 예수님만을 믿는 신앙과 배척되는 것인지를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그들은 그냥 우상 숭배하는 신전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가 오는 걸지 모르지만 그 배후에는 더 깊은 문제가 숨어 있는 겁니다.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우상의 재물을 먹고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참여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제 배웠지만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와 소통하는 것이자 심지어 한 몸이 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렇기에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고 그 제사 중에 제물을 함께 현장에서 먹는 것은 바로 우상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상과 교제하고 소통하면서 참여하게 되면, 결국 그 우상과 하나되는데 내 마음을 여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 우상의 신전에 나아와 그 예배와 제사를 참여하는 것은 결국 내가 그 우상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은 귀신과 우상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분명히 경고합니다. 우상 숭배의 일을 피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귀신과 악한 영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상에 숭배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 신전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드려야 할 마음을 귀신과 악한 영에게 마음을 다 빼앗기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제사를 드리고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냐는 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그냥 신전에 가서 제사에 앉아 있는 것일지 모르나 그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영적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우상의 신전에 들락 날락 하고, 우상의 제단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가 악한 영과 귀신에게 교제하고 소통하도록 내 마음을 내어 주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구약 성경부터 신약까지 끊임없이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수님만을 섬기라 강조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님이 아닌 귀신과 악한 영과 교재하고 소통하는 이런 우상숭배에 빠질 수 없고 빠져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우상 신전에 나아가진 않지만 눈에 보이는 여러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는 세상의 흐름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 성도임에도 이 세상의 물질과 돈이 이미 신이 되어 버렸고, 마음을 물질과 돈과 힘에 다 빼앗겨 굴복하고 엎드리며 그걸 내 인생의 절대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큰 도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상을 겸하여 붙들고, 예수님과 우상을 붙들면서 사는 삶이 바로 우상 숭배의 일에 참여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치명적 영적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가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점쟁이를 찾아가며 마음이 불안할 때는 자기 미래를 점지한다고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헌금하고 있는 이런 모습들이 결국 귀신과 교제하고 소통하도록 나를 내어주는 일이자, 자신을 망하게 하는 첩경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우상의 신전에 출입하며, 그 제단에서 제물을 먹고 참여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겁니다.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는 첩경임을 잊지 말고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상대주의 신앙에는 갈등이 없고 핍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종교가 동일하고 서로 잘 지내고 서로 화합하자 평화롭게 지내자 여기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고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생명이라고 고백하며 선포할 때 여기서 갈등과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편적으로 품어야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내 이웃들과 잘 지내며 함께 나아가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상대주의가 아니고 절대주의이며 예수님의 이름은 여러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닌 유일한 신이며 유일한 구원자이며 유일한 그리스도이며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데 우리의 신앙에 방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분명히 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전에 가서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귀신과 악한 영과 교제하고 소통하도록 나를 드리는 일이며 그 제사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그 우상과 하나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분명한 복음에 내가 분명히 서 있어 이런 우상숭배의 일에 빠지지 않도록 분명한 선긋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대신 귀신과 교제하고 소통하려는 모든 가능성을 다 잘라내는 결단,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성도들은 겸하여 섬기려는 모든 것들을 다 잘라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귀신과 교제하고 소통하는데 내 마음을 드리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붙들며, 예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일에만 참여하는 말씀의 기준이 분명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유통된 것을 먹는 것과 우상 숭배를 하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우상에게 받쳐졌던 고기가 시장에 유통된 것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자유 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자유롭게 먹어라…그것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우상 숭배를 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시장에 유통된 것을 먹는 것과 여전히 내가 신전에 나아가 우상 숭배를 하며 그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신전에 가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아예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 교회에 와서는 주일날 예수님께 예배드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신전에 가서 우상도 붙들고 우상에게 절하며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를 나오는데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러는데 교회도 나오고 신전에도 가서 우상 숭배도 하는 이런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붙들고 우상도 붙드는 문제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만 있었던 영적 문제가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반복되었던 영적 문제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금송아지 신앙이 대표적인 우상 숭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우상숭배 패턴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저버린 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만을 숭배한 게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 신앙은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섬긴 거예요.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모세가 산에 올라가 안 내려오니까 애굽에서 익숙하게 보아 왔던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 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만들어 놓은 게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나서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너희를 위한 하나님이라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금송아지로 변질된 하나님을 놓고서 그것을 신앙생활로 변질 시켜 버린 것, 그게 그들이 버리지 못한 우상숭배의 일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우상숭배라는 도전과 경고는 동일하게 무겁고도 심각합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하면 하면 안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 숭배하는 일은 겸하여 섬기는 일로 드러납니다. 이 시대에도 성도들의 동일한 도전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만 믿는 게 아닌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도 믿고 세상도 믿고 예수님도 붙들고 우상도 붙들고 이것을 갖다가 지금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금송아지 신앙으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기복 신앙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붙들고 우상도 붙드는 이 영적 문제는 구약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있던 영적 문제였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있었던 영적 문제였으며,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도 있는 영적 문제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항하여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자는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단순히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성만찬 참여하는 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 믿는 신앙은 주일 한번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 참여함이라는 말의 원어 의미는 코이노니아입니다. 교제와 소통과 사귐으로 모두 포함하는 중요한 단어가 코이노니아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찢어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심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떡이 하나이고 몸이 하나이듯이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지체임을 경험하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결되어 그분에게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된 것,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묶여 그분과 교제하고 소통하며 사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성도가 된 본질적인 존재감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리는 성도가 동시에 우상에게 가서 그 제사에 참여하는 일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대해서는 자유할지라도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철저히 멀리하며 우상숭배를 피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은 일인지를,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겁니다. 성도는 우상숭배를 피하고 멀리해야 되며 예수님도 섬기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만 섬기는 인생으로 나아가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 믿고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과 우상을, 하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붙들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금송아지 신앙과 같이 기독교 신앙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금송아지로 변질시키고, 이게 우리 하나님이라 말하는 이 우상 숭배의 일도 피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주님이시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만이 그리스도 되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자로 우리는 명 받았고 부름 받았기에 우상과 겸하여 섬길 수 없고 겸하며 붙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피하라는 간절한 사도 바울의 외침이 우리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으로 담겨 새겨지기 원합니다. 양다리 걸치는 신앙과 금송아지 신앙으로 변질되는 우상 숭배의 일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도전이며 영적 문제임을 직시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고백하며 그 예수님과 참여하며 교제하고 소통하는 일에 내 삶에 전심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받아 마음에 심기울 때 해석과 적용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해석과 적용이 주신 말씀 그대로 담지 않고, 잘못된 해석이나 왜곡된 해석을 한다거나 전혀 말씀과 동떨어진 해석을 해서 내 마음에 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절을 딱 떼 가지고 그 말씀을 하나를 깊이 곱씹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런 해석에 위험하고 또 조심해야 되는 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본래 의미를 벗어나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기 쉽습니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맥락 안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늘 겸손한 마음으로 받으며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맥락과 전체적 그림 가운데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겸손한 태도가 우리에게 참 필요합니다. 왜곡과 잘못된 적용이 많은 대표적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 주시지 않는다…. 내게 갑자기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큰 고난과 큰 재난이 다가올 때 우리에게 딱 떠오르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내 인생에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이 다 허락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은 나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시는 것이야…그러니 모든 시험은 너희가 감당할 수 있다…이렇게 해석 적용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특별히 주변에 어려움과 고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권면한다고 이 말씀을 쓱 꺼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 주시지 않아.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그랬으니까 믿음으로 인내로 견뎌...그래서 당한 시험 속에 신음할 때마다, 모든 것을 자기 의지 부족, 믿음의 부족으로 여기도록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씀이 그렇게 해석되고 적용되는 게 맞는 것인가…우리는 이 말씀을 맥락과 앞뒤 말씀과 연결을 통해 큰 그림으로 진지하게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감당할 만한 시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말씀 속에서의 그 시험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 시험이라는 단어는 “trial or suffering”이 아니라 “temptation”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게 해석과 적용에 핵심입니다. 이 시험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공통적으로 예외 없이 당하는 재난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내 삶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그 고난이나 어려움을 얘기하는 게 아라는 겁니다. 이 부분을 영어로 읽으면 정확하게 이 말씀이 분별됩니다. God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시험을 당한다는 말이 바로 be tempted…미혹 당하다의 의미이고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감당할 만한 미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할 만한 미혹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험이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 당하신 그 미혹을 얘기하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이 시험은 고린도전서 10장에 등장하는 세 가지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를 사도 바울은 증언하는데 그 세가지 미혹이 바로 오늘 말씀의 시험입니다. 왜 그들이 광야에서 그렇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늘 인도함을 받고 만나와 매출하기로 늘 공급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그렇게 망하는 백성이 되었는가? 그 세 가지가 우상숭배와 음행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험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오늘 말씀의 시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할 것이 없나니….” 이 말씀을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뚝 떼서 그냥 내 인생에 당하는 재난과 어려움에 적용하는 것은 굉장히 왜곡되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갑자기 어려움과 고난, 큰 병이 찾아왔을 때 그 가운데 어쩔 줄 몰라 할 때,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잘못된 적용으로 큰 시험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맥락 가운데 큰 그림을 이해하며 해석하고 성경적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미혹 가운데 뭐를 내신다는 겁니까?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겁니다. 사단에게 미혹 당하실 때 예수님에게 그 피할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셨죠. 사단이 돌을 떡으로 다 만든다고 예수님을 미혹했을 때 그 미혹을 이기시고 피할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으로 사는 존재라는 말씀으로 그 미혹을 이기신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능히 우상숭배를 피하고, 음행을 피하며, 원망과 불평의 삶을 피할 길을 반드시 내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임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본질을 우리가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선 줄 아는 자는 넘어지고 자빠질까 조심하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면서 우상숭배에 자빠지고 음행에 자빠지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빠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자빠지고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대표적으로 교만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감사가 사라진 당연한 삶을 살아가는 삶. 그리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 다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이 정도면 됐고 내 믿음 강하고 나는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교만한 착각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그런 잘못된 착각에 빠지게 되는가 하면 내 신앙의 기준을 내 주변에 있는 옆에 사람들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 잘 나오지 않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새벽기도 나오는 내가 그래도 좀 괜찮은 거 같고 주변에 여러 사람들을 보면 내가 그들보다 난 거 같고 그래서 스스로 믿음이 강하고 믿음이 크고 나는 정말 좋은 신앙인이라 착각하는 겁니다. 그런 착각이 영적 교만으로 이끌고, 교만해지만 감사할 것들이 당연해지면서 감사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선 줄로 착각하다가 우상 숭배에 자빠지고 음행에 자빠지며, 불평과 원망으로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 줄 아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망하는 것을 증언한 이유는 말세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주신 본보기임을 잊지 마십시오. 선 줄로 착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조심해야 삽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피하고 음행을 피하고 원망과 불평의 인생을 피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인생을 피하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예수님 꼭 붙들지 않으면 큰일 나는 존재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살아가는 게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붙들지 않으면 금방 자빠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히 십자가 앞에서 늘 넘어질까 조심하며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 그게 신앙 생활 잘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이 주시는 그 은혜를 하나도 가감없이 내가 받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 줄로 착각하지 말고 늘 넘어질까 조심하며 은혜만을 붙들고 주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모세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은혜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통과하며 그들의 옛 자아와 신분이 완전히 죽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세례와 중생의 역사를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신령한 음료와 음식을 먹으며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놀라운 은혜와 역사와 신비 체험을 일상의 단위로 경험했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대다수는 기뻐할 수 없는 자였으며 결국 광야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어떻게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음식을 매일 먹으면서 일상으로 신비 체험을 하면서 일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했는데 그럴 수 있느냐? 그렇게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신령하지 않게 살 수 있느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 번째가 바로 우상숭배였고 두 번째가 음행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세 번째 이유가 등장하는데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는 커녕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죠. 당연한 삶에는 감사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 감사 위에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먹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인 메추라기 역사를 그들이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모두 독에 물려 죽어가게 만드셨습니다. 그 불뱀 사건의 본질은 바로 광야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셨던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넘어 하나님을 시험한 것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처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산다고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쫙 갈렸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절대 다수 중에 많은 사람들은 저거를 본다고 어떻게 살 수 있어? 그러면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지 않고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 주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놋뱀 사건은 죄라는 불뱀에 물린 우리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붙들어야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임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죄라는 불뱀에 물려 지금 멸망과 심판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에게 남는 건 멸망, 즉 영원 형벌밖에 없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우리의 인생이자 죄라는 불뱀에 물려 모든 인류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대로 보내셔서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 산다는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주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바라보지도 붙들지도 않고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가듯 죄와 함께 죽어가는 겁니다. 오직 누구만 살게 됐습니까? 장대에 달린 그 놋뱀을 바라보고 붙든 사람들…. 누구만 살게 됩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붙든 사람들… 저 예수 이름만이 나를 살릴 능력의 이름임을 분명히 믿으며 그분을 바라보고 붙든 사람만 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두신 게 없습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을 바라보고 붙드는 자만이 사는 것입니다. 그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만이 사는 것이고 그 예수 이름을 의지한 사람만이 사는 겁니다. 그 이름을 믿기를 거절하며, 바라보지 않고 붙들지 않은 사람은 죄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시험하다 망했고 원망하다 망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데, 매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데도 그들은 감사가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교만해지면 은혜로 받은 게 다 당연해지는 겁니다. 오히려 어디를 동경하고 그리워합니까? 어디에 마음을 둡니까? 애굽이라는 삶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마음에 두는 겁니다. 그 하늘의 놀라운 은혜가 당연해진 삶에 감사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자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온 겁니다. 결국 원망과 시험으로 그들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이 본보기가 되고 또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이게 결론 말씀입니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불신앙과 원망과 불평과 시험으로 망한 이야기를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수해 주신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뭐를 위해서요? 본보기를 위해서라는 겁니다. 지금 너희도 까딱 잘못하면 광야에서 다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본보기로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관통하는 경고와 본보기라는 겁니다.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엄중 경고하시는 결론 말씀입니다. 이런 망한 백성과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말자고 사랑으로 안타깝게 권면하는 겁니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라 사라진 모습이, 은혜에서 오히려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는 모습이, 바로 누구의 현주소라는 겁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현주소라는 것을 엄중 경고하며 알기에 너희는 이러지 말라고 다시 한번 권면하는 겁니다. 내 인생을 조금만 돌아보면 내가 받은 모든 것들 가운데 은혜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 소유라고 여긴 많은 것들이 다 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에요. Own이 아니라 Loan인 것이지요. 이것을 알면 알수록,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당연한 게 하나도 없고 다 감사할 제목들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를 향한 경고와 본보기로 생각하며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우리는 다 날마다 넘어지는 사람들이고 까딱하면 이렇게 감사대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는 백성이며 잠깐만 정신 못 차리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붙들고 세상에 젖어 살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향한 채찍으로 찌르시는 말씀으로 담으면 그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경고가 고린도 교회를 향한 본보기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우리를 향한 동일한 본보기가 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본보기로 삼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며 우리를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광야에서 거룩한 신실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도 경험하지 못하는 놀라운 역사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목도했고 홍해 바다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옛 자아와 신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자아로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완전한 자유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것 만이 끝이 아니죠. 그렇게 광야로 나와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하늘에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물을 먹이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일상단위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평생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하는 하늘의 놀라운 역사를 그들은 매일매일 일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엔 등장하지 않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게 누구냐면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놀랍고도 분명한 구원 체험도 있습니다. 일상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신령하고 거룩하고 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은 뭐라고 증언합니까? 안타깝게도 그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셔서 광야에서 멸망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광야에서 일상으로 신령한 음료와 음식을 먹고 늘 하늘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만나로 먹이시는 은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는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는데도 그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고 절대 다수는 광야에서 멸망했다는 것이죠.
안타깝고도 놀랍게도 그들은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 기적과 이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광야에서 감사하는 대신에 그들의 일상은 원망과 불평이었다는 겁니다.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음식을 먹었던 그들은 전혀 대다수는 신령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일상에서 기적이 펼쳐지는 그 삶의 현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들어가는 대신에 환경과 상황에 압도당하여 모두 죽었구나 통곡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치는 이런 완악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원망과 불평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게 믿을 수 없지만 분명했던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고 그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처한 현 주소이며 그게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주소일 수 있다는 것을 엄중 경고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구원의 감격과 거듭남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으며 신령한 음료와 음식인 하늘양식으로 말씀과 기도로 공급하시며 주님이 주시는 분명한 약속으로 우리를 채우시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 말씀과 약속을 믿지 않고 감사 대신 불평과 원망으로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아니냐며 묵직하게 우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일상으로 경험했음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되었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이유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우상숭배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해서 결국 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 신뢰,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두는 대신에 광야에서 끊임없이 우상을 찾고 하나님의 소위 말하는 대체물, substitution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과 같이 걸러가는 놀라운 경험 가운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가운데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매일 먹이시고 입히시는데도 그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찾았다는 것이고, 하나님 뜻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우상숭배를 했던 대표적 사건이 바로 시내산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던 때였습니다. 시내산에 십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가 예상보다 좀 늦게 내려오지 않으니까 백성들이 한 일은 초조하고 두려워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서 숭배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 금송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라 그랬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망할 수밖에 없는 백성에 대한 첫 번째 이유였다는 겁니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음행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백성이 앉아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증언하는데 이 말은 단순히 그냥 즐겁게 여흥을 한다는 게 아니라 그 우상숭배가 특별히 뭐와 연결된다는 겁니까? 바로 예배를 빙자한 행음과 성적 방종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세우고 금송아지 신앙으로 변질된 이유는 그들이 거룩함을 내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이 방탕과 음행하는 자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게 된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황은 어떠냐 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다수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가 될 위험성이 있고 망할 백성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거예요. 우상숭배와 또 하나는 음행 때문에… 특별히 우상숭배와 음행의 문제를 우리가 배운 신전에서 나온 고기 먹는 문제와 연결을 해보면 신전에서 나와 유통하는 고기를 먹는 것이 우리의 거룩함과 깨끗함을 그 음식 자체가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가 정함과 부정함을 가르는 본질이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통된 고기를 먹는 것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신전에 가서 같이 뛰놀고 같이 타락하고 세상 사람 같이 똑같이 살아가는 문제는 완전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가운데 그렇게 세상에서 하는 행음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신전에 가서 우상숭배와 뛰노는 이런 행음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일들 하고도 부끄러워하지도 그것을 회개하지도 않는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음행과 우상숭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광야에서 하루에 23000명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상태임을 엄중 경고하시는 겁니다. 이 우상숭배와 음행의 문제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였고, 고린도 교회 문제였으며, 지금 우리들의 문제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영적 체험이 많았던 백성이 없었고 놀라운 것을 일상으로 봤던 백성이 없었습니다. 그 놀라운 역사를 온몸으로 40년을 매일같이 경험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기뻐하지 않는 백성이고 하나님께 멸망을 당한 절대 다수가 되었다는 것을 경고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들은 신령한 음료와 음식을 먹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고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아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금송아지를 만들며 방탕과 음행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 내 영적 체험과 기적이 나의 현재의 신앙생활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오늘도 주 앞에 겸손히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붙들지 않으며 망하는 백성입니다. 놀라운 체험과 놀라운 신비한 일들이 주님을 붙드는 도구만 되게 하십시오. 주를 붙들지 않으면 망하는 백성을 잊지 않으며 좋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좋은 하나님과 오직 좋으신 예수님만 있으심을 믿으며 우리는 그분을 붙들어야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하며 하늘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지 말고 현재화 하여 마음에 새기십시오. 광야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꼭 붙들고 주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구약 성경 자체에도 은혜를 받고 그 내용 자체가 큰 영적 유익을 주지만 성경을 좀 통전적으로 큰 그림으로 바라볼 때는 구약이라는 말씀은 옛 언약이거든요. 즉 새로운 언약이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을 바라보는 것이 참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여러 말씀들은 그림자 같은 말씀들이고 그 말씀들이 신약에 의해 완성되고 성취되는 이런 큰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며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을 잡는데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영적 의미를 재해석하는 말씀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세례의 경험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게 바로 홍해를 지나가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홍해 바다를 걷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새로운 출발과 새로 태어나는 새창조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바로 군대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멸망이라는 놀라운 눈을 뜨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가 바로 “바다로 들어갔다”는 사건입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홍해라는 바다를 지나감으로써 그들은 두 가지의 놀라운 영적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는 사건, 즉 옛 과거에 모든 신분과 모든 것들이 바다에서 다 죽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는 바다, 뒤에서는 바로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는 진퇴양란입니다. 앞으로 가도 죽고 뒤로 가도 죽는 겁니다. 사람들은 지금 겁에 질려 있고 아우성치며 패닉이 된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가 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잠잠히 입 다물고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시는 걸 보라는 겁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 군대가 달려오고 있는데 바다를 향해 나아가라는 겁니다. 홍해 바다로 들어가면 죽는 건데 그 죽음을 향하여 바다를 향하여 진군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붙들고 바다로 나아갔다는 것은 그들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분명히 바다는 죽는 곳인데 그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는 겁니다. 그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 뭐가 죽는 겁니까? 나의 옛 과거가 죽고 나의 옛 신분이 죽고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상태였던 그들의 모든 과거가 홍해에서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자 그들의 과거 신분과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게 바로 홍해로 들어가는 죽음이라는 거예요. 두번째는 홍해 바다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그 죽음의 바다를 향해 갈 때 하나님은 그 죽음의 바다를 마른 땅과 같이 가르고 지나가게 하신 겁니다. 그들이 홍해를 죽음의 바다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가 살았다…이 사건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해야 될 거듭남과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 거듭났다는 의미가 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것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다로 들어가 죽음으로 갔는데 그 죽음의 길이 사는 길이었다는 겁니다. 그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서 죽음을 통과하면 죽어야 될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감으로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옛 자아가 죽었고 그들의 옛 신분이 죽은 겁니다. 그들에게 바뀐 것은 내적 신분이 바뀐 것이며,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듯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바뀌어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걸 거듭남이라 그러고 이것을 외적인 표징으로는 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이게 바로 그리스도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구약 사건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세례 받은 사건으로 영적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했든 그들의 모든 신분이 바뀌고 모든 과거가 단절되고 그들의 옛 자아가 죽어 다시 태어난 사건이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그들의 옛 신분인 애굽의 노예됨이 홍해를 들어감으로 죽었고, 새로운 신분인 자유인이 되어 홍해를 빠져나온 겁니다. 세례란 바로 나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물 안에 들어가는 것은 바다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 바다는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는 사건은 신약에서 세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알지 못하지만 그 죽을 것 같은 홍해를 건너가는 것만이 구원과 생명이 있는 겁니다. 반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바다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홍해 바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겐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과 구원의 역사인데, 바로와 그 모든 군대는 그 홍해 바다가 죽는 심판과 멸망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받는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는 것입니다. 세번째, 홍해를 건넌 후의 삶입니다. 새로운 신분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경험했던 인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떨어지고 주시는 음식만을 먹고 살도록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구원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 같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의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가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 모든 소스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겁니다. 우리는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의 말씀을 먹고 기도를 먹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령한 떡을 먹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잠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하는 힘과 그 모든 운동력의 원천이 어디 있다는 겁니까?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생명의 떡, 바로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먹으며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받는 인생, 그리스도로부터 연결되어 그분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인생으로 광야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우리를 돌아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바다를 건너듯, 내 옛 자아와 신분이, 내 과거가 모두 홍해 바다에서 죽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세례의 고백이며 거듭난 놀라운 역사입니다. 나의 옛 애굽과 세상과 완전한 단절, 나의 옛 신분이 완전히 죽는 것이 홍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며, 홍해를 건너 나온다는 것은 완전한 새신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났음을 현재형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붙들어야 될 세례의 의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나의 과거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세례를 통해, 구약의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통해 분명한 고백의 언어로 내 삶에 담기 원합니다. 또한 구원받은 이후에 성도의 삶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신령한 양식, 내 영혼을 채우는 말씀과 내 영혼의 호흡을 하게 하는 기도가 있는 겁니다. 그분을 통하여 주시는 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음식을 구하고 내 마음에 채우며 살아가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놀라운 말씀을 통하여 내 삶의 구원이 무엇이고 내가 광야와 같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현재형으로 경험되며 고백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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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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