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심판을 넘어 13장부터는 이제 주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증언합니다. 첫 번째로 그 심판을 예언하신 나라가 바로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에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였고,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나라,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때가 차면 그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우리 눈에는 믿을 수 없겠지만 장차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 뿐 아니라 바벨론 왕이 스올, 즉 지옥으로 던져지는 심판을 예언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예언의 말씀을 과거 시제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예언의 말씀들이 이미 다 과거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을 수 있는데, 이사야 말씀이 선포되는 삶의 자리에서 듣는 이 예언의 말씀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을 말씀들 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가 멸망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방 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수 있을까…이건 말도 안된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바벨론이 어떻게 망할 수 있을까…정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미래의 일을 이미 하나님의 시각을 바라보고 이사야를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자리에서 이사야는 머지 않은 미래에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을 할 것, 남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하는 겁니다. 또한 남유다를 망하게 했던 그 대국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멸망할 것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이 큰 그림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을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처럼 불쌍히 여기십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밤새 씨름하며 환도뼈가 부러져 평생 절룩거리는 불편함을 통해 늘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마치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져 절룩거리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포로에서 돌아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란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겁니다. 이를 통해 오늘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시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제일 첫 번째로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으로 주시는 이유는 바벨론은 단순히 과거에 존재했던 강대한 나라를 넘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벗어나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 하는 짐승의 나라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창세기의 바벨탑으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말씀을 다 아우르는 짐승의 나라에 대표입니다. 그렇기에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회복과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바벨론이 심판 받고 망하는 날은, 이 세상 나라가 망하는 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나라가 망하는 날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고 안식을 얻는 날이자 모든 결박에서 놓임 받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을 선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절대 망할 것 같지 않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예언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 같고, 거대한 바벨론이 모든 것을 좌지 우지하는 거 같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심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며 멸망하게 하시는 때가 속히 온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믿음 가운데 그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짐승 나라의 왕 바벨론왕이 어떻게 망하게 되고 어떻게 심판 받게 되는가를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바벨론 나라가 하루아침에 심판으로 멸망하고, 바벨론 왕은 깊은 스올에 던져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잠시 쓰임 받는 도구라는 것을 망각한 바벨론은 주변 나라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며 교만과 완악에 빠져 살았습니다. 바벨론 왕은 하나님 자리에 대신 올라가려 했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님이 있는 저 구름 위에까지 내가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게 바벨론 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바벨론 제국은 마치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 왕은 그 나라가 망하고 무너진 후 스올, 즉 지옥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3번이나 반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이 죽어 스올에 던져지는 것을 준비하고, 어서 오라고 환영하고 맞는 일이 깊은 스올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이 땅에서 잠시 누린 부귀 영화는 모두 사라지고 지옥의 맨 밑의 구덩이에 떨어지고, 구더기에 깔리고 지렁이가 너를 덮는 이런 끔찍한 일이 바벨론 왕에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이처럼 악한 자와 악한 나라의 심판과 멸망은 단순히 그 나라가 멸망하고 무너지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더기와 지렁이가 가득한 스올 밑으로 던져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을 선명한 예언의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만 이 시간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도 아니고 오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지만 미래의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 이 넓은 영적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과 현실은 문제와 아픔, 어려움과 질병이 가득합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이 온 세상을 통치하는 거 같고 좌지 우지 하면서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지옥과 같은 현실을 매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그 날을 바라보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짐승의 나라 바벨론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듯 한번에 망하는 심판의 때가 곧 온다는 것, 그 바벨론 왕은 깊은 스올에 던져지는 심판의 때가 곧 온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십시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그 때가 일어나면 마치 도적이 오듯 일어나게 될 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날을 주목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 날을 준비하고 대비하며 살아가기에,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 절망할 필요도 너무 열광할 필요도 없음을 믿음으로 붙들며 사는 겁니다. 그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내 아픔보다 큰 주님의 영광, 내 질병보다 큰 주님의 영광이 임할 것을 분명히 믿고 굳건히 믿음의 길을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 말씀은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넘어 각 주변 나라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13절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을 선포하는 겁니다. 그 주변 나라와 열방의 심판 가운데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고입니다. 사실 이사야가 선포하는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은 그 당시 눈으로 봤을 때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얼마나 강한 국가 였는가 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아무도 대항할 수 없을 가장 부강한 나라, 모든 것을 가진 나라이자 절대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였습니다. 어떻게 저 큰 나라가 저렇게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변방의 이름도 모를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가….말도 안되는 일로 생각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절대 망하지 않고 절대 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건드리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이라는 건 그 당시에 존재하던 바벨론이란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바벨론은 성경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짐승의 나라의 대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더 이 영적 의미가 넓고도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벨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를 믿는 나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는 짐승과 같은 인간의 열망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아무리 겉으로는 대단하고 화려하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큰 나라이지만, 그런 큰 강국이지만 하나님이 바람 한번 불게 하시면 추풍 낙엽과 같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는 이 말씀을 분명히 붙드는 겁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바벨론의 상황이라는 것이 얼마나 안개와 같고 가변적인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겁니다. 바벨론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강대국이었고 대항할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말씀으로 바라보는 현실과 충돌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으로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바벨론이 곧 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을 내 눈보다 더 신뢰하며 붙드는 겁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 대신 말씀으로 바라보는 현실을 진리로 붙들고 취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린 자,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결정적인 차별점이 이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예언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체로 받아들이며 다가 올 그 날을 준비하는 겁니다. 반대의 상황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처한 상황이 절망밖에 없어 눈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의 시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 뒤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회복하는 겁니다. 그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상황 또한 얼마나 안개와 같고 가변적인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늘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의 바로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기 전 여러 경고의 사인과 전조증상들이 있음을 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바벨론의 교만과 악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기에,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기에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약한 나라를 짓밟고 죽여서 이런 큰 강대국이 됐기 때문에 약하다 여기는 나라들을 짓밟고 죽이며,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삶, 소위 말하는 짐승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거기에는 교만이 가득했고 죄가 가득했고 다른 사람을 학대하고 짓밟고 억누르는 것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말도 다 담을 수 없는 악을 행하고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면서도 문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 바벨론 제국의 멸망의 징조는 바로 죄악이 가득한 삶, 하나님 없이도 내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입니다. 중요한 건 이 교만과 죄악이 가득한 짐승의 나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바벨론은 결국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영적 교만과 완악함,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는 짐승의 나라 패러다임이 바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 하는 자, 하나님에게 싸우자는 선전 포고를 하는 자들이 된 겁니다. 그게 바로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무너뜨리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려는 교만함,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며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완악함,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며 하나님께 선전 포고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바벨론을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게 하시는 이유, 그렇게 철저히 심판하고 무너뜨리시는 이유는, 바벨론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 했으며 하나님에게 ㅆ싸우자고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바벨론을 가만두지 아니하며 모두 무너뜨리게 되는 겁니다. 역사가 증언하듯이 바벨론이란 나라는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 같았고 영원히 존재할 것 같았던 나라가, 얼마가지 않아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도 서서히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 번에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을 경시하며 하나님 없는 자같이 살아가게 될 때 결국 그것이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하나님과 싸우려고 선전포고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 바벨론이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다 여기듯이, 살다 보면 우리 생각에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것 같은 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동산 불패 신화, 주식 불패 신화와 같이 내 눈에 보기에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듯 이런 것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게 이 땅의 것들이라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왕이시자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하나님을 없는 분 취급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의 예언은 내 눈과 생각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열릴 때에만 이걸 다가올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말씀이 보여주시는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함,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완악함,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바벨론은 결국 끝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벨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인간의 제국과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결국 하나님을 떠난 짐승의 나라는 끝이 이렇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다 무너뜨리게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며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을 다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삶이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선전포고임을 잊지 마십시오. 겸손히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높이며,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말씀으로 보는 현실을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 지금까지 증언된 이사야서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이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 이런 경고와 심판의 말씀이 충격인가 하면 그들 생각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계신다고 철썩 같이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민족이란 선민이 열방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우리만 잘 되면 되고, 우리나라 이스라엘만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찌르시고 깨우쳐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13장부터 23장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에 대한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주변 나라들의 첫번 째 심판과 경고의 메세지를 바벨론을 향한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여겼었는데 하나님은 바벨론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열방과 민족을 위한 하나님,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명히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남 유다와 이스라엘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온 주변의 나라들과 열방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도록 그들을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변방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의 경고는 주변 나라들이 보기에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농담같이 들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당시 고대에 전쟁의 개념은 한 나라와 한 나라 사이의 군사력으로 서로 싸우는 것을 넘어 신과 신의 싸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신이고 전쟁에서 지는 것은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 남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어떻게 보면 앗수르나 바벨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주목받지 않는 변방의 한 조그만 나라들이었습니다. 영토로 봤을 때나 군사력으로 봤을 때나, 영향력으로 봤을 때 바벨론과 비교했을 때는 이건 존재 자체가 미미한 나라들이 바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한 선지자가 일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히 그 당시 최고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콧방귀도 끼지 않을 농담 정도로만 여겨질 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그들이 듣던 듣지 않던 상관하지 않고,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목숨을 걸고 선명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변 여러 나라들 가운데 왜 1번 타자로 나온 심판의 나라가 바벨론인가? 역사적 멸망 순서를 봤을 때 바벨론이 1번이 아닌데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1번으로 제일 먼저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성경에서 바벨론이란 단어는 그 당시에 존재한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상징하기도 하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바벨탑을 만든 인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미래의 큰 바벨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받은 바벨론은 단순히 그 당시에 존재했던 한 제국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반하는 제국의 상징, 인간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의 상징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바벨론의 심판을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으로 예언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중심에 놓은 짐승의 나라의 대표인 그 악한 제국인 바벨론이 상징하는 분명한 대표성 때문입니다. 그 거대한 제국 바벨론, 짐승의 나라 바벨론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인간의 힘과 능력을 극대화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 하는 모든 조직과 시스템인 겁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인간의 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망각하고 살아가는 나라가 바벨론이고, 그 나라가 위대해서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착각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돈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절하며, 그 모든 것을 집중적으로 만드는 삶이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히 군사력과 경제력이 큰 강대국이라는 것을 넘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나라 짐승의 나라로서의 바벨론을 지칭하는 것임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 모든 바벨론이, 짐승의 나라의 가치와 시스템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벨론에 임하는 그 날,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며 말도 안 되는 일이 펼쳐져 그날에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벨론을 치러가는 군대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을 강조하시는 “내가”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하는 그 날에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것을 말씀은 강조하는 겁니다. 짐승의 나라 바벨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받고 멸망하여 몰락하는 것은 단순히 이사야 시대의 선포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을 관통하는 심판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늘에까지 닿으려고 쌓았던 바벨탑을 무너뜨리실 때도 한 순간에 다 무너뜨리시고 흩으셨습니다. 노아의 방주와 심판의 날에도 때가 차매 한 순간에 하늘을 여셔서 모든 것을 다 쓸어 버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바벨론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 죄인들을 멸하는 일이 한 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바벨탑을 쌓던 바벨론, 자기들의 힘이 최고라고 믿으며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 짐승의 나라가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과거에 있었던 바벨탑도, 지금 현재에 있는 바벨론 제국도, 미래에 있을 짐승의 나라 바벨론도 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가운데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선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와 남 유다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온세계와 열방을 친히 다스리시는 우주만물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북 이스라엘 잘 안되고 심지어 망하는 것도, 남 유다가 잘 안 되어 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뜻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고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열방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임을 선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리 거대한 제국인 바벨론도 하나님이 손에 이렇게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음을,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다스림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뛰어 넘으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 우리 민족을 뛰어넘어 모든 열방과 나라들을 모두 다스리시고 역사의 흐름을 주관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늘 겸손히 엎드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회복의 날, 구원의 날에 대한 이야기가 11장 말씀이었습니다. 소망 없고 절망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람,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열심이 약속의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12장 말씀은 약속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통한 놀라운 회복과 구원의 날에 대해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하고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회복과 구원의 여사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심을 철저히 믿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 없고 가능성 없는 우리들을 건지고 구원하시기 위해 약속의 메시아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는 이 놀라운 역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한 믿음의 반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나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세 가지를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감사, 기쁨, 찬양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감사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 군데에서 감사에 대한 고백이 등장할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중요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삶 가운데 외적 환경과 조건이 내 뜻대로 잘 이루어질 때 주로 감사하고, 반대로 내 뜻대로 환경과 조건이 안 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감사는 여전히 상황적이고 조건적인 경우가 많은데 오늘 말씀에 감사는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감사입니다. 즉 내 삶에 어떤 조건과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 회복과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시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 지금 이 시간 나를 인도하시고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하신 것 자체 때문에 감사로 반응하는 것, 그게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진정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 모든 상황 아래서 감사하는 비결은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하는 믿음의 반응일 때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내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나 환경은 늘 변하고 흔들리기에, 모든 상황 아래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회복해 주시고 구원해 주심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일상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는 것은 물론 귀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개입하시는 것에 대한 감사를 계속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사 1번은 환경과 조건과 상황을 통한 감사가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본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찬양입니다.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찬양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입술의 고백이자, 나의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는 입술의 고백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찬양을 한다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주목한다는 믿음의 고백이자, 하나님이 나의 힘 되심을 통해 내 삶에 두려움이 물러감을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이 하신 회복과 구원에 대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며, 나의 힘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사는 삶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찬양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여전히 세상이 두렵고 여전히 세상이 부러운 이런 삶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럴 때마다 상황에 몰두하여 붙드는 삶을 넘어서기 원하십니다. 세상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세상을 너무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은 바로 내 삶에 구원도, 내 인생의 힘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 삶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되시고 나의 힘 되심을 온 마음으로 찬양하는 믿음의 선포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눈을 들어 땅만 보지 않고 하늘을 보고 살아갈 때, 상황과 환경에 압도되지 않고, 하나님에게 압도되어 살아갈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반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드리는 나의 믿음의 고백이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기쁨입니다. 감사가 결국 내 삶에 기쁨으로 찾아오는 것이며 찬양이 결국 나의 삶에 기쁨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자는 결과적으로 당연히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의 반응을 하는 자들은 그 삶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쁨은 성령의 열매 두 번째입니다. 내가 스스로 결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기쁨이 희락의 열매입니다. 희락, 기뻐함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주님을 바라봄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 방황할 때는 정말 이 구원의 기쁨이 뭔지 모르고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나에게 감사와 감격이 되어 주님을 찬양할 때 내 안에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감격과 구원의 기쁨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가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내 삶을 적시게 되고, 내 삶에 기쁨이 흘러 넘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내 삶에 기쁨의 열매는 오직 주님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기뻐하는 힘이며 감사하는 힘이며 찬양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그게 믿음의 반응입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감사, 찬송, 기쁨이기에, 내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자 마음 자세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회복하심이 선명히 보여지기 원합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이 하시는 회복하심에 주목하기 원합니다. 내가 주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나의 감사 제목 1번은 하늘을 향한 감사가 나의 넘버원이 되는 것이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버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인도하심에 대해 찬양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내 삶의 구원과 힘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찬양하는 천국 백성으로 선명히 살아가십시오. 상황과 환경이 돌아가는 것을 먼저 바라보는 대 신,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일들을 먼저 바라보기 원합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내 삶에 감사가 메마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함이 끊이지 않은 것이며, 내 삶에 기쁨이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1장부터 39장은 하나님의 백성인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향한 경고와 심판의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그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온 민족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심판 외에는 남은 것이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경고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내미시는 손을 끝까지 거절한 그들은 결 북 이스라엘도 망하게 되고 유다도 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예언하는 이 때는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하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 그 망한 백성이 남은 자로서 돌아오게 될 것이고,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이 큰 역사의 그림을 미리 알려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이미 지나간 과거형으로 바라보니까 별로 놀랍지 않은 얘기일지 모르나 그 당시에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데체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우린 아직 망하지도 않았는데 망한 백성들이 남은 자로서 돌아오게 된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우리에게 보내진다는 것이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 과거형의 역사로 이해하고 말씀을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니까 아는 거지 현재 말씀이 선포될 때는 백성들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예언 말씀을 통해 앞으로 펼쳐지게 될 미래의 역사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큰 그림으로 이미 준비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나아간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힘이 됩니다. 지금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지만 먼 미래까지 하나의 큰 그림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취하는 것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영적 지혜라 믿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첫째 아들 이름의 의미가 바로 “남은 자들이 돌아오리라…” 입니다. 그 큰 아들의 이름과 같이 장차 미래에 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되며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신다는 것을 예언해 주시는 겁니다. 남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아서 결국 심판에 직면하게 망하게 되는데 그걸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은 그들을 향하여 약속의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는 것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이 11장 말씀의 큰 그림입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배운 것과 같이 메시야가 오실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해지는 역사가 있고, 사자들이 어린아이와 뛰놀고, 수많은 천적과 원수들이 기적과 같이 녹아져 모두 함께 손을 잡고 공존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내실 약속의 메시아가 오시는 “그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세 가지의 부흥의 징조로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시는 약속의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놀랍게 부흥의 역사로 일어나게 될 텐데, 바로 그 날에 임하게 될 부흥의 세 가지 징조를 오늘 말씀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 메시아가 만민의 기치와 승리의 기치로 우뚝 서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열방이 돌아오게 되며, 예수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두 재편되며 모이게 되는 것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바로 그 날 이루어짐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사모하는 자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첫번째, 그날에 우리에게 임하는 진정한 부흥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기치로 서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만민의 기치라는 것은 하늘 높이 펄럭이는 깃발이라는 의미로, 이 깃발은 만민의 승리의 깃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온 백성들에게 바로 이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민이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그 구원의 승리에 펄럭이는 깃발로 약속의 메시야가 우뚝 서시에 될 거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부흥이라는 겁니다 진정한 부흥은 내가 단순히 뜨거워지고 내가 은혜 받는 것을 넘어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고,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계 만민의 승리의 깃발로 우뚝서게 되는 그 날이 바로 부흥의 날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 그날에 우리에게 임하는 진정한 부흥은 모든 열방이 예수님에게 돌아오게 되는 역사입니다. 말씀에 열거된 앗수르와 애굽의 모든 도시들, 지중해 바다 섬들은 그 당시에 세계관으로는 모든 세상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날에 메시아를 향하여 온 세계 열방이 돌아오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남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계 열방에 주님을 만난 백성들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라는 겁니다.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 주님께서 세어 놓으신 남은 자들이 그날을 기다리며 주님께 모든 열방이 돌아오는 역사를 기대하며 꿈꾸는 그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흥의 사모하며 그 부흥의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남은 자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날에 우리에게 임하는 진정한 부흥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고 재편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며 흩어진 열방을 돌아오게 하시며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게 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부흥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부흥을 통해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부흥의 물결은 그 날에 예수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시고 예수 중심으로 다 모든 게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천적과 원수의 관계 있는 자들이 메시야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서로 공존하게 되는 기적입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 이후에 나라가 갈라진 이후 그들은 지금 한반도의 남과 북과 같이 서로 물고 물리는 아주 원수의 관계, 적대와 천적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되면 약속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재편되면서, 형제이고 한 핏줄이지만 천적이 되고 원수다 되었던 에브라임과 유다가 메시아 아래 서로 함께 공존하며 손 붙들고 사는 겁니다. 북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는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과 유다가 서로 한 형제로 공존하는 겁니다. 마치 사자가 어린아이와 뛰놀듯이 에브라임과 유다가 서로 함께 하나되는 놀라운 역사, 그게 바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실 진정한 부흥의 역사라는 겁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부흥의 역사는 마치 무엇과 똑같은가하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출애굽의 역사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날은 구원의 날이자 소망의 날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즉 부흥의 역사는 새로운 출애굽의 역사이자 새로운 구원의 역사라는 겁니다. 이 놀라운 소망의 약속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시는 겁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어둠과 절망입니다. 점점 세상은 더 멸망과 어둠을 향하여 질주해 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을 볼 때마다 소망보다 절망할 일이 훨씬 많은 아프고 깨지고 병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로서 우리가 붙드는 하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실 놀라운 부흥과 회복의 그날이 우리에게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래알 같이 있지만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돌아올 겁니다. 이 세상 가운데 남아 있는 새벽을 깨우는 소수의 사람들이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고 구하며 의지하며 그 날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높은 같이 충만하기를 사모하며 그날에 부어 주실 부흥의 역사, 열방이 예수에게 돌아오며,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재편되는 승리의 깃발을 보게 되는 부흥의 역사를 사모하며 그 날을 기대하며 사모하며 살아가는 주의 남은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약속으로 보여주시는 예언입니다. 이사야서 전반부는 계속해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한 무서운 심판과 경고의 메세지를 계속 증언하고 있는데, 그 심판과 경고 한 가운데 약속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절망과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암담한 어둠이었습니다. 이 어둠과 절망 한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주심으로 소망과 빛을 보게 될 것이라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목해야 할 것은 언제 메시야가 오시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즉 어떤 모습으로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는가? 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그들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것이 잘려 나가고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듯이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인데,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하는 겁니까?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과는 달리 겉으로 봐서는 매우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그루터기 밖에 남지 않은 나무, 모든 것이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 뿌리 가운데 한 가지가 나듯이, 줄기에서 한 싹이 나듯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상상하는 메시아는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해줄 장군이나 영웅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이사야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는 이렇게 잔잔한 물과 같이, 한 싹이 나오듯 초라한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게 오신다는 것을 분명히 예언해주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시며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가장 약한 자인 아기의 모습으로, 그렇게 보잘 것 없이 작게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한 싹 같이 보잘 것 없이 오신 메시야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여호와의 영이 강림,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한 싹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재능과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심을 예언하는 겁니다. 메시야에게 부어질 여호와의 영의 강림하심으로 이 세상에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벌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자리와 처한 상황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경시하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불법을 행하고 잘못된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착취하는 절망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그 작은 싹 위에 임할 때 참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고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오직 공의로 정직으로, 그의 말씀의 막대기로 입술의 기운을 삼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새롭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법도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지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여호와의 영이 임한 메시야를 통해 이 세상에 펼쳐지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겁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현실에 대해 선명히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 6-8절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그림 언어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성취하신 메시아로서 가져올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펼쳐 보여 주고 계십니다. 바로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하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들의 새끼가 함께 엎어지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함께 장난하는 삶, 이게 그 날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벌어지게 될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그 때” 라는 단어와 “함께” 라는 단어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가져올 하나님 나라는 서로 죽고 죽이는 나라, 서로 밟고 밟히는 나라, 서로 먹고 먹히는 나라, 정글과 같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나라를 넘어서는 나라입니다.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나라에서 천적과 원수가 사라지며 강자를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와 강자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나라로 바뀌는 겁니다. 메시야가 가져오실 하나님 나라는 정글 속에서 서로 죽이고 전쟁하고 억누르며 원수 되는 그런 세상을 넘어서서 함께 화해하고 손잡고 함께 하나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함께 찬양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라 겁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실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 나라임을,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구원의 날이 됨을 예언하는 겁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될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 이 세상의 모든 싸움과 죽음, 천적과 원수됨을 모두 밀어내 함께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은 바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해야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들이 함께 모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두 모여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해질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은 같이 충만해져야 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이 아주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체라는 것을 믿는 것, 오실 그 메시아가 예수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그 예수께서 온 우주의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시며 모든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분명히 믿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는 겁니다. 그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 덮은 같이 충만할 때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며 그 때 바로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과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삶의 자리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메시야가 가져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온전히 왕 되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온전히 임하는 곳이며, 서로 천적과 원수 되어 죽고 죽이는 낌찍한 세상을 넘어 함께 공존하며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 시대 또한 절망과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암담한 삶의 자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경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 천적과 원수 되어 정글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에게도 약속으로 보내주신 메시야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이 끔찍한 정글의 삶을 넘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와 다스리심, 그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를 오늘도 기대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에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에게 임하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라 덮음 같이 우리에게 충만해지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사모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이중적인 의미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숫자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매우 적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세대와 암흑의 세대를 다 무너뜨리시고 그루터기와 같이 남은 자들과 함께 새롭게 재편하시고 새롭게 일을 하시는 것, 그게 그날에 일어나게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들과 함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번째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 은자들은 앗수르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믿어야 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믿지 않아야 될 눈에 보이는 세력을 믿다가 결국 무너지게 되는 이야기,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 북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왕으로 언제나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도록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왕이 더 자신들에게 즉각적으로 도움과 필요가 될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나님의 도움 보다는 눈에 보이는 주변 나라들의 힘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 착각해 붙들다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대신 세상 왕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붙들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붙들며 살아갑니다. 논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야 말로 나의 힘과 도움이 된다 믿으며 의지하고 붙들고 살아가다가 완전히 망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는 자기를 친 자들을 의지하지 않는다, 즉 세상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는다…이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는 새로운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정말 믿는 남은자들, 바알에 무릎꿇지 않은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에게 돌아와 새롭게 새 시대를 열며 다시는 자기를 친 자들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에 모래 같이 많을 지라도 남은 자들만 돌아오리니….그런 의미에서 옛날이자 지금이나 남은 자들이 소수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증언하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많았다는 겁니까?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손이 바다에 모래알 같이 많고 하늘에 별과 같이 많았는데 멸망과 파멸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오는 나온 자는 정말 소수였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는 정말 소수였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가 정말 소수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정말 하나님 말씀밖에 붙들 게 없는 삶은 원하지 않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게 더 쉬워 보이고 편해 보이기에 대다수가 가는 그 길을 가기 원하는 겁니다.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만을 붙들고 말씀만을 붙들고 가는 남은 자들은 늘 소수였고 하나님은 그 소수인 남은 자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재편하고 여시는 겁니다. 두 번째, 그날에 남은 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새로운 일은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남은자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에게 돌아올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힘과 의지할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두려운 존재였고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도 동시에 붙들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꼭 좋아서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막강한 앗수르가 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손을 흔든다고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을 흔든다는 것은 반갑게 인사하는 게 아니라 너희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다음은 너희 차례라고…협박하며 손을 흔드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 당한 후에 다음 차례는 너희 유다와 예루살렘이야…앗수르가 협박하며 손을 흔드는 비웃음입니다. 앗수르의 협박과 비웃음에 이제 우리는 곧 망하게 되었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마치 골리앗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와 같던 그때에 다윗과 같이 골리앗을 넘어 골리앗 뒤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이 가진 하늘의 시각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남은 자들이 앗수르의 협박과 두려움 가운데 붙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내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을 내 진노로 멸하리라…하나님께서는 그 앗수르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 그들의 몽둥이와 채찍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붙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속히 무너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결국 골리앗도 다윗이 싸워 이긴게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이기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앗수르로 하나님이 무너지게 하신다는 그 말씀만을 믿고 붙든 겁니다.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앗수르와 같은 힘에 두려움과 불안에 압도 당하여 살다 죽게 되는 겁니다. 병에 걸렸을 때 병으로 죽는 것도 있지만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 자체도 어렵지만 고난에 대한 불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 당하여 이미 전쟁에서 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만 보는 게 아니라 문제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은 자들과 같이 문제에 압도 당하지 말고, 어려움과 고난에 압도 당하지 말고 문제 가운데 주님과 함께 해답을 하며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 바로 남은자가 말씀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삶인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믿고 의지하는 세상 것들과 사람들에게서 떠나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길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는가 달려 있습니다. 쉽고 편한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자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소수인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에 머물러 있고 세상을 의지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과 군사력이 더 유용해 보이고 더 나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주저하는 겁니다. 그 날이 오게 되면 대다수 모래알과 같은 많은 백성들이 다 사라지고 다 무너지고 다 멸망하고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 결국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 날이 오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힘과 권력을 붙들지 않는 남은 자들과 함께,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새로운 삶으로 재편하실 겁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어두웠고 갈수록 더 어두워질 겁니다. 하나님이 점점 멀리 있는 것과 같고 눈에 보이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게 당연할 것 같은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 남은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세상 것을 의지하는 데서 돌아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남은 자로 세상을 선명하고도 분명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경고의 말씀을 계속 선포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방치하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계속해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아니하면, 지금 당장 돌이키지 아니하면 임박한 화와 심판에 대해 직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이란 말을 훨씬 더 좋아하고 은혜라는 말을 훨씬 좋아하지만, bad news에 직면하지 않고는 good news가 없듯이, 나의 현재적인 실체에 대해 분명히 직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화와 심판에 대한 심각성이 없이는 복이 없고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부분에 “화 있을 진저..”의 경고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화 있을 진저…” 라는 관용어는 하나님께서 임박한 화와 심판을 예언할 때 주로 사용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임박해 있다…화가 곧 닥칠 자들이라는 것을 선언할 때 “화 있을진저..”라는 관용어를 쓰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화 있을 진저…”의 대상은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고, 두 번째는 아수르 나라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우리 마음속에 담아 심판과 화가 임박한 이 시대에 동일하게 나를 깨우시며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화 있을 진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과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마음은 스스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며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은 돌과 같이 딱딱해 져서 하나님의 찌르시고 깨우치시는 말씀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영적 무감각증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그들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약한 자들을 외면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보면 먼저 불의한 법령을 만들고 불의한 말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힘이 있으니까 법을 만드는데 법을 계속 만드는 이유가 불의한 이득을 위해 법령을 만드는 겁니다. 백성들에게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의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불의한 법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그런 법들이 결국 서민들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법이 되고 힘이 없고 약한 자들의 것을 빼앗는 법들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지도자들은 이렇게 불공평과 부정 부패를 통해 백성들의 것을 계속 빼앗아가는 불의한 법들을 계속 만드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시며 경고하시는 겁니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불리한 법령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인 고아와 그리고 과부들 것을 빼앗고 노략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음을 증언합니다.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대표적 대상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고아와 과부를 사회에서 어떻게 돌보는가를 하나님 말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시험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고아와 과부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불의한 법들을 이용해 가장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노략하는 일을 벌인 것입니다. 이게 지도자들의 교만하고 완악해진 마음 가운데 나오는 구체적인 죄악의 내용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 진저…”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보내시는 겁니다. 빼앗을 게 없어서 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고아와 과부의 것을 빼앗느냐….힘을 가지고 힘없는 자를 눌러 버리며 고아와 과부 같은 가장 약한 자의 것들을 뺏어서 이익을 취하는 이런 일들을 지도자들이 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살면 곧 망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법을 만들어 착취하며,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의 것을 빼앗는 악한 일에 대해서 좌시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화 있을 진저…” 앗수르 백성들과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사실 앗수르…라는 강대국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심판하시기 위해 들어 쓰신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선 주기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청소하시는 모든 불순물을 태우시는 그때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가 바로 앗수르였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좋은 도구들을 쓰실 수도 있는데, 굳이 그렇게 악하고 강대국인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쓰셨을까? 완벽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겠지만, 말씀을 비추어 묵상하면서 답을 찾아보자면, 그 당시 죄인 아닌 사람들이 없고, 죄에 쩔은 악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는 내가 대단해서 쓰임 받는 건 아닐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겁니다. 앗수르에게 하나님은 내 진노의 막대기 그 손에 몽둥이의 도구가 잠시 되게 하셨습니다. 심판을 위해 앗수르에게 막대가와 몽둥이가 되게 하셔서 잠시 힘을 맡기신 겁니다. 북 이스라엘을 치는 것을 통해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도록…그렇게 하나님께 도구 됨으로써 앗수르가 굉장한 힘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의 교만과 착각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로서의 힘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내가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의 입에서 계속 나오는 말이 뭡니까? 내 손이 대단하고 내 지혜가 대단하고 내가 총명해서 내가 이 모든 걸 다 이루었고 다 했다… 모든 관심과 초점이 나에게 있죠. 하나님이 도구로서 주신 힘이라는 것을 철저히 망각하고 교만과 악으로 질주한 게 앗수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구됨을 망각하고 교만과 악에 빠져 버린 앗수르와 그성읍들은 화 있을진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열방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세우신 백성인데 하나님의 도구됨을 망각하고 스스로 우월한 줄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교만과 완악함에 빠져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았으며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의 것까지 빼앗는 불법을 일삼았기에 “화 있을 진저…”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잠시 주신 몽둥이로서의 힘과 능력을 받은 앗수르, 그들도 도구됨을 망각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며 교만과 악으로 질주하다가 “화 있을 진저…”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대국이 되는 것이죠. 하루 아침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치시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시려고 힘과 능력을 부어 주셨는데 그게 내 힘과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며 도구인건 망각하면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임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고 우리가 앗수르와 같이 잠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망각할 때 결국 내 인생이 앗수르의 길을 가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 결국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약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의 것을 약탈하며 살아갔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화 있을 진저…”가 우리와 전혀 무관한 얘기가 아니며 무관한 경고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늘 겸손하게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이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임을 잊지 말고, 부어 주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내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 자체를 그냥 듣고 깨닫고 변화하는 지혜로운 자들, 말씀으로 깨닫지 못해도 어려움을 통해 깨닫고 변화되는 자들, 말씀으로도, 어려움으로도 깨닫고 변화되지 않는 우매한 자들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자들은 경험하기 전에 말씀으로 알려주실 때 깨닫고 변화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깨닫고 변화되지 않을 때는 결국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야 깨닫고 변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알려주셔도 깨닫고 변화되지 않고, 상황으로 직면하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깨닫고 변화되지 못하는 자들이 가장 어리석고 가장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보내시는데 그들이 바로 이처럼 가장 어리석고 가장 답답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계시는데, 바로 말씀을 보내시고 말씀이 백성에게 임하게 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고 건강한 교회 공동체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일어나는 선순환입니다.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는 모두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시고 말씀이 임하게 하시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이 새벽에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인 성도들에게 부족한 종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임하게 하셔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말씀이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교만한 마음과 완악한 마음이었습니다. 교만이란 하나님 대신 내가 중심이 되어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하는 마음입니다. 완악이란 마음이 돌과 같이 딱딱해진 마음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하고 완악한 영적 상태였기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시고 말씀을 임하게 하시는데 그들은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반응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밥 먹여주냐? 하나님의 지혜가 나와 그렇게 뭐 상관이 있냐…이렇게 반응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는 삶을 지속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고,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도 변화되지 않고, 어려움과 위기 상황으로도 변화되지 않는 겁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고,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으로 밖에 치시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벽돌이 무너지고 뽕나무들이 찍혔다는 건 삶에 찾아 오는 예상치 못한 위기와 어려움들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벽돌이 갑자기 무너지기도 하고, 뽕나무가 갑자기 뽑히는 일들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어려움과 위기 상황이 찾아올 때, 정말 깨어 있는 자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됩니까? 아, 이걸 통해 하나님이 내가 깨닫기 원하시는게 뭔가…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그래서 직면한 어려움과 위기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는 것이 깨어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벽돌이 무너지고 뽕나무가 찍히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전혀 깨닫지고 변화되지도 않는 겁니다. 교만한 사람과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시고 말씀이 임하게 하심에도 불구하고 변화되고 깨닫지 못하고 어려움과 위기 상황을 통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다듬은 돌로 쌓고 백향목으로 그것을 다시 쌓으면 되지…내가 스스로 모든 해결책인 냥 교만에 빠져 착각하는 겁니다. 지나친 자기 과신의 교만과, 돌과 같은 완악함에 빠지니까, 깨닫고 변화되어 하나님께 돌아오는 대신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겁니다. 그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은 결국 심판 외에는 남는 게 없게 만드는 겁니다. 세 번이나 반복하시면서 경고로 주신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노가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선포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의 본질이 뭡니까? 죄된 행동을 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거며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구별 되었는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말씀과 무관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을 찾는 대신, 내 스스로 자꾸 빛을 만들려고, 내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려 하고, 내가 모든 삶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오직 하나님의 심판 밖에 남지 않는 것이며, 그의 진노가 돌아서지 않고 심판의 손을 계속 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치시는 순서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를 먼저 치신다는 겁니다.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들, 그 꼬리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거짓말이란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심을 가르치는 대신,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들만 계속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더 민감하게 깨어 있지 아니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을 다 물에 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미혹을 받게 만들고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하는 영적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임하게 하시며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예배를 통해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를 사모하십시오.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끊임없이 경주해 되는 성도로서의 삶입니다. 말씀을 보내시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경건하지 않고, 악을 밥 먹듯이 행하고 입으로 망령 행하면서도 문제 의식이 하나도 없는 교만하고 완악한 삶을 지속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는 그들은 모두 심판에 직면하고 망하게 되리라… 이게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빛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찾으며 주님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스스로 빛을 만들려 하지 말고, 내 스스로 정답과 해결책이 되려 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향하여 걸어가며 주님을 구하는 백성 되십시오. 오늘도 보내시는 말씀 임하게 하시는 말씀을 통해 내가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과 무관하지 않게 말씀과 무관하지 않게 구원과 무관하지 않게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계속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그들이 풍전 등화 같이 언제 망할지 모르는 깊은 어둠 가운데 이제 남은 것은 심판 밖에 없는 것 같은 있는 상황입니다. 고통받는 시대, 사망에 그늘진 시대, 흑암이 가득한 시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처한 삶의 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도 풍전 등화같이 언제 망할지 모르는 시대, 깊은 고통과 어둠가운데 있는 삶의 자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소망의 메세지는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앞뒤 좌우에 모든 것이 막혀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절망과 답답함…그런데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이것이 모두 다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외부부터 메시야가 오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며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빛이 임한다…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 주신 소망의 메시지이며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세지입니다.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은 해변길과 요단 저쪽의 갈릴리, 즉 이스라엘 땅의 북쪽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남유다, 사마리아, 갈릴리로 되어 있는데, 북쪽 갈릴리는 늘 외세의 침략이 많고 전쟁이 나면 제일 총알 받이로 황폐해지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항상 멸시를 당하고 항상 힘들고 어려우며, 황폐함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메시야가 오심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라시고 유년의 시기를 보내신 곳이 바로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그렇게 멸시를 당하고 흑암이 가득한 그 땅에 메시야 예수님이 오심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흑암에 빛이 임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게 바로 갈릴리에서 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시간에 딱 맞추어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이것을 이사야서는 오래 전에 이렇게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셨고 이 약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약속으로 성취될 메시아가 오시는 방식입니다. 그 메시아가 어떻게 오시는가 하면 사람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 큰 용사 같은 메시아가 딱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상상하는데,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는 방법은 너무 달랐다는 겁니다. 바로 한 아기를 보내시는 겁니다. 놀라운 역사의 반전은 아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같이 아기가 태어나는 거라는 예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메시아가 오셔서 용사로 오늘 당장 모든 걸 해결해 주셔야 될 거 같은데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역사는 아기를 보내시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로 오신 아기는 너무나 힘없고 작고 연약해 보이기에,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파격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아기가 실제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라야 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찬찬히 흐르는 물과 같이 하나님의 때를 인내로 기다려야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재물로 바쳐지는 장면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삭도 어떻게 태어나는가 하면 기다리다 기다리다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이 다 끊어진 상태에서 마침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게 이삭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도 그가 아기로 태어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리고도 40세도 아니고 80세 되어서야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출애굽을 위한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 가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약속대로 오시는 메시아는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십니다. 기묘자란 Wonderful입니다. 경이롭고 놀라움이 가득한 분이십니다.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에서 이렇게 가득해지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풍성하게 내 삶에 설명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을 가득하게 해주시는 기묘자 이십니다. 모사란 counselor, 상담자입니다. 자기 하나님에게 마땅히 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인생에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날 때, 사람들 찾아가기 전에 제일 먼저 내 삶의 베스트 카운셀러이신 메시야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어떤 결정을 해야 될지 모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 인생에 길, 진리 생명이신 주님과 상담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뒤따라가는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겁니다. 내 마음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 내 인생을 상담하며 조언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영원히 존재하는 아버지입니다. 영존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죽지 않고 그냥 영원히 존재하고 사신다는 시간 개념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구원 하시겠다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 작정하신 자들을 반드시 구원으로 이끄시고 완성하시고 결말을 내신다, 이것이 바로 영존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시간표와 방법대로 반드시 이루심을 믿는 것, 그 고백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심을 믿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 공로나 열심이 이루는 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공로와 열심이 이루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내 일상의 많은 축복들은 누가 이루시는 겁니까? 겉보기에는 내 열심이 이루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 언약인 구약과 새 언약인 신약을 통해 그 하나님의 작정하신 구원 계획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시는 구속사의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으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아닌 주님의 열심이 일하시도록 점점 나를 드리는 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은 오직 주님을 기준으로 붙들고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살아가며, 주님을 나의 힘으로 모시고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어 가시는 존재로 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늘 고통받았고, 늘 멸시를 당했습니다. 흑암과 사망이 가득한 땅입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 속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복음은 하루하루 나아지고 좋아지는 개선이 아닙니다. 외부의 구원자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모든 흑암과 사망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내 기대와 상상대로 오시지 않지만, 아기와 같이 오신 메시아를 마음에 깊이 새기며, 언제나 한치에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바라보십시오. 내 머리와 계산, 내 시간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한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 가심을 믿는 겁니다. 내 계획과 시간표를 내려놓고, 그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방법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믿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모든 것을 이루는 그 놀라운 역사가 내 삶 속에서도, 우리 교회 공동체 속에서도 선명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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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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