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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깨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를 쓰시기도 하셨고 수수께끼를 하시기도 하셨고 에스겔을 통하여 몸으로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또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경고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데 그게 바로 슬픈 노래인 애가를 지어 부르라는 것이죠. 탄식하고 애곡 하는 것을 통하여 감정이 정화가 되고 슬픈 마음을 내려놓는데 잘 사용되는 게 바로 슬픈 노래인 애가입니다. 노래라는 자체가 가지는 힘도 굉장히 큰데, 슬픈 일이 있을 때 그 현실을 담아 부르는 노래인 애가의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애가를 지으라고 명하신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을 향하여 애가를 부르라는 것을 통해 이 심판과 멸망의 본질적으로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에 대한 부분을 잊지 말라는 주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 애가를 부르면서 우리 민족에게 찾아온 참담한 심판과 멸망의 끔찍한 일 앞에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잿더미 위에서 정신을 차려서 너희가 바라볼 분이 누구이고 소망을 가져야 될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시기 위해 에스겔에게 슬픈 노래인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애가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지나고 있는 안타까운 아픔의 역사를 구구절절 알려 주는 슬픈 노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유다 지파와 다윗 왕조를 비유하는 암사자가 새끼 사자들을 잘 길러 그 중에 하나를 왕으로 세웠는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세워진 왕인 젊은 사자가 먹이 물어뜯기를 배우면 먹이를 물어야 하고 그 먹이를 가져와 백성들을 배부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먹어야 할 먹이는 안 먹고 누구를 먹는 겁니까? 사람들을 삼키고 백성들을 삼키는 것이죠. 이게 그 당시에 포악한 왕을 상징하는 슬픈 노래입니다. 이렇게 포악하게 백성들을 삼키다가 애굽으로 잡혀 끌려간 왕은 요시아 왕의 아들이었던 여호와스 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백성을 섬기고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세워 주신 자리인데 타락한 왕들은 왕의 자리에서 백성들을 먹이로 물어뜯고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앉아 있는 것이죠. 여호아하스 왕은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백성들을 먹이로 여기며 삼키는 이런 포악한 일을 고작 3개월밖에 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악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을 수 없는 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를 꿰어 애굽 땅으로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여전히 눈에 보이는 왕에게 소망을 두고 애굽으로 끌려간 그 왕이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포악한 그 왕이 돌아와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이 붙들고 있던 그 소망을 끊게 하십니다. 그 소망이 끊어지고 나서 또 다른 새끼 하나를 키워서 젊은 사자로 키워서 또 다른 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3개월만에 쫓겨난 왕과 달리 그렇게 세워진 왕은 잘했는가? 좀 더 나은 왕일 줄 알았는데 그 나물에 그 밥, 별반 다르지 않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와 똑같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서 백성들을 먹이로 잡아 먹는 왕인 겁니다. 섬기고 먹이를 먹는게 아니라 사람들을 백성들을 먹이로 먹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읍을 부수고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왕이었습니다. 이 왕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시드기아 왕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여호야김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둘 중에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은 왕이 바벨론에 또 끌려가게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왕이라는 자리에서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왕이 되었고, 백성들에게 바른 길을 인도하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겁니다. 백성을 섬기고 보호하고 지켜야 되는 왕의 책무를 망각하고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도 모자라 백성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 그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면 산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여 내가 죽고자 하느냐 경고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 죽고자 정신 못 차리고 잘못된 결정으로 불구덩이로 뛰어든 사람들이 바로 이 왕들이었다는 것이죠. 왕이 본분을 잊어버리고 왕이 먹이 대신 백성들을 물어뜯고 피를 빨아먹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너무 싫으신 겁니다. 왕이 백성들을 불구덩이로 이끄는 그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너무 참담한 마음이신 겁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강대국에 기대서 문제를 타개 하려 하는 그런 잘못된 선택으로 자기만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온 백성들을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을 보며 너무 싫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지도자들을 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들을 향하여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그 혹독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고, 바벨론 군대를 상징하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타게 되는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멀어져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왕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엄중하게 심판하신 결과입니다. 고대 시대의 왕들이나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백성들을 위한다 하지만 결국 사람을 삼키고 백성들을 물어뜯고 백성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 결국 끝나게 되는 게 세상 역사라는 것을 엄중히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잃어버리면 결국 우리는 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세상 왕과 지도자에게 실망하며 그 아픈 현실 가운데 또 헛된 소망 붙들고 다음 사람이 생기면 좀 낫지 않을까? 다음 사람이 세워지면 낫지 않을까? 이런 착각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왕들에게 소망을 두거나 기대하고 바라보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워진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른쪽의 사람도 왼쪽의 사람도 결국은 백성들을 먹임으로 뜯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백성들을 빨아먹는 자들이고 백성들의 삶을 결국 황폐하게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왕이 돌아오는 게 백성들에게 소망이 아니라 참 왕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게 백성들에게 소망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 왕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죠. 이 슬픔의 노래인 애가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노래로 바꿀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세상을 기대지 말고 왕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대며 살아가며 오직 주님이 오셔야만 해결된다는 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 슬픈 노래 가운데 살아가는 이 슬픈 세상 가운데, 눈에 보이는 왕이나 지도자가 아닌, 오직 주께만 소망을 두고 주의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복음적 신앙을 산다는 것은 말씀이 정의하는 구원과 심판에 대해서 주님이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그 길이 공평하고 절대 진리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복음적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죽으면 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 평가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때 어제 말씀을 통해 배운 것처럼 의인됨이나 악인됨이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개인적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개별적으로 평가하시는 것이지 부모의 의로움이나 부모의 악함이 그 자녀에게 전가되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제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한 본질은 그 구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있어서 판단 기준은 과거가 아니라 오직 지금 현재라는 겁니다.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평가 기준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고 예수님과 어떤 관계냐…이게 평가 기준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죠.
과거에는 죄에 빠져 사는 악인이었지만 지금 현재 그가 정의와 공의 가운데 있으며 죄에서 돌이켰으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거라 약속해 주신 것을 믿는 것이 복음입니다. 돌이켜 회개하기만 하면 나의 과거를 하나도 기억하지 아니하겠다는 주의 약속을 믿는 게 복음입니다. 아무리 내가 방탕하고 어둠 가운데 헤매었을 지라도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그의 의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내가 의인이라 여기며 살고 있었는데 그 의인됨에서 돌이키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옛날에 이렇게 살았고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고 내가 이렇게 헌신 많이 했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있었던 거 하나님이 하나도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한 공로와 헌신과 업적들, 이런 공의로운 일들은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하나도 기억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 즉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시간 예수 보혈 의지하고 예수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 복음 가운데 붙들려 있느냐? 이걸로 평가받는 것이지 내 과거로 평가 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길에 대해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 이런 방식은 공평하지 않다며 불평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길이 불공평하고 틀렸으며 우리 길이 공평하고 옳다는 주장까지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복음과 생명의 길을 공평하지 않다고 fair 하지 않다고 여기는 겁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한 길은 인과 응보적 숙명론에 근거한 계단식 구원입니다. 포인트를 적립하듯 과거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공로와 공덕을 차곡 차곡 쌓아서 그걸 가지고 평가받는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성경의 평가 방식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뭐가 중요하다는 겁니까? 지금 이 시간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 공평하지 않은 길을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품꾼의 비유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죠. 어떤 사람은 9시부터 와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11시부터 와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1시나 3시 부터 와서 일하는데 그들에게 받은 임금이 동일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 이건 공평하지 않다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공평하지 않고요. 복음은 우리 머리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내 머리로 계산해서 내가 받을 만하고 내가 이해할 만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죽지 않고 멸망하지 않고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길에서 떠나고 돌이켜 주의 길로 나아오면 산다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이대로 살면 망한다는 것을 알고 그 나의 길에서 돌이켜 주께 두 손 들고 나오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이게 복음입니다. 내가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면 반드시 산다는 것을 믿고 주께 두 손 들고 나아가는 것, 이거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현재 살아가는 대로 살면 망하고 큰일 난다는 것을 알고 지금 나의 현재의 삶에서 돌이켜 주께 나아가고 주님께 돌아오면 나는 산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복된 소식은 나의 부끄러운 과거, 나의 그 어두운 모든 것들을 예수 이름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약속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 과거를 놓지 않고 잊지 못하고 붙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잊으신다 그러는데 나는 잊어버리지 않고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과거의 일을 회개하고 돌이키면 주님은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다 흘려 보내시고 잊으신다는 이 약속 가운데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고 나의 길과 주님의 길은 다른 겁니다. 우리들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거지 주의 길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언제나 공평한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께서 외치시는 결론과 같은 복음의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돌이키면 살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삽니다.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면 삽니다. 주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죽어 마땅한 자가 죽는 것 조차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한 영혼도 낙심하지 않고 한 영혼도 이탈되지 않고 모두 구원받는 게 주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 회개하도록 구원에 이루도록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한 영혼도 이탈되지 않고 복음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의 뜻에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인 하나가 돌아와 새 생명 얻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며 죽어가는 영혼이 건짐 받는 것을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면 삽니다. 어느 한 영혼도 죽기 원하지 않으시는 주의 마음을 담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는 주의 경고의 말씀에 깨어나 회개하며 주 은혜 가운데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독수리와 포도나무 수수께끼를 통하여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직면한 영적 현실을 깨닫고 지금 망하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면 산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정도면 깨달을 만하고 알아들을 만한데 해도 해도 너무한 게 그들은 또 말씀을 외면하고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18장 말씀을 통해서는 속담을 들고 나오십니다. 수수께끼로 해도 안 들으니까 이번에는 속담을 들고 나오시는 거죠.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백성이 듣고 깨달아야 살기 때문에 오늘도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속담은 이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우리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아버지가 신 포도주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라는 속담입니다. 신 음식은 아버지가 먹었는데 누구의 이빨이 시린 겁니까? 아들의 이가 시린 겁니다. 결이 비슷한 우리의 속담이 있죠.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그 의미는 똑 같은 겁니다. 포로로 잡혀온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부모 세대의 죄와 잘못 때문에 우리가 억울하게 끌려왔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겁니다. 자신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 아니라 여기기에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억울하게 조상 잘못 만나 가지고 이 바벨론에 끌려왔다는 생각을 담아 이 속담을 즐겨 인용하고 자주 사용했던 겁니다. 이런 걸 뭐라 그러냐 하면 피해자 코스프레 (Playing the victim)…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안 되는 걸 모두 남탓, 부모 탓, 나라 탓, 교회 탓하고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책임을 전가하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을 가해자로 낙인 찍어 버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려운 점을 과장하고 늘 죄 없는 자신은 억울한 것을 포장합니다.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억울하게 조상 잘못 만나서, 부모 세대가 잘 못해서 바벨론으로 끌려온 피해자의식, 이게 포로로 잡혀온 남유다 백성들의 피해자 코스프레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시면서 너희는 이 속담 절대 이제 쓰면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담을 다시는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포로로 잡혀온 것이 자신들의 불순종과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모든 것을 핑계와 탓 논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순종에 직면하지 않기에 회개로 나아오는 대신 나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다는 핑계 논리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부모 세대나 자녀 세대나 똑같이 그들은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이렇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기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기회를 다 날려버리고 앉아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의인이면 아들도 의인, 아버지가 악인이면 아들도 악인….이런 인과응보적 숙명론을 좋아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안 되는 건 부모 탓이고, 조상 탓이고, 남편 탓이고, 아내 탓이고, 교회 탓이고 나라 탓이라고 이러고 앉아 있는 거죠. 이런 속담 다시는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중히 경고하시며 각각의 영혼이 각자의 책임임을 강조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자의 의로움이나 악한 자의 악함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겁니다. 이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의 상황을 오늘 말씀에서 가정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5-9절은 의로운 사람에 대해, 10-13절까지는 그 의로운 사람의 악한 아들에 대해서, 14-18절은 악한 아버지의 의로운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았는가 하면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붙들고 산 의인은 반드시 산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선 우리가 반대하는 사람 아무도 없이 다 아멘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은 겁니다. 아버지의 공의와 정의는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죄악 중에 빠져 악인의 삶으로 망나니가 되어버린 겁니다. 의로운 아버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악한 길을 행하고 가증한 행위를 서슴치 않는 아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이 속담과 같이 의로운 아버지 탓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아버지 탓이 아니라 누구 책임이라는 겁니까? 오롯이 아들의 책임이라는 거예요. 그 인생을 살아간 자의 책임이라는 것이죠. 아버지의 의로움이 전가되지 못한 아버지 책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살아간 아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이 내가 이렇게 죄악으로 살고 내가 죄인으로 살아가는 게 아버지 탓이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아버지의 의로움이 아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의로움은 아들의 전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14- 18절까지는 정반대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완전 죄인이고 망나니인데,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담지 않고 의롭게 살아간 아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악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아버지를 담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붙들고 산 의로운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악인이니까 아들이 자동적으로 악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리 죄를 많이 졌고 아무리 악하게 망나니로 살았어도 아버지의 죄악과 악함이 이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이고 아들은 아들의 인생이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리 죄를 많이 졌어도 이 아들이 하나님 앞에 정의와 공의를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이 아들은 의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속담을 즐기며 뭐라 그러는 겁니까?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항의 하는 겁니다. 여전히 그들은 처한 상황을 부모 세대 탓으로 부모 세대 핑계 대는 걸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 불순종과 죄에 직면하는 대신 탓하고 핑계 대면서 나는 잘못없다고 나는 억울하다고 외치는 구멍을 만들기 좋아하는 죄인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늘 핑계 대고 남의 탓하고 나는 억울하고 나는 잘못 없다며 피해가 코스프레 벌이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 한 행동들과 같이, 죄를 인정하고 두 손 들고 살려 달라고 주 앞에 돌아오는 대신에 손가락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찌르시며 깨우시는 경고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핑계 대지 말고, 그런 탓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게 끊임없이 불순종하며 끊임없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특징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남의 탓 하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는 것입니다. 아버지 붙들고, 아들 붙들고 묻어 가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붙들고 살아갔는가? 내가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있으며 그 보혈 아래 있는가?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내가 내 삶을 하나님 앞에 평가받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지 내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백성인지 그것이 악인과 의인을 가르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처한 상황을 부모나 가까운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교회 핑계대지 말고 내가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원합니다. 탓하고 핑계대는 인생을 내려 놓고, 내 죄와 불순종에 직면하여 회개로 나아가 돌이키며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독수리와 포도나무 수수께끼의 결론 말씀입니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영적 현실과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맺은 맹세를 업신여기고 주와 맺은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마지막 왕 시드기아의 어리석은 선택을 통하여 방아쇠를 당기듯 폭발했으며 남유다와 함께 온 백성이 함께 심판으로 모두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쪽인데 내 뜻대로 다른 쪽을 따라 기웃거리며 애굽이라는 독수리를 추종하며 언약을 배반한 남 유다의 끝은 결국 심판과 멸망이라는 것이 바로 그 수수께끼의 끝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남 유다의 불순종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의 끝이 어떤가를, 왕을 세워달라고 했던 그들의 요구의 끝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신 것을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 되심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죠. 우리도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서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 위해 싸워주고 든든히 지켜주는 왕이 있어야 되겠다는 불순종의 요구로 말미암아 초대 왕인 사울이 세워졌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분명히 경고했던 것이 너희 왕이 너희에게 복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자 화가 될 거라는 것이었고, 그 경고대로 이스라엘과 남유다 역사의 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왕이 구원과 회복을 줄 거라는 믿음이 다 산산 조각 나고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왕 이신데 눈에 보이는 왕이 마치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을 줄 거라고 여겼던 어리석은 백성들의 끝은 결국 모든 게 망하고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야기의 결론은 그렇게 남유다 백성들이 심판당하고 멸망한다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한 그 잿더미 남유다에서, 눈에 보이는 왕에 대한 소망이 다 무너져 모든 것이 끝난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는 그림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백향목 꼭대기라는 것은 다윗 왕조를 상징합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요구해서 세워진 유다 지파의 다윗 왕조의 모든 것들이 다 백향목 꼭대기이죠. 결국 백향목 꼭대기는 다 무너지고 타고 불타고 사라지게 되는데 그때 높은 가지 중에 연한 가지를 꺾어 다가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순산에 하나님이 심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백향목 가지 돋은 연한가지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메시아를 알려 주시는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을 보게 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연한 순과 같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정말 작은 어린 아기로 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연한 가지로 이 땅에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연한 가지를 꺾어 우뚝 솟은 산에 심었다는 것은 무엇은 의미하겠습니까? 이스라엘에는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없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우뚝 솟은 높은 산인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해석합니다. 그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십자가에 심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아기로 오신 겁니다. 연한 가지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높고 우뚝 솟은 산인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고 동시에 모든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을 이루시기 위해 이 모든 걸 구약에서 이미 이렇게 약속으로 주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요한 복음에서는 놋뱀이 장대에 높이 들리듯 예수님이 높이 들리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lifted up” 높이 들리시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높아지시면 그때 눈에 보이는 왕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향한 구원과 회복을 주실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결과,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연한 가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높고 우뚝 솟은 산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거라는 겁니다. 이 아름다운 백향목이 우리에게 참 왕되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 되심을 분명히 보여 주시면서 그 놀라운 하나님 구원 계획을 십자가에서 이루실 것임을 그림자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며 그 가지 그늘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각종 새가 바로 이스라엘을 넘어선 온 열방과 백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예수 은혜 아래, 그 은혜의 그늘 아래 모든 열방과 민족이 구원과 회복을 누리게 되는 기적입니다. 그 결과 복음의 이방인이었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이 새벽에 주의 은혜를 구하게 된 축복 아니겠습니까? 참 왕이시자 메시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셨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심으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열방과 민족이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이름만 붙들고 있으면 그리스도에 의의 옷을 입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그 아래 깃들며 그 가지 그늘에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결론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온 인류의 진정한 구원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결론 말씀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눈에 보이는 왕들이 그렇게 구원과 회복을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왕을 쫓아가고 그렇게 세상을 쫓아갔는데 결국 다 무너지고 사라지고 망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도 국가의 역사도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왕과 눈에 보이는 힘과 눈에 보이는 권력과 플랜을 가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더라도 결국 끝은 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무너진 현장에서 다시 새로운 것을 이루시는 것이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놀라운 그 구원 역사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재편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결론으로 주시는 겁니다.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이 선언이 십자가 복음의 결론 그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때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며 말씀을 중시 여기며 사는 겁니다. 높을 때는 낮춰 주시고 낮칠 때는 높여 주시고 푸를 때는 말리시기도 하고 마를 때는 푸르게도 하시는 이 모든 게 주의 손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내 인생의 생사 화복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생사 화복도, 온 세계와 나라들의 생사 화복도 다 주의 손 안에 있으며 주께서 수레 바퀴를 돌리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모든 소망은 예수님이 오셔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예수님이 나에게 오심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짐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왕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과 회복이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는게 바로 우리가 믿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걸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결론으로 꼭 마음에 새기며 우리에게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이 구원과 회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으며 나의 인생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늘 신뢰하고 경험하며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독수리와 포도나무 수수께끼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며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영적 현실을 직시하고 너희가 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어 알기 원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냥 머리에 잃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지식이라면 깨닫는 것은 그 머리에 있는 지식을 내 몸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내 삶의 상황과 현실 속에서 그 말씀이 기억나고 말씀의 원리를 붙들고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데 말씀을 아는 것을 넘어 말씀을 깨닫도록 이끄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수수께끼를 친히 해석해 주시면서 두 가지를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망각하고 깨닫지 못해서 너희들이 망하고 심판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 백성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언약을 지켜야 사는 백성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큰 독수리인 바벨론에 순종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구조로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그 다음 왕인 시드기아와 바벨론 왕이 언약을 세우고 맹세하게 하는 소위 말하는 굴복하는 모습을 통하여 그들을 의도적으로 낮추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치 하나님을 없는 분처럼 경시하고 말씀과 뜻을 거스르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을 낮추어서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언약을 지켜야만 능히 서는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 하면 망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언약을 지켜야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큰 독수리인 바벨론을 통하여 온몸으로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백성 됐다는 것은 뭐냐면 혼자 살겠다고 스스로 발버둥 친다고 잘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서거나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물론 내가 열심히 살고 최선을 살 최선을 다해 살고 발버둥 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이고 본질적으로 내 인생의 잘됨은 어디에 있냐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잘되는 것임을 깨닫는 게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낮추시는 사건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는 사건들을 직면할 때마다 너는 스스로 서지 못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는 백성인 주의 약속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낮추심을 통해 그 뜻을 발견하면 영적으로 민감하여 정도를 가게 되는 것이고, 낮추시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면 영적으로 둔감 해져 온몸으로 얻어맞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몸으로 깨달으면 영적으로 민감한 거고 그 깨달음을 망각하고 착각하면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맺은 맹세를 업신 여기고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네 번이나 “맹세를 져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상대적 요인들과 부수적인 요인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진단하시는 그들이 망하고 심판 받은 본질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시드기야 왕이 굴복에 가까운 언약, 바벨론과 함께 언약을 맺을 때 누구 앞에서 누구 이름으로 한 맹세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였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아 왕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그 맹세를 업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배반하고 바벨론 대신에 애굽을 바라보고 내 생각과 내 판단에는 애굽이 날 도와줄 거 같은 착각에 빠진 겁니다. 애굽에 기대는 게 내 계산으로 봤을 때 더 분명해 보이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바벨론 왕을 배신하지 말고 그와 맺은 언약을 중시 여기며 네가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언약을 지켜야 사는 백성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하기 원하셨는데 시드기아 왕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뭐가 더 중요한 겁니까? 내 뜻이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내 계획이 더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판단보다 내 판단이 늘 옳다는 착각에 빠진 겁니다. 가까이에서 눈에 보이는 도움을 받을 거 같은 애굽을 찾아가고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닌 겁니다. 우리가 구습을 쫓아 산다는 것, 옛 습관을 쫓아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 딱 생겼을 때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고 상황과 환경만 크게 보이는 겁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눈 앞이 캄캄해 지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상황과 환경이 어려워지면 먼저 사람들을 바라보고 먼저 사람들을 찾아가고 먼저 사람들의 도움 받을 궁리만 하는, 이게 바로 구습입니다. 어려운 일만 생기면 문제만 생기면 먼저 사람만 바라보고 먼저 사람만 찾아가고 먼저 사람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는 예수 믿고도 버리지 못하는 옛 습관인 것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애굽이 그들을 도와줄 거라고 여겼고 그들을 기대면 살 거 같이 여겼는데 실제로 일이 터지고 문제가 생기니까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내 생각에는, 내 판단에는 어려움만 있으면 바로 애굽이 와서 도와줄 거 같았는데 애굽이 실제로 일이 터지니까 하나도 도와주지도 않고, 도와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이 저 사람과 함께 가까이 지내면 내가 도움 받을 것 같고 어려울 때 와서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거 같은데 우리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일이 터지면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도와줄 거 같은 사람이 도와주지 않고 배반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람 바라보지 말고 사람 찾아가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그렇게 말씀을 주셔도 인간은 깨닫지 못하고, 일만 생기면 여전히 사람들 찾아 해메이며 언약을 배반하고 오늘도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상황과 함께 하나님이 같이 보여야 하고 약속이 같이 보여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산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야 되는데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안 중에 없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맹세를 업신 여기고 언약을 배반해서 당하게 되는 결과를 직면하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함께 있다가 죽는 것, 이게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의 운명이었고 결국 왕의 운명은 온 나라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남유다와 예루살렘과 같은 동일한 문제가 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깨닫기 원하시는 두 가지의 진리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언약을 지켜야 사는 백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 혼자 살려고 발버둥치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붙들고 그와 맺은 언약을 지켜 사는 백성임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동시에 나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그 하나님과의 맹세를 업신 여기고 언약을 배반한데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맹세를 중시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철석같이 믿고 살아가는 언약의 백성 되십시오. 그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원히 살게 되며 그 영원한 약속이 나를 영원한 곳으로 이끄는 복된 그 놀라운 열쇠가 될 줄 믿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며 깨닫는 지혜를 갖기를 소망하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주의 말씀 가운데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참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경고도 하시고 협박도 하시고 수많은 예화도 들으시고 그래도 듣지 않는 그 백성들을 향하여 포기하지 않고 오늘 17장 말씀을 통해 또 다시 말씀을 주시는데 그 방식은 바로 수수께끼와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마리의 큰 독수리와 포도나무를 사용한이 수수께끼와 비유를 통해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실제 지금 상황이 어떤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두 큰 독수리와 포도나무가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고 그걸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기를 원하는 주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 수수께끼를 통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라는 의미와 동시에 내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조율되지 않으면 이 비밀은 알려줘도 알 수 없다는 이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수수께끼를 통해 정확하게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첫번째 큰 독수리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큰 독수리입니다. 그 큰 독수리는 두 가지 일을 하게 되는데 첫 번째로 레바논에 와서 백향목의 높은 가지를 꺾어 장사하는 땅으로 가져가서 상인의 성읍에 심게 됩니다. 그걸 통하여 연한 가지는 다른 곳에 옮겨 심을 때 더 크게 잘 자를 수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죠. 두 번째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수양버들을 가지로 심는 것처럼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곳에 가서 심었습니다. 이 큰 독수리가 하는 일을 통해 주시는 게 뭐냐 하면 백향목의 높은 가지를 제거하고 백향목이 아닌 포도나무를 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독수리를 향하고 뿌리는 독수리 안에 있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십니다. 이 말은 포도나무가 큰 독수리 아래에 복종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산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표되는 이 포도나무가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이 큰 수리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지금 당장은 그들이 어려운 일을 지나가지만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이렇게 잘 세우게 될 거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이야기 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어렵지만 결국 바벨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나아갈 때 그들을 통하여 큰 축복이 있게 될 거라는 것을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큰 독수리인 바벨론과 부딪히지 말고 그 뜻에 따라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그 가운데 있음을 신뢰하고 웅크리라…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큰 독수리와 함께 두 번째 독수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소리가 하나 있는데 누구를 상징하겠습니까? 당연히 애굽을 상징하겠죠. 바벨론의 큰 독수리 아래 남유다가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게 될 거라는 큰 그림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데 두 번째 독수리가 등장하니까 포도나무가 눈이 돌아가 정신을 못 차리게 되는 겁니다. 또 다른 독수리인 애굽을 향하여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물을 받아먹으려고 그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 독수리인 바벨론이 주는 물을 거부하고 두 번째 독수리인 애굽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으려 하는 그 모습을 통해 결국 가지 말아야 될 곳에 눈과 마음을 돌리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계산하는 머리로 봤을 때는 두 번째 독수리인 애굽을 향하여 뿌리를 뻗고 가지를 피는 게 사는 길 같이 보이고, 그게 진짜 애국이고 진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내 생각에 옳음을 강조하고 소위 말하는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엄중히 물으십니다. 큰 독수리에 의해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인 애굽을 통하여 물을 받으려고 뿌리를 뽑고 가지를 펼치고 있으니까 결국 그 첫 번째 큰 독수리인 바벨론이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죠. 이 포도 나무를 번성하도록 두겠냐는 것이죠. 첫 번째 독수리가 아닌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독수리인 애굽을 의지하려 그러는데 과연 포도나무 가만두겠냐는 거예요.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결국 이 포도나무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동풍이 부딪칠 때에 완전히 마르게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동풍이 분다는 건 바벨론으로부터 큰 군대가 불어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애굽의 도움을 받으려고 두 번째 독수리에게 기웃거렸던 포도나무 남유다는 완전히 뿌리뽑혀 말라 죽게 된다는 것이죠.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이냐 바벨론이냐 여기 줄대고 기웃거리기만 하면 안 되는 민족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어 살아가야 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큰 독수리인 바벨론을 통하여 공급받으며 그 그늘 아래 있는 것이라면, 그 뜻이라면 그 뜻에 순종 했어야 되는데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고, 내 눈에 보기에 좋은 곳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바벨론을 배신하고 또 다른 독수인 애굽을 통하여 나아가게 되니까 본인이 망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망하게 되는 겁니다. 독수리와 포도나무 수수께끼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분명한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애국은 필요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랑이 애국주의로 가게 되면 시드기야와 같이 이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나라를 송두리째 심판의 불길로 멸망으로 질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소견대로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하는 게 애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조율 받는 애국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큰 뜻이 언제나 옳음을 분명히 믿으며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수수께끼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독수리가 더 크고 저 독수리가 더 크고 거기에 어디 가서 줄 서야 내가 살까…. 끊임없이 머리 굴리고 골몰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제일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하여 나를 먹이고 나에게 갈 길을 인도하시는가를 분명히 봐야 합니다. 바라기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주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떠난 것은 결국 번성할 수 없으며 메마르고 뽑히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주의 뜻 가운데 말씀과 함께 조율되어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긴 16장 말씀의 결론 말씀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통하며 하나님을 향한 배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그 참담한 모습을 비유로 설명하시며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교만에 빠진 가증한 백성들, 하나님과의 약속을 멸시하며 그 언약을 배반한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는 겁니다. 언약을 깨고 배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어긴 그 죄는 그 행한 대로 심판 받는 게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다 고발하고 죄에 대한 무거운 결과인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마지막은 그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언약을 주시겠다는 회복과 구원의 약속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가만히 있으면 이렇게 심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너희를 내가 다시 한번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어렸을 때 너와 세운 언약이란 바로 시내산 언약입니다. 광야에서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었던 그 시내산의 언약이죠. 광야 한복판에서 모세를 통하여 너희가 나의 말을 순종하고 청종하며 나의 뜻을 따르면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주셨을 때 그 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피투성이가 된 아이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돌봄 받지도 못하고 탯줄을 자르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 피투성이의 상황….그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먼저 가서 돌아보시고 그들을 전적인 은혜로 건져주고 지켜주고 보호해 준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렸을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받은 이유와 원인이 나에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에겐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이유도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피투성이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인생임을 철저히 고백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가만히 있으면 심판과 멸망인 피투성이의 아이 같은데,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자격도 조건도 되지 않는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운 언약입니다. 피투성이라도 살라 말씀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며 우리의 언약이 되신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그 하나님과 어렸을 때 세운 언약을 송두리채 망각하고 멸시하며 다 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직면하고 다 망하게 되는데, 그들이 언약을 깨뜨리고 주님과의 맹세를 다 그냥 산산 조각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시고 세우시는 그 영원한 언약은 누구를 통해 세워지는 겁니까?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 영원한 언약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언약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 옛 언약을 기억하시고 새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 주시겠다는 그 놀라운 구속사의 은혜를 그림자로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새로운 언약은 혈통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믿음을 통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영적인 아브라함 자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죠. 이 새로운 언약, 신약 시대에 정확하게 그리스도를 통하려 이루어 질 일들을 예언하는 겁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소돔과 사마리아가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고 나중에는 소돔과 사마리아를 언니와 동생을 딸로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 말이 뭐냐하면 나중에는 사마리아와 소돔 같은 이방 민족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의 가족으로 접붙임받게 된다는 거예요. 무엇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실 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을 통하여….단순히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의 회복만이 아니라 온 열방과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통하여 영원한 새로운 언약을 통하여 소돔과 사마리아와 같은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영원한 언약이 유대인의 바운더리를 넘어 놀랍게 뻗어 나가고 회복되는 과정을 통하여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서 내가 내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내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그 영원한 언약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 된다는 것을 결론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들을 그렇게 나열하시며 신약에서는 우리의 죄들을 그렇게 처절하게 고발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만큼 조건도 자격도 없는 죄인이라는 것, 내 안에는 소망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시니 위함입니다. 우리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서 죄에 직면해야 그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자격 없는 나에게 베푸시는 그 놀랍고도 무한한 은혜 앞에 내가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알면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게 되기에 놀라고 부끄러 입을 못 여는 겁니다. 내가 철저하게 죄인이었고 그 철저한 죄를 하나님께서 모두 다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아 아는 게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된 자들이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언약으로 건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피투성이 아이와 같은 소망 없는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살려주마 약속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그가 베푸신 용서의 은혜, 우리를 건지신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고, 엎드릴 수 밖에 없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의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끝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원 불변함을 잊지 마시고, 영원한 언약을 세워 건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선명히 십자가에서 보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 16장 말씀은 하나님의 큰 은혜로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망각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은혜를 배신하며 이방 우상들을 쫓는지를 비유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격과 조건이 없는 그들이 정말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민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마치 자기들 안에 자격과 조건을 가 갖춘 우월한 백성인 양, 우성의 DNA가 있는 양 착각하며 살았던 것이죠. 그게 바로 그들의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당연하게 만들며, 자신들의 영적 객관화가 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죄와 가증한 삶이 주변의 이방민족보다 훨씬 더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그들을 경고하고 계신 것이죠. 하나님의 신부였던 주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왜 이렇게 품위와 품격을 지키지 못하고 망가져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탄식하시며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오늘 말씀은 자동차 기어가 바뀌듯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을 넘어 소돔과 사마리아의 회복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심판이 끝이 아니라, 소돔과 사마리아를 포함한 이방 민족들의 회복과 함께 유다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 방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봤을 때는 인간으로 치지도 않는 상종도 하지 않는 타락한 이방인들의 대표라고 여겼습니다. 그니까 지옥의 뗄감되는 대표적인 사람들, 타락의 대표적인 사람들, 그러면 소돔 사람을 누구나 뽑죠. 지금 우리도 도시 중에 가장 타락한 도시에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멸시받던 소돔, 죄악의 대명사로 여겨진 소돔이 회복이 되는 겁니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 아니겠습니까? 사마리아는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사라진 곳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어떤 착각에 빠졌냐면 우리는 우월하고 영적으로 괜찮아서 망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백성들과 북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음란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서 망했다고 착각하고 살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소돔이나 사마리아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봤을 때는 본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주 죄에 빠져 뒹굴고 있는 백성들이며 우리같이 괜찮은 선민과는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 악한 민족 죄악에 빠진 민족의 대표가 바로 소돔과 사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소돔과 사마리아를 회복시키신다는 거예요. 그 소돔과 사마리아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바라보며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이 얼마나 컸는지를 그대로 드러나게 하시면서 부끄러움 당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이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늦게 회복되고 더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걸 통해 소돔과 사마리아가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통하여 예루살렘과 남유다 백성들에게 나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나에게 하나님이 뽑아 주신 이유는 100%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었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간 나의 영적 현주소는 소돔이나 사마리아와 별반 차이가 없구나…라는 것을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사마리아가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며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실존이 무엇인지,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 가증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함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 음란함이란 하나님만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만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면서도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게 가증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청종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것이 가증한 것입니다. 그들의 가증함과 교만함은 하나님 앞에 냄새가 날 정도로 구역질 나는 역겨움입니다.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나 어떤 선행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신실하심과 긍휼에 기초하신 은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됨의 기초임을 정확하게 보여 주십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와 무릎 꿇고 주의 은혜만을 구하는 백성으로 회복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겁니다.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과 남유다 백성들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을 엄중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은 교만하여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주변 민족들을 굉장히 무시했습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교만하여 소돔을 멸시했죠. 소돔은 죄악의 도시라고 아예 제쳐 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소돔과 똑같이 구원받아야 되고 주님이 건지시면 안 되는 그런 처지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능욕과 멸시를 당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한 때 범죄함으로 멸망한 소돔, 한때 범죄함으로 자빠진 사마리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회복의 시간을 주시는 것을 바라보며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죄악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죠. 그들의 교만을 허물어 버리시며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깨닫는 것을 통하여 우리 또한 소돔이고 우리 또한 사마리아고 우리 또한 주님의 은혜 없으면 망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주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겁니다. 즉 소돔과 사마리아의 회복을 통하여 정말 말도 안 되는 백성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회복을 통해 유다와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꺾고 그들의 저지른 죄악을 실제로 직면하게 하시는 주의 공의를 그대로 보여 주시는 겁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의 회복을 바라보며 내 자신을 돌아보기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내가 소돔이고 내가 사마리아인데 착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하고 전혀 상관없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고 교회를 다닌다 그러는데 교인이라 그러는데 예수님하고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냄새가 날 정도로 구역질 나는 역겨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듣지도 따르지도 않고 예수님과 정말 무관하게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데 우리는 스스로 성도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데 부끄럽지 않고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는 것이 가증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는 건 내가 지금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돌아보고 직면하게 하시는 거죠. 내 의와 교만을 내려놓고 내가 무언과 원인과 이유가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이 모든 것들을 허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죠. 내가 빠져 있는 교만과 가증함과 죄악을 직면하게 하셔서 주님의 은혜 아니면 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철저히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내가 바로 소돔이고 내가 바로 사마리아고 내가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내 의와 내 교만함과 내 가증함과 나의 죄악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의 은혜만을 구합니다. 주의 은혜의 건짐으로 하나님 백성 되었음을 분명히 직시하고, 겸손한 태도로 주 앞에 나아가 은혜 가운데 놀랍게 회복되고 변화되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영적 부패함과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꾸짖는 주의 말씀입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우리는 괜찮고 의롭기 때문에 안 망하고 북 이스라엘과 사마리아는 의롭지 않고 타락해서 망했다는 착각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우상을 겸하여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드리고 제사 드린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이 정도면 괜찮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착각을 깨라 말씀하시며 어제 말씀을 통해 너희는 음녀와 같은 자들이라고 경고하셨고, 오늘 말씀에는 부전 자전과 비슷한 의미인 “그 어머니의 그 딸이다”라는 속담을 통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유로도 말씀하시고 수수께끼로도 말씀하시고 이번에는 속담으로 또 말씀하시는 것을 통하여 나는 못 알아들었다…나는 들은 적이 없다는 핑계 없게 하시려고 다시 한번 그들의 자화상을 보게 하시는 것이죠. 너희들이 그 어머니의 그 딸일 정도로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절대 낫지 않다는 것을 선명히 드러내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소돔이나 사마리아와 비슷할 정도로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를 세 가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편과 아내를 싫어하는 어머니같이 너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겁니다.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건데 남편과 아내를 싫어하는 어머니의 딸같이 지금 너희의 삶이 참담하고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음행을 하기 위해서….음행에 정신 팔려서 남편과 자녀를 싫어하는 아내라 표현하는 것을 통해, 예루살렘과 남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일탈을 바라보기 원하시는 거죠. 남편과 아내를 싫어한다는 걸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들의 죄악과 가증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 하면 소돔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거예요. 소돔이란 도시는 죄악과 타락의 대명사로 하나님에게 유황불로 망한 도시입니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은 어떤 착각에 빠져 있냐 하면 우리는 타락한 도시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월하고 의로운 자들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DNA를 가진 우월한 백성이고 의로운 백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뭐라 그러시는 겁니까? 너희 친형이 소돔이고 너의 동생이 사마리아라는 겁니다. 즉, 너희의 죄악은 이 소돔의 죄악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과 별반 차이 없는 소돔의 죄악을 교만함, 음식의 풍족함, 태평함으로 인한 남을 돌보지 않음과 가증한 일을 행함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글 번역이 조금 아쉬운데, 음식의 풍족함이란 “overf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음식에 취해 과도하게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입니다. 또한 태평함이란 “unconcerned” 라고 되어 있는데, 나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이죠. 나 하나 괜찮으면 주변이 어떻게 되고 상관없는 삶이에요. 그래서 결국 그들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주변에 음식이 없어도 혼자 배 터지게 먹으면 상관 없는 삶을 살아가며, 거만하게 성적으로 타락하며 가증한 삶을 살아간 것이 바로 소돔이란 도시가 유황불로 망하게 된 이유였다는 겁니다. 그런 소돔을 망하게 했던 죄악이 지금 어디에 팽배하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팽배해 있다는 겁니다. 너희의 죄악은 이 소돔의 죄악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은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사마리아가 더 의로워 보일 정도로 심각했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죄는 너희들의 죄에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북 이스라엘과 사마리아는 죄가 너무 많고 너무 가증한 일을 많이 해서 망했고 우리 남 유다는 그렇지 않아서 안 망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뭐라고 지적하시는 거예요? 사마리아의 죄가 너희보다 절반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너희 죄가 사마리아 북 이스라엘보다 두 배라는 것이죠. 너희의 가증함과 죄악은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 하면, 사마리아가 더 의로워 보일 정도로 타락했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로운 도시라고 여겨질 정도로 너희가 타락했다는 것이죠. 왜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토록 너희는 가증한 일을 행한 죄인이고 너희는 그 어머니의 그 딸이고 너희는 음녀라고 끊임없이 강조하시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심각한 영적 상태라는 것을 모르면 망하고 그것을 깨달으면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직시하여 무릎 꿇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 망하기 전에 건짐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 엄중한 하나님의 선언은 로마서의 선언인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주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괜찮다고 착각하는 순간, 내가 의롭다고 착각하는 순간, 내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착각하는 순간 너희는 망한다는 말씀이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현실은 아무 소망이 없는 존재이며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는 가증함과 죄악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자라는 것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주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돌아와 산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이 새벽에 나와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유다와 예루살렘과 같이 우리는 늘 망각의 병에 벌려 착각하는 삶에서 깨어나는 겁니다. 계속해서 나에 대해서 소망을 두고 내가 의롭고 내가 괜찮고 내가 이 정도면 잘 살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삶에서 깨어나는 겁니다.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는 비결을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씀을 통해 직시하는 겁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남편과 아내를 싫어하는 아내 같이 심각합니다. 소돔보다 더 악하면 악했지 낫지 않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사마리아가 더 의로워 보일 정도로 심각합니다. 이런 나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통하여 직시하십시오.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엎드리고 그의 사랑만을 꼭 붙들고 살아갑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면 망하는 인생,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말라 죽는 인생임을 철저히 직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꼭 붙들어야 살고 예수 안에 머물러야 산다는 것을 항시도 잊지 않는 겁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주 앞에 겸손히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이틀 동안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정말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모셔야 할 하나님의 백성임을 망각하고 음녀같이 영적 음행과 극심한 죄악상으로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를 유발하게 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의 백성을 향하여 음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남 유다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구별되게 세워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모시며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자들로 세우셨는데, 그들을 향하여 음녀라고 말씀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무너지는 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야 선지자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떤 지를 눈으로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음녀와 같은 삶은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모시지 않는 삶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 한분만을 남편으로 모시기를 거절하고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하고 눈에 보이는 여러 강대국을 향해 추파를 던지며 남편이 되기를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남편으로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도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음녀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죠. 너희가 바로 이 창녀와 같이 하나님 앞에 음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시며 무너지는 마음을 담아 경고하신 것입니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의 본질적 문제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됨을 망각하고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죄,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모시지 않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얼마나 질투와 분노를 유발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사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을 때 남유다와 예루살렘에는 회복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걸 보고 다음은 우리 차례다 생각하고 정신 차리며 회개하여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모시는 이 본질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 유다와 예루살렘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도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가 저들보다 더 나으니까 우리는 구원받았고 저 북 이스라엘은 멸망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도 그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는 주의 이 분노와 질투가 그대로 느껴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고 구별하게 세우셨는데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이 느끼시는 감정이 바로 질투와 분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지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시면 이런 마음을 가지시겠냐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 그들의 음녀와 같은 영적 음행과 타락은 자식을 불에 태워 죽이는 몰렉의 제사를 통해 극에 달합니다. 인신제사를 통하여 그 자녀들을 태워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두번이나 강조하시며 피를 흘리는 여인을 심판한 같이 너를 심판하여 진노의 피와 질투의 피를 내게 돌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투로 말미암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그들의 영적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를 엄중히 심판하시겠다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거룩함을 잃어가는 주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당연한 반응들입니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게 됩니다. 칼과 기근으로 들짐승으로 여러 심판의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다 벌하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엄중히 심판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너에게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즉 그들을 모두 죽임을 그 음행을 그치게 하신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죽고 파괴 되서야 그들의 음행이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죽어야만 그 음행을 멈추는 가능성 없는 자들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받는 겁니다. 즉 너희 행위대로 너의 머리에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내 행위대로 내가 행위대로 머리에 보응을 받는 게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행위대로 보응 했을 때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건져 주셔서 은혜로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그 구원의 선물을 영접함으로 의로운 자로 여기게 하신 게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긍휼과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내 머리에 보응하시는 것 뿐입니다. 그게 심판이고 그게 저주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되면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경고하시고 그렇게 돌아오라고 외치셨는데도 돌아오지 못하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의 끝에 남은 것은 멸망밖에 없고 망하는 것 밖에 없으며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보응을 받는 심판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성도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망하지 않는 비결은 기억할 것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망각하면 죽고 은혜를 기억하면 사는 겁니다. 사람들의 말은 기억하면서 평생 상처라고 붙들고 있는 우리들, 그런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여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에 기웃거리며 또 다른 남편을 찾는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송두리채 저버리는 인생이 되게 되는 것이고 남는 것은 심판 밖에 없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기에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임을 분명히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바라보고 붙드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그 은혜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분별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내 남편으로 모시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는 것, 하나님은 그 지점에서 타협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돌이키면 살고 가만히 있으면 죽으며, 은혜를 망각하면 죽고 기억하면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주 앞에 나아가 돌이켜 주님만을 예배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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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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