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선지자는 반복해서 임박하게 다가올 마지막 때에 대한 이중적 의미를 강조하는데, 그 날이 임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고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줌을 통하여 한 날에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고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의지한 백성에게는 그날이 구원의 날이 될 거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자식들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게 34장이라면, 빛의 자녀들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35장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 편에서 있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회복이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과 같은 사막이 즐거워할 수 없는데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그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메마른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품는 기쁨은 여호와의 영광이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겁니다. 동시에 그 기쁨은 두려워하고 겁낼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이 광야 같고 사막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고 갚아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그 약속의 말씀에 자신을 묶은 자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건짐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모든 게 다 장차 오실 메시야가 우리에게 주실 선물인 십자가 복음의 그림자 아니겠습니까? 광야 같은 이 세상과 메마른 사막을 지나가는 세상에서 두려움이 내 마음을 채우는 대신 하나님의 기쁨이 내 마음을 채우는 기적을 경험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내 마음을 묶고 주신 하나님 약속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차면 반드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친히 보복하고 갚아 주실 것을 분명히 믿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건져 주시고 구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믿음으로 남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 말씀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자에게 그 날에 있을 놀라운 회복의 역사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증언하는 또 다른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이 오셔서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광야에서 물이 나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기적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바라보고 희미하게 듣는데 그때에는 완전히 밝은 눈으로 보게 되고 완전히 귀가 열려 모든 것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눈먼 자가 눈을 뜨는 사건이고 듣지 못하는 자에게 귀가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광야 같은 이 세상에 물이 솟아나고 사막과 같이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되는 기적이 풀어지는 겁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은혜가 이 세상에 흘러 넘치게 되는 겁니다. 사실 이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주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약속대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놀라운 역사가 무엇입니까? 어두워진 눈을 밝게 해 주시고 닫혀진 귀를 열어 주시는 치유와 기적을 베푸시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선명히 드러내신 겁니다. 목마른 영혼은 예수님께서 와서 값없이 마시고 생수가 흐르게 하심으로,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놀라운 역사를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 길은 이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길이라는 겁니다? 그 거룩한 길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과 진리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길 자체이시기에, 생명과 진리의 길 자체이시기에, 오직 예수 이름을 통과하여 간 길을 통해서만 생명이 있다는 십자가 복음의 메시지가 이사야서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그림자와 같이 증언되는 겁니다. 그 길을 거룩한 길이어서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만 열린 길이라는 겁니다. 그 더러움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고 깨끗함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바로 깨끗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속함을 입은 자, 즉 예수님의 은혜로 받은 선물, 전적 수동태입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자들, 예수 이름을 믿고 영접한 자들만 건너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거룩한 길입니다. 그 거룩한 길은 깨끗하지 못한 자들, 구속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못 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자들 만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예수님이 마련하신 그 거룩한 길을 은혜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반복하여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과 거룩한 길 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소망은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어떠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어떠 하심이 중요하며, 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가 하신 일을 바라보며, 내 말이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사는 겁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과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이 마련하신 그 거룩한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겁니다. 구속함을 입은 자로 속량함을 입은 자로 노래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는 역사를 우리가 그날에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거룩한 길로 가는 비결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나의 소속을 정확하게 밝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예수 소속인지, 지금 내가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지, 내가 지금 예수님 사랑 안에 있는지, 그 소속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때 그날에 저 사람이 오직 예수 이름으로 구속함을 받은 자구나…저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자구나…홍해가 갈라지듯이 이 구별이 확실히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 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 우리 가운데 놀라운 역사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의 권면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가 되어 하나님 편에 서서 꼭 붙어 살아가 거룩한 길을 걸어가고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을 놀랍게 누리는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33장 말씀이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과 구별됨은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다름에 있다는 것을 증언했다면, 오늘 말씀은 무엇을 듣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듣고 있느냐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반복되는 것은 “들을지어다” 입니다. 모든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귀를 기울일 지어다…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은 구체적으로 심판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나를 위해 하시는 말씀이요 나를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농담도 아니고 잔소리도 아니고 정말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해서 주시는 생명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정말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여기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다가 아무 준비 없이 그 심판의 때를 직면하게 된다는 겁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중한지 알지 못한 채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며 살아갔던 것이죠. 그것이 결국 그들이 망하는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해야 이유는 무엇을 듣고 무엇에 귀를 기울이냐가 결국 우리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말씀은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경청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땅에 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왕을 모시지 않는 백성들 결국 임박한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모든 열국 가운데 집중적으로 오늘 말씀은 에돔을 심판의 대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내동댕이 쳐지며 시체에서 악취가 가득 오르며 홍수같이 흐르는 피가 산에 모두 쌓이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게 마지막 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온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죠. 특별히 이런 끔찍한 심판이 에돔에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왜 여러 열방들을 심판하실 때 특별히 그 대표선수로이 에돔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증언하는가에 대하여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에돔은 이스라엘과 무관한 나라, 하나님 백성들과 무관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피가 섞여 있는 백성들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예들이기에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피가 섞여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이 마지막 때에 심판의 케이스가 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배신과 패역함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관한 삶을 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힘들게 하고 상처 난데 소금을 뿌리고,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는 길을 막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의 위험에 있을 때 있는 위치를 고자질하며 걸림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에돔은 본인도 망하게 했고 다른 사람들도 망하게 하는 걸림돌의 인생을 산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칼이 에돔을 치시며 에돔을 심판하시며 진멸하게 될 거라는 것을 경고하셨고, 하나님의 때에 심판이 끔찍하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티끌은 유황이 되며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고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오르는 하나님의 불심판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은 불바다가 되며 그 불은 끊임없이 타오르며 그 연기가 꺼지지 아니하며 영원히 황폐한 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에돔의 심판의 때에 일어나게 되는 끔찍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정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시는 일이기에 우리가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되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돌이킬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돌아갈 시간이 있고 아직 회개할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들을지어다…귀를 기울일 지어다” 경고하시는 겁니다. 아직 남아 있는 그 시간이 지나 찾아올 그 날을 뭐라고 주님은 표현하셨는데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가 될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에돔을 향한 심판의 모습은 하나님이 친히 보복하심, 친히 공정하게 재판하심, 친히 억울한 것을 풀어 주심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친히 판결하시고 친히 보복하시고 억울한 것을 풀어 주시는 날,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스스로 판결 할 필요도, 스스로 억울한 것을 풀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을 억울하게 한 자들을 친히 판단하시고 친히 보복하시고 친히 억울한 것을 풀어 주시는 그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그 길을 나아갈 때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정의를 회복해 주시는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지금 돌아오라는 주님의 초대에 귀 기울이면 사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얼른 깨달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 하나님 은혜 가운데로 돌아오라 심판 가운데 너희를 건지실 어린양의 그 보혈 아래로 내려오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만큼 내 믿음이 분명해지고 단단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게 될 것 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때에 친히 하실 이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오늘을 살지만 그 날을 바라보고 주목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거나, 잔소리로 여기며 경시하는 자들은 그 때에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경고를 잔소리나 농담으로 듣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 자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다 나를 위해 하시는 말씀이요 나를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이며 나에게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하시는 경고의 말씀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잔소리로 여기지 않으며 나를 위한 말씀으로 여겨 말씀에 귀 기울이고 경청하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일이 모두 실체로 이루어짐을 믿으며 말씀에 선명히 묶여 말씀 가운데 거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은 바라보는 영적 시각과 시야가 다르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에게 피하고 하나님의 그늘에 달려가는 영적 시야, 눈 앞에 것들만 바라보지 않고, 눈 앞에 펼쳐진 현실과 상황만 바라보지 않는 영적 시각을 갖는 겁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는 영적 시야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내가 멀리 보게 만들고 끝을 보게 만듭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 멀리 보고 끝을 볼 수 있는 넓은 영적 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하시고,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믿게 하시며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게 하시는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담겨야 하는 겁니다. 그 영적 시각은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열리게 되는 신비이며 보이는 것을 주목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바로 눈이 바뀌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 눈앞에 펼쳐진 일들을 넘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야를 갖게 만드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멀리 바라보고 끝을 바라보게 만드는 영적 시야,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만드는 영적 시야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시온성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말씀으로 조율된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야 갑자기 찾아온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허둥 대지 않고 눈앞에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시온성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성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고백을 하게 하십니까? 여호와는 거기 위험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평소에 내가 말씀을 통해 내 눈을 열어 주셔서 현실과 상황을 넘어 나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영적 시야가 있어야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늘 말씀을 통해 교정 받으며 시온성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멀리 바라보고 끝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고백이 가능한 겁니다. 그럴 때만 이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놓일 때에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붙들 수 있는 겁니다. 평소에 시온성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상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매몰되고 분주하게 살다가 위기와 어려움이 딱 닥치면 눈앞이 캄캄해져서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죠.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여겨지며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니까 허둥대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애굽을 붙들고 나를 건져줄 것처럼 착각하고 살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처한 상황이 왜곡되고 과장되면 내가 싸우는 적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거기에 압도 당하여 두려움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눈에 보이는 세상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은 거룩함과 구별됨을 잃어버린 삶이자 그 끝은 심판과 멸망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의 반복적 경고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종종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매달리고 눈앞에 것들만 바라보고 살아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분주하다는 핑계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계속해서 몰입하고 눈앞에 것들 것 처리하라고 정신이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인생에 큰 어려움과 위기가 다가오면 눈 앞이 캄캄해져서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며 도움을 구하다가 무너지는 겁니다. 세상을 향하여 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기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피하고 기대는 놀라운 역사를 삶에서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될 길이라는 것을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실패를 통하여 우리에게 간절하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바라보고 믿는가….이게 다른 존재입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이 처한 상황과 환경은 비슷할지 모르고 살아가는 일상은 비슷할지 모르나 그 가운데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죠. 눈앞에 있는 현실만 매몰되어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생과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넘어 저 광활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고 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생이 다른 겁니다. 나의 일상에서 시온성을 주목하고 내 눈이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게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죠. 그래서 평탄할 때나 위기의 때 내가 붙들고 믿을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고 내가 의지하고 나를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하나님에게 달려가고 하나님에게 피하는 겁니다. 주어진 현실과 상황에 내 모든 것을 매몰시켜 것이 아니라 그 주어진 상황과 현실을 넘어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바라보는 눈이 나를 살리는 것이죠 여호와는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하실 것이라….이 세상은 내가 스스로 강해져서 내가 스스로를 지키고 위기도 스스로 빠져나와야 된다고 가르치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강해져야 되고 내가 더 높아져야 되고 다른 사람을 밟아서라도 스스로 살아 남아야 한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구하실 것을 믿고 사는 겁니다. 스스로 강해지려는 삶을 내려놓고 주님의 강하심에 내가 묶이며 주님의 공급하심에 내가 묶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위험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고백하고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심을 고백하는 것이죠. 이사야 선지자 이름의 뜻 기억나십니까? 이사야 이름 자체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이 없고 내 스스로 강해지려는 것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힘에 내가 묶여 살아가는 삶에만 소망이 있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건지심과 구원하심은 완전하며 확실하며 언제나 최고의 것을 주십니다. 이 놀라운 고백,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심의 고백이 내 삶에 현재형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 되심을 나의 삶에서 현재형으로 고백하는 것이죠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주목하며 살아가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눈앞에 현실이 전부인 줄 살아가는 이 시대에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사모하십시오. 그것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눈 앞에 현실이 중요하고 처한 상황과 환경이 중요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눈앞에 모든 현실에 내 마음을 다 빼앗기지 않고 매몰되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영적 시야가 넓어져서 위를 바라보고 멀리 바라보고 살기 원하며 끝을 바랍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눈앞에 처한 상황과 환경을 넘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시온성을 주목하여 살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이 위험에서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실 왕이심을 고백하며 그 고백이 내 삶에서 현재형으로 풀어지기 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만이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은 상대화 되기 시작하며 나를 힘들게 하는 적들은 왜곡되고 과장되지 않게 됩니다. 그걸 통하여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힘과 능력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피하며 그분께 기대며 그분을 통하여 힘과 능력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의 핵심인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멀리 바라보시며 끝을 바라보시며 하늘을 바라보시며 시온성을 바라보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은혜를 구하는 기도로 알려져 있는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는 기도와 동시에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가 섞여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를 향하여 패역하고 화를 부르는 백성이라고 경고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팔이자 구원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앙망하고 붙들어야 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환란 때에 하나님 대신 애굽을 피할 팔로, 자신들의 구원이라 믿었고,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향하여 도움을 구하러 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둔해지며 하나님의 불병거와 불말 대신에 애굽의 군대가 자신들을 앗수르의 공격과 환란에서 건져주고 보호해 줄 거라고 착각했기에,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유다에 이어 앗수르를 향하여 패역하고 화를 부르는 백성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럼 왜 앗수르를 향하여 ”화 있을진저…”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잠시 사용 받는 도구로서 막강한 군사력과 힘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인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마음껏 학대하고 마음껏 속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패역의 길로 질주했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내려왔을 때, 히스기야와 평화조약을 맺고 조공을 치면서 그들을 치지 않을 것으로 약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앗수르는 조공은 조공대로 받고 다시 군대를 보내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려고 하는 속임수를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학대하고 속이는 앗수르의 범죄를 하나님은 엄중히 보시는 이유는 그게 하나님을 학대하고 속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너희가 누구를 믿고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학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행한 것들을 다 기억하고 그날이 오면 반드시 갚아 주리라…. 그게 바로 “화 있을 진저” 라는 하나님의 앗수르를 향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오늘 말씀에 앗수르를 향한 심판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반복해 등장합니다. 황충의 떼같이, 메뚜기의 떼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갑자기 밀어 닥칠 것이며, 과거에 너희가 학대하고 속인 그대로 너희가 거두게 될 것임을 증언합니다. 샤론이라는 곳은 그 당시에 가장 넓은 곡창 지대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샤론의 땅이 사막과 같이 황무지가 될 것임을 증언합니다. 역사가 증언하 듯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앗수르는 말씀대로 그렇게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에 심판과 함께 오늘 말씀에는 시온의 죄인들이 등장합니다. 시온의 죄인들은 누구냐 하면 남 유다와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면서 화를 자초하고 망하는 길로 갔던 그 백성들을 지칭합니다. 시온의 죄인들을 오늘 말씀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지 않고 경건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며 눈 앞에 애굽을 의지하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결국 이방 사람들과 똑 같은 자들이 된다는 겁니다. 이 시온의 죄인들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과 같이 심판의 때에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될 거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날이 오면 앗수르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고 시온의 죄인들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의 때에 누가 살아남는가?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남은 자들이죠. 그 모든 심판이 임할 때 결국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회복되며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오직 정직히 말하는 자, 뇌물을 받지 않고 악을 바라보지 않는 자,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붙들었던 남은 자들만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어떤 날이 되는 겁니까? 구원의 날이 되고 회복의 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 높은 곳에 거하고, 견고한 바위가 그들의 요새가 되고 하늘 양식과 물이 끊어지지 않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고백들은 모두 누가 하는 기도들이냐 하면 바로 이 남은 자들이 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심판과 화가 밀려오는 그 임박한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남아 있는 순전한 백성들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번 주일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추수 감사 주일을 준비하며 기억해야 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해를 마무리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날이라는 고백입니다. 동시에 추수 감사 주일은 알곡과 가라지가 홍해가 갈라지는 나누어지는 영적 추수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영적 추수를 하실 때, 알곡과 가라지가 갈라지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갈라질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듯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만을 정말 구원으로 붙들고, 예수 보혈을 의지하며 그 남은 자가 되어 알곡으로 천국 창고에 들어가는 꿈, 이게 우리가 추수 감사 주일에 기억해야 될 놀라운 영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환란과 심판과 마지막 때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면하게 하실 자들 그 심판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로 건지실 자들은 누굽니까? 바로 오직 예수 안에 예수 보혈 아래 있는 자, 오직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자, 그들 만이 높은 곳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편에 서시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시며 예수 보혈만 의지하고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남은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나의 삶이 주님의 풍성한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놀라운 역사, 하나님께 칭찬 받고 알곡으로 천국 창고에 들어가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실 왕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는 것을 약속의 말씀으로 배웠습니다. 때가 차면 그 때에 우리에게 오실 메시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는 삶, 오실 그분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삶이 바로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 때를 준비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갔으며 눈에 보이는 일상에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았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둔감하며 다가올 그 때를 준비하지 않은 남 유다와 예루살렘을 안일하고 염려 없는 여인들로 동일하게 세번이나 반복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라고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안일하게도 염려 없이 살아가는 여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심을 믿으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며 이 땅에는 넘어서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날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 날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없으면서 안일하게 염려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 미래에 대해 안일하게 염려하지 않고 사는 게 문제가 되는가? 여기서 염려 없는 그 삶의 본질은 장차 올 그날과 메시야가 오심, 그 날과 함께 다가올 심판의 날이 있음을 망각하고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끝없이 그들의 관심은 오직 이 땅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과 일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가 있다는 것도 망각하고, 장차 올 그날에 심판과 그 모든 것들 것을 치리하실 때가 온다는 것도 망각하고 안일하게 아무런 대비 없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도 아무런 염려 없는 자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여성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준비 없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얘기하고 있는 경고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렇게 안일하게 그 날에 대한 대비와 준비 없이, 염려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 날이 오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이며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인 깨어 있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들과 같이 안일하게 염려 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심각하게 경계하시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근원의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교만에서 찾고 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스스로 자신을 중심에 두려고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장차 올 그 날이 있다는 것도 망각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땅의 것들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갑자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눈 앞이 캄캄해져서 여전히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들에게 피하며 망하는 길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눈에 보이는 애굽에 기대며 피하고 의지하고 살면서 이렇게 살면 그냥 괜찮겠지 안전하겠지… 그렇게 안일하게 태평하게 아무런 영적 대비와 준비 없이 살다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속히 오면 한꺼번에 망하게 되는 것을, 당황하고 가슴을 치며 모든 것이 무너지는 처참한 현장을 경험하게 될 것을 왜 모르냐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이 땅에 익숙해지고 이 땅에 그냥 젖어 사는게 당연시되면서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지막 때가 온다고 경고했던 노아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던 사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과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며 경시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 영적 무감각의 모습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문제를 깨닫기 원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함과 구별됨을 잃어버릴 때, 이 세상을 향해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자들이 된다는 겁니다. 영적 대비 없이, 영적 준비 없이 다가올 그 날에 대해 염려 없는 자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은 그날에 메시야가 오시고, 그 날에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한 왕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32장 앞부분에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약속으로 보내실 그 메시아가 오시면 광야 같은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임하게 되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 때 광야가 한 순간에 기름진 옥토가 되고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엮게 되리라… 거의 복음서와 사도 행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말씀입니다. 신약의 그 모든 약속의 말씀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와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영이 하늘에서부터 우리에게 임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은 눈에 보이는 강대국들을 통해 오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고, 위에서부터 하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임하는 사건이라는 거예요. 내 인생의 진정한 화평과 평안과 안전은 하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임하는 영적 사건이라는 것이죠. 어둠이 물러가고 두려움이 물러가고 하늘의 빛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서 주시는 놀라운 화평과 평안과 안전입니다. 그 날에 마침내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 때 광야 같은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하고 사모하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는 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며 진정한 노래이며 진정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 여인들과 같이 다가올 그 때에 대한 대비도 없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만 집중하며 이 땅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안일하게 아무런 염려도 없이 살아가는 영적 무감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우리를 깨어 주시기 위해 오늘도 위로부터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지만 눈과 마음을 다가올 그 날을 주목하며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천국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삶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자, 다가올 그 날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임하실 때 하늘의 영이 임할 때, 그분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는 화평과 평안과 안전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찬송의 놀라운 고백과 같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그 놀라운 하늘에서 부어지는 평화가 우리 가운데 펼쳐지며 경험되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흘러 나오기 원합니다. 안일하게 그 날에 대한 염려 없이 살아가는 대신 위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영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준비하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백성, 기름을 준비하는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1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애굽을 의지하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경고하시며, 애굽으로 도움을 구하려 내려가고 의지하고 피하는 것은 도와주는 나라도 망하고 도움 받는 나라도 망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32장은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애굽 대신 바라보고 붙들어야 할 생명줄과 같은 존재가 하나님이 보내실 한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하고 붙들고, 인생을 걸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한 왕 되신 메시아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은 39장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신데 동시에 그 사이사이에 소망과 구원의 소식을 주십니다. 즉 그 날에 보내실 하나님의 왕 메시아가 있다는 것을 통하여 심판 가운데 소망과 구원의 소식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메시야, 참 통치자이자 한 왕이 누구인가? 이 땅에 오셔서 통치하실 메시야는 하늘의 공의로 통치하시며 하늘의 정의로 다스리실 왕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구하고 사모해야 할 것은, 참 왕이신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공의와 하늘의 정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늘의 정의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완성하실 진정한 왕 메시야를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소망을 붙들고 내 인생을 의탁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임을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의 소망은 내 상황과 환경이 조금 나아지는 게 아니라, 참 왕이신 메시아가 오시는 것임을 정확하게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가 공의로 통치하고 정의로 다스릴 왕으로 오신다는 말은, 지금 남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는 왕들이 있지만 공의로 통치하지 않고 정의로 다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매일 살아가는 세상은 공의와 정의가 아닌 이익을 위해 늘이고 줄이는 왜곡되고 변질된 악한 일들이 판치는 곳입니다. 처음부터 아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굽게하는 것도 다반사고, 의도는 좋았지만 인간이란 늘 자기 생각을 따라가고 내 입장에서 바라보는 정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 참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적 위기를 경험하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문제와 위기의 본질은 결국 공의의 부재이며 정의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군사력과 정치력의 약함과 부재가 국가적 위기를 가져왔다고 믿고 있는데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직면하는 위기의 본질은 정치력과 군사력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라는 겁니다. 국가적 위기의 본질이 군사력과 정치력에 있다고 여기기에, 자꾸 눈에 보이는 큰 세력, 나보다 더 큰 세력인 애굽을 향하여 피할 그늘이나 도움을 구하려는 모습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내 부족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보완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애굽에 기대고 의지하는 삶, 눈에 보이는 강함을 통해 내 안전을 지키려 하는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지, 얼마나 허무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참 왕이신 메시아가 오시면 피할 바위가 되시고, 폭우를 가리게 되고 많은 땅에 시냇물 같으며 곤비한 땅에 큰바위 그늘 같다는 것입니다. 이걸 통하여 알게 되는 지금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삶의 자리는 뭐라는 겁니까? 광풍이 가득하고 폭우가 가득하며 메마르고 곤비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나 낙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깨지고 아프고 눈물 나는 곳입니다. 삶의 광풍과 폭풍우가 있으며, 메마르고 곤비한 땅과 같은 곳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 세상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풍랑이 일고,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오며, 메마르고 곤비한 땅과 같이 힘든 겁니다. 그런 나의 메마르고 곤비한 마음에 영혼의 해갈을 주시고 생명수를 부어 주시는 분, 광풍을 피하게 하시고 두려움과 불안을 물러가게 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가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피하고 기대해야 될 의지해야 될 언덕은 곧 무너질 언덕과 같은 애굽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 분이야 말로 우리가 기대하고 기다리며 의지하고 붙들어야 할 참 왕이시고 참 메시야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실 이사야 32장에서 예언하신 그분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모든 것을 잠재우고 모든 것을 완성하실 그 한 왕인 메시야는 사실 장차 오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심에 대한 그림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행하신 많은 기적과 이사는 오늘 말씀 이사야 32장에 그림자와 같이 예언된 메시야의 모습을 그대로 완성하는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가운데 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풍랑 가운데 걸어가는 역사도 복음서에서는 보여주신 겁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분이야 말로 바로 이사야 32장에서 예언하신 그 메시아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른 땅에 생수를 부어 주시겠다 약속하시면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나에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사야 32장에서 예언된 참 왕이자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모든 말씀들과 역사들은 구약 말씀의 성취로서 참 왕이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다 이루시는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질서와 우선순위가 바뀌게 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통해 질서와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을 눈과 귀와 마음과 혀가 바뀌는 것으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고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고 곧 무너질 애굽에게 기대며 피하게 되니까 그들의 눈이 감기고 그들의 귀가 막혔으며 마음이 딱딱해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가 다 무너져 육의 삶만 땅의 삶만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약속하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이 무너진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를 다시 한번 세워 주신다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 눈과 귀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정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목해야 될 것이 무엇이고, 내가 흘려 보내야 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인생을 걸고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내 눈을 들어 보고 주목해야 할 것이 하늘의 일이며 하나님 나라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며 새로운 우선순위와 영적 질서로 재편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내 눈과 귀가 열리고 변화되며 내 마음이 깨달아지며 혀가 주님이 원하시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수많은 치유와 기적의 역사를 통하여 눈이 먼 자들을 고쳐 주셔서 보게 하시고, 귀가 먼 사람을 듣게 하시는 역사를 치유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병을 고치신 치유의 역사만이 아니라 이사야 32장에서 보여주신 장차 오실 메시아의 역사를 현재형으로 임하게 하신 하늘의 역사인 것입니다. 내 인생에 처한 위기 상황과 어려움에 본질은, 군사력과 정치력의 부재나 가진 재물이 적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진 위기입니다. 그분이 오셔야 정의와 공의가 회복되며 그분에게 피하고 그분을 도움으로 여길 때 내 삶에 놀라운 은혜가 경험되며 그분이 내 삶에 오셨을 때 내 눈과 귀가 변화하며 열리고 내 마음이 뒤집어지고 변화되며 내 혀가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 오실 메시아가 하나님의 통치로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심을 사모하며 그 분이 오셔서 가져올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는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며 폭우를 가리는 곳이 되며 많은 땅의 샘물이 되며 곤비한 땅에 그늘이 될 것입니다. 애굽을 의지하며 세상을 의지하는 삶에서 돌이켜 우리가 바라봐야 될 소망은 오직 오실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 메시야가 오심으로 내 마음이 완전히 변하게 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변화되면서 조급함이 사라지고, 근심과 두려움이 밀려가며 마음에 하늘의 평안이 임하는 기적을 경험하는 겁니다. 내 도움과 기댈 그늘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그가 보내신 메시아임을 제대로 알게 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는 겁니다. 바라기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고 사모하며, 우리의 소망되신 그 분이 가져오실 통치와 다스림을 사모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p오늘 말씀은 30장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경고하신 말씀과 거의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붙들지 말라는 것을 반복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똑 같은 얘기를 반복하시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으로 경고했다는 것은 한두 번해서는 이 하나님 백성의 태도와 삶의 스타일이 바뀌어지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백성이 성경 말씀을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단 한 번에 바뀌고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건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업신 여기는 불신앙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함과 패역함은 하나님과 충돌하고도 자신들이 옳은 줄 알고 말씀이 들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아니하며 무시하고 흘려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도움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할 백성들이 말씀 대신 눈에 보이는 강한 것들을 의지해서 그런 것들이 나를 지켜줄 것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인생을 기대며 망하는 길로 여전히 질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30장 말씀에 거의 비슷한 내용을 31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도움을 구하러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그들의 영적 상태를 경고하시며 하나님께서는 다시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며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순리를 거역하고 하늘의 화를 부르는 인생을 왜 계속 살아가고 있느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경고입니다. 국가적인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은 안 듣고 도움을 구하러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를 부르는 인생이라 경고하십니다. 애굽으로 도움을 구하러 가는 것을 화를 부르는 인생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에게 피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은 안개와 같은 허상이기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본인들도 망할 나라이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나라도 도움을 받는 나라도 그 끝은 멸망과 심판인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도움 받으러 내려가는 것은 그들의 과거의 아픈 역사, 즉 애굽의 노예 생활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결국 도움을 빙자해서 내려갔다가 완전히 노예가 돼서 망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이미 역사를 통해 경험했던 민족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과거에 노예 생활로 그렇게 호되게 경험을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직접 경고해주고 계신데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또 그 어리석은 길을 택해 애굽으로 도움 받으러 내려가고 있는 겁니다.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는 인생의 본질적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는데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는 겁니다. 하늘의 도움과 영적 도움이 아닌 육의 도움이라는 겁니다. 바람 한 번 불면 다 날라가고 안개와 같이 조금 있으면 사라질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돕는 자도 도움을 받는 자도 얼마 안가 다 함께 엎드러져 망하게 될 걸 왜 모르냐는 겁니다. 얼마 후면 다 무너질 거기에 인생을 걸고 그 강함에 나의 모든 인생을 의탁하며 안전할 걸로 착각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람 한 번 불으시면 다 무너질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면 내 영적 시야가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계속 기웃기웃 거리고, 눈에 보이는 애굽에, 세상에 어떤 세력에 도움을 구하려 내려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피하는 대신 애굽의 도움을 받으러 내려가는 그 본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러 내려가는 본질을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의지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병거와 마병의 강함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이라고 엄중히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보호하심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애굽의 바람 불면 날라가는 병거와 마병의 강함을 의지해서 여기 기대면 우리가 안전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바로 화를 부르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피하고 의지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병거와 마병에 기대고 의지하면 결국 그 끝은 망하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인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본질적 문제는 상황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갑자기 옆에 큰 나라가 우리를 치려고 한다는 게 위기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위기의 본질은 도와 주실 분이 누군지 정확하게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며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마음에 새겨 하늘의 힘을 의지하는 백성 되길 주님은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가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하나님 백성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겁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했기에 실제로는 의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말씀을 주셔도 그들은 듣지 않았고 흘려 버리며, 변하지 않고 망하는 길로 질주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불신앙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태도, 하나님을 도움으로 여기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애굽으로 내려가 도움을 얻으려는 그 결과 그들은 화를 부르는 인생의 결과로 하나님의 엄중한 재앙과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보다 눈에 보이는 병거와 마병을 더 의지하고 기대고 살아가려는 삶 자체가 불신앙과 어리석음의 인생이고 망하는 인생임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 겁니다. 도움을 준 나라도 도움을 받은 나라도 다 자빠지고 무너지게 되는 것을 처절하게 망하는 심판으로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반복해도 듣지 않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패역함과 교만함은 우리와 무관한 모습으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이 경고는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엄중한 경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게 선이고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게 악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도움으로 여기지 않는 게 악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대체물을 찾으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피하고 의지하며 도움을 구하려 내려가는 것 자체가 악한 삶입니다. 그렇기에 의로운 삶과 선한 삶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선한 일이고 하나님께 피하는 게 선한 일이며 하나님을 도움으로 여기는 자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기에 회개는 하나님 말씀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경시하며 하나님 대신 다른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다른 것들로 피하며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회개하는 겁니다. 회개는 다시 한번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피하며,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의 도움이 나에게 가장 큰 힘과 도움임을 믿고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하나님만을 나의 피할 그늘로, 하나님만을 나의 도움으로 붙들고 의지하며,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의 도움을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도움되심을 거절하고 눈에 보이는 애굽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으려 내려가 망하는 길로 질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무리 반복해 경고해도 들을 귀가 없었고 무시하고 경시했습니다. 그 어리석음과 패역함에서, 망하는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서 도움과 피할 그늘을 찾는 선한 인생,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 유다와 예루살렘은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애굽을 붙들고 자신들의 생명이 보호될 것처럼 안전할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앗수르라는 큰 적이 있을 때 눈앞이 캄캄해져 허둥대다가 하나님께 피하는 대신 애굽에게 피하고는 우리는 괜찮겠지… 착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슬프게 했습니다. 이사야 30장 말씀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이 얼마나 심판과 멸망을 자초하는 일인지에 대해서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30장 뒷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깨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너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앗수르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애굽이 구해 줄 것 같이 믿고 있기만 너희도 망하고 도와주는 애굽도 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남유다와 예루살렘 같이 갑자기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오면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달려가 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대신 애굽으로 대표되는 세상에, 눈에 보이는 어떤 힘에 기대며 피하며 위기를 모면하고 그걸 통하여 내가 안전하겠지…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였다는 것이고, 공동체가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면 그 공동체가 직면하는 것은 심판과 멸망 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그림은 바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모습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의 진노…그의 손…그의 입술….그의 호흡….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주목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절대 이길 수 없었던 같았던 거인 앗수르를 이렇게 한 날에 치신다는 겁니다. 사실 앗수르는 한 때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 북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을 깨우시는 심판의 도구로 그들을 잠시 사용하셨을 때,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되는 도구임을 망각하고 본인들이 심판의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다가 버림받고 심판에 직면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몽둥이와 막대리고 치셔서 앗수르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도벳과 같이 불사르는 곳이 되며 멸망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주목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묵상하며 살았을 때, 그 날이 올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자들은 그날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앗수르를 심판하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앗수르를 치실 것이다…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치시고 심판하시는 그 모습은 마치 출애굽 하기 직전에 유월절전날의 심판과 거의 비슷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든 밤에….” 는 애굽과 바로왕에게 하신 마지막 재앙, 모든 첫째 아들을 하나님이 심판으로 죽이시는 그 유월절의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절기를 지키던 밤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었던 자들, 즉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날에 한 가정도 예외 없이 한 순간에 큰 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온 애굽 땅에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며 문설주를 피를 발랐던 집에는 그 심판과 재앙이 넘어가게 되는 구원과 회복의 날이었습니다. 그 심판과 재앙이 어린 양의 보혈로 인해 넘어가게 되어 건짐을 받은 날이었기에, 마음에 즐거워하며 기쁨과 찬양을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찬양과 기쁨의 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에게는 눈물과 통곡과 심판의 날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치시는 심판의 날의 양상이 똑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혈, 신약의 그림으로 보면 십자가에 예수님의 보혈 아래 있는 자들은 노래하는 날이고 피리를 부는 날이며 마음이 즐거워하는 날이며 구원과 회복을 얻는 날이라는 겁니다. 심판과 구원으로 딱 나눠지는 그날에 너희가 하나님 편에 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께 묶여 있는 자가 되며 어린양의 보혈 안에 있어야 됨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애굽을 붙들지 말고, 오직 유일한 생명줄인 하나님 기대어 하나님이 친히 앗수르를 심판하심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너희의 큰 대적 앗수르는 애굽이 싸워 이길 수도 없고, 너희 스스로 싸워 이길 수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친히 싸워 물리쳐 주시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너희가 살 길은 하나님에게 피하는 것 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친히 치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끝까지 그날에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대신 애굽을 붙들고 의지한 자들은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자들에게 그 날은 구원과 회복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우리가 집중해야 되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진 현실 너머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의 시선을 주목하는 것이고, 저 끝을 향해 멀리 바라보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이 땅을 넘어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 눈에 처한 상황과 환경을 넘어 함께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대적을 한순간에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싸워 이기시고 해결해 주심을 믿음으로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과 같이 끊임없이 앗수르에 벌벌 떨고, 여리고 성에 벌벌 떨고, 골리앗에 벌벌 떨려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눈에 보이는 썩은 동아줄인 애굽을 붙들고 허망한 것 가운데 나는 괜찮을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에 직면하는 거인 골리앗, 거대한 성 여리고, 거대한 나라 앗수르는 결코 내 스스로 싸워 이길 수 없는 적들이며, 오직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적의 방법 외에는 풀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워 벌벌 떨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향해 피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존재를 두려워하며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애굽을 붙들고 안개를 붙들고 내가 괜찮은 것처럼 착각하며 허망한 인생으로 끝나게 되는 겁니다. 구원의 주님이산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피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기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찔러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선명히 새기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를 깨우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 진리 가운데 거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길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이 싸워 이겨 주시는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주님께 영광 돌리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 현재형으로 풀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의 큰 구조를 보게 되면 앞부분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경고, 40장 이후부터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에도 심판과 멸망의 이야기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사이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짜 마음인 하나님 백성들의 회복을 위한 메시지를 두셨습니다. 그런 말씀의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30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배웠습니다. 복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패역한 백성, 화를 자초하는 백성으로 부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안타까우셨던 겁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임박한 심판 밖에 없다며, 다가올 심판과 멸망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엄중한 심판에 대한 경고 말씀을 주셨으면 거기서 딱 끝나야 될 것 같은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꼭 하나님이 두 마음을 품으신 거 같은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강력한 심판과 멸망이 그들에게 임한다 말씀하시고는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라…선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시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에 벗어나 패역하고 화를 자초하는 인생을 사는 이스라엘은 쓴맛을 보고 완전히 멸망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딱 끝나야 할 거 같은데,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려고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이걸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심판의 진짜 의도가 뭔지를 알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심판하신다고 경고하시는가? 망하기 전에 돌아오라고 지금 여호와 하나님은 애타게 기다리시는 겁니다. 뭐 하시려고? 은혜 베푸시려고….이게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너희를 기다리고 있어…너희를 위해 은혜 부어주려고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어….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답답할 만큼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냥 심판에 직면하다….경고의 말씀으로 딱 끝나면 깔끔할 거 같은데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분명히 임박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 앞에서 여전히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오늘도 문밖에서 돌아올 백성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게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 말씀을 저버린 이스라엘, 패역함과 화를 부르는 삶으로 인해 임박한 심판에 직면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정의이고, 우리를 그렇게 기다리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 또한 바로 하나님의 정의라는 겁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을 향해 피하며 스스로 애굽에 기대어 강해지려 하는 악한 백성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 하나님을 통과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 안에서 안전할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심판과 멸망인 게 분명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동시에 끝까지 그들을 향하여 은혜 베풀려고 기다리시며 끝까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또한 하나님의 정의라는 겁니다. 이 이중적이며 모순과 같은 하나님의 정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진짜 본심을 알고 깨달을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 베푸심을 이사야 선지자는 임박한 심판과 함께 동시에 우리에게 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 인생에 교만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마음도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긍휼을 베풀려고 일어날 준비를 하시는 하나님, 여전히 사랑의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보고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위기와 어려움이 왔을 때 내가 쓰러지고 넘어졌을 때 여전히 나에게 은혜 베푸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게 믿음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어떻게 하신다고 증언합니까? 26절을 보면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온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올 때 하나님은 먼저 혼내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떠나 가지고 애굽에 기대니까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지…내가 너희들에게 몇 번이나 강력하게 경고했냐? 이러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매맞은 자리를 고쳐 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에게 소망이고 그게 우리에게 위로임을 것을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 대신 애굽을 붙들고 허망하고 무익한 애굽의 기대여 살다 멸망의 길로 질주하다가 끝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탄식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며 애타는 하나님의 마음이 오늘 우리 마음에 깊이 담기기 원합니다. 교만과 불순종을 향한 심판이 전부가 아니라 심판을 통해 회복과 구원의 길을 주시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심판 전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시는 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다시 일어서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족하고 충만한 인생,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을 통하여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인생으로 돌아오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시는 겁니다. 혼내려고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려고, 긍휼히 여기시려고 기다리십니다. 상처를 싸해 주시려고 맞은 자리를 고쳐 주시려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것이 놀랍게 회복되는 역사로 돌아가는 귀한 은혜가 우리 가운데 현재형으로 펼쳐 지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을 향해 패역한 백성이자 화를 자초하는 백성이라고 경고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 오죽 하나님이 답답하시고 슬프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는지를 새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강대국인 애굽을 의지하려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계속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그들이 왜 하나님 대신 자꾸 애굽을 의지하려 하는가? 그건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는 영적 문제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교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불신앙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말씀 자체를 듣기 싫어하는 교만한 자식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묻지도 아니하며 눈에 보이는 바로왕에게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있으며 그들의 교만과 불신앙의 태도가 결국 망하는 길로 질주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심판을 향해 질주하는 그들의 교만과 불신앙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내가 취사 선택해 듣겠다는 태도입니다.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거짓된 것을 보여도 되니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취사 선택해 듣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메세지 중에 죄, 심판…이런 듣기 불편한 말씀들은 전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진리냐 비 진리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긍정적인 얘기 좋은 얘기만 해 주고, 위로만 해주고 괜찮다는 얘기만 해달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부드럽게 sugarcoat해서 내 귀에 듣기 좋게 만든 것만 듣겠다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MSG 친 내용이어도, 심지어 거짓도 상관없으니까 우리를 즐겁게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왜곡과 변질로 만드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 하는 백성들이 되게 만듭니다. 바른 길을 버리며 말씀에서 돌이키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만드는 겁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백성, 말씀을 취사 선택해 듣는 백성은 결국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는 인생이 되며 바른 길과 진리의 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길 대중이 분위기 따라 가는 길을 선택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만인이 가고 대중이 가는 길, 내가 원하는 길을 가니까 그 끝은 심판과 멸망으로 무너지는 것 밖에 남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안타깝게 그들을 향하여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도움이 된다고 착각하며 의지하는 애굽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익한지를 알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을 붙들고 있으면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도움은 무익하다는 것, 결국 너희를 함께 망하게 만들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애굽으로 피해 도움을 구하고 붙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끝은 심판과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너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결과이며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애굽을 붙들 때 너희가 직면하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가 될 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게 된 영적 결과를 직면하게 될 거라는 겁니다. 그 날이 도적과 같이 임하며 홍수가 나듯 아무런 대비 없이 완전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 모든 말씀은 아무런 대비 없이 홍수 같이 찾아온 심판 앞에 그들이 처참하게 당하게 되는 현실을 증언합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빗다가 규격 미달, 함양 미달이면 과감하게 던져서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함량 미달의 하나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사정없이 깨뜨리고 무너뜨리시겠다는 겁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들이 애굽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버린 결과이며,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을 듣지 않고 떠난 영적 결과임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이 문제가 과연 옛날 남유다 백성들만의 문제일까요? 지금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은 이 경고에 과연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이라는 것이 중요하기에 사람들에게 들리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리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강조될수록 말씀이 물타기 되는 왜곡과 변질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 마음에 너무 부담 안 주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노력하는가 하면, 듣기 좋은 말, 부드러운 말, 위로해주고 공감하는 말에만 집중하다 보면 말씀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은 점점 흐려지고 하나님 말씀이 왜곡과 변질이 되며,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을 의지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영적 현주소이자, 하나님 대신 자꾸 세상을 의지하려는 이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현주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말하라…내가 듣고 싶은대로만 말하라….외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는 광야의 예언자와 같은 선지자의 용기는 때로는 미움 받을 용기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부드럽게 심지어 그게 거짓말이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내가 듣기 좋은 얘기, 내가 원하는 얘기만 해달라는 민심의 소리를 넘어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직면하라 외치는 것은 때로는 미움 받을 각오를 하는 용기입니다. 잠잠히 조용히 있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뜻가운데 조율되어 힘을 얻게 되는 백성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원하지 않고 거절할 때, 하나님 대신 세상을 의지할 때,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세상의 말에 휘청거릴 때, 결국 아무 유익도 없는 커다란 애굽을 붙들고 함께 멸망과 심판의 길로 질주하는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똑 같은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 심판에 직면하는 여리고성으로 가는 기차에 앉아 같이 망하는 비참한 인생이 된다는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경고를 나와 무관한 이야기로 듣지 말고,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나에게 주시는 경고로 알고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지 말고,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나를 찌르고 깨우치는 진리와 참된 말씀 앞에 내가 엎드리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참된 말씀 앞에 우리가 굴복하며 그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바른 길을 나아가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기를 열망하십시오. 그럴 때에만 허망하고 무익한 세상을 붙들고 의지하며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는 이 비참한 결과를 피하게 될 줄 믿습니다. 나를 도와주고 건져줄 것 같이 보이는 애굽의 도움, 세상의 도움,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의 모든 도움들은 결국 헛되고 무익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세상에 인생을 믿고 의지하려는 어리석음에서 건짐을 받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고 힘 되심을 믿으며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바른 길을 나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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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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