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는 계속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먹고 살만하고 괜찮아 보이는 거 같은데 하나님께서 지금이 영적으로 파산 상태이고, 파멸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찌르는 말씀으로 경고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끝까지 거역하고 끝까지 겸하여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되심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거절하는 삶을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다른 것에 눈이 쏠려 그것을 의지하게 되며 괜찮다고 착각하다가 무너집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벌벌 떠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도 문제고,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 대신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고 거기서 죽을 것 같이 아우성 치는 것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남유다 왕의 불순종의 역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망하는 역사는 단순히 한 백성의 역사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실존을 관통하는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심판의 경고를 주시는 하나님의 찌르는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경고의 말씀이 아닌, 아 지금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붙들고, 나와 무관하지 않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에게 증언하는데 바로 그들의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위기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상황에 압도되어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에 두려워 하면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고 갈대 같이 흔들리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가장 악한 왕 중의 하나인 아하스 왕 때에, 남과 북은 굉장한 갈등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아람군대와 연합군을 맺어 남 유다를 치러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남유다의 1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죽게 되는 비극과,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의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의 풍전등화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겁니다. 그때에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반응을 성경은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고 증언합니다. 큰 허리케인이나 태풍이 오게 되면 그냥 마을 전체가 다 휘청 거리는 것과 같이 왕과 백성 할거 없이 모두가 사시나무같이 벌벌 떨고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표현이 바로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쳐들어왔을 때 사울 왕과 그 모든 군대가 벌벌 떨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완전히 상황에 압도당하여 눈앞이 캄캄해지고,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버리게 된 겁니다. 왜 이렇게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물론 처한 상황이 굉장히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인 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상황과 처지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 앞에 먼저 나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살려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데, 아하스 왕도 백성들도 이렇게 국가적인 큰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오거나 매달리지는 자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그들은 처한 상황에 압도당하여 눈앞에 있는 두려움과 절망에 매몰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들에, 눈에 보이는 상황을 더 두려워하며 눈앞이 캄캄해지고 매몰되어 상황 넘어를 볼 수 있는 영적 시야가 완전히 닫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시나무 떨듯이 죽게 되었다며 흔들리게 되며,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아야 될 아람 군대에 압도당해 눈앞이 캄캄해 지면서 보이는 것 너머를 보지 못하며 거기에 다 압도당하며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노라면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이라는 감정이 찾아오는 거 자체를 우리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이라는 감정이 끊임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손님과 같이 잠깐 왔다가 내보내는 것이 건강한데, 건강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그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이 내 마음의 안방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방에 들어오니까 자리 잡고 앉아서 우리는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그 감정들을 묵상을 하는 겁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묵상하게 되면 항상 그 두려움과 불안함과 낙심은 왜곡과 과장, 재생산을 하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통해 찾아오는 두려움, 불안, 낙심에 내가 결박되어 짓누르며 나를 사시나무 같이 흔들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아람 군대와 북 이스라엘 연합군은 기세가 등등해서 남유다를 이미 감정적으로 압도하며 위협합니다. 너희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너희는 이제 죽은거나 마찬가지다… 협박하며 막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주시는 말씀이 뭡니까? 그 일은 서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이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두려움과 낙심에 압도될만한 큰 위기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나에게 찾아올 때, 이때 여러분들이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느냐가 믿음 생활의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정말 붙들고 상황에 압도되지 않으며 상황 너머의 주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영적 선택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두려움과 낙심과 불안에 빠져나가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던지, 아니면 처한 위기 상황에 매몰되어 두려움과 불안이 압도해 무너지던지…한다는 겁니다. 눈앞이 어렵고 캄캄한 거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상황만 바라보고 매몰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두려움과 불안한 상황 가운데 상황 너머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서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영적인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 압도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상황 너머를 볼 수 있는 게 영적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소에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보이지 않는 천국을 주목하고 살아야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눈에 보이는 상황 너머를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닫히지 않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정말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거의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골리앗만 바라볼 것인가? 골리앗 뒤에 나의 도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 눈에 보이는 상황만 바라보면서 무너지고 두려워하며 압도당할 것인가? 위기 상황 뒤에서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볼 것인가? 내 인생이 처한 풍랑만 바라볼 것인가? 풍랑 뒤에서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것인가? 언제나 이야기는 다르고 내용은 다르지만 패턴과 영적 지혜는 똑같다는 겁니다. 믿음 생활이란 눈에 보이는 것 넘어 어려움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각과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상황만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몰되지 않고 상황과 어려움과 문제 너머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보이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나아갈 때 내 안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이 물러가게 된다는 겁니다. 위기 상황 가운데 상황 너머를 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을 가진 사람만이, 상황을 좀 멀리 떨어져서 한걸음 뒤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누구로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내가 평소에 하나님이 정말 나의 도움 되심을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만을 굳게 믿어야 위기 가운데 굳게 서게 된다는 겁니다. 내 삶의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은 찾아옵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은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불안해 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아야지…말하고 싸운다고 물러가는 게 아닙니다. 상황만 바라보지 말아야지 주먹 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싸운다고 절대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은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황 너머를 보는 비결,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을 넘어서는 비결은 오직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사랑이 그것을 밀려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인생,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에 압도당하며 눈앞이 캄캄해 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초자연적인 인생,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는 인생 외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과 싸우려 그러지 마시고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이 찾아올 때 주님을 바라보고 굳게 믿으십시오. 주님이 빛과 사랑이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과 낙심을 밀려 가게 하시며 물러가게 하시며 쫓아내시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을 넘어, 상황에 압도당하는 것을 넘어, 상황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 주님을 굳게 믿고 붙듦으로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이 밀려 나가는 기적을 내 삶에서 선명히 체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의 사명장으로 불리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하늘의 놀라운 일과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에게 회개하게 하셔서 하늘의 불을 통하여 정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사명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사도”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께 이방인들을 구원하는데 보냄을 받은 사도라는 것을 선명히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적 삶을 견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이고, 선교사는 아니지만 선교적 삶을 견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도적 삶을 견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우연히 어쩌다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선명히 믿는 삶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내 선택으로 내 뜻과 계획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하나님의 선택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보내신 분의 계획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내신 분이 돌아오라 하시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결정과 선택이 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게 보냄을 받은 자의 삶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사명을 위해 보낼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도구로 쓰임받은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 때 이사야는 놀라운 믿음의 반응으로 주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의 분명한 부르심과 보내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보내심과 부르심이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한 사도적 삶을 살았던 사람만 보내심 부르심이 있는 게 하나님의 백 성에게는 이 분명한 부르심과 보내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먼저 찾아 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겨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있으며, 주님께서 누구를 보낼까…나를 깨우시는 보내심의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이사야의 소명을 통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나에게 찾아오시고 부르시며, 나를 보내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사야와 같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될 때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일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겁니다. 이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계획하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며 열매는 맺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보내심에 분명한 고백 가운데 내 마음을 드리고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 그 삶으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과 보내신 사명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바로 불순종과 반역 우상숭배로 지금 멸망 직전에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깨우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 자들과 같이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해졌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고 찌르는 말씀을 계속 듣게 하셨지만,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보고도 알지 못하는 우매함이 반복되면서 임계점을 넘어간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고 둔해져서 깨닫지 못하게 될 지경이 된 겁니다. 이제는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봐 걱정된다…반어적 말씀을 하실 정도로 절망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소망 없어 보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보냄을 받는 겁니다. 그들은 결국 어느 때까지 그들이 안 돌아오냐….언제 두 손들고 돌아오게 되느냐는 것이죠. 완전히 망하고 무너져야만 돌아온다는 것을 전하는 겁니다.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모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때가 되어야 정신 차린다는 겁니다. 완전히 황폐해질 때까지 완전히 망할 때까지 끝을 보는 때가 되야 돌아올 정도로 그들의 현재 영적 상태는 절망이라는 겁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소망의 메시지도 함께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다 황폐해지고 멸망하고 무너지지만, 그 가운데 그루터기와 같이 남겨두신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다 망하고 무너져도 그루터기는 남아 거룩한 씨가 이 땅에 남아 있게 하시겠다는 소망의 메세지입니다. 그 남겨진 믿음의 사람들은 바알에 무릎 꿇지 않는 7000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모두 불신앙과 우상숭배로 자빠지고 무너진 것 같은 그 어둠의 때에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남겨두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망하게 하시고 그 남은 자들과 함께 다시 새 출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망하고 무너지고 황폐하게 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쓰신다, 다시 일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를 그의 뜻에 따라 일하도록 부르신다…이것이 성도의 분명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내가 조율 받으며 그 보내심에 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하도록 부르시는구나…그 부르심과 보내심을 분명히 깨닫기 원합니다. 내가 살아나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이자 하나님의 보내심의 자리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부르시고 하나님은 사명을 위해 보내시고 계심을 분명히 믿으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줄 믿습니다. 부르심의 자리와 보내심의 자리의 모든 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리임을 고백하며 살아가게 되기 원합니다. 그게 그분께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이 성도인 내가 살아가는 방식인 줄 믿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이 세상에 부르심의 자리와 보내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의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장부터 5장까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에 계속 무서운 멸망과 심판의 경고의 메세지를 주시다가 오늘 6장에서는 빛과 같이 이사야에게 소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이 그 모든 것들을 덮고 넘는 차고도 넘치는 은혜와 같이 놀라운 역사의 한 순간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르시고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먼저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때가 언젠가 하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남유다 역사에서 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굉장히 선한 왕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든든해지고 주변 나라들이 벌벌 떨 정도로 부강하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또 그렇게 위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주시니까 왕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하지 말아야 할 제사장 역할도 감당하려 하다가 병이 와서 그만 죽게 되던 때, 즉 국가적으로는 큰 위기의 전초가 되던 때였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심으로 모든 것이 시작합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때, 국가적으로는 큰 위기가 찾아올 전환점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영어로 하면 God’s initiation이라 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겁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가 쓰임 받고 싶습니다…그러면서 먼저 나아간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사야를 부르시고 만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시고 먼저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먼저 떨기 나무 가운데 찾아가셨고, 기드온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이사야를 부르시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먼저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Initiation과 주도권 아래 하나님의 뜻을 나누시며 하나님을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현장으로 보내시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하늘의 역사, 그 영적 원리의 순서인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먼저 찾아오셨고, 먼저 하늘의 일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십니다. 땅의 일에 몰두하고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하늘의 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땅만 바라보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임을, 눈에 보이는 땅의 일에만 몰두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일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하늘의 것을 보여주셨는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스랍들 천사들을 통하여 하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천사들의 옷자락은 하나님의 위엄을,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 세번을 찬양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님 하나님을 온전한 찬양을 들은 것입니다. 하늘의 가득한 영광이 가득했던 세번의 거룩함의 찬양이, 보좌 주변을 메아리 치고 문지방의 터가 요동할 정도였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을 이사야가 보고 들은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썼으나 부분적으로만 표현되는 하늘의 놀라운 위엄과 영광을 보여 주신 겁니다. 땅만 본 사람들은 하늘의 것을 알 수 없고, 땅의 영광만 보고 사는 사람들은 하늘의 영광이 뭔지 모르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사야를 부르시고 하늘을 열려 놀라운 하늘의 역사를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보이는 유다의 왕이 아닌 보이지 않는 만유의 왕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선명히 알게 하신 겁니다. 세번째, 이사야의 처절한 회개와 하나님 용서입니다.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역사와 영광을 보고 들은 이사야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까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복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나는 큰일났구나 망했구나 죽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왜냐면 나는 더럽고 죄인이고 하나님의 그 영광 가운데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게 되면 나에 대한 절망과 포기, 나에 대한 소망 없음을 철저하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거룩 가운데 내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진짜 알고 나서 그가 했던 첫 번째 반응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고백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놀라운 하늘 보좌와 임재를 놀랍게 체험하면서 발견한 나라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며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내가 한 일을 자랑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소망 없음을, 가능성 없음을 고백하며 엎드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나의 존재감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라는 회개의 고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의 많은 죄악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입술이 부정하다 고백한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한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찾아옵니다. 천사가 죄로 말미암아 부정해진 이사야의 입술을 하늘의 숯으로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죄악의 본질인 내 입술에 하늘의 숯이 닿게 하니까 바로 내 죄가 해지고 악이 사해진 것입니다. 회개하며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나를 깨끗게 하시고 나를 정하게 하시며 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겁니다. 나의 부정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만나면 나의 부정함이 정해지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놀라운 역사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일어나는 놀라운 축복들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며 예수님을 만나면 부정했던 나병환자가 병이 치유를 받고 깨끗해지는 역사가 예수님을 대면한 자들에게 주신 하늘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 철저하고 진정한 회개 가운데 주님의 거룩하심에 내가 닿을 때 내 붉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며 불순물이 모두 태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하늘의 복이며 이사야에게 보여주던 놀라운 하늘의 영광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대면한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심을 믿는 게 복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시고 나의 마음을 노크하시며 깨우시는 분임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깨우시고 부르시는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저 오늘을 위해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넘어 그날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자는 바로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는 자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 가운데 엎드리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정한 자이며 얼마나 소망이 없는 자이며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 자인지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겁니다. 그냥 나는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며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모든 건 주님이 다 해결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그 하늘의 은혜를 맛보는 것뿐입니다.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 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 그 모든 다른 삶의 비결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믿고 하늘의 영광을 보는 데 있는 겁니다. 나에게도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 하나님의 역사와 일이 보여지는 기적이 열리기를 사모하며 오늘을 살아 가십시오. 땅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광을 넘어 하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의 현실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반복적 경고 문구가 운전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상하지 않는 일이 앞에 벌어지기 때문에 미리 반복적 경고 안내를 통해 미리 대비하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내판을 무시하고 달리다 보면 결국 길을 돌아 나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큰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앞부분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를 들포도 열매를 맺은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가장 좋은 열매가 나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먹을 수도 없고 악취나는 들포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하나님을 안 섬긴 건 아니고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는 정기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담긴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며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생겨, 하나님을 그런 것들과 겸하여 섬기면서, 결국 오늘 말씀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시하고 율법을 버리고 말씀을 멸시하는 병든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악취나는 들포도 열매를 그들의 인생에서 주렁주렁 맺은 것입니다. 그렇게 병든 신앙, 먹을 수도 없고 악취나는 들포도 열매를 주렁주렁 맺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세 번이나 “화 있을 진저…”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반복적인 경고 문구인 “화 있을 진저…” 는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저주의 말씀을 하실 때 관용구와 같이 쓰셨던 말씀입니다. 이사야도 예수님도 “화 있을진저” 라는 반복적 경고 문구를 통해 심판과 멸망이 임박하고 있음을 엄중히 선포하셨습니다.
첫 번째,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 진저…. 끈이라는 것은 무엇을 묶는데 쓰는 도구입니다. 어떤 끈으로 내 인생을 묶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리의 하나님 말씀으로 그들을 묶어야 되는데, 들포도와 같이 그들은 거짓의 끈으로 그들의 인생을 묶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거짓에 묶여 살아가니까 죄악을 끌고 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거룩하게 구별 받은 그들이 거짓의 끈에 인생이 묶여 죄악을 끌고 가는 참담한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나를 묶고 죄악을 끄는 인생, 그리고는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 드리고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에게 “화 있을진저” 하나님은 경고하신다는 겁니다. 이 안타까운 이사야의 경고는 예수님 시대에도 반복되는 경고 문구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예배 잘 드리고 기도 잘하는 사람들이었을지 모르나, 하늘의 시각으로는 영적 관점으로는 그들은 거짓의 끈에 묶여 죄악을 끌고 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종교 의식이 화려할지 모르나 속은 썩은 악취가 나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예수님이 경고하셨고 그들에게 동일하게 화 있을진저…저주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내 삶에 적용하여 말씀으로 비춰 보지 않으면 오늘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끄는 인생인 우리들에게 “화 있을진저 …” 경고 하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뇌물을 받아 선과 악을 왜곡시키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변질시키는 겁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뇌물로 말미암아… 유다와 예루살렘은 거짓의 끈에 인생이 묶여 살았기에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 공의를 빼앗는 악취나는 불의를 일삼았습니다. 거짓에 묶여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부당한 뇌물을 통해 취하는 자들이고, 그 뇌물은 반드시 정의와 진리를 내 입맛에 맡게 고무줄과 같이 늘렸다 줄였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무줄 같이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을 넘어, 뻔뻔하게 선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고, 흑암을 광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뇌물은 이렇게 내 욕심을 채우는 부당한 도구가 되어 내 눈과 마음을 가리게 되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정의와 공의를 나의 유익과 욕심의 도구로 삼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철저하게 죄악을 끌고 가는 인생이 되며 무너지는 겁니다. 항상 시대가 악하고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의 절대 기준이 사라지며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스스로 기준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내가 조율되지 않으면 내 이익과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고무줄과 같이 내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이 거짓의 끈에 묶여 사는 인생의 특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무너뜨리며 내 유익과 욕심을 붙들고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결국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에 내가 조율되는 인생이 아니라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면 내가 기준이 되어 스스로 지혜롭고 잘나고 교만하다 뻐기며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지혜가 기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인생은 거짓의 끈에 묶여 살아가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왜곡과 변질시키는 죄악에 물들어 사는 자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반복적 경고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채 멸망을 향해 질주하면서도 스스로 지혜롭다 착각하며 교만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악취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어둠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자들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기를 거절하고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냐 거짓이냐에 그들은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님이 나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에게 불이익이 되며 나의 기득권을 흔들게 되면 의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지혜 있다 착각하며 스스로 교만하여 주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의 대신 거짓의 끈에 묶여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이며, 뇌물을 받아 정의를 왜곡시키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나아가 욕심을 위해 살아가면 결국 끝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증언되는 먹을 수 없고 악취 나는 들포도를 맺은 자들을 향한 세가지의 “화 있을 진저…”의 경고 문구를 마음에 새기 원합니다. 화 있을 진저 거짓의 끈에 묶여 죄악을 끄는 자들이여….화 있을 진저 뇌물을 받아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왜곡 시키는 자들이여….화 있을 진저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기 교만에 빠진 자들이어….지금 이 시간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엄중한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끈으로 나의 인생을 묶고 살아가는지…..내가 무엇에 묶여 살아가는지…이걸 모르고 살아간다면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죄악을 끌고가는 참담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사람들은 거짓에 묶여 죄악을 끌고 살아가다가 망합니다. 각자 자기 소견대로 스스로 지혜롭다 스스로 명철하다 착각하며 살아가다가 망하게 됩니다. 나의 인생은 어떤 끈을 가지고 내 인생을 묶고 있는지 주님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 반복되는 나의 습관이 결국 내 인생이 거짓에 묶여 살아가는지, 진리에 묶여 살아가는지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끈으로 삼아 나를 묶는 일이 내 일상의 신앙 생활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며 기도와 말씀을 내면화 시키는 습관은 거짓의 끈에 묶이기 쉬운 나를 진리의 말씀의 끈으로 단단히 묶는 거룩한 영적 생활로 나아가십시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먹을 수 없고 악취나는 들포도 같은 열매를 맺는 인생 대신, 맛있고 향기나는 열매 맺는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식물을 키우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들 합니다. 물을 주고 가지치기 하며 좋은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하며 돌보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의 기대,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안타깝게 무너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하면 극상품의 포도나무와 같이 여기시고 그들을 높이 세워 주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노래를 반복하시며 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백성,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큰 기대가 가득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최상급으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거기에 잘 자라도록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망대도 세우시고, 가지도 잘라 주시며, 해와 비를 내리시며 가장 좋은 열매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기대하셨습니다. 엄청 맛있고 향기도 좋은 괜찮은 포도 열매를 맺겠다고 가득 기대하신 겁니다. 그런데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그렇게 가꾸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
이 맺은 포도 열매는 들포도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들포도는 단순히 들에서 나온 포도가 아니라 너무 시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포도이자 악취가 나는 포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먹을 수도 없고 악취가 가득한 들포도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포도를 바라보시며 말문이 막히시며 멘붕 상태가 되신 상태, 그게 정확하게 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보내신 목적은 바로 그 죄와 우상이 가득한 가나안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과 똑같다는 것이죠. 그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기를 그렇게 기대하셨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이 맺은 열매는 맛이 없고 악취가 나서 먹을 수 없는 들포도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절대 망칠 수 없을 것 같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 된 것 같았던 포도 농사를 완전히 망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며 기대 가득히 바라보신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있을 수 없는 엉뚱한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맺은 맛없고 악취나는 들포도 열매를 몇 가지로 구체적 예를 들어줍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바라셨는데 그들의 삶에 맺은 건 불의와 포악이고 불순종과 타락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은 것입니다. 또한 유다와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도 무관심하며 오히려 세상 일과 우상의 말에 관심을 두며 우상숭배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은 것입니다. 그렇게 맛없어 먹을 수도 없고 악취가 나는 들포도를 맺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절망과 탄식이 오늘 말씀에는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극상품 포도 나무인 우리는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가지 치기도 하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분명한 기대가 있다는 겁니다. 그 기대는 뭐냐하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기에 맛있고 향기 좋은 포도 열매는 맺기 원하시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 극상품 포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 말씀에도 무관심하다면 필연적으로 들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맺기를 기대하신 정의와 공의 대신 불의와 포악,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맛없어 먹을 수도 없고 악취가 나는 들포도를 맺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절망과 탄식이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망이자 탄식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절망과 탄식, 하나님의 심판 예고의 말씀을 읽으면서 나와 무관한 사건, 나와 무관한 이야기로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과거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현재형의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시작은 하나님께서 기대 가득한 모습으로 사랑으로 노래하시며,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그들이 맺은 열매는 하나님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들포도를 주렁주렁 맺은 그 절망감….때가 차매 하나님은 과감하게 포도원 담장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다 헐어 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이 심판의 때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가 곧 찾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셨는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삶을 스스로 택하며 극상품의 열매 대신에 먹을 수도 없고 악취가 나는 들포도를 맺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뭐를 더 하실 수 있겠냐는 절망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포도원을 다 무너뜨리시고 헐어 버리겠다는 거죠. 모든 것을 무너지며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밀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 끔찍하고도 두려운 심판의 날이 곧 찾아온다는 것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내미신 손을 붙들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뭐라고 증언합니까? 지옥으로 대표되는 스올이 입을 크게 벌리고 그들을 삼키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겁니다. 그 큰 흑동 고래가 입을 크게 벌려 모든 것들을 삼키듯, 지옥의 심판이 입을 벌리며 타락하고 들포도를 맺으며 멸망으로 질주하는 그들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보내신 극상 품의 포도 나무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가장 맛있는 열매와 향기나는 열매를 맺도록 기대하시며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를 맺도록 부름받은 자임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가십니까? 그런 우리들에게 나의 시선은 어디 있느냐 주님은 오늘 물어보십니다. 과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두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살아가는지….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간다면 내 인생 끝에 맺는 열매는 맛 없고 악취나 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주렁주렁 맺을 수 있음을 경고의 말씀으로 내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떨어져서 내 스스로 살고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오늘도 뛰어다니는 그런 인생을 산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고 실망하시는 불의와 타락,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열매를 맺으며 내 인생이 끝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경고와 같이 마음에 새겨 내 인생 끝에 맺어지게 될 열매가 맛있고 향기나는 포도 열매가 되기를 사모하며 그날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자,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며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임박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무너지고 망하는 것을 통해 예루살렘을 정결하고 청결하게 하실 그날이 곧 임한다는 것이죠. 그 여호와의 날은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의 길을 걸었던 자들에게는 구원과 복의 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바라보길 거절하고 불순종과 죄악의 길을 걸었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화가 임하는 날이 될 것임을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그 여호와의 날에 임하게 되는 심판과 화가 어떤 모습인가 하면 일곱 여인이 한 남자를 붙잡고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아우성 치는 날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예전에 제주도에는 돌이 많고 여자가 많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주도에 많은 남자들이 척박한 섬에서 먼저 죽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 여인들은 오로지 남편에게 기대 살 수 밖에 없었기에 남편이 먼저 죽는다는 것은 가족의 삶 모든 기반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날이 임하게 되면 남자들이 다 죽어 나가는 겁니다. 전쟁을 통하여 남자들이 다 죽고 끔찍한 재앙이 임해서 여자만 남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그 당시 많은 남자들이 죽어 없어진 아주 절박하고도 비참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 심판이 임하여 대부분 남자들이 죽게 되니까, 살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는 여자들이 한 남자에게 일곱 여자가 달려드는 이런 비참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큰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는 겁니다
두번째, 여호와의 날, 그날에 임하는 역사는 바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그 땅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임박한 멸망과 심판의 때는 무슨 타이밍이라는 겁니까?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정결하게 하실 때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 그 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더러움을 시키며 예루살렘의 피를 깨끗하게 하시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하는 영이라는 건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악한 지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심판하는 영입니다. 소멸하는 영이란 불로 태우는 것과 같이 죄악과 불순물을 모두 태워버리고 제거하셔서 더러움을 씻기시고 피를 정결케 하시는 영이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에 그날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놀랍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가 뭡니까?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을 통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더러움과 불순물을 모두 태워버리고 없애 버리며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적 안목이 없고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불순종과 죄악에 빠져 살면서 이 세상의 것에 몰두하다가 준비 없이 덜컥 그 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하지 않고 불신앙에서 돌아오지 않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심판입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심판이 곧 유다와 예루살렘에 현실로 찾아온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날, 그 날에는 이렇게 심판과 고통만 임하는 게 아닙니다. 멸망과 심판과 함께 유다와 예루살렘에 곧 임하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싹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심판의 비참한 가운데 동시에 그날은 여호와의 싹이 나오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날이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여호와의 싹이란 말씀에 예언된 대로 장차 오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말씀대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 날,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싹이 나고 그 싹은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라는 겁니다. 또한 그 멸망과 심판 가운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그루터기와 같이 남아 있던 자들은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과 고통이 임하는 날이고,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자들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구원과 회복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날, 여호와의 날, 그 날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는 구원과 심판, 복과 화,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임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찾아왔던 그 임박한 심판과 구원에 준비 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구원과 심판, 복과 화로 확 갈라지게 되는 게 바로 임박한 여호와의 날이자 그날인데, 오늘을 위해서만 오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불순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내 인생에 끝이 있는 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 끝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 만을 위해 오늘만을 위해 오늘을 그냥 열심히 달리는 인생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에서는 겉으로 봐서 똑같아 보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똑같은 오늘을 살지만 오늘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사는 자들과, 그날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은 천지 차이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영적인 어둠의 증거가 뭡니까? 그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날을 준비하지 않고 오늘을 위해서만 사는 겁니다. 그날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오늘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겁니다. 그날을 위해 살아가는 영적 안목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이 그들을 삼키기 일보 직전인데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날을 위해 오늘을 살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준비 없이 여호와의 날이, 그 날이 확 찾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과 죄악으로 살았던 자들, 오늘만을 위해 살았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되는 이유입니다. 구원과 심판이, 복과 화가 동시에 임하는 이 갈라짐이 분명한 여호와의 날, 그 날이 곧 다가옵니다. 그 여호와의 날, 그날이 다가 오고 있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의 인생도 곧 끝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도 곧 끝나고 내가 대단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도 머지 않아 다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겁니다. 종말론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깨어 말씀으로 돌아가며, 내가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분명히 발견하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영적 안목이 있으면 하나님의 시각과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본다면 영적으로 깨어 살아가는 겁니다. 나의 인생도, 눈에 보이는 이 세상도 곧 종말과 끝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오늘만을 위해 오늘을 사는 자가 아니라, 그 날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을 견지하는 겁니다. 그게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시각을 살아가는 자이며, 말씀 안에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여호와의 날, 그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땅 만을 바라보는 삶,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깨어나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하늘을 바라보는 삶, 그 날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임박한 심판과 구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며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깨어 준비하는 영적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신다”로 시작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뭐 debate이나 토론을 하신다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심판하시는데 직접적으로 개입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단어는 일어나시며….서시며….입니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여 앉아 계셨었는데 그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실 정도로 그들은 너무 타락했고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 가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타락은 물론 왕을 비롯해 지도자들의 타락이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만들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불순종과 영적 타락이 과연 왕과 지도자들만의 문제였는가? 오늘 말씀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유다와 예루살렘의 영적 타락은 왕과 지도자 몇 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백성의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탓을 돌리길 참 좋아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문제 있고 어려운 이유를 늘 지도자 탓으로만 돌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든 문제를 대통령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은 깨끗하고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을 가져오게 되고 한 마음이 되어 왕도 백성들도 불순종과 영적 타락의 길로 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타락하고 있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등장합니다.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 집에 있도다…. 힘이 좀 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물건들을 빼앗아 강탈하는 일이 만연한 겁니다. 요즘에 한국에는 많이 없어졌겠지 옛날에는 학교에 가면 조금 힘 있는 애가 힘없는 애들 물건을 자꾸 훔쳐가고 빼앗아 가는 일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느냐… 소위 말하는 갑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을을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약한 자들 사이에서도 조금 더 힘이 있는 사람이 조금 더 약한 사람을 짓밟고 얼굴에 매질하며 이익을 강탈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게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왕과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유다와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는 겁니다. 백성들 중에도 자기보다 좀 만만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짓밟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굽게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순종과 타락의 문제는 지도자도 백성도 모두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런 불순종과 영적 타락이 남자들만의 문제였는가?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들도 똑같이 문제였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16절부터 24절의 긴 부분이 여자들의 타락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만하여 늘린 목걸이,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는 모습이 그 당시에 소위 말하면 잘나가는 여인들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다니는 모습을 대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여인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온몸에 치장한 것들이 다 나오는데 들어보지도 못한 게 많은 정도로 너무 구체적입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갖 보석과 사치품으로 두른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자기 교만과 사치에 취해 있는 그 시대의 여인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남자와 여자를 따질 것 없이 모두 한 마음으로 무너진 공동체의 타락이라는 겁니다. 왕과 백성들이 동시에 타락했고, 백성들 중에도 남자들과 여자들이 동시에 타락한, 타락하고 여자들도 타락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남자들만 타락한 문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불문하고 모두의 문제였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과 영적 타락으로 갈 때까지 간 하나님의 백성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아니하시고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일어나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겁니다. 주께서 여인들이 온몸에 치장한 귀금속들과 사치품들을 다 거두어 가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는 끔찍한 수치를 경험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이 마치 내가 일한 결과의 보상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망각하고 내 노력의 산물이라고 치환하는 것을 반복하게 되면 주신 분인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눈에 보이는 주신 선물 자체에 매몰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온 몸에 치장한 귀금속들과 사치품들로 자신을 뽐내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교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망각하고 선물 자체에 매몰되는 왜곡과 타락의 모습입니다. 그런 자들의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이 제하여 버리시고 거두어 가시겠다는 것이고, 수치와 모욕을 경험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다 거두어 가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거두어 가십니까? 주신 하나님보다 선물 자체를 더 의지하고 그 선물들이 다 하나님이 주신은 선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주신 선물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제하시고 거두어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을 다 제하고 거두어 가시면 남는 건 뭐라는 겁니까? 심판 밖에 없고 멸망 밖에 없는 겁니다.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며 굵은 배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정은 칼에 무너지고,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성문은 슬퍼하고 곡하고, 황폐하여 땅에 앉아 통곡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공동체가 타락하고 변질하고 불순종하는 문제는 왕과 지도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백성의 문제이며 남자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자 여자 모두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지금 이 시간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멸망과 심판을 예루살렘과 유다는 경험했고 우리에게도 이런 동일한 일이 찾아올 수 있음을 계속 경고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길이 참으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참으시지는 않으심을 잊지 마십시오. 어느 임계점을 넘어가면 하나님은 일어나시며 서서 직접 개입하실 때가 찾아옵니다. 어느 임계점을 넘어가면 하나님은 은혜로 주신 것들을 다 거두어 가시는 때가 찾아옵니다. 생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십시오. 주신 선물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면 주신 선물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것을 다 거두어 가실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고,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통해 하나님만을 선명히 바라보기 원합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우리에게 이 심판과 거두어 가심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으며 선물주신 분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심을 끝내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을 선지가 이사야가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거절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깨우시는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돌아오지 않는 일을 반복하다 임계점이 지나게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우시겠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개입하셔서 하나님 대신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 하나씩 무너뜨리시겠다는 것을 선언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게 구별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장 큰 도움이시며, 보이지 않는 천국이 더 중요하며,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실체로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예루살렘이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돼야 되는데 그들이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게 너무 많은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돈의 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미혹에 너무나 쉽게 빠져 살아간 겁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의뢰하고 의지하며 기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불신앙과 불순종이 반복되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또 다른 영적 현실은 바로 나라를 소년이 다스리고 아이들이 다스리는 현실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전혀 지도자로 준비되지 못한 자격 없는 소년과 아이들이 다스리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요즘 시대는 아이들과 소년을 귀엽고 사랑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여기지만, 이 당시에 아이들과 소년이란 순진하고 착한 존재보다는 가치가 없고 자격이 안되는 자에 대표입니다. 그렇기에 소년과 아이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것과 같이 지도자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 지도자가 되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올라가면 안되는 무자격자가 국가 지도자가 되면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게 되는 비극과 공동체 재앙이 일어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어린 아이 같은 무자격자 지도자가 이끄는 공동체가 직면하는 치명적인 결과가 바로 서로가 서로를 학대하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가까이 있었던 백성이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고 서로 내부 총질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해야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가 서로를 학대하며 서로의 피를 빨아먹는 것입니다. 서로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학대하고 죽이는 그런 비극이 공동체에서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공동체 전체가 멸망을 향해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오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이란 무엇이라는 겁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붙들고 있는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친히 다 무너뜨리시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님보다 더 많이 의지하며 의뢰했던 것들을 다 무너뜨리시는 하늘의 사건이자 영적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것은 심판이자 동시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임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자들은 구원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 위에 세워지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이 그렇게 황폐해지고 무너지는 것과 함께 너의 영혼에 화가 있게 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들이 직면하게 될 공동체적 재앙은 그들의 영혼이 소돔과 같이 화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하는 것도 끔찍하고 비참한 일인데 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영혼에 화가 되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된다는 것이죠. 북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역사는 왕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내부 총질로 점철된 끔찍한 역사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끔찍하게 서로가 피를 흘려 죽이는 내부 총질이 난무하는 역사였습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이 먼저 앗시리아의 손에 무너지고 멸망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먼저 무너지고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정신차리고 반면 교사로 삼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남유다 또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고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곧 벌어질테니 지금 정신 차리고 돌아와서 하나님께 조율 받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된다는 것을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역사에 드러나게 될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하게 될 일이라는 것을 미리 지금 예언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런 일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니 지금 정신 차리고 돌아와 지금 정신 차리고 해라는 이사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고 듣기를 거절하며 여전히 불순종의 길로 질주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렇게 친히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겠다 경고하시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의뢰하고 의지하는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는 것이 그들이 살고 돌아올 회복의 길이 된다는 것을 이사야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정신 차리고 돌아오기를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기도 하지만,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불순종을 반복하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고 고백한다면 천국 백성이라고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경고하실 때 얼른 정신차리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와야 되는데 하나님의 경고와 찌르시는 말씀을 계속 무시하고 귀 기울이지 않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때가 찾아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 무너뜨리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경고의 말씀과 같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믿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무너지고 망하기 전에, 심판날이 찾아오기 전에 주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내려놓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간 모든 의지하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고 무너뜨리시는 날이 올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를 두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나를 두며, 지금 주님께 달려가고 주님 앞에 조율 받으며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지자 이사야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 받은 백성으로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기에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다른 것들과 겸하며 붙들고 섬기는 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날 도와줄 존재가 있으면 여지없이 달려가는 이 불순종과 불신앙의 문제, 하나님 외의 대체물을 계속 찾고 붙들고 섬기는 문제로 끊임 없이 하나님께 책망과 경고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는 눈에 보이는 군사력이나 사람들이나 돈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삶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며,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면, 결국 대가를 치르고 심판 받는 결정적인 날이 이른다는 선언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말일에…여호와의 날이…그 날에…모두 마지막 그때가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들입니다. 우리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때가 차면, 경고하셨던 말씀이 실체가 되고 현실이 되는 그날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겐 구원의 날이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는 그 날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는 마지막 때인 그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는 큰 두 가지 일에 대해서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일어나는 일은 다 깎으시고 낮추시고, 두 번째는 다 무너뜨리고 없애십니다. 첫 번째로 무엇을 다 깎으시고 낮추시는가 하면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들을 다 깎으시고 낮아지게 하십니다. 교만하고 거만하다는 것은 다 잘 아시는 건데 자고하다는 말은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자고 하다는건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 마지막 때 임하는게 뭐냐면 교만하고 거만하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낮추시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그 인생들은 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특징입니다. 특별히 높은 망대와 높은 성벽은 다 인간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 세우는 것들입니다. 모든 배와 아름다운 조각들은 요즘으로 하며 모든 좋은 차, 모든 좋은 기념비라 할 수 있는데, 결국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을 높이기 위해 만드는 것들, 나의 스스로 높아짐을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그날이 임하면 이런 모든 것들을 다 깎으시고 낮아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 교만하고 거만하게 만들고 스스로 높아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다 낮아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오직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도록….이게 평소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될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여호와 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만이 홀로 나의 도움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따라야 되는데 그 경고를 듣고도 따라가지 않고 불순종을 계속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 완전히 주저 앉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게 그들이 장차 경험하게 될 예루살렘과 남유다의 멸망이라는 겁니다.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모든 걸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뭐를 보이시기 위해? 여호와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심을 보이시기 위해….이게 여호와의 날, 그날에 임하는 첫번째 두렵고도 떨리는 역사라는 겁니다. 두 번째 그날에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는 모두 무너뜨리고 없애신 겁니다. 무엇을 무너뜨리고 없애시는가 하면 모든 우상들입니다. 사람들이 우상들을 세우는 본질은 다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 만든 것들입니다. 우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섬기는 것도 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 나를 경배하려고 만든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든 우상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늘 끝까지 높이 세운 그 바벨탑은 인간이 만든 우상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날이 임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 모든 우상들은 완전히 다 없어지고 무너지게 될 거라는 거예요.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려 부정한 동물인 두더지와 박쥐에게 다 던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겨야 할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절하며 나를 경배하는 그 영적 타락….너희 스스로 그걸 내려놓지 아니하면, 너희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완전히 그 우상들을 다 무너뜨리고 없애고 던져버리는 때가 온다는 경고입니다. 그게 바로 마지막 때, 여호와의 날에 임할 일들이라는 것이죠. 이게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일이고 저와 여러분들이 마지막 때에 경험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거만하고 스스로 높이려는 모든 것들을 다 낮추시는 하나님,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리시고 던져 버리시는 그 하나의 심판의 역사가 곧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우리가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진리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그게 결론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인생을 살아갈 때 눈에 보이는 것 믿지 말고, 사람들 믿지 말고 나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내 인생은 눈에 보이는 것에 달린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디 있다는 겁니까? 내 인생은 하늘에서 불어넣으시는 호흡인 코에 있다는 겁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숨결로 사는 존재가 나라는 것이죠. 반대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숨을 거두어 가시면 오늘이라도 끝나는 인생이 나라는 겁니다. 숨을 거두셨습니다….그러면 나는 죽는 인생이고, 그 모든 결정과 주권이 나에게 없음을 인정하는 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시면 살고, 거두어 가시면 죽는 인생인데,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데 내 인생인데, 왜 자꾸 내 인생을 다른 걸 의지하며 살려 하느냐…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너가 그렇게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발버둥 치며 사느냐?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 사람들을 의지하고, 내 자신을 의지하며 사느냐…경고하시는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지 못했고, 하나님만 홀로 영광 받으시도록 하나님만 붙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의지하며,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돈의 힘을 의지하며, 나를 높이며 교만하고 거만하고 자고하게 살았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높아진 모든 것을 낮아지게 하셨고,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리시고 던져 버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빛 가운데 걸어가며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심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만 따라가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범한 실수와 우를 반복하지 않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이 말씀을 경고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이 말씀을 붙드시고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숨결을 이 시간 갖고 살아가는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이 주님 손에 달려 있음을 실체로 믿고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며,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는 그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시각과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실에 대해서 신랄한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1장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담한 영적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심판의 말씀을 주셨다면 2장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실까에 대한 비전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증언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중요한 단어는 다가올 시간에 대한 단어인 “말일에”…”그날에” 입니다. 말일이란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인데, 마지막 날입니다. 그 날이란 때가 차서 다가오는 D-day입니다. 이 두 단어가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실 마지막 때에 대한 의미입니다. 마지막 때는 이 세상의 저 끝에 마지막 날을 의미하고 동시에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이 시대 또한 마지막 때이기도 합니다. 저 끝에 다가올 미래로서 마지막 때와 동시에 마지막 때를 지금 살아가고 있는 두 사이를 정확한 긴장감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언젠가 올 마지막 날임과 동시에 우리는 현재 그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는 이 모호함과 분명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마지막 때에 대한 이중적 의미를 정확하게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 유다와 예루살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말일이 될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거절한 채 불순물이 가득한 신앙, 물타기를 계속 하는 신앙으로, 창녀와 같이 겸하여 섬기는 자가 된 그들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버리신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길이 참으시고 계속 기다리시며 참으시는데, 끝까지 그들을 기다라시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말일이 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은 멸망하게 되는데 그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의 버리심의 결과라는 게 바로 6절 말씀의 선언입니다. 그들은 동방 풍습이 가득하고 점을 치며 이방인과 언약을 하며 하나님이 내미신 손길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불순물이 섞이고 물을 탄 신앙 가운데 동방 풍습이 들어오니까 유다와 예루살렘에 은금이 가득하고, 마필과 병거가 가득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 도움과 같은 주변 나라로부터의 돈과 군사력이 가득해진 겁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심을 고백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 세상이 온 겁니다. 그렇기에 동시에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해졌고 죄악도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나의 도움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대신에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예배하고, 나에 대한 기념비를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불순물과 물타기가 계속된 신앙은 처음에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지만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되고 우상을 중심에 두게 됩니다. 또한 그 우상을 섬기는 이면의 본질은 하나님 대신 나를 섬기는 것이고 나의 기념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다른 이방 우상의 손을 붙은 그들의 손, 불순물과 물타기를 한 혼합주의 신앙의 손을 하나님은 언젠가는 버리신다는 겁니다. 말일에,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이 돌아오지 않는 자녀들은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지막 때에 심판과 멸망이 임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말일에, 마지막 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자 생명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인 것입니다. 그것이 1-5절까지는 말일에 임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고, 6-10절은 안타까운 심판과 멸망을 경험할 사람들에 대한 말씀인 이유입니다. 심판과 멸망이 임하는 그 말일에 있게 되는 빛의 자녀들이 경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등장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시온산인 하나님의 산을 향하여 열방들이 놀랍게 몰려드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산에 몰려들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로 생명과 구원의 길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역사가 마지막 때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죽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는 역사, 빛이 임하는 역사입니다.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는 겁니다. 전쟁 도구인 칼과 창을 녹여서 농기구인 보습이나 낫을 만든다는 겁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역사로 얼룩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서로 죽이려고 만든 창과 칼이 주도하는 삶에서, 서로 먹여 살리는 보습과 낫이 주도하는 삶으로 변화한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열리는 세상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는 세상이고, 사자가 어린양과 뛰노는 세상이자, 독사의 굴에 아이가 손을 집어넣어도 해가 없는 놀라운 세상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며 사람들은 그 빛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함과 모호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이중적 의미의 말일, 마지막 때를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말일에, 마지막 때에 임하시는 구원과 심판의 이중적 의미를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야곱 족속인 유다와 예루살렘을 결국 버리십니다. 족속을 버리셨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야곱 족속을 버리신 게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배반하여 떠난 겁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빌리면 끝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를 거절하고 떠난 겁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렇게 빛과 어둠으로 구원과 심판으로 확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내 안에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게 만드는 동방 풍속과 우상에 물들게 하는 모든 불순물들을 태우시고 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지금 이 시간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기를 열망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 마지막 때가 되기 원합니다. 죽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마지막 때가 되기 원합니다. 오직 빛으로 나아가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으시는 예배, 여호와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예배로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역사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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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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