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까지 후반부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메세지입니다. 모든 것이 망한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들고 일어나 다시 한번 새 출발하고 새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말씀을 통해 소망을 붙들고 일어가기 위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서 있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에는 구원과 회복, 아니면 심판이라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 날이 구원과 회복의 날인데 하나님 밖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된다는 이 양면성을 선명히 드러내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리에서 있어야 되며 어떤 모습과 태도로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1-7절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향한 메세지로, 섬들과 민족들에 주시는 말씀, 8-16절은 하나님 백성들인 야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1-7절에 등장하는 첫번째 부류인 “섬들과 민족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고대시대에 전쟁은 사람들과의 전쟁만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이,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모두 망하는 것을 바라보며, 주변 섬들과 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망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 섬들과 민족들을 그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그 섬들과 민족들을 다 부르시며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는 겁니다. 재판의 자리란 시시비비를 따지는 법정,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대적하는 백성들 사이에 법정에서 선고하듯 이 시시 비비,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겁니다. 하나님 밖에 있었던 자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던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따지는 공의의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이신데, 하나님과 대적하여 시시비비를 따리는 재판의 자리에 선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의 메시지인 겁니다. 심판이라는 건 하나님이 사람들을 앞에 놓고 재판 자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시시비비를 따지는 겁니다. 누가 옳은지, 누가 그른지를 따지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심판의 자리입니다. 8-16절에 등장하는 두 번째 부류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의 종 이스라엘, 내가 택한 야곱, 나의 벗 아브라함입” 니다. 하나같이 호칭에서 드러나듯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하나님의 친구…이 모든 게 하나님 은혜 아래 있는 백성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시는 것 자체가 앞에 섬들과 민족들을 부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시는 소망의 구원의 회복의 메시지가 등장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놀라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를 도와주리라…모두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들을 주시는 겁니다. 왜 심판 대신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겁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보혈 아래 은혜 안에 붙들린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입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만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로 주님을 대면하게 되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대면할 때 이렇게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있는 존재,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대신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과 친밀감이 있는 존재로 서야만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따지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한 자들, 하나님과 대적한 자들이 장차 직면하게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과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재판정으로 그들을 불러서 네가 정말 공의로운지 내가 정말 공의로운지, 네 생각이 맞는지 아니면 내 생각이 맞는지 하나하나 따져보는 엄중한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홍해가 갈라지듯이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백성과 하나님 밖에 있는 백성, 하나님과 관계성이 있는 백성 하나님과 무관한 백성,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는 백성과 그리스도의 보혈과 무관한 백성,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나온 백성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기 의를 붙들고 나온 백성으로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소망으로 사는 유일한 길 우리가 회복과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택함을 받는 것 외에는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나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모습, 하나님 은혜밖에 구할 게 없는 전적 의존의 모습을 뭐하고 표현합니까?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안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발견할 수 없는, 나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얼마나 먼지와 같은 미물인지를 이렇게 버러지로 고백하는 겁니다. 찬송가 가사 가운데도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보혈을 흘렸네..” 찬양 가사 있지 않습니까? 그 찬양을 부를 때 예전에는 반항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귀한데 무슨 우리가 벌레고 버러지인가…그런데 나이가 들고 익어가면서 버러지 같다는 이 고백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던 그 절망과 똑 같은 고백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미물인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내가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엎드리는 겁니다. 목을 꼿꼿이 들고 내가 이렇게 대단하고 놀라운 일들을 많이 이루었다고 내 공로와 일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자격도 아무런 조건도 없는 자로 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시지 않으면 저는 끝장입니다… 주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망합니다…라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바짝 엎드리는 그 믿음의 태도가 구원과 회복의 은혜 가운데 있는 자들의 반응인 겁니다. 두려워 말라…놀라지 말라…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받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이 작은 모습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벗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을 때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놀라운 소망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담기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0장 말씀은 모든 것이 망해 잿더미 위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을 주시며 하나님 안에서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도록 손을 내미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39장은 망하기 전 하나님의 백성에게 너희 불순종과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망하고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은 결과로 망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끝이 아니고 마침표가 아니라며 위로와 소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사단은 이 하나님의 메세지를 거꾸로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합니다. 우리가 망하기 전에는 죄 지어도 상관없고 너 인생이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다며 미혹의 길로 이끌다가, 죄로 인해 망하게 되면 갑자기 참소하며 죄책감을 들먹이게 됩니다. 너희는 끝이야…절대 용서 받지 못해… 하나님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하나님에게서 도망가…이렇게 참소하며 미혹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고통과 눈물과 아픔이 가득한 이 싸움터 같은 세상에서, 고단함과 피곤함에 쩔어 사는 이 세상에서 망하기 전에 얼른 불순종과 우상숭배와 죄에서 돌이켜 두손들고 돌아와야 되고요. 그리고 죄로 인해 망하고 자빠진 그 현장에서는 오늘 40장에서 주시는 이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붙들고 주님 안에서 다시 한번 일어서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나에게 소망이 되며 그 소망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에 대한 결론 말씀으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라는 겁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이 말씀이 28절에도 21절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우리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데 있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듣지 않고 붙들지 않는데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해야 될 때가 아니라 들어야 될 때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는 겁니다. 억울함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토해내고 내 처한 상황과 환경의 여러움을 말로 쏟아내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소망되는 이유는 처한 상황과 환경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통하여 하늘의 소망이 담긴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십니다. 네가 사는 비결, 잿더미 위에서 네가 새로운 소망으로 일어서는 비결은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하늘의 소망을 둘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길이 다 막히고 메마른 광야에서 새로운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여시는 분이고 새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을 정말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시고, 그의 백성을 내치지 않고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심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냐….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과 말씀을 붙들고 내가 그 하나님이 어떠함을 붙들고 나아가며 살아가는 삶, 그 삶에서만 소망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새 힘과 능력은 오직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붙드는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잿더미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내가 좀 더 주먹쥐고 힘을 내는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겁니다. 외부로부터 건짐을 받아야만, 공급을 받아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 자가 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겁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며, 바라보며 기다리는 겁니다. 그냥 멍하니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갈망하며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주목하여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것이 앙망하는 겁니다. 대강절을 지나며 아기 예수님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도 바로 아기 예수님을 앙망하는 겁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보며 기다리는 겁니까? 바로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내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시는 그 새 일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앙망하는 겁니다. 주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늘 기대하며 기대하며 그분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 앞에 엎드려 내 인생을 통해 펼치실 새로운 일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시고 독수리가 날개 침같이 올라간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면서 올라간다는 것을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힘이 부어져 땅에서부터 하늘로 날개쳐 올라가는 도약, 또한 흐르는 물살을 거스르며 날개쳐 올라가는 도약입니다. 독수리가 위로 올라가려면 시선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고정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내 눈과 마음은 땅을 향해 있고 처한 상황과 환경만 바라보면 절망과 낙심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기 시작하면,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겁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주님이 일하시기에 새 가능성을 여시며 새로운 길을 여시는 그 하나님의 일이 내 인생에 펼쳐지는 겁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듯 올라간다는 것은 땅의 절망과 한숨 가운데 그 처한 상황과 환경을 치고 올라가 하늘을 향해 날라가는 힘과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겁니다. 상황과 환경에 떠밀려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그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약을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일하심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하늘의 역사인 겁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이 때에 우리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었고 남겼는가를 돌아보는 것도 귀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 내가 하나님 말씀과 약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여호와를 앙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입니다. 말을 쏟아낼 때가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임을 잊지 말고 주님 말씀과 약속에 귀 기울이며 그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음으로 붙드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으로 기대하며 바라보는 앙망함이 나를 살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통해 새 길을 내시고 새 가능성을 여시며 새로운 일을 행하심을 믿으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앙망함,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내 처한 모든 상황을 훌쩍 뛰어넘게 만드는 하늘의 힘과 능력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주목하여 바라보고 기대하며 바라보는 앙망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붙어 있지 않고 떨어지면 죽는 존재다…라는 진리를 잊지 말고 그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과 말씀에 귀 기울여 모든 것이 망한 잿더미 윟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40장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한 잿더미의 절망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가 소망이 되는 이유는 처한 상황과 환경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내 마음을 기울일 때 하늘의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는 것을 계속 말씀은 증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영원한 약속과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끝까지 품으시는 목자이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사는 길이며 소망을 붙들도 다시 일어서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거기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말씀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도 다 알아듣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잿더미 위에 처한 상황에서는 그 말씀이 마음에 담기지 않고 수용되지 않는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애타는 질문입니다. 모든 것이 망해 잿더미가 된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끔찍한 모습을 바라보며, 전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며 모든 것을 놓아 버린 한 그 절망가운데 짓눌려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불순종과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이해할 지 모르나 그때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면 왜 이런 비극과 잿더미를 직면하며 예루살렘 성전이 이렇게 무너지고 망할 수 없는가에 대한 몸이 말하는 질문들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하게 되는 겁니다. 끊임없는 몸이 하는 탄식과 질문이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처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처한 삶의 자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원망과 낙심이라 건 결국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루실 수 있으세요…라는 탄식입니다. 그런 탄식을 다 이해하시고 받아주시긴 하지만 그 원망과 낙심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 그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동의할 수 없다는 불순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탄식으로 처한 상황 속에서 몸이 쏟아내는 질문 가운데 헤메일 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고 바라보지 못할 때 일어나는 공통적인 일이 있는데 바로 우상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원망과 낙심이 내 영혼을 상하게 만들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지 못할 때 빠르고 쉬워 보이는 우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강대국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처절하게 무너졌음도 불구하고, 그렇게 망한 삶의 자리 잿더미 위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원망하고 낙심하면서 또다시 하나님을 대체할 뭔가를 찾는 겁니다. 이 모든 우상들은 꼭 돌이나 금으로 만들고 뭔가 눈에 보이는 형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으며, 내 힘으로 그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며 내 힘으로 뭔가 해결해보려고 하는 모든 발버둥이 결국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뭔가 해결하려 그러니까 내 힘으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체하는 내가 쥐락 펴락하는 우상을 만들어 문제를 타개하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엄중한 경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는 대신, 여전히 내가 내 힘으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을 붙들고 발버둥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이 주시는 경고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을 붙들지 않고, 충돌하고 부딪치고 원망하고 낙심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대체할 우상을 붙들고 문제를 타개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온 우주를 만드실 때 너희는 한 방울의 물방울과 티끌 같은 존재였음을 왜 모르냐는 겁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지 안다면 그런 하나님과 달리 너희는 얼마나 작은지를, 그런 큰 하나님의 뜻을 티끝 같은 내 머리로 다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지 왜 모르느랴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고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모두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허락을 가지고 모든 일을 만드신 것도 아니고 우리의 머리에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조하는 건, 그걸 통해 내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을 직면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거기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내 머리에 이해 돼야만 받아들이고 수용하려고 하는 이 교만과 낙심이 결국 원망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겁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로는 내 마음으로는 내 느낌으로는 받아들일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순종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작은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됐을 때, 이 우주와 세상에는 내 머리에 담길 수 없는, 내 생각과 느낌을 초월하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생이 잘 풀릴 때도 인생이 안 풀릴 때도, 인생이 위로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시고 일하시며, 새로운 길을 내시며 영원한 말씀을 이루심을 믿는 겁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의 위로를 부어 주시며 우리를 끝까지 품으시고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는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붙들고 그분의 주권 앞에 내가 엎드리는 겁니다. 내 머리에 이해되지 않고 담기지 않는 일들이 계속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끄시고 기초를 놓으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든 것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치하고 계심을 믿고 순종하며 엎드리는 겁니다. 내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내 생각과 감정으로는 수용되지 않는 이런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믿었을 때 우리 영혼이 주님 은혜 가운데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깨지고 아픈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내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곳이 이 세상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럴 때마다 왜…라는 질문과 그것에 대한 설명을 위해, 인과 응보를 끊임없이 구하고 머리를 굴리는 모든 시도와 발버둥을 내려놓고 멈추십시오. 내 머리로 이해하고 내 생각으로 수용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 놓고 멈추십시오. 이해되지 않는 그 일 자체를, 설명되지 않는 그 상황 자체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엎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는 비결이자 하늘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비결입니다. 주님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믿으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주님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이 순종의 믿음으로 엎드리고 무릎 끓을 때 하늘의 소망이 나를 붙들고 이끌어 가시는 겁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이 잿더미 위의 절망 속에서 소망을 붙들고 결국 이것을 통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와 생각으로 수용되지 않으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 가운데 헤매고 신음할 때에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심을 분명히 믿으며, 순종의 믿음 가지고 잿더미 위에서도 엎드리며 순종하기 원합니다. 여전히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언제나 실수하지 않으시며 완벽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적으로 깊어지며 단단해지며, 순종의 믿음으로 돌파하고 하늘의 소망과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 말씀이 소망이 되는 이유의 본질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광야에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심을,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을 지키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배웠습니다. 가변적, 찰라적, 조건적인 이 세상 사람들의 말이나 약속, 내 생각이나 감정에 인생을 걸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불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 안에 내 인생의 기초를 두며, 그 말씀을 이루시며 지키시는 하나님 약속을 붙들고 그 안에서 소망 가운데 살아야 됩니다. 계속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속성 두 가지를 더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소망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비교대상이 안되는 위대하고 강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구구 절절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게 비교대상 불가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비교대상이 되지 못하는 한방울에 물방울 같고 작은 먼지 같다는 겁니다. 이 지구에서 대단하다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 우주에서 보면 얼마나 작은 겁니까? 아무리 대단한 것도 우주의 관점으로 보면 먼지만도 못하다는 것을 이제 과학의 발전을 통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구라는 전체도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우리는 우주적 관점에서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 안에서 나라들이 크고 대단하다 내가 이룬 게 크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건 다 물 한 방울 같고 먼지 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영어로는 comfort라고 하는데 com (together)+fort (forte)입니다. 음악 악보에 강하게 할 때 포르테라 하지 않습니까? 그 강하신 (forte) 하나님이 나와 함께 (com) 하시는 게 위로하심 (comfort)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저 내 말 잘 들어 주시고 눈물 닦아 주시고 공감해 주시는 것에 멈추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그의 강하심이 나와 함께하는 위로라는 겁니다. 그게 세상의 위로와 하나님의 위로가 다른 것이며 하나님의 위로만이 나에게 참 소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내 눈높이에 내려오셔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하기고 이해하시며, 내 눈물을 분명히 닦아 주십니다. 동시에 그의 강함, 포르테가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게 바로 주님의 위로하심이 나에게 소망 됨을 분명히 붙드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진짜 알게 되면 그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그렇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을 때, 하나님의 포르테가 나와 함께하심이 하늘의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전지전능, 위대하고 강하신 그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한 위로를 구하며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상태 안 좋은 모습으로 오는 건 너무 좋은 일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죄인 된 모습 그대로, 깨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는 건 너무 귀합니다. 그런데 그 안 좋았던 상태 그대로 돌아가면 안되는 겁니다. 올 때는 상태가 안 좋아져서 왔지만 하나님을 대면 한 후 돌아 갈 때는 좋은 모습으로 갈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위로하심의 역사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양떼와 같이 먹이시는 목자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목자라는 분명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셔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우리에게 강함을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먹이시고 그 팔로 꼭 안아 주시고 품으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신 위로 하심은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 팔로 꼭 안아 주심을 분명히 믿음으로부터 소망을 얻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의 팔로 품으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은 품으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성도인 저와 여러분들은 내치지 않고 끝까지 품고 가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인 열두 제자를 향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 즉 끝까지 너희는 세상에 있는 나의 사람으로 내가 품고 간다… 그게 예수님이 작정하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공로 없고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품으시는데 끝까지 품으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주님의 위로하심이 참 소망되는 겁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며, 하나님이 그 팔로 나를 꼭 품으시며 갈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할 때 참 소망이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나를 품으시며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에게 참 소망 됨을 믿고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잿더미 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결론이 뭡니까? 하나님이 누군지를 선명히 바라보라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보라”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소망이 사라진 잿더미 위에서 다시 일어서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지 않고 주목하지 않고 살았기에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알았고 눈에 보이는 가치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서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망한 그 잿더미 위에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체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주목하며 보는 것만이 다시 일어서는 길이고 소망으로 일어서는 길임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이 놀라운 역사들이 나에게 실제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람들의 말과 약속에만 귀 기울이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새로운 길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포르테가 나와 함께하심을 누릴 수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품으심을 믿고 소망으로 일어설 수 없는 겁니다. 상황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나를 바라볼 때는 소망이 없는 겁니다. 참 소망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함에 주목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심, 즉 하나님의 속성에 내 인생을 주목하며 살았을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나에게 진정한 하늘의 소망이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일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속 상하면 묵상할수록 그 하나님의 속성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삶의 실체로 흐르게 되면서, 거기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기도와 예배의 모든 본질은 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십자가를 먼저 바라보는 거룩한 습관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시선을 먼저 고정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들에 먼저 주목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새로운 길을 내시고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을 지키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전지전능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강하심에 비교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물 한방울이나 먼지로 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시고, 모든 것보다 강하시고 모든 것보다 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나와 함께하는 역사를 분명히 믿고 나아가십시오. 바라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하심이 나에게 참 소망이 됨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0장 말씀은 나라가 망한 잿더미 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선포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소망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함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하늘의 소망이 우리에게 임함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라가 멸망한 잿더미 위에서 바라보며 붙들 때 바로 초경험적인 하늘의 위로하심이, 하나님의 위로가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선명히 증언되는 두가지의 하나님의 속성, 내일 말씀을 통해 선명히 증언 되는 또 다른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마음에 새기며 내가 경험하고 직면한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우리에게도 현재형으로 임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첫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 분이시라는 선언입니다. 나라 멸망이라는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소망인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길을 내는 분이라는 분명한 고백에 있습니다. 그 당시 나라 멸망을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삶에 고난과 역경이 어려운 이유는 갈길 몰라 방황하는 길이 꽉 막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가보시면 알지만 사막은 내가 걸어온 길도 한 30분만 지나면 그 길이 다 없어집니다. 모래 바람이 계속 불기 때문에 내가 걸어온 길조차도 다 사라지는 것이 사막 한 가운데 광야와 같은 우리 인생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없는 것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실존이자 삶의 자리입니다. 내 스스로는 길을 낼 수 없는 지경에 꽉 막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내시고 사막의 대로를 내시는 분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는 분이시기에 새로운 길을 만드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시고, 새로운 일을 행하심을 분명히 믿는 고백만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내는 분이라는 것을 선명히 믿는 것만이 바로 여호와의 위로가 나에게 임하는 비결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내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실 때 먼저 길을 내시기 전 평탄 작업을 먼저 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내시기 전 하나님은 먼저 길을 내실 준비를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건 그 길을 내시 전에 하나님이 평탄 작업을 하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 이게 바로 내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길도 하나님이 내시고 평탄 작업도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평탄 작업을 위해 내 마음을 드리며 믿음을 반응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한다…말씀합니다. 새로운 길을 낼 때 보면 먼저 길을 평탄하게 하는데 그 평탄 작업을 오늘 말씀에는 골짜기마다 돋우고, 산과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어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신다 증언합니다. 새로운 길 내기 전에 높은 곳은 낮게, 고르지 않은 곳은 고르게 만드는 평탄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 특별히 고난과 역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밑그림 작업은 대부분이 평탄화 작업입니다. 고르지 않고 딱딱해진 나의 마음을 평탄화 하는 작업은 뭡니까? 고운 가루와 같이 고르게 만드시는 겁니다. 마음이 높아진 교만이라는 산이나 언덕같이 높아진 곳은 깎아 내리셔서 평탄하게 하시는 겁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내 삶에 역사하고 일하시는 것을 막아 버리기 때문에,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길을 낼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로 시작하지만 교만이 시작되면 하나님의 일이 내 일이 되고 사람의 일로 땅의 일로 끝나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하나님의 일로 시작하고 하늘의 일로 시작하지만 교만이 들어가면 그것이 그렇게 무너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경고하십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길을 내시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높아진 마음을 다 평탄하게 다 깎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교만이 처리되어 낮아지고 고르게 되면, 그 위에 하나님의 새로운 길이, 놀라운 길이 열리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낮추시고 하나님이 고르게 하시는 평탄화 작업을 거절하며 새로운 길이 열리질 않는 겁니다. 그렇게 평탄화 작업을 먼저 하신 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광야 같은 우리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내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내시는 분임을 분명히 믿고 붙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한 말씀을 약속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8절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영원한 말씀인 하나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말씀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고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옛 약속인 구약과 새 약속인 신약이라 하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주신 약속, 한번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결코 반드시 이루신다는 겁니다. 반대로 사람들의 말이나 사람들의 약속은 다 조건적이고 가변적이고 찰라적인 풀과 같아서 믿을 게 못 됩니다. 사람들의 말과 약속이 풀과 같아서 곧 마르고 시든다는 겁니다. 좀 더 넓게는 우리 인생에 잘되는 거 번성하고 성공하는 것, 다 조금 있다가 마르고 시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하나님 약속 외에 이 땅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과 약속들은 다 시들고 마를 것들이기에 신뢰하면 안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을 사람들에게 두어서도 안되고, 세상에 두어서도 안되고, 내 감정이나 생각에 두어서도 안되는 겁니다. 가변적, 조건적, 찰라적인 것에 인생을 두고 목숨 걸면 망한다는 겁니다. 이런 가변적, 조건적, 찰라적인 사람들의 말과 약속, 세상의 말과 약속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만 소망을 두는 이유이고, 내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 비결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도 왜 하나님의 위로가 나에게 소망이 됩니까? 내 상황과 환경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 때 하늘의 일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 아니면 사람의 일인지, 하늘의 일인지 땅의 일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처음 보는 거로는 알 수 없고요. 시간이 좀 지나면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일이 한결같이 끝까지 간다 그러면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건 하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한번 반짝했다가 시간이 좀 지나니까 다 변하고 무너진다면 그것은 사람의 일이고 땅에 일이라는 겁니다. 시간이 흘러 보면 아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구나… 이거는 하늘의 일이었구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새로운 길을 내시고 놀라운 가능성을 내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주신 약속과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며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한결같이 그분에게 공급받으며 한결같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고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겁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광야 같은 우리 인생에 새로운 길 놀라운 길을 만드시기 위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길이 뚫리도록 고르게 하시고 낮추시는 평탄 작업들을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그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이 손길을 축복으로 알고 믿음으로 반응하기 원합니다.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에 내 마음을 열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길과 놀라운 역사가 내 삶에 놀랍게 뚫어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1-39장 말씀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 예고의 말씀들이었습니다. 또한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열방과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와 만물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39장 말씀은 히스기야 왕으로 말미암아 결국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아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끝났어… 저 사람들은 끝났어…단정하고 대부분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망하는 것으로 딱 끝날 것 같은 말씀은 39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0장으로부터 새로운 막이 열리는 겁니다. 나라가 망하고 폐허가 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주심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며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게 될 것이라는 이 놀라운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사야 40-6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 눈에 보이게 어떠함을 따라 마침표를 찍기 쉽고 모든 것을 그냥 단정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아직 끝이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다…라는 새로운 소식을 듣게 하시는 겁니다. 내 눈에 보기에는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무너져 끝났고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모든 소망이 무너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40장부터 66장까지의 말씀을 구약에 있는 신약의 말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의 서론으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과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의 위로 선포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과 심판과 무서운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딱 구별하여 이원론으로 나누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말씀인 이사야에서도 심판과 함께 위로와 용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말은 측은지심을 넘어서는 말로 “애간장 타는 마음으로 함께 고통 가운데 서 있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타는 그 느낌, 설명할 수 없지만 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고 절박하면 나의 몸이 타들어가는 겁니다. 애간장 타는 심정으로 그 자리에서 함께 있는 마음이 바로 위로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심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목자 없이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심, com+ passion…함께 고통 당하는 마음이 바로 위로하는 선포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간장 타는 마음으로, 함께 고통을 당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에게 이 하늘의 위로를 선포하시는 겁니다.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며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졌고, 나라는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잿더미 위해서 그들은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고, 모든 것이 끝났다며 절망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빛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이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한 두번 말씀하시고 끝나신 게 아니라 마음에 닿도록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선포하신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두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여전히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첫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라는 겁니다. 너희의 하나님…내 백성…2인칭이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도 여전히 나와 하나님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면 우리나라…라는 말 대신 이 나라…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이 나라 문제야…이 나라 망했어…이 나라 지도자가 망조야….나와 이 나라를 구별시키고 객체화 시키는 게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이 망한 나라가 우리 나라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객체화된 하나님, 나와 무관하고 떨어져 있고 나를 신경 쓰지 않는 하나님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하심의 첫번째는 나와 여전히 함께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될 때만 가까이 계시고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라 감옥 속에서도 눈물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모든 것이 끝난 거 같은 그 절망 가운데서도 나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 것,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를 위로하시는 겁니다. 내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당연히 감각으로는 하나님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이 느껴지지 않기에 멀리 계신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내 감각과 내 생각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고백하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데서 모든 위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너희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우리에게 반찬고 붙여주고 진통제를 주면서 위로하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 주시며 암덩어리와 종양을 잘라내고 수술하시는 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그냥 잠시 공감해 주고 잘 들어 주시는 위로함을 넘어서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 선언이 바로 우리에게 위로라는 겁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를 미혹하며 죄 짓기 전에는 죄를 져도 문제 없다고, 죄 져도 상관없다고 계속 흔들어요. 그리고는 죄를 딱 지고 나면 하나님은 너 같은 거 용서하지 않아… 하나님에게서 도망가…우리를 끊임없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나의 죄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어떻게 해결해 주신 겁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 죄문제를 해결해 주신 겁니다. 이 십자가 은혜 없이는 그냥 괜찮다 위로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보혈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신 선언이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되고 가장 큰 위로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절망 가운데서도 마침표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쉼표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침표를 찍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마침표를 찍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마침표를 찍고 싶은 상황이 있습니까? 마침표를 찍고 모든 것을 그냥 끝내 버리고 내려놔야 되는 절망의 때가 있으십니까? 그때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고 선포하시는 그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붙들기 원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취하시기 원합니다. 절망과 깊은 어둠 속에서도,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이 고백을 믿음으로 붙들고 하늘의 위로가 담기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죄 문제이고 그것을 해결받는 것이 구원과 회복이라는 것을 믿으며 오늘도 십자가 앞에 나왔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해 주심이 우리에게 위로의 본질이 됨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죄악이 사함을 받고 용서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음을 선명히 붙드십시오. 내 눈에 보기에는 완전히 망하고 모든 게 불타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주님의 소망을 붙들고 다시 한번 회복과 구원의 역사로 일어나는 소망을 붙들고 일어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 전반부 1장부터 39장까지 심판에 대한 예언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은 히스기야왕의 무너짐은 결국 남유다의 무너짐이 되고, 남유다는 결국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예수믿는 신앙 생활에 입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작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신앙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도 중요하고 신앙의 중간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의 끝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안타까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신앙의 전반전은 좋았는데 후반전이 좋지 못해서 용두사미와 같이 무너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히스기야 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얼마나 대단한 왕이자 얼마나 위대한 왕이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전심을 다하는 신실한 왕이었습니까? 그의 시작은 너무 좋았고 그의 국가적 위기 앞에서, 개인적 위기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중간은 너무 좋았습니다. 앗수르 공격이라는 국가적인 큰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갔고, 죽을 병 앞에서도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공격할 때는 정신이 확을 정도로 긴장감이 생겨 하나님께 나아가 그렇게 의지했는데, 자기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는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벽을 향하여 하나님께 통곡하며 하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큰 승리 이후에, 죽을병에서 건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치유하심 이후에 안타깝게도 교만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기적의 치유하심으로 15년을 더 살게 된 히스기야왕의 교만과 그걸 통해 개인 뿐 아니라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사신들이 선물을 보내왔는데, 선물이라고 덥석 받으면 안 되고 의심해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신들이 주는 선물에는 대가가 있고 의도성이 있기 때문이죠. 선물과 뇌물의 결정적인 차이는 의도성과 목적성에 있습니다. 선물에는 목적성이 없는데 뇌물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바벨론 왕의 사신들이 가져온 것은 겉으로 봐 선 선물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선물이 뇌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기적의 치유 이후에 영적 긴장감이 사라지고 풀어지면서 이게 뇌물을 선물로 착각해서, 뇌물을 받고 좋아하면서 마음이 그냥 확 열려 버렸습니다. 뇌물 받고 얼마나 좋았던지 사탕 발림으로 호리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줄 거, 안 보여줄 거 다 보여줬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보물 창고와 무기고에 있는 것들을 다 보여준 겁니다. 왜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사신들에게 군사 기밀들을 다 공개하면서까지 모든 걸 다 그렇게 보여줬을까요? 자기를 과시하고 싶었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내 나라가 이렇게 대단하고 내가 가진 게 이렇게 많다고 뻐기고 싶었던 겁니다. 교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 자랑의 본질에는 죽을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내 죽을 병이 나왔다는 자체에 빠져 자기 교만에 모든 것이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할 때 거룩한 분노가 있었고 하나님을 자랑하는데 앞장섰던 자였는데, 지금은 내 이름과 내 병고침과 내 군사와 내 보물들이 자랑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사신의 사탕 발림의 미혹과 뇌물에 눈과 마음이 어두워 져서 보여 줄 거 안 보여 줄거 다 보여주며 자랑하며 교만에 사로잡힌 히스기야 왕, 그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 다 바벨론에게 털리고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너희 자손 가운데 몇명은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가 되어 거기서 환관이 된다고 증언합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비극의 소식을 들었으면 예전 히스기야 같으면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한 번만 기회를 다시 주옵소서…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교만해진 히스기야는 말도 안 되는 반응을 보입니다. 내 생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다행이네요… 결국 남유다가 누구 때문에 국운이 기울어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겁니까? 히스기야 왕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히스기야 왕에게는 놀라운 큰 치유를 경험한 형통이 결과적으로는 복이 아니라 화였다는 겁니다. 죽을 병에서 건짐 받고 찾아온 형통이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자기를 자랑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고난이 우리에게 큰 어려움과 고통이기 하지만 영적으로는 고난보다 형통이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께 잘 나아가며 은혜를 구하다가 고난이 끝나고 형통이 시작되면 하나님을 망각해서 무너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모순과 같이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이라 선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난 이후 찾아온 형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고난 뒤에 찾아오는 형통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면 그 형통은 복이 아니라 화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나에게 복이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이사야서 말씀은 우리에게 냉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에서 고쳐주셔서 15년의 삶을 연장시켜 주시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대로 살지 못한 히스기야, 차라리 15년 전에 죽었으면 더 좋았을 인생이라는 겁니다. 15년을 기적적으로 더 산게 히스기야 왕과 남 유다에게 복이 아니라 화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인생을 살면서 끝에 그렇게 무너짐으로 나라 전체가 무너지게 만드는 인생이 되었다… 이것이 히스기야 왕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라는 것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이것이 바로 우리가 붙들어야 될 말씀의 진리입니다. 나에게 주신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와 축복이, 고난 후에 찾아온 형통의 시간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그게 복이 아니라 화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은 완주하는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신앙은 끝까지 가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이 끝까지 가는 믿음을 놓친 안타까운 인생을 반면 교사로 삼아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끝까지 지속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끝까지 영적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붙어 있어 완주하는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과 같이 15년의 인생을 덤으로 선물 받은 후 올려드린 감사와 찬양의 시입니다. 사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은 우리에게 감사라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못하는 완전히 삶이 바뀌는 경험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은 Before 와 after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마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새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며 바라보는 것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와 자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간증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죽을 고비를 하나님의 은혜로 넘김 히스기야 왕은 그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감사기도를 시로 남겨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는 성도란 하나님이 부어 주신 은혜를 당연히 여기지 않고 망각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내면화하고 현재화 하며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죽을 병에서 건짐 받고 죽다가 살아나게 되면, 내가 병 나았다는 사실 자체에만 매몰되어 고쳐주신 분을 망각하기 쉬운데 히스기야는 고쳐주신 분 하나님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이것을 찬양과 감사의 시로 남기는 겁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죽을 병에 걸려 신음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탄식할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으며 하나님을 눈이 빠져라 앙망했으며 하나님만이 나의 중보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고 간절히 간구했던 그 때를 잊지 않는 것이죠. 그것을 내면화하며 현재화하며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감사와 찬양의 삶에 핵심이라는 겁니다.
먼저 히스기야는 죽다가 살아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을 병에서 건짐을 받은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해 주였음을, 하나님이 내 인생의 온전한 주인이셨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 알게 되었을 때, 히스기야는 왕이라는 지위와 권한,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죽음의 그림자 앞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고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죽음의 질병 앞에 왕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이 죽을 병 앞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가진 그 어떤 것도 그를 죽을 병에서 건져주고 회복시켜주며 구원해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눈이 빠질 정도로 여호와를 앙망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나의 중보자가 되어 달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철저히 내 삶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눈이 빠지도록 여호와를 앙망하는 그 모습이 죽을 병 앞에서의 히스기야의 믿음의 태도였고 반응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 두 손들고 나아가게 합니다. “주님 나 불쌍히 여겨 주시고 생명이 모두 주님 손안에 있사오니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주옵소서” 고백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은 주의 손안에 있사오니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를 치료하시고 살려 주옵소서… 그 간절한 기도가 히스기야의 기도였고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 놀라운 히스기야의 찬양과 감사를 통하여 붙들어야 될 것은 내 삶에 예고 없이 깊은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동일하게 우리는 눈이 빠져라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에게 나아가 붙드는 것 외에는, 살려 달라는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면 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히스기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 가운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고백을 합니다. 그 고통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하나님이 이것을 통하여 나에게 하늘의 평안을 주시려 하는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나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죽을병이 결국 나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앙망하게 만들어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한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뒤돌아 보면 내가 영적으로 단단해지며 내면으로 성장하기 위한 라는 은혜의 도구가 된 것을 믿습니다…고백하는 겁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와 같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내가 처한 죽을 병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모든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를 고쳐 주시고 나를 살려 주세요…간절히 간구하는 기도, 동시에 원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내가 이해할 수 없으나 이 상황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나를 평안으로 인도하실 줄 믿는 분명한 기도, 이 둘이 함께 가야 하는 겁니다. 히스기야 기도, 그 결론이 찬양과 감사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끝과 결론은 찬양과 감사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죽을병에서 신음할 때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 하시는구나…하나님이 내 기도를 정말 들으시는구나….하나님이 나를 정말 고쳐 주시는구나…하나님이 나에게 하늘의 평화를 주시는구나….이 놀라운 고백을 온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편 23편에 다윗왕이 고백했던 놀라운 고백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내가 죽을 병에 걸렸어도 해를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황에 압도당하는 대신,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당하는 대신 나와 함께하신 주의 은혜에 압도당하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온통 하나님이 부어 주신 은혜, 건져 주신 은혜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사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죽을병에 걸려서 모든 것이 막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였을 때, 그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을 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이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 놀라운 고백과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찬양과 감사의 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예전에 이미 부어 주셨던 놀라운 은혜들을 그냥 옛날에 희미한 기억으로 두거나 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 선명한 기억으로 현재화 시키고 내 마음에 새기는 내면화의 고백으로 남겨지기 원합니다. 몸이 아프고 연약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매달리며 간구하기 원하십니다. 생명이 주님 손 안에 달려 있사 오니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나를 고쳐 주시며 살려 주옵소서… 그 간절한 은혜를 구하는 기도밖에 답이 없습니다. 동시에 내 머리로는 해석이 되지 않지만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서도 그 끝은 주님께서 나에게 평안을 주시고 감사와 찬양이 되는 결론이 될 줄 믿으며 주님 앞에 엎드리기 원합니다.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그 기적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성도들의 놀라운 고백 일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고난을 통해서도 여전히 우리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를 고백하며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감사로 끝나고 찬양으로 끝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발버둥 쳤던 왕입니다. 그런 신실한 왕에게 찾아온 것은 축복과 평화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와 앗수르라는 큰 적이었습니다. 예수살렘이 무너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큰 어려움 속에서,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붙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멸하시고 물러가게 하는 기적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과 버금가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놀라운 승리의 역사 앞에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고 국가적 위기와 벼랑 끝에서 건져 주시고 큰 승리를 주셨으면, 이제는 좀 쉬게 해주시고 평탄한 길을 걷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국가적 위기를 크게 넘고 나니까 찾아온 것은 개인적 위기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네가 죽을 병에 걸려 곧 죽을 거라는 청천 병력과 같은 소식을 들은 겁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에게 첫번째 드는 생각은 왜…라는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왜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섬기고 충성되게 섬겼던 정직한 왕에게, 국가적인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위기를 넘게 해 주시더니 왜 개인적 위기와 어려움으로 또 몰아가십니까? 하나님 제대로 믿어보려 하는 사람에게, 신앙 생활 제대로 해보려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이런 개인적 위기와 어려움은 참 마음을 무겁게 하며 탄식과 함께 가슴을 치게 합니다. 인과 응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않는 기가 막힌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하면서 그 깊은 탄식을 내는 것이 우리 인생이자 히스기야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국가적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반응을 보였듯이, 개인의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고 포기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넘어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놀라움을 발견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럴 수 있느냐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는 대신에 히스기야 했던 제일 먼저 했던 건 기도였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나아갔다는 것이죠. 그의 죽을 병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병에 걸리면 하나님에게 멀어집니다. 왜…라는 풀리지 않는 질문과 함께 원망과 낙심으로 하나님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기 쉽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위대한 점은 죽을 병이 걸린 그때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으로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려 개인적 위기 상황으로 벼랑 끝에 섰을 때도, 히스기야 왕은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갔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진심과 전심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며 눈물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통곡의 기도였고, 눈물과 함께 드리는 마음을 쏟는 기도였고, 그의 진심과 전심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상황 중심의 반응과 기도가 아니라 죽을병이 오려 더 하나님에게 가게 만드는 믿음 중심의 반응과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믿음의 대단함은 그의 삶에 하나님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다 피하게 해 주셨다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그의 형통한 삶은 고난과 어려움을 직면함애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의 놀라운 믿음은 놀라운 국가적인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개인적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오는 반응을 했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가 기도하며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그 태도, 그게 히스기야왕 믿음의 대단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피해 가서 형통한 삶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그 상황이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게 만드는 믿음의 반응이 형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잘될 때도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고 내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드는 삶, 내 인생이 오르막길을 갈 때도 하나님을 붙들고 내리막길을 갈 때도 하나님을 붙드는, 삶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삶이고 이것이 히스기야가 보여주는 놀라 믿음의 삶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며, 매달려 눈물과 마음을 쏟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기도를 들었고 내 눈물을 보았다고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통해 뜻을 돌이켰다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뜻을 돌이키셨던 여러 예가 성경에는 등장합니다. 대표적인데 요나 선지자를 통해 예고하신 니느웨의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가 곧 멸망할 거라는 것을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주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하며 회개하며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멸망시키려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켰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심,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주님 앞에 회개하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그 심판의 뜻을 돌이키셨다는 겁니다.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자비하심이 오늘 말씀에서는 히스기야의 왕을 향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중심을 보시며 국가적 위기에서나 개인적 위기에서나 한결같이 하나님에게 먼저 나오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걸 통하여 죽을 병에서 건져 주셔서 15년 연장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15년 연장의 선물, 그것을 통하여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해야 될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 이 성을 보호하는 놀라운 역사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이 세상에는 문제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 숨쉰다는 것은 계속되는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가지 문제의 연속인 이 세상, 국가적 위기와 개인적 위기가 계속 밀려오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문제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며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반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문제와 어려움과 고난을 만날 때마다 그 문제와 고난과 어려움에 압도당해 원망과 낙심, 절망으로 이끄는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구가 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설명되지 않는 큰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하는 대신 사람 붙들고, 눈에 보이는 것 붙들고 헤매는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을 붙드는 인생 되기 원합니다. 내 계획과 계산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삶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그 자리에서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그 믿음의 반응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내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는 그 믿음의 반응을 통해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내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형통하는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자비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 믿음의 반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형통의 은혜, 함께하심의 은혜를 누리며 오늘도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바라기는 문제를 뛰어 넘어 함께하시는 주님의 역사, 오늘 하루를 살아도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기를 열망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누구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이고 살 것인지, 무엇을 보고 주목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선택의 삶입니다. 귀 기울이고 주목하는 것에 따라 인생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결정되며 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은 벼랑 끝의 위기상황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 당하는 것을 지켜 봤고, 그들이 얼마나 강대하고 무자비한 민족인지 다 봤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협박하고 그들이 최후 통첩을 하는 게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앗수르는 산헤립을 통해 심리전으로 백성들을 향하여 유다 방언으로 항복하고 나아오면 목숨은 살려주고 먹고 살게 해 주겠다는 흔드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에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소망의 말씀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은 처한 상황을 비추어 볼 때 듣고도 믿을 수 없고, 머리 속 계산으로는 받아들 수 없는 약속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며 순종하느냐, 아니면 앗수르와 세상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택해야 할 결정사항이라는 겁니다.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최후 통첩을 받아 망하기 일보 직전의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귀 기울일 것인지, 앗수르로 대표되는 세상이 주는 말을 듣고 귀기울일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주목할 지, 눈에 보이는 환경과 상황에 주목할지에 대한 그 결정이 나아갈 길과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앗수르의 하나님을 향한 죄의 무거움, 그 무거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로 시작됩니다. 히스기야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는 자신과 백성들이 처한 위기 상황과 어려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고 능욕하는 앗수르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주목하여 바라본 것은 처한 상황의 어려움, 앗수르의 최후 통첩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훼방 당하는 무거운 죄였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을 반응하셨고 대답해주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똑 같은 죄도 가중 처벌이 있습니다. 모욕하고 훼방한 게 옆사람에게 한 것과 경찰서장에게 한 것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하물며 모욕하고 훼방한 것이 대통령에게 한 것은 얼마나 큰 가중 처벌을 받겠습니까? 앗수르의 범죄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능욕하는 중범죄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앗수르는 그 무거운 죄에 대한 대가가 있음을 선포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능욕하고 훼방한 죄의 결과를 약속으로 선포하십니다. 최후 통접을 한 강대국 앗수르가 예루살렘 성에 이르지 못하고,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왕은 돌아가서 죽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사야를 통해 약속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체로 믿으며 거기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리라.” 이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은 변수이고 하나님의 열심이 상수라는 고백, 내가 만드는 것은 변수이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 상수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삶, 그게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나의 열심히 이루는 삶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내 열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의 열심이 때로는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내 열심이 될 일도 안 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는 이유는 내 열심이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나아가는 삶이 중요한 이유는 내 열심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위한 수단이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열심은 변수임을 알기에 내 열심은 언제나 상수이신 하나님의 열심에 쓰임 받는 도구 되게 만드는 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상수라는 것을 믿으며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가 싸우지 않고 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은 머리로 이해되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약속이자 믿음 없이는 순종하기 어려운 약속입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애굽의 군대가 죽이려고 추격해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는 약속과 똑같습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절대 이길 수 없는 난공 불락의 여리고성이 성 주변을 믿음으로 도는 것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약속과 똑같습니다. 어떻게 싸우지도 않고 앗수르 군대가 다 도망갑니까? 어떻게 홍해가 가만히 있는데 길을 내며 갈라집니까? 어떻게 여리고성이 그냥 돈다고 무너집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는 하늘의 역사라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도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하늘의 일이 이 땅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라는 겁니다. 위기 상황에 있을 때, 절박한 벼랑 끝에 있을 때, 환경과 상황에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은,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약속으로 붙들고 취하는 것 이게 바로 기적의 삶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말 대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상황과 환경을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신앙 생활을 나를 넘어서는 기적의 삶이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죽게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뛰어넘는 하늘의 역사이며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많은 군인들이 모두 시체가 되었기에 그들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은 돌아가서 비참하게도 자기 아들들에게 살해 당하며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도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갈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살아갈지를 선택해야 하며, 환경과 상황에 주목할지 그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할지를 결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새벽에 우리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사모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이유도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일 수도, 하나님을 주목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사람들과 세상의 말에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 말씀에 주목할 힘을 달라고,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에게 주목할 힘을 달라고 은혜를 간구하며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민감하게 깨어 귀 기울이며 살아간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넘어 하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주목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며 살아가기 쉬운 우리를 깨우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역사를 주목하며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살아 그 약속을 실체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도로서 우리가 경험하고 사모하는 일들은 나의 열심이 이루는 것들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일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약속으로 취하고 믿음으로 붙들면서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놀라운 하늘의 일들을 맛보며 살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는 도구로 내 열심을 사용하시고 내 삶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합당한 삶이란 내가 열심히 살고 내가 열심을 내고 무언가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며 내 삶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쓰여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취할 때 여호와의 열심이 나의 삶을 통하여 일하시고 그 하늘의 일이 우리 가운데 경험되는 놀라운 일이 목도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만들어 내시는 일들이 내 삶에 펼쳐지며 그 약속을 실체로 경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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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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