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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주신 분의 뜻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과시를 위한 그릇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 때문에 순기능보다는 역기능과 많은 문제들이 파생되어 왔습니다. 특별히 공예배 현장에서 무분별한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예배에 심각한 무질서와 사람들 사이에 계층을 나누고 갈등과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는 여러 부작용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먼저 알려 주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은사들이 있으며 그 은사를 주신 데에는 목적이 하나라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주신 게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지체들과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주신 도구이기에 성령의 은사를 나를 위해 내 유익을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이드라인으로 주었습니다. 또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즉 사랑 없이 사용되는 은사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후 14장에서 구체적으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심도 있게 성경적 기초과 성경적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방언의 은사가 가지고 있는 한계, 특별히 공예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상태로 남용되는 방언의 한계와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좋습니다. 문제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에게 만족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에 열매가 맺어지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내 인격이 변화하는 열매나 회개의 열매, 새 생명으로 구원받게 하는 열매가 맺어지지 못하는 겁니다. 방언 기도를 아무리 오래 해도 그것이 내 인격을 변화시키고 특별히 회개의 자리로 이끄는 데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방언 기도를 공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공적 예배에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배 중에 대표 기도의 순서를 맡았는데, 대표 기도를 하러 올라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방언 기도를 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자기가 혼자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 게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근데 고린도 교회에서의 문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려고 공예배의 대표기도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방언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심지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는데 중간에서 막 방언 기도로 설교를 막고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랑 없이 사용되는 방언의 한계와 부작용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특별하고 대단해 보이기에 나에게는 흡족할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을 깎아먹는 일이 되며,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하러 올라가서 방언 기도만 하고 있으면 그 기도가 뭔지 모르는 대다수의 회중들이 그 대표 기도를 들으면서 어떻게 아멘하겠냐는 겁니다. 본인은 대표 기도하면서 은혜받고 영적으로 만족하고 충만할지 모르지만 그 대표 기도를 듣고 있는 대다수의 성도들은 교인들을 대표해서 하는 대표 기도인데 대다수의 회중은 소외시키고 방관자가 되게 하며,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기도를 잘했어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아들 수 없으면 대표기도로서 그 방언 기도는 성도들을 대표할 수 없고 성도들을 견고의 믿음으로 세울 수 없으며 성도들에게 아멘할 수 없는 일이 되버린다는 질책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덕은 안 되고 유익은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방언의 은사를 잘 사용했어도 사랑이 없으면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 좋은 것도 결국 어떻게 된다고요? 잘못 사용하게 되는 일이 되며 그 은사로 인하여 오히려 교회가 시험에 들고 교회가 갈등과 분열이 생기며 교회가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 교회가 처한 현실이었고 지금도 많은 교회들의 소위 말하는 은사를 좀 경험하고 체험한다는 것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은사가 덕을 세우지 못하고, 은사가 갈등과 분열로 가게 만드는 겁니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것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덕세움을 방해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한계가 분명한데 자기에게 덕이 되고 유익할지 모르나 열매를 맺고 그걸 통하여 인격을 성숙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데까지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 유익과 내 덕은 세우는데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은 구하지는 않은 겁니다. 이런 한계와 부작용이 교회에 어려움을 가져옴을 직시하며, 사도 바울은 방언 사용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제시합니다.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공적으로 기도하고 예배할 때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 현장에 있을 때 이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성경적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은혜롭게 잘 사용하는 방언의 은사는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배려하는 자세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겁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지체들, 예배에 참석한 자들을 위해서 내가 공예배 가운데 대표 기도를 하게 될 때는 영으로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건 뭡니까? 함께 예배 드릴 때에는, 함께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는, 내 유익이 아닌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내 방언을 자랑하듯이 기도하지 말고 내 방언 찬양을 자랑하듯이 하지 말고 어떻게 한다고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찬송하라는 겁니다. 특별히 공예배 중에는 방언으로만 기도하는 건 안 된다는 겁니다. 방언은 통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주변 사람에게 이해되도록 흘러가야 된다는 거예요. 은사의 성경적 사용을 위한 사도 바울의 결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분명히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더 뭐 너희들보다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골방에 있을 때 분명히 많이 방언의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공적인 상황에서 특별히 예배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더 중요한 게 방언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겁니다. 깨달은 다섯 마디의 예언이 방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에 깨달은 예언이 더 좋고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뭐를 위해요?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성령의 역사는 나 혼자 구원받고 나 혼자 은혜받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확산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게 하는데 있기 때문에 깨달은 다섯 마디 예언의 말씀이 방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깨달은 말씀,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킨 그 말씀, 그 말씀이 전해져야 예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은혜를 받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데 그저 방언과 방언의 은사만 머물려 있으면 나에게 갇힌다는 거 내 유익을 위한 영성에 머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인생이 변화할지 모르나 내 주변에 아무에게도 이 생명의 역사, 회개의 역사로 열매를 맺는데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방언이 나에게는 유익이고 개인적으로 덕을 세우는데 아무리 좋은 은사라 할지라도 어떤 목적으로 쓰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역효과가 날 수 있고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 은사 받기를 사모하는데 그 은사 주신 분의 목적대로 합당하게 쓰임 받지 못하면 그 방언의 은사조차도 교회 공동체의 유익에는 도움 안 되고 다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데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성령의 은사라도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은사로서 존재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방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은사는 나를 위해 주신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는 것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사모할 것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깨달은 말씀임을 잊지 말고, 방언의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를 분명히 붙들기를 원합니다. 내게 주신 그 하늘의 말씀이 회개의 열매와 구원으로 이르는 새생명의 열매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은혜로 받은 성령의 은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잘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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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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