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7장 말씀은 이사야가 바라봤던 마지막 때 그날에 있을 여러가지의 환상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피크의 장면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모든 원수를 한 번에 제압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2절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모든 말씀은 포도원의 노래에 대한 증언입니다. 사실 27장 전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1절 그리고 나머지로 나눌 정도로 1절이 가장 피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짧은 한 절 말씀에 농축하여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짧은 1절의 말씀을 한 단어, 한 단어씩 나누어 묵상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과 승리의 역사를 함께 마음에 단단히 새기면 좋겠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이 뱀, 리워야단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칼로 죽이시며 심판하실 리워야단은 누구인가? 먼저 리워야단…이라는 말은 “비틀다”는 의미를 가진 아랍어에서 파생된 히브리어로 알려져 있는데 구약 성경에서 여섯 번 정도 등장합니다. 그래서 고대 중동의 여러 신화에 나오는 뱀, 혹은 악어나 용으로도 알려진 존재가 리워야단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적국을 상징하기도 했고, 큰 군대이자 약탈자 앗시리아를 상징하는데 쓰이기도 했습니다. 욥기 41장에는 리워 야단은 악어로 표현하고 있고, 가장 깊은 물 속에 사는 악한 뱀, 악어, 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이라는 건 죽음을 먹고 사는 강력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바다가 고대 시대에는 죽음과 혼동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거기에 가장 깊은 바다는 혼돈과 죽음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비틀다”는 아랍어의 의미를 따라, 오늘 말씀에는 리워야단은 꼬불꼬불한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꼬불꼬불하다는 것은 단순히 뱀의 모슴이 꼬불꼬불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리워야단이라는 뱀이 가지는 특징 자체가 바로 진리와 사실을 이렇게 비틀고, 하나님의 말씀을 꼬불꼬불하게 왜곡하는 존재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괴물과 같은 꼬불꼬불한 뱀인 리워야단은 결국 하나님의 대적자 사단 마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 혼란과 죽음이 있는 깊은 어둠에서 사는 존재, 그게 바로 리워야단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와 에덴동산에서 만나 미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속이고 왜곡시키는 뱀이야 말로 이 꼬불꼬불한 뱀으로 그려지는 사단 마귀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단, 마귀의 특징인 속이는자, 미혹하는 자, 대적자…이 모든 것이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에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했던 그 뱀, 꼬불꼬불하게 왜곡과 미혹을 일삼고, 깊은 어둠에서 죽음 가운데 죽음을 먹고 살아가는 그 존재가 바로 리워야단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 그날에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속이고 왜곡시키고, 사람들은 미혹하는 꼬불꼬불한 뱀인 리워야단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그를 죽이신다… 그를 처단하고 멸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눈물짓게 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한칼에 심판하신다고 증언합니다. 그게 바로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의 성취라는 겁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이시고 심판하시는가를 주목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의 크고 강한 칼로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칼로…사람의 칼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칼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그 칼로…이 모든 주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그 하나님의 칼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대단한지를 이사야 선지자가 가지고 있는 최상급의 모든 말을 다 동원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칼은 모든 만물이 떠는 칼이고 어떤 것에도 무뎌지지 않는 견고한 칼이자, 절대 깨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는 강한 칼이자,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칼입니다. 그렇게 견고하고 크고 강한 하나님의 칼로 바로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 악한 사단 마귀를 한 번에 죽이시고 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예수님은 돌려 말씀하시지 않고 아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이루시는 가장 중요한 일, 우주적인 역사는 뭡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마귀를 멸하시는 겁니다. 마지막의 때, 그날에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칼로 꼬불꼬불한 뱀인 리워야단을 죽이시고 멸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마귀가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여기서 마귀를 싸워 이기는데 사용한게 뭐라고요? 자기를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신약 성경에서 좌우의 날선 검으로 증언하는 겁니다. 사단 마귀를 쳐서 이기는 하나님의 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래서 사단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에 하나님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승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사단 마귀에게 미혹 받으시고 시험 받으실 때 다른 여러 방법들이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사단의 미혹과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게 바로 장차 일어날 마귀의 일을 멸하시게 될 때도 하나님의 검인 말씀을 통해 이루실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는 겁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는 하나님의 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사용하는 것을 요한 계시록 12장에서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피와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증언합니다. …already but not yet….우리 눈에는 마귀의 일이 아직 완전히 멸하져 진 것 같이 않은 것처럼 보이고, 여전히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거 같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루시게 될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already…시작된 겁니다. 그 마귀의 일이 멸함이 시작되어 사단 마귀는 결박 되었고, 마지막 때에 바로 하나님께서 그 심판의 칼로 완전히 심판하시고 멸하신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사단 마귀의 권세를 미혹을 이기고 멸한다는 의미는 바로 어린양의 보혈로 요약되는 복음의 핵심 십자가와 부활을 붙들고 어린양의 피를 말씀으로 선명히 붙들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끝이 있고 심판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럴 겉 같다는 불분명한 가능성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신 분명히 직면하게 될 현실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심판은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이루어짐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마귀의 일을 멸하신 예수님의 승리가 이미 시작되었고, 마지막 때에는 그 승리가 완전히 완성되는 것이죠. 그 날, 마지막 때에 일어날 놀라운 승리, 하나님의 검으로 리워야단은 완전히 심판하고 멸하시는 분명한 일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끝이 어떻게 될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것이 현재를 이기고 버티는 성도의 힘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지금 현재만 바라보고 살아가지만, 끝에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까에 대한 결과를 이미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게 오늘을 버티고 믿음으로 나를 묶고 살아가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견고하고 강하고 큰 검을 통해, 리워야단으로 그려진 사단 마귀를 멸하고 마귀 일을 다 멸하신다는 것, 그게 바로 성도들의 현재를 버티게 하는 힘이고 하늘의 소망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 최후 승리, 바로 모든 원수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칼로 모두 심판하시고 멸하실 것을 분명한 말씀의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 분명한 약속을 붙들고 최후 승리를 믿으며, 세상의 시험과 유혹과 미혹을 말씀으로 이기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들려 하늘의 소망으로 오늘을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로 전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린 불순종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 지나가고 구원받은 남은 자들이 고백하는 찬양입니다. 계속해서 27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구약에 나타나는 요한계시록이라고도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 그리고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 이후, 27장까지는 그 날에 온 세상과 모든 나라에 이루어질 사건들에 대해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습이 요한계시록을 그림자와 같이 증언되는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알려져 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계속 배웠지만 그날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이자 이 땅에 왕들과 높은 군대들을 다 정리하시는 날이고, 의인과 악인이 홍해와 같이 갈라지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날은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고 멸망의 날이자 회복의 날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찬양을 드린다고 고백하는데, 유다 땅이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는 땅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에 찬양을 드리는 유다 땅은, 지역적인 유다 땅이 아닌 어디에 있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는 그 땅에서 그 날에 고백하는 찬양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우리를 구원하심에 대한 대한 찬양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통과하고 나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의 신분이 완전히 변하고, 애굽의 손에 죽을 뻔한 위기 속에서 건져 주심을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백성은 심지가 견고하다 그랬는데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은 마음이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한결같은 자, 변덕스럽지 않은 자, 내면이 단단한 자 입니다. 하나님만을 한결같이 신뢰하고 붙드는 심지가 단단한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하늘의 축복은 바로 하늘문을 여시고 하늘에서 주시는 평안이 그에게 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부어지는 하늘에서 주시는 평강을 놀랍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평안할 일이 하나도 없고 기뻐할 일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그 문제 가운데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주님의 평안이 내 삶에 임하고 내 삶을 압도하는 기적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 한결같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하늘의 복입니다. 더 나아가 그 날에 드리는 찬양은 온 열방이 주께 돌아와 구원받음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복이 아니라 온 나라와 열방과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하려고 오신 분도 아니고 이스라엘만 위한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 들어오기 원하시는 온 열방과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먼저 세우시고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해서도 아니고, 그들만 구원받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열방이 주 볼때까지 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도록 이스라엘을 먼저 선민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먼저 건져 주시고 먼저 선택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을 믿는 모든 열방들이 그 구원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실 거라는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성읍을 견고하게 바라보는 자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두손 들고 나아오는 자, 그들이 모두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자, 영적 아브라함 자손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신약에 그리스도가 이루실 놀라운 역사들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로 고백하며 인생을 의탁하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두셔서 그들이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문은 오늘 찬양과 같이 넓게 열려 있는 겁니다. 누구를 향하여? 예수를 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열방을 향하여….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민족을 향하여….그래서 그날에 이루어질 모든 열방과 모든 나라들이 예수 이름을 붙들고 돌아오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미 이사야는 우리에게 현재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는 땅이 유대 땅이고 거룩한 땅입니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 땅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는 유대 땅이자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주님의 성도들이 서 있는 이 땅이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명히 고백하는 곳이 되기 원합니다. 구원의 문을 활짝 열고 모든 열방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달리 우리 끼리만 잘 지내고 우리만 구원받는 거로 끝나는 것에 머물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통하여 구원의 문이 열려 있으며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 구원의 선물이 주어짐을 발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너희는 영원한 반석 되신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그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는 땅에서 하늘을 향해 찬양으로 드리는 놀라운 고백의 결론입니다. 내 인생의 복과 화, 축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은 결국 무엇을 통해 결정됩니까? 내가 한결같이 신뢰하는 붙드는 존재를 통해, 내가 의지하고 묶는 그 대상을 통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하고 하나님에게 내 인생을 단단히 묶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이 구원의 노래를 부를 자며,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내리며 하늘 소망을 붙들고 나아가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잠깐 왔다 사라집니다. 하늘의 것만이, 하나님이 주신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 영원히 남는 것에 인생을 집중하며, 한결같이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영원히 붙들고 살아 가는 참된 길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고 평안의 길임을 알려주시며, 이 길을 가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날에 유다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는 이 찬양이 저와 여러분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에 언젠가 우리가 직면하게 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고백의 찬양 되기 원합니다. 내가 왕이 아니라 여호와만이 왕되심을 선포하며, 내가 한 일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신뢰하며 나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이 내 인생의 결론되기 원합니다.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붙들고 그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에게 나의 인생을 단단히 묶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쌓여가는 죄에 대해서 방관 하실 수가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던, 주변 나라들이던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쌓고 살아가는 모든 나라들을 그날이 오면 심판하게 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죄를 쌓으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았던 그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돌무더기로 만들고 황폐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무너지게 만드셔서 영원히 건설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심판 가운데 직면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남은 자들에게는 그 날이 심판과 멸망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며 회복의 날이 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심판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죠. 그날이 임할 때 심판은 모든 것들이 다 황폐해지고 모든 것들이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것인데, 그 폐허와 절망 한 가운데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날이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라보게 되는 날이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구구절절 그 날에 선명하게 고백하고 찬양하게 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누구로 고백합니까? 바로 빈궁한 자의 요새, 가난한 자의 요새, 그리고 폭풍 중에 피하는 그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머리로 입술로만 고백하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통과한 진정한 고백으로 드릴 때 하나님이 나에게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여호와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절망의 때, 고난과 풍랑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나의 요새가 되어 주시며 나에게 피할 그늘이 되어 주심을 내 삶을 통과하며 고백하는 삶,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고 살아 있음을 고백하는 삶, 그게 바로 찬송 가사인,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내 삶으로 드리는 찬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상황과 처지가 어떠하던지 나의 조건과 상황을 넘어서,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누군가에 주목하며 살아가는 이 놀라운 믿음 생활의 신비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며 붙들며 나아가는 성도의 삶, 그들이 바로 임박한 심판 가운데 살아가는 진정한 남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특별히 8절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 마음속에 꼭 새겨야 할 보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이것이 이사야를 통해 미리 선포되는 복음의 그림자입니다. 구원의 백성인 우리가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붙들고, 다가올 천국을 실제로 믿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본질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복음의 능력이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이며 그 빛을 통하여 모든 어둠을 물러가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 승리를 믿기에 우리는 예수님만이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망 권세를 깨시고 어둠의 권세를 영원히 멸하신 십자가 복음의 능력과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 현재형으로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게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 빛 가운데 걸어가며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수치를 제하시리라…이 약속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그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겁니다. 이 깨지고 아픈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눈물들을 주님께서 닦아 주시고 씻겨 주심을 분명히 믿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물을 알고 보시는 것을 넘어 그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심을 진짜 믿을 때 나에게 소망이 있는 겁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성도로서 우리가 당하는 억울한 일과 수치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모두 제하려 주실 것임을 분명히 믿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이 환난을 당하고 가난해지고 폭풍 가운데 처할지라도 그 가운데 나의 요새 되시며 나의 피할 그늘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며, 내 눈물을 씻겨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 깨지고 아프고 눈물 나는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수치를 주님께서 제하여 주심을 진짜 믿을 때, 나에게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 이름 붙들고 내 공로 의지하며 살던 삶에서, 오직 예수 이름 붙들고 예수 공로 의지하여 나아가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일어날 힘과 용기를 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믿음의 대상으로 믿고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망을 영원히 멸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어둠을 영원히 멸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씻겨 주시는 분입니다. 내 모든 수치를 제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심…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힘과 위로이며, 가장 큰 소망과 피할 그늘이십니다. 주변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죽을 뻔 하다 살아나는 사람들,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놀라운 경험 이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대부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삶의 죽음의 문턱에서 건짐을 받고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음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들로 다 흘러갈 일들, 상대적인 일들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나에게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온몸으로 경험했기에….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온몸으로 체득했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가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믿고 고백하며 매일 구원의 기쁨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남은 자의 삶입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내 수치를 제하시며, 사망을 멸하신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있는 주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선명한 남은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셨고, 주변 나라들을 하나 하나를 지목하시며 그들도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24장부터는 온 땅,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 전부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런 모든 심판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성품에 근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관영해진 죄를 보고 가만히 계실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24장 앞부분에서는 이 세상 전체가 페허로 변해 버리는 환상을 증언했습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현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반응하시며 영원한 언약을 깨어버린 사람들을 향하여 심판하시는 모습을 현재형으로 보는 듯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장 후반부인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남은 자들이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 엄중한 심판 가운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소리 높여 찬양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어디에서요? 바다에서부터, 동방에서로부터…이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그루터기 같은 남은 자들 입니다. 그 날이 오면 엄중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온 세상 가운데, 동방으로부터, 바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땅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영광의 소리와 함께, 동시에 찾아오는 소리는 더 심각하게 찾아오는 심판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그 날에 임할 일들을 바라보는 환상은 두 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겁니다. 남은 자들은 서쪽 바다와 땅끝에서, 동방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 동시에 그 땅 전체에는 죄와 심판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걸 내일 말씀에서 좀 더 자세하게 배우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날이 회복과 구원의 날인데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은 그날이 심판의 날이자 멸망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백성들과 하나님 밖에 있는 백성들이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날이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때가 차서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중한 심판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임한다고 묘사합니다. 두려워서 함정에 빠지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면 올무에 걸리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 땅에 모든 것이 흔들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모습, 두려움을 피하려고 도망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함정에 빠지고, 그 함정에서 빠져 나오려 하면 바로 앞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것, 이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한 모습입니다. 또한 그 날에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군대와 왕을 벌하시고 감옥에 갇혔다가 벌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고 땅의 왕들을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진 높은 군대와 땅의 모든 왕들을 주님께서 엄중히 벌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땅의 왕들과 높은 군대가 깊은 옥에 갇히는 것, 그들을 깊은 감옥에 던져 넣으시는 것이 바로 그들을 향한 영원한 형벌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보는 이 모든 것들은 마치 장차 있게 될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미리 보여주시는 프리뷰 같은 모습입니다. 이 땅의 권세를 잡은 왕들, 이 땅에 매어 살아가는 왕들, 스스로 높아지려는 높은 군대들을 다 하나님께선 벌하시고 깊은 감옥에 던져 넣으시는 이 모습은 마치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에 있게 되는 일들을 구약의 버전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여호와만이 왕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그 악한 세력들 땅의 권세 잡은 자들과 땅의 왕들, 스스로 높아지려는 높은 군대들을 다 벌하시고 심판하신 후,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온 세상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온전한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명히 드러내시는 것, 바로 그 날의 결론인 겁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이자, 이 땅의 왕들과 높은 군대들을 다 벌하시며 처리 하시는 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리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공중 권세 자들을 다 무너뜨리며, 죽음에 사로잡힌 이 땅의 모든 왕들을 처리하시고 깊은 감옥에 던져 넣으실 겁니다. 동시에 그 날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날이자, 하나님이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온전한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땅에 가져오는 그 날은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고, 이 땅의 모든 왕들에게는 멸망의 날이자, 온전히 하나님 만이 왕이 되시는 회복의 날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 날이 속히 오고 있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선명히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날이 오고 있음을 잊지 않고 그날을 기대하고 준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하실 때가 오고 있음을 잊지 않고, 그 날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으로 깨어 준비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는 1장부터 39장까지 심판에 대한 경고이고 40장부터 66장이 회복과 구원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예고의 말씀은 크게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12장은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멸망의 경고 말씀입니다. 13-23장은 주변 나라들의 불의를 고발하고 그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그걸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넘어 온 나라와 열방,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오늘 24장부터는 주변 나라들의 심판 예고를 넘어 이 땅 전체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 즉 마지막 때에 대해서 구약의 요한 계시록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날, 마지막 때에 온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24장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뒤집어 엎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 땅이라는 말은 하늘의 반대말로,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 땅 전체,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 땅 전체를 의미합니다. 땅은 부정적 의미의 세상이란 말과 똑 같은 말이고, 하늘과 대비되는 말로서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땅과 세상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멸망과 심판에 직면했고 주변 나라들도 하나같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다 그렇게 멸망과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땅 전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과는 무관하게 어둠을 향해 질주하였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삶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가 임하게 되면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날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땅을 공허하게 하시고 황폐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땅이 온전하게 공허하게 되고 온전하게 황무하게 되리라…선언하십니다. 공허하게 한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실 때 빛이 임하기 전에 이 땅이 바로 혼돈과 공허에 흑암이 가득한 상태였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건 바로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 모든 세상이 공허, 혼돈으로 가득했던 그 때로 되돌리신다는 겁니다. 이 땅이 온전히 공허해지고 혼돈으로 가득 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이 없었던 그때의 암울한 모습으로 돌러 버리고, 다 뒤집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창조의 빛이 임해 모든 것에 질서가 생기게 되었던 그 놀라운 은혜 전의 상태로 되돌리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심각하고 크고 무서운가 하면 종과 상전이 같아지고, 여종과 여주인이 같아지고, 빌려준 자와 빌린 자가 같아 진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차별과 구별로 너와 나를 나누고,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나누고 주인과 종을 나누고, 수많은 나누어짐을 통해 지배 구조를 만드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무의미해질 정도로 그날의 심판이 크다는 겁니다. 신분의 차이도, 경제적인 차이도, 어떤 권력의 구조도 다 무의미해질 정도로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모두 공허해지고 모두 황폐해진다 겁니다. 큰 심판 앞에 모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구별이 무의미해 질 정도로 폭삭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과 땅을 그 날이 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이렇게 하나님이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한 나라도 예외 없이 인간들이 사는 이 땅에 모든 곳에 임하는 심판은 우리에게 곧 닥칠 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너의 눈을 들어 그 날이 오고 있음을 분명히 알라는 주님의 깨우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마지막 때에 이 땅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땅과 세상이 너무 더러워져서 더 이상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된 본질적 원인이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그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복 가운데 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복으로 주신 영원한 약속인 언약을 인간은 다 무시하고 경시하며 다 깨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교만이 자리잡고 결국 하나님 없이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려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드높이고 내 공로에 대한 기념비를 하늘 높이 세우며, 스스로 높아진 것처럼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 깨어 버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땅 안에서 모두 더럽게 되었고,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집어 엎어버리고 쓸어버리는 외에는 방도가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죠. 그날이 임하면 저주가 땅을 삼켰고 사망의 권세가 그 땅에 모든 사람들을 삼키는 것이죠. 이 땅에는 닥칠 심판과 닥칠 하나님의 마지막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고 그 끝이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기 쉽기에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으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땅은 맺는 그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날을 바라보고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지 아니하면 결국 본능대로 살아가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며, 내 눈에 보이기에 좋은 것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런 인생의 끝은 결국 멸망과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과 말씀을 떠난 이 땅은 저주가 모든 것을 삼키고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실 심판에 곧 직면함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경시하고 무시하면 망한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말씀의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는 남은 자로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점점 어두워만 가는 이 땅,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고 무시하며 하나님을 떠난 이 땅에 임할 마지막 때가 곧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그 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며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경고의 말씀으로,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 같은 나라들이 군사와 정치 강대국들이었다면 두로와 시돈은 무역을 통하여 큰 부를 얻은 경제 강국이었습니다. 다시스의 배들, 바다에서 무역하는 상인들과 같은 언급을 통해 두로와 시돈이 고대 시대에 독점적으로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특별히 다시스의 배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다시스는 요나서를 통해 알겠지만 지중해의 맨 끝, 지금의 스페인 지역을 얘기하는데 그 당시에는 땅끝 마을이었습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땅이 바로 다시스였는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그 땅끝 마을 까지도 배로 모든 교역을 주도하며, 물건을 이곳 저곳으로 팔면서 큰 경제적인 이익과 부를 챙긴 것입니다. 지중해 모든 경제의 흐름을 장악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면서 그걸 통하여 경제 강국이 된 곳이 바로 두로와 시돈 이었습니다. 그런 경제 강국이 된 나라, 무역을 통한 풍성하고 부유한 삶을 살게 된 나라인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는가를 오늘 말씀은 두 가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혼합주의로 요약되는 우상숭배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거룩한 속성의 여호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풍요와 부유함을 위해서 이곳저곳에 경제 교역을 통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다 보니까 세계 각국의 재물이 들어오는 것과 함께 세계 각국에 혼합종교와 우상이 함께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각양 각생의 우상들이 두로와 시돈에 들어오면서 겉으로는 잘 먹고 잘 살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영적으로는 온통 우상이 가득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지면에 있는 열방은 바로 지중해 지역의 많은 나라들인데, 그들과 무역과 교류하는 것을 그냥 무역을 한다 그러지 않고 음란을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두로와 시돈이 돈의 흐름을 쫓아 풍요와 부유를 붙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돈을 모았지만, 그것과 함께 영적인 음란함, 즉 종교 혼합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도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풍요와 부유함을 절대 가치로 두고 살아갔기에, 종교와 신앙 경시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겁니다. 결국 풍요와 부요함을 신과 같이 여기고, 내 삶의 절대가치인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위해서는 종교를 섞고 혼합하고 우상을 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던, 이슬람을 믿던, 힌두교를 믿던, 기독교를 믿던 그게 뭐 큰 차이가 있냐… 우린 다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에게 신앙은 부수적이고 하위개념이자, 멤버십 같은 액세서리인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닌 다른 것을 절대 가치로, 상위 개념으로, 인생을 걸고 열심을 내기에, 종교가 혼합이 되던, 우상숭배를 하던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심지어 우상을 섬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두로와 시돈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가져온 풍요로움과 만족과 하나님 없는 안전과 평안을 찾는 모습이 결국 하나님이 이 모든 복을 부어 주셨음을 망각하고 신앙을 수단화하고 도구화 하는 것입니다. 풍요와 그들의 부요함의 절대 가치를 위해 종교와 신앙을 하위 개념으로 부수적 사용 개념으로 경시한 삶, 우상숭배와 혼합 주의가 가득하게 만든 것이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고 멸망한 이유입니다. 두 번째, 두로와 시돈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바로 영적 교만함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교만하게 된 모습을 한 마디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였느냐…” 하나님 없이 돈만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내가 정한 대로 내가 뜻한 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돈이 많으니까 모든 게 내 뜻대로 이루어지며 내가 정한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착각하는 것, 그게 바로 두로와 시돈의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일한 결과로 내가 모든 것을 얻는다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되고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만, 나의 열심과 노력이 도구는 될 수 있으나 절대 공식과 같은 결과를 내를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풍성함을 주시는 분이 계시고 부유함을 주시는 분이 계시며, 나에게 평안함을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게 신앙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두로와 시돈의 풍요로움과 부요함은 그 모든 게 내가 열심히 해서 나온 결과물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죠. 해상 무역을 통해 바다를 장악했으니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 있다 착각하며, 넘치도록 많은 돈이 있으니까 내가 모든 것을 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과 같이 나의 부요함과 풍요로움이, 나의 영화와 평안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제대로 모르는 게 바로 교만한 인생입니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내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교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의 영적 교만과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심판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바다 위에 하나님의 손을 펴사 온 나라를 흔드시며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시고, 기쁨과 평안이 다 사라지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들의 경제 시스템이 다 무너지고, 교역할 물건을 팔 항구들이 다 없어지게 만드시고, 통곡과 눈물만이 가득한 심판이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 믿는 신앙을 상대화 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격하시키지 마십시오. 종교 혼합 주의에 빠지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하나님 믿는 신앙은 절대 가치에, 상위 개념에 number one으로 둘 때만 가능합니다.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인생에 부어진 풍요와 부요함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모두 하나님 때문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배제한 채, 내 노력과 열심, 내 재능과 능력이 이런 결과를 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때껏 산 것이 누구 때문인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적 겸손입니다. 이 정도 부요함과 풍성함 가운데 살게 된 것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 때문임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영적 겸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의 실력과 능력보다, 여러분들의 노력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신 것을 인생에서 순간 순간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노력하고 열심을 낸 것이 귀하지만, 내 능력과 실력도 있지만, 그거보다 훨씬 많이 부어지는 것이 있을 때, 그때는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건 하나님이 주시는 거구나…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구나…기억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에 여기까지 왔음을 철저히 믿으며, 내 인생의 풍요와 부요함의 원인을 오직 주님께 돌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남유다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특별하게 그런 나라들에 대한 경고와 심판이 아니라 바로 한 개인을 향한 심판의 경고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남유다가 멸망을 향해 질주 하는데 있어 큰 책임이 있는 한 지도자에게 집중하여 심판의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그 지도자의 죄가 중하기도 하고, 남유다 멸망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그 지도자의 하나님을 향한 모습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의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에 대한 심판과 경고를 말씀하시면서 지도자 한 사람이 공동체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한 지도자에게 집중하는 심판 예고의 주인공은 바로 셉나입니다. 셉나의 이름은 “하나님이 세우시리라.” 너무 좋은 고백의 이름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올려주심을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셉나의 이름을 주신 겁니다. 그리고 셉나는 국고를 맡고 동시에 왕궁을 맡는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대로 셉나는 굉장히 높은 지위에 하나님이 세워 주셨고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국가적인 개혁을 원했던 히스기야 왕의 오른팔 노릇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니, 셉나는 왕실에서 최측근이자 가장 실세이자 그에게 맡겨진 권력과 힘이 대단했을 겁니다. 왕실에서 장관 자리를 두 직을 겸하며 섬기면서 왕의 최측근으로 일하는 그 높은 자리, 그 대단한 자리에 셉나가 앉은 겁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올라갈 수 없는 자리와 권력, 내 힘으로 세울 수 없는 업적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시고 부어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다스리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세우시며 맡기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막강한 힘과 권력, 그 높은 지위를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살았다면 셉나는 이름값을 하며 살아간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워 주신 권력과 맡겨 주신 힘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선용하면서 살기를 하나님은 분명히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셉나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경고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이름대로 살지 못하였고 이름 값을 하지 못한 겁니다. 세워 주신 권력과 맡겨 주신 힘을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위해 쓰임 받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그 자리에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왕궁의 두 장관 직을 맡은 셉나가 심판에 직면할 정도로 잘못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말씀에 증언되지 않고 다른 하나는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첫번째로, 앗수르의 위협이 가중될 때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에게 피하고 주변 열강들이 강대국을 의지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해 주셨는데 하나님의 뜻에 반하며 눈에 보이는 애굽을 등에 업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선봉에 선 자가 바로 셉나였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애굽과 연합군을 짜는데 모든 밑그림을 그린 자가 바로 셉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결국 나라 전체를 어렵게 만든 아주 중요한 실수를 하게 되 겁니다. 두번째 셉나의 결정적 실수는 바로 국가적 위기 가운데 자신의 안위와 이익에만 몰두한 죄입니다. 지금 나라 전체가 풍전 등화의 위기 상황입니다. 주변 열강에 지금 위험 가운데 하나님에게 피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주변 나라들의 등에 업혀 문제를 타개하려 하다 더욱 위험해지고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왕실 권력의 핵심이었던 셉나는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 겁니까? 죽어서 묻힐 자신의 묘를 높은 곳에 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고대 사회는 양반의 옷과 평민의 옷이 따로 있을 정도로 옷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묘자리의 위치 또한 양반과 평민의 위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식이었습니다. 어느 자리에 어떤 위치에 묘자리를 만드냐는 것은 사회적인 지위와 자신의 위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남유다가 평탄한 아니고 굉장한 국가적인 위기 가운데 흔들리고 있는데 셉나는 나라를 어떻게 구하고 세워야 할까를 고민한게 아니라 내 묘자리를 어디에 세워야 할까를 고민한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죽어서 자기가 묻힐 묘 자리를 왕족들이 묻히는 그런 높은 곳에 두는데 몰두한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자기가 왕족이 된 것처럼 그 맨 꼭대기에 자신의 묘실을 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자기를 위해서… 누구를 높이려고? 자기를 높이려고….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자기가 높아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셉나, 나라는 망해도 어떻게 돼도 상관하지 않고 죽어서 묻힐 자신의 묘자리에 온 관심을 쏟고 있는 셉나의 잘못된 지도력을 하나님은 아주 엄중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게 되는 데는 물론 백성들이 불순종과 반역, 우상숭배의 영적 문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동시에 셉나와 같은 간신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자기가 높아지려고만 발버둥치며 나라를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를 자기를 섬기는 도구로 악용했던 이런 잘못된 지도자들의 죄악과 실책이 분명히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를 자신만을 위해 악용한 셉나의 죄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적인 문제이며,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악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들의 심판과 멸망의 경고 사이에 한 개인인 셉나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악한 자 셉나를 향한 엄중한 심판이 임할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너를 반드시 결박해 던져 버린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반드시 내려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이름을 높이는데 그 지위와 자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의 자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라는 것을 망각하고 이렇게 악을 행하니 내가 너를 좌시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우신 자리임을 망각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워주신 자리에서 제대로 못하면 하나님이 끌어내리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지 않으면 맡기시고 세워 주신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시는 겁니다. 악한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 높은 자리 높은 지위, 그 높은 권력을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워 주셨는데 하나님 나라와 뜻을 위해, 하나님을 높이는데 사용하지 않은 셉나, 하나님과 무관하게 산 셉나는 악한자가 된 것입니다. 이 시간 나에게 하나님이 세워 주신 자리가 있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권력이 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올라간 자리도 아니고 내가 세운 자리도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세워 주신 자리이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력임을 잊지 않는 만큼 쓰임 받는 겁니다. 맡겨 주시고 세워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위해 겸손히 사용되며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시는데 선명히 사용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임을 알고 내가 두려워하고, 어깨에 무거운 책무는 바로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임을 잊지 않는 부담의 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워 주신 자리에 앉아 내 뜻과 내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망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워 주신 자리에 앉아 주님이 원하시는 뜻과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 거룩한 도구가 되기만을 사모하십시오. 그 높은 자리에서 세워진 자리에서 나를 높이려고 발버둥치다가 셉나와 같이 처절하게 무너지고 끌어 내려지는 엄중한 심판이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제대로 못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준비하신다는 것도 잊지 않고 잠시 올라가 있는 그 자리에서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선명하게 쓰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다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말씀 초반에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으로 주셨는데 왜 22장에서 또다시 말씀으로 주시는가… 에 대한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대한 멸망과 심판을 다시 한번 반복해 증언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이유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서 마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하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신다고 착각하고, 주변나라들의 심판과 멸망의 예언을 들으며 자신들은 심판에서 제외 된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이유와 원인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의 바벨론과 차이가 없이 똑같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들의 우상숭배는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은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왕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무관하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 눈에 보이는 나라들을 믿으며 그 나라들의 힘을 등에 업고 무언가를 해보려 발버둥 쳤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주변 나라들을 다 의지했는데 결국 너희가 의지한 나라들은 이처럼 다 망하게 될 것이고, 그들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또한 망하게 되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너희 또한 예외 없이 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큰 그림 가운데 있다는 것을, 심판에 직면해 있는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어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해변 광야라는 모순과 같은 말로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백성 예루살렘과 남유다의 영적 실체를 비슷하게 “환상의 골짜기”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환상의 골짜기라고 부르시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영적 현실을 지적하는 모순과 같은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얼마나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이 바로 환상의 골짜기입니다. 골짜기는 깊어서 멀리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멀리 보려면 골짜기가 아니라 산꼭대기에 올라가야 합니다. 큰 그림을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기 위해서는 골짜기로 내려 가는 게 아니라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환상의 골짜기라는 말은 환상을 본다 말하면서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환상을 붙들고 이 땅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야 되는 이스라엘이, 환상을 보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가는 대신 골짜기로 내려가는 영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실제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하늘에서 주시는 환상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갇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될 이스라엘, 하나님 만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고 주시는 환상을 붙들고 살아야 될 그들이 지금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세상적으로 살아가며,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실제로 하나님의 환상을 하나도 못 보고 살아가는 자들, 그게 바로 환상의 골짜기인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실, 환상의 골짜기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영적 맹인이라 말과 거의 비슷한 말입니다. 그들은 깨어 가장 멀리 바라봐야 될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들의 눈은 가리워서 땅만 바라보고 영이 아닌 육으로만 살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대신 사람들만 의식하며 살아가는 영적 소경인 셈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 심판과 멸망 외에는 남은 게 없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다는 겁니다. 환상의 골짜기와 같고, 영적 소경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 영적 현실은 여호와를 앙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에 따라 이루시는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남을 오늘 말씀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갈망 하지도, 공경하지도 않는 삶, 이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환상의 골짜기가 된 본질적 문제였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망하고 심판받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바라봐야 될 분인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앙망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때를 준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심판이나 예루살렘의 심판이나 둘 다 차별 없이 직면해야 될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임박한 심판과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 날을 준비하며 통곡과 애곡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문이 막히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일 죽어도 오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파티 하겠다는 겁니다. 어제 말씀에 다가올 그때를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베푸는데 모든 정신이 팔렸던 바벨론이나 내일 죽어도 오늘 고기 파티 하고 포도주 먹겠다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똑같은 겁니다. 머지 않아 결박 당하여 끌려가고,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슬픈 현실이 다가오는데 그들은 내일 죽어도 오늘 그냥 먹고 지내겠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전혀 대비하지 않고, 그 날이 오는 것을 그냥 무감각하게 보고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드는 대신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고 등에 업히려, 애굽을 의지하고 나중에는 바벨론을 의지하고 등에 업히려 했습니다. 결국 그 믿었던 나라들에게 다 배신당하고 피눈물을 흘리고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 나라였던 바벨론의 영적 무지함과 전혀 구별됨 없이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정말 마음이 아프신 겁니다. 그날이 곧 오기 때문에 생각하면 통곡하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임박하게 찾아온 하나님 백성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환상을 본 이사야는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 때문에 슬퍼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환상의 골짜기…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영적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경고의 말씀으로 받기 원합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 바라봐야 될 분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본질적 문제입니다. 불들어야 할 분을 붙들지 않고 의지해야 할 분을 의지하지 않으며, 공경하고 앙망해야 할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적 문제임을 마음에 깊이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코 앞에 있는데 먹고 놀다 망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리는 반면 교사로 삼기 원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세련되게 살아가는 이런 것들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살아간 하나님의 백성, 그 끝은 심판이자 멸망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정말 바라볼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있게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저 웃고 떠들고 지낼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앙망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처절하게 무관한 삶을 살면서 그때를 대비하지 않고 살다, 결국 처절하게 망하고 무너지게 된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주시는 환상을 바라보기 위해 산 위에 올라가는 것이며, 보아야 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주목하는 실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바라보는 실체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보아야 할 하나님을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지만 그날을 준비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환상과 비전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앞에서 이미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주셨던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이사야의 주변 나라들을 향한 심판과 경고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와 세계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열방이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게 합니다. 또한 이렇게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이 계속되는 것은 bad news에 대한 직면이 없이는 good news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본질이 소망 없는 어둠임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본질이 심판을 향해 질주하는 어둠임을 직면하지 아니하면 빛이신 예수, 복된 소식인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복음이 내 안에 받아들여질 수도 영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멸망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 이유는 바벨론이 단순히 그 시대에 있었던 한 나라 바벨론을 넘어서는 훨씬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 하는 바벨,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린 채 정글에서 힘의 논리와 생존의 논리만을 위해 살아가는 짐승의 나라 바벨론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바벨론을 해변 광야라 명하고 있습니다. 왜 짐승의 나라 바벨론을 해변 광야라 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 소위 말하는 바벨론에 대한 그들 영적 상태를 비꼬며 지적하시는 모순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해변과 광야라는 말은 같이 갈 수 없는 모순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변은 고대 시대의 풍요와 넘침에 상징입니다. 그래서 모든 고대 문명은 다 강을 끼고 발생을 했고 물이 있다는 것은 특별히 중동 지방에서는 생명 줄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해변가의 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메마르지 않고 죽지 않고 풍요와 넘침을 공급하는 수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변은 풍요로움과 넘침이 가득한데 바벨론을 해변의 광야라고 모순과 같이 지칭한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와 풍성함이 가득한 해변에 있는데 속으로는 메마른 광야 같은 곳이 바로 바벨론이 처한 영적 현실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많이 누려도 하나님이 빠진 인생은 속이 다 메마르고 공허한 해변 광야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풍요 속에 빈곤, 해변 광야가 바로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간 짐승의 나라 바벨론의 현주소인 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고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의 끝인 바벨탑,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이 짐승과 같이 내 이익을 위해 약육강식의 논리로 모든 것을 죽이고 뺏는 짐승의 나라 바벨론으로 살아간다면 해변의 광야이고 결국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교만하게 살고 있는 바벨론에 임하는 혹독한 심판을 예고하시는 겁니다. 혹독한 심판이란 메데라는 나라가 급 부상해서 하루 아침에 바벨론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심판입니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러 올라가 폭상 망하게 하실 것을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어떤 심판을 하실 지 미리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메대, 페르시아의 손에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멸망시키는 사건을 우리는 과거형으로 바라보니까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만, 그 당시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는 시대에는 이런 일은 정말 있을 확률이 0%에 불과하다, 정말 있을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바벨론을 누가 그렇게 한번에 무너뜨릴 수 있느냐? 이런 혹한 묵시가 말이 되느냐…사람들은 소설을 쓴다며 이사야의 예언을 무시했을 겁니다. 그런데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강대국 바벨론에 임할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한 실체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에 장차 있게 될 짐승의 나라, 해변 광야인 바벨론이 어떻게 심판 받고 무너지게 될 것일지 분명한 실체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해변 광야인 바벨론을 심판하실 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하듯이 그 모든 곳이 함락되고 부서지고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함성으로 하루 아침에 무너지듯, 하루 아침에 바벨론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미래의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이사야는 그것을 예언하는 조차 두렵고 떨리는 심판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한반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루 아침에 초토화되는 그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하는 멸망 자체를 보는 게 너무나 처절하고 혹독해서 너무 두렵고 떨렸다는 겁니다.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임박한 여인이 해산을 하는 고통과 같이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바벨론의 심판을 예언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두려움을 주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그날이 오는 것은 실체 이기에 지금 돌이키고 돌아오라고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심판의 당사자인 바벨론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 앞에 뭐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세운 바벨론 나라가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죽음과 멸망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그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며 잔치하는 일이 잘못된 일도 아니고 틀린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다가올 때를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데 모든 것을 쏟는 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의 때를 망각하고 둔해지며, 임박하게 다가오는 그 날을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면 죄가 되는 겁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가 임할 때 사람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며, 먹고 마시며 그들의 일상에 그냥 충실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 충실한 게 잘못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나라 바벨론은 해변 광야입니다. 바벨론과 같이 나의 영적 현주소가 해변 광야, 속빈 강정,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놓친 백성은 겉으로는 아무리 풍요롭고 화려해도 결국 속이 텅 빈 고아 같고, 공허함과 메마름이 가득한 광야 같은 겁니다.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고, 풍요롭고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다 메마르고 텅 빈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변 광야와 같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실 것을 혹독한 묵시로 주셨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이사야의 혹독한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경고를 마음에 새기면 새길 수록 내 안에 소망이 없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직면하고 내 밖에서 나를 건질 소망과 빛이 와야 함을 믿고, 복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빛, 참 소망, 참 생명만을 붙들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사야가 전하는 이 혹독한 묵시의 때가 실체로 오고 있음을 알고 그 날을 바라보며 대비하고 준비하며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믿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게 중요하며 그것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며 그것을 위해 보냄 받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변 광야와 같은 인생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꼭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듣고 그걸 깨달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선포될 때 백성들은 농담으로 여기거나 들을 귀가 없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선포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때로는 극약 처방을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극약 처방은 이렇게라도 제발 말씀을 좀 듣고 깨달으라는 경고로 말로 말씀을 선포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벗은 몸과 벗은 발이 바로 하나님의 극약 처방입니다. 하나님이 하라 명하시니 순종해야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 입장에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일까요? 그런데 이렇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한 번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3년을 있으라고 이사야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다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극약 처방으로 벗은 몸과 벗음 발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3년을 다니게 하신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렇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당하면서 벗은 몸과 벗음 발로 3년을 다니는 극약 처방을 내리신 것일까요? 먼저 벗은 옷과 벗은 발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평등 사회에서 옷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지만 고대 시대에는 양반은 양반 입는 옷이 있었고 평민은 평민이 있는 옷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와 위치, 계급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옷을 벗었다는 것은 그 위치와 지위를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요즘에도 어떤 직에서 내려온 사람을 옷을 벗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옷을 벗었다는 것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한다, 혹은 그의 지위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고대시대에 노예, 종들은 신을 신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을 벗었다는 것은 바로 노예, 종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80살에 미디안 광야에서 부르실 때 네가 있는 곳에서 신을 벗으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명령은 그동안은 자신이 주도하는 인생을 살았는데 신을 벗고 하나님이 주도하는 인생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에게 3년 동안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건 수치와 부끄러움을 안고 노예와 되어 살아갈 애굽과 구스, 이디오피아에 대한 예표가 되게 하신 겁니다.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엉덩이를 드러내며 부끄러움과 수치 가득 노예로 끌려가는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가 온몸으로 선포하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극약 처방으로 말씀을 선포한 핵심이 바로 장차 있게 될 애굽과 구스의 예표인 겁니다. 애굽과 구스가 직면하게 될 이 비참한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주는 겁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벗은 몸과 벗음 발이 애굽과 구스의 예표이자 너희의 자화상이라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애굽과 구스는 하나님 대신 붙들고 있었던 나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바라고, 하나님 대신 자랑하고, 하나님 대신 믿었고, 하나님 대신 달려가 도움을 구하던 나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고 자랑하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보다는 눈에 보이는 애굽과 구스의 힘과 능력이 더 든든해 보이고 더 믿을 만해서 붙들고 기대며 의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대신 그렇게 붙들고 믿고 의지하고 바라던 자랑하던 나라들이 벗은 몸과 벗은 발이 되어 포로가 되어 완전히 무너지며 되며 수치 가득 자빠지게 될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들이 바라고 자랑하는 분, 믿고 달려가 도움을 구하는 분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돌아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불순종한 남 유다와 예루살렘 같이 하나님 대신 자랑하고 바라며, 하나님 대신 믿고 달려가 도움을 구하는 것들이 있는지….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차별 없이 똑같이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바라고 자랑한다면,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 힘과 나라들을 믿고 달려가 도움을 구한다면, 결국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깊게 들어가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사야 선지자의 벗은 몸과 벗은 발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의 죄만 감당하시고 죽으신 게 아니라 그 죄에 담긴 수치와 부끄러움도 모두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죽으셨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 죄로 인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두 온몸으로 당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값은 다 해결되며 우리 죄로 인한 수치와 부끄러움도 다 해결해 주셨음을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림자와 같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3년동안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득 안고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모습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죽으시며 우리 죄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감당하시고 해결하시는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이 예표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반응이 없는 영적 무감각증에 빠진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자화상일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나님 대신 애굽과 구스를 믿고 의지하다가 발등 찍히고 무너지는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자화상일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말씀을 듣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때로는 극약 처방을 쓰면서까지 이사야 선지자같이 온몸으로 선포하게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과 구스가 대단해 보이고 당장 내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 줄 나라들 같이 보여도 조만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며 무너질 모래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나라들을 등에 업고 의지하며 나아가면 그 길이 멸망의 길이고 무너지는 길이며 심판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대신에 믿고 의지하려는 나라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대신에 바라고 자랑하는 어떤 힘과 물질이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 대신 믿고 붙드는 순간 여러분들은 망하는 길로 질주하는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 답게,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하나님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하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마련하신 피난처로 달려가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며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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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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