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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셉 목사의 새벽묵상

새벽묵상 "우리의 소망은 그분이 오시는 것 뿐이다." ​ 예레미야 23,1-8 | 7-31-2025

7/31/2025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이자 지도자인 남유다 왕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책과 결국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과 새로운 목자를 보내주시고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동시에 증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 당시 왕들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너희 이렇게 살면 망하고 큰일 난다는 걸 경고하셨지만 왕들은 그 경고를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모든 백성들의 죄와 우상숭배를 책망하시지만 특별히 왕들을 향하여 더 무거운 가중 처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화 있을 진저…”라고 경고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그들을 향하여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심하게 경고하시고 질책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맡기신 나의 양떼를 흩으며, 몰아내며, 돌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맡기셨습니다. 왕으로 그들을 세웠을 때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백성을 기르는 목자로서 잘 돌보고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책임과 권한을 주시며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들을 목자인 왕들이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흩어버리고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다는 겁니다. 특별히 요시아 왕 이후에 모든 왕들은 악한 왕들이었고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고, 섬기는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슬픈 것을 넘어 거룩한 분노를 내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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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유다의 왕은 그냥 한 시대에 요시아 이후 악한 왕들만을 얘기하는 게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면 결국 인간들이 원했던 사람의 왕의 끝이 어떤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왕을 세울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세우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다른 나라들과 같이 인간의 왕을 그렇게 원하는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대신, 사람의 왕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제공할 지도자라고 외치는데 결국 후회하게 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끊임 없이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는 겁니다. 결국 그 눈에 보이는 왕을 세운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왕들이 백성들을 흩고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게 된 겁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이스라엘이 그 왕으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는 것을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구약 성경 전체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사람의 왕을 세운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와 이스라엘의 끝은 무엇입니까? 믿었던 왕이 백성들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고 그 끝은 결국 망하고 무너지고 끝난다는 것, 이게 결국 눈에 보이는 가짜 왕, 가짜 목자를 하나님으로 대신하려고 했던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끝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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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그 왕들의 악행을 다 보응하실 것을 경고하셨고 그 경고대로 요시아 이후의 모든 왕들은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고 나라도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걸로 끝나면 그냥 절망으로만 끝나게 되는데 그 다음부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구원역사의 시작입니다. 즉 신약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새로운 목자, 새로운 왕을 세우시겠다 선언하십니다. 이게 장차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그의 날에, 때가 이르면…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늘문이 열리며 하늘의 때가 이 땅에 임하는 그 결정적인 때가 곧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새로운 왕을 세우실 거라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나오는 한 의로운 가지, 그 분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걸고 고백하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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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는 결국 망하고 흩어지게 될 텐데 그리고 나서 때가 이르게 되면 참 목자, 진짜 목자, 진짜 왕을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는 의로운 가지, 예수 그리스도는 참 목자이자 참 왕이 되신다는 겁니다. 참 왕으로서 지혜롭게 다스리시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고 우리는 평안히 살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세상 왕이 아닌 하늘에서 오시는 진짜 왕이 오셔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결국 메시야가 오셔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니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참목자이자 참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이 새롭게 그리스도로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결국 세상의 왕과 목자들은 이렇게 결국 양떼를 흩어버리고 몰아내고 돌보지 않으며 결국 다 무너지고 망하게 된다…이게 구약의 결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소망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며 세상 왕에 있지 않고 하늘에서 오시는 참 왕, 참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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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세상 왕을 세워야만 될 거라고 하나님께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대신 올라갔던 그 왕의 끝은 멸망이고 흩어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세상 왕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 뿐입니다. 그분이 오셔야 합니다. 그분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지혜롭게 다스리시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며 그걸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 안에서 평안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야만 결국 이 세상 모든게 지혜롭게 다스려지며 정의와 공의가 행해지며 우리 가운데 참 평안과 구원이 임하게 됨을 믿습니다. 그 때가 있음을 우리가 분명히 믿으며 그리스도 가운데 소망을 보게 도와주옵소서…기도하기 원합니다.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참 목자이자 참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새로운 회복과 새로운 소망을 기대하며, 약속의 메시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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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하나님 말씀 듣는 습관 하나 못 지켜서 망한다." 예레미야 22,20-30 | 7-30-2025

7/31/2025

 
 우리가 성도로서 늘 집중하고 주목해야 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의사들도 눈에 보이는 증상이 있을 때 증상의 치료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그 증상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원인을 찾아내는 게 바로 좋은 의사입니다. 열이 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열이 난다고 타일레롤만 처방하는 의사는 좋은 의사가 아니죠. 보이는 증상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병의 증상을 보고 보이지 않는 병의 원인을 찾는 사람을 명의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증상과 현상이 있을 때 보이지 않는 본질을 바라보는 것, 이게 바로 중요한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다고 엄중히 선언하시는 배경에는 너희가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있다는 겁니다. 레바논과 바산과 아바림이라는 곳은 다 북쪽 지방에 있는 풍요를 상징하는 곳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 세 곳에 가서 외치며 소리를 높이며 이제 너와 너를 사랑하는 자가 모두 멸망할 거라는 말하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증상과 현상에 대한 결과이자 열매라는 겁니다. 너희에게 보여지는 증상과 현상이 있는데 그 증상과 현상을 넘어 그 보이지 않는 본질적 원인이 있다는 겁니다. 그 본질적 원인은 평안할 때에 하나님 말씀 듣지 아니하고, 어려서부터 하나님 목소리 청종하지 아니하는 습관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귀기 기울이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세상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시켜 주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실 때 하나님이 주셨던 중요한 삶의 지침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가서 가나안 백성과 같이 그 문화에 젖어 살아가지 말고 사람들 말 듣고 귀 기울이지 말고, 사람들 의지하려고 이리저리 뛰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 말씀 듣고 귀 기울이면서 살아. 그러면 너희는 하늘의 복 가운데 있어…이게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듣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평안할 때도 안 듣고 어려서부터 귀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안 들었다고 지금 책망하시는 게 아니라 평안할 때부터 지금 멸망이 임박한 이때까지 끊임없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책망하시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유다왕 여호야김이 불의로 자신의 인생을 세우려 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계속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임금을 체불하고 심지어 말씀의 두루마리를 불태우는 이런 악행을 하게 되는 본질적 이유, 이런 눈에 보이는 악한 일들을 하게 되는 본질적 이유가 뭐라는 겁니까? 하나님 말씀 듣고 청종하는 습관 하나 못 지켜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귀를 기울이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과 마음이 닫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만 바라보고 땅만 바라보고 물질만 바라보고 살아가며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강대국에 이리 저리 붙다가, 사람들에게 기웃 거리다가 결국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의 삶에 완전히 젖어든 습관이 되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도 청종하지도 않는 것, 이게 멸망하게 되는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것이죠.
 
 
 
말씀을 듣지 않고 청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에 기반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거죠. 말씀 듣는 습관 하나 지키지 못하는 데는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내 목자들과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들을 상징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목자는 목자인데 가짜 메시지만 전하는 거예요. 영적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다가올 심판에 대비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들, 기분 좋게 하는 말들만 전한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젖어 살아가기에 하나님 말씀을 겉으로 듣기는 들어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통해 어떤 생각만 하냐 하면 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도와 주시는 분이지…라는 생각만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조율되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 뜻과 계획을 하나님은 도와 주셔야만 되는 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청종하지 않는 습관에 길들여지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도록 계속해서 이끌려 가게 된다는 겁니다. 말씀 듣는 습관을 지키지 못해 그 인생이 이렇게 피폐해지고 결국 그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은 돌이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들은 심판의 때에 다 어떻게 바람에 삼켜지고 다 죽거나 사로잡혀 가게 된다고 엄중히 책망하십니다.
 
 
 
내 백성이여, 내 백성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어다… 이게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진단입니다. 성도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청종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뜻하는 대로 살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게 아니라 내 뜻과 계획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평안할 때에 문제가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어려서부터 하나님 목소리에 청종하는 습관을 지키십시오. 그 때 듣지 아니하고 돌아가지 아니하면 평안한 시절을 지나 이렇게 심판과 멸망의 시기가 도적과 같이 찾아올 때,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신음하고 고통 당하며 쫓겨나고 죽게 되는 이런 끔찍한 일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음,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음…이 본질적 원인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 듣는 습관 하나 지키지 못해 망하게 된 남유다 백성들의 비극을 남의 이야기로 여기지 마십시오. 내 뜻과 계획을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살아가며 말씀에 귀 기울기며 청종하는 주의 귀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인생 평가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시는가에 달렸다."예레미야 22,10-19 | 7-29-2025

7/29/2025

 
​우리 나라가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하게 되면 나라와 나라가 대항하는 그 A 매치 경기가 마치 나라가 이기고지는 거 같이 여겨져 우리가 막 응원을 할 때가 있습니다. 11명에 축구 하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온 국민이 그렇게 관심 가지고 응원하는가 하면 국가를 대표해서 나가는 선수가 싸우는 게 나라가 이기는 거 같고 지는 것 같은 대표성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등장하는 남유다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단순히 그냥 한 개인의 왕에 대한 평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 나라 전체를 평가하는 대표성을 갖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왕은 그 나라 전체를 대표하기에 한 왕의 선하고 악한 삶은 결국 백성의 선하고 악한 삶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시아 이후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증언하고 있는데, 살룸과 여호야김입니다. 안타깝게도 믿음으로 바로 섰던 요시아 왕 이후 남 유다 왕들은 하나님께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악한왕으로 하나님께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모든 이유가 그들의 행위나 업적, 그들의 성취에 따라 평가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가에 따른 평가였음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시아 이후의 남유다 왕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순종하지 않고 말씀을 멀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런 악한 일들을 행했고 하나님 앞에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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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룸과 여호야김, 이 두 왕은 모두 요시아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근데 이 모든 아들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먼저 이 살룸이라는 왕은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름은 여호아하스라는 왕입니다. 요시아 왕이 전투에서 사망한 이후에 둘째 아들인 살룸, 여호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온 백성이 갑자기 전쟁에서 전사한 왕 요시야를 애곡하고 슬퍼하고 있는데, 더 이상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지 말고 그 다음 왕인 살룸을 향해 애곡하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살룸, 여호아하스 왕은 석달밖에 왕 위에 있지 못하고, 애굽으로 끌려 가게 되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게 됩니다. 3개월동안 얼마나 많은 왕의 일을 수행했는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그를 향한 평가는 악한 왕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가 말씀을 듣지 않고 멀리하며 불순종하였기에 악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가 어떤 업적을 남겼든 어떤 놀라운 일을 했던 간에 하나님에게 중요한 평가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있는 겁니다. 말씀과 멀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왕들이 이루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눈에는 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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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인 여호와김이 왕으로 세워집니다. 여호야김이 11년 동안 왕이 되었는데 그는 온갖 악을 저지르는 완전히 끔찍한 왕 중에 하나였습니다. 13-19절에 그의 악행이 세 가지로 요악되어 있는데, 불의로 집을 세우고 부정하게 자신을 위하여 무리한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 이웃을 고용하고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지혜와 은혜를 구하며 풍전 등화의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하여 넓은 다락방을 무리해서 짓고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그 당시 구하기도 어렵고 비싼 백향목으로 치장하고 붉은 빛을 칠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만 동원하는 게 모자라 이웃 나라에서 일꾼들을 고용해 수입해오면서 그 일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수입해온 용병 일꾼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지불하지 않는 악행도 서슴지 않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불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자신의 것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태평 성대가 아니라 풍전 등화의 위기의 상황입니다. 선대 왕이 애굽에 끌려가고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인데 왕이 “나를 위하여…” 밖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며 불의를 밥먹듯이 행하는 왕, 백성들은 죽어나고 나라는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데 백성들을 도외시하고 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눈과 마음이 탐욕과 압박과 포악으로 가득한 여호야김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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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의 악행 자체만으로 분명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눈에 보이는 악행들은 열매이자 결과이고, 그 본질적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있는 겁니다. 여호야김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멀리하였기에, 그의 마음과 눈이 닫히고 어두워진 것이 본질적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호야김이 얼마나 말씀을 멀리하는 악한 왕이었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막 태워버리는 끔찍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불순종하고 무시하면, 말씀의 두루마리를 태워 버릴 정도로 말씀을 멀리하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비결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비결은 내가 도를 닦는 것도 아니고 내가 대단한 인간이 되어, 놀라운 업적과 성취를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들을 수록 내 눈과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나에게 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면 내 눈과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며 내 눈과 마음이 닫히고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며 악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과 무관하게 닫혀버린 그의 눈과 마음은 자기를 위하여 살고 탐욕과 욕심으로 살고 불의를 행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여호와김 왕의 끔찍한 악행은 우연히 어쩌다가 생긴 악행들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멀리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이자 열매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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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머지 않은 미래에 마지막 숨을 내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 평가받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업적과 성취를 이루었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세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어떠한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시는가가 나의 인생 평가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게 하나님의 엄중한 두 왕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고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평가 기준인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억될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들어 내 눈과 마음이 열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선한 인생입니다. 말씀을 멀리하면 눈과 마음이 닫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며 말씀을 멀리하여 내 눈과 귀가 닫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면 무엇을 이루고 남기던 상관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인생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가까이 하는지,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며 멀리하는지…이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인생 평가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서 내 눈과 마음이 열려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하며 그 아름만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형통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가를 늘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기억되는가를 내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을 들으면 살고, 듣지 않고 멀리하면 결국 망한다." 예레미야 22,1-9 | 7-25-2025

7/25/2025

 
예레미야 21-22장 말씀은 계속해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사는 길과 죽는 길이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끊임없이 경고 말씀을 주셨는데 백성도 왕도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살다가 그 말씀대로 그들이 바벨론에게 망하기 일보 직전이 되고 나니까 갑자기 허둥대며 시드기야 왕이 사신을 보내며 예레미야에게 부탁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회개와 항복 없이 하나님께 상황의 변화만을 구하고 있는 왕과 백성을 향하여 계속해서 이 두 가지의 길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상황의 변화 전에 생명의 길과 사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을 듣는 건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몽둥이로 들어 쓰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에 바벨론에게 대항하고 싸우면 죽고 망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그 항복이 결국 살게 되는 길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대신, 자신들의 생각에 옳음을 따라 바벨론에 항복하는 대신 대항하다가 싸우고 죽고 멸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과 내 눈에는 그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말씀 듣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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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도 그 연장 선상에서 시드기야 왕에게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사는 길과 죽는 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의 핵심적인 차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달렸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죠. 그럼 여기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압제와 학대를 하지 말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냐 하면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나라 전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게 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멀리하게 되고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게 되면 정의와 공의 대신 압제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힘과 권력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힘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쳐서 약한 자들은 압제하고 학대하고 피 흘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남유다 왕이 말씀을 멀리하고 떠나니까, 정의와 공의가 사라지고 이런 끔찍한 압제와 학대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경고로 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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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단순히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약하고 힘없는 자들이기에 압제하지도 학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예전에 이방인이었고 고아였고 과부와 같은 처지였기에, 자신들의 올챙이적 시기를 잊지 말라는 의미가 훨씬 더 큽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학대당하고 압제 당하며 무죄한 피를 흘리며 피눈물 흘리던 그 때를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면 너희가 살고 생명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죠. 반대로 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멸망과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남유다 백성들 그들의 살고 죽는 문제는 어디에 달려 있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있었던 겁니다. 나머지 것은 다 눈에 보이는 결과적 현상들이고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남유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준행하기를 거절합니다. 정의와 공의 대신 압제와 학대를 일삼는 삶에서 돌이키거나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너희들이 약한 자들을 압제하고 학대한다는 것은 그 과거를 망각하고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멀리하고 있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멸망과 심판,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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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백성들과 시드기아 왕은 생명과 사는 길 대신, 죽는 길과 사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말씀 안 들어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옳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혈기를 부리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처절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며 완전이 망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 정탐꾼 열명이 있었습니다. 그 열명은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가야 되고 순종해야 되는데 가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두 명 정탐꾼의 목소리는 땅에 묻혔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은 가지 말라고 하는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또 가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미 늦었고 버스는 떠나서 이제 들어갈 수가 없는데, 가라고 하나님이 명하실 때는 안 가고 가지 말라 하시는데도 가서 죽는 어려움을 당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벨론에 항복하라 그러는데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싸우다가 다 망하고 죽는 겁니다. 그렇게 남유다 백성들이 처절하게 망하고 심판 당하는 것을 여러 민족들이 돌아보면서 서로 말하는 때가 생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저 남유다가 왜 저렇게 처절하게 망하고 무너지게 되었는가?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무시하고 경시한 처절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멀리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 붙들고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다 결국 망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남유다가 가게 된 안타까운 사망과 죽음의 길, 심판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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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사는 길과 죽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 사는 길과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는 비결은 오직 하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까이 하며,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여러분들의 마음과 눈이 열리는 겁니다.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들의 눈과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천국을 주목하고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부른 찬송과 같이 말씀을 들으면 주님께서 내 마음 붙드사 저 높은 곳을 향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붙들면 주님께서 내 마음을 붙들어 하늘을 향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또한 내 뜻과 계획에는, 내 머리에는 이해되지도 담기지도 않을 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내 눈과 마음이 닫히는 겁니다. 내 눈과 마음이 닫히면 말씀을 멀리하고 무시하고 경시하다가 결국 불순종과 타락의 길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게 되는 것이죠. 나쁜 일을 대단히 많이 해서 타락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내가 눈과 마음이 닫히면 우리는 말씀과 멀리하면서 결국 그 타락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늘 대신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 대신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니까, 내 생각과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니까 결국 그 인생은 망하는 길, 사망의 길, 죽는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남유다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 붙들고 살다,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고 살다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남유다의 멸망의 이유이고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동일한 삶의 원리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내 눈과 마음이 열리고 말씀 앞에 나의 인생을 두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 뜻에는 항복하는 게 사는 길이다." 예레미야 21,8-14 | 7-24-2025

7/24/2025

 
​갑자기 찾아온 국가적 위기 앞에 허둥대며 시드기아 왕이 급히 사신을 예레미야에게 보내 간청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은 답을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고 이제 심판을 직면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고 오늘 말씀은 왕과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계획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에게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살길이 있고 죽을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살길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우리 위해 싸워 주시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여기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이 해 주실 걸로 끝까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살 길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과 싸워 주시는 게 생명의 길인 거 같고 살길인 거 같은데 살길은 그 바벨론과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은혜의 손이자 축복의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유다가 하나님과 정반대 길에서 있기 때문에 그들을 망하게 하고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화를 내리시는 손이 되겠다 선언하신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 편에서 있지 않고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망하고 무너지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망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의 길이고 사는 길이며 거기서 악쓰고 싸우고 무언가를 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오히려 죽는 길이며 사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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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길,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벨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군대는 단순히 힘이 세서 그들을 치러온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사용하시는 몽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이미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바벨론과 싸워 거기서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사는 길은 싸우는 길이 아니라 대항하는 길이 아니라 포기하고 물러나고 내려놓고 그 자리에 엎드리는 것, 그래야만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으로 남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시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손 가운데 그들은 엎드려 항복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이것을 남유다 백성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안 들었습니다. 처음에 이런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돌아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경시하며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망각하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눈에 복이 좋은 대로 살다가 이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려 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주기를 간구하며 하나님과 함께 싸워야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어떻게든 바벨론과 싸워 보겠다… 끝까지 버텨보겠다…끝까지 내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간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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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셨고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셨기에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항복하여 나아간 자들은 살게 된 거고 그 말씀을 거절하고 거부한 채 이건 내 머리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야… 그러면서 바벨론과 나가서 싸우면서 버티고 있었던 자들은 결국 다 죽고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게 나아가서 항복하는 자가 결국은 살게 되고, 싸우고 버티고 나가는 것이 이것이 죽는 길이 되었음을 역사가 보여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내가 높아져야 되고 내가 강해져야 되며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야 되며 내가 버텨야 되며 내가 싸워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고 그게 성공하는 길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이며 그게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라는 겁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자들은 내가 여전히 중심이 되어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그러고 내가 무언가를 이루려 그러고 끝까지 싸우고 버티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아래 항복하는 대신 나에게서 여전히 가능성을 찾고 나에게서 소망을 찾아 무언가를 얻으려고 계속해서 발버둥치는 인생이 오히려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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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뜻 아래 내 뜻을 굴복하고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고 생명의 길임을 잊지 않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무언가 하고 내가 열심히 무엇을 이루어서 싸우고 버텨서 얻어내는 것이 사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는 길과 생명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가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내가 무언가를 이루며 내가 버티고 끝까지 싸워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임을 인정하며 내 시간표를 내려놓고 항복 선언하는 것이 사는 길이고 생명의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가능성 없음을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에게 엎드리는 것, 하나님 뜻 아래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 사는 길이고 생명의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항복 선언을 할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오히려 놀랍게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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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복음서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잃은 것이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게 될 거라는 역설을 말씀하신 겁니다. 목숨을 계속 붙들고 있으려고 버티고 발버둥치면 오히려 죽게 되고 목숨을 버리고 포기하고 항복하는 자들은 목숨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 아래 포기하고 절망하며 항복하여 주님 앞에 두손 들고 오는 것만이 유일하게 사는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신앙의 역설이란 죽어야 사는 것이고 항복해야 사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뜻 아래 항복해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끝났습니다. 나는 완전히 망했습니다…내가 죽어야 산다는 것이죠. 죽어야 사는 진리, 포기하고 항복해야만 사는 이 생명의 길의 진리가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붙드는 진리가 되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 앞에 살 길이 있고 죽을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있고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는 길은 내가 죽어야 되고 내가 항복을 하고 엎드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진짜 행복한 인생, 진짜 사는 길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주님 앞에 순종과 포기 죽음과 항복으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나는 안 변하고 상황만 변하기 원하는 기도는 쓸데없다." 예레미야 21,1-7 | 7-23-2025

7/23/2025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계속해서 그들이 처할 혹독한 죄의 결과와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경시하고 무시하며 농담인 줄 알고 심지어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하고 조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예레미야 안에 주셨던 불붙는 마음, 답답한 마음 때문입니다. 마음에 불붙는 것 같이 전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기에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조롱과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선명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말씀은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아 왕이 사신들을 통하여 예레미야를 찾아와 간청하는 이야기로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며, 심지어 전하는 예레미야를 멸시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왕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주목하고 그렇게 사신을 예레미야에게 보내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어용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전해서 나라가 망하거나 심판 받을 것에 대하여 백성들이 영적으로 전혀 대비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대로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지금 망하기 일보 직전에 큰 어려움에 처하니까 갑자기 허둥대고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마음이 급해지는 겁니다. 곧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코너에 몰리게 되니까 왕으로부터 사신들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다급하게 보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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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막상 말씀대로 일이 이루어지니까 마치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허둥대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와 갑자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으려 찾아온 겁니다. 그렇게 예레미야에게 급하게 사절단을 보내 자문을 구하면 엎드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두 손 들고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너에 몰려 당황하며 갑자기 찾아온 왕의 사신들은 “우리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라.”는 요청밖에 없는 겁니다. 시드기아 왕은 급하게 사신들을 보내면서 나를 포함해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으니까 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그 많은 경고를 보내셨는데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회개합니다…라는 이런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적을 베풀어 줄지 어떻게 아느냐?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한 회개나 돌아보는 돌이킴 자체가 없는 겁니다. 왕이 하나님을 향한 회개나 돌이킴이 없는데, 백성들이 회개하겠습니까? 백성이 회개 안 하겠죠. 나는 변하지 않고 단지 기적만을 바라는 겁니다. 왕이라는 직위는 그 당시에 개인을 넘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아 왕이 이렇게 철저하게 착각했다는 것은 지금 남유다 백성 전체의 나라 분위기가 이미 심판으로 질주하고 있는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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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히스기아 왕은 죽을 병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며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달렸습니다.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아갔었습니다. 그게 남 유다 왕들이 하나님 앞에 했던 일이었는데 지금 시드기아 왕은 나라가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그 위기 가운데도 본인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잘못을 돌이킬 마음도 회개로 변화할 마음도 하나 없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위해서 그냥 간구하라는 거예요.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바벨론이 우리를 떠날 것이라고 착각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만일 이때 시드기야가 왕으로부터 모든 신하까지 죄를 무릎 쓰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토설하며 우리를 살려 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했으면 그림이 달라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조차도 회개의 기회로 불순종을 내려놓는 기회로 돌이키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그저 우리를 위한 도구로서의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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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간구하라….나의 변화 없이 상황 변화만을 구하는 그 사절단을 향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는 너무 늦었다…라고 답합니다.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 들이리라…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다…이게 하나님의 공식적인 대답이라는 겁니다. 무기가 앞으로 가야 싸우는데 뒤로 돌린다는 건 모두 죽고 패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를 치는 핵심은 바벨론이 아니라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든 손과 강한 팔입니다. 바벨론이라는 것은 도구이고 하나님이 결국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다 치고 망하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셨는데 이제 거꾸로 하나님의 그 손과 팔로 너희를 심판하고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칼로 죽이고 나서도 남은 사람들은 큰 전염병에 죽게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바벨론이 침공해서 남유다를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고, 그리고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전염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의 칼을 견딘 사람들, 전염병을 견딘 사람들조차도 결국 남아서 모두 바벨론에 끌려가는 포로가 될 거라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칼로 망하게 되고 전염병으로 망하고 남은 사람들은 다 포로로 끌려가 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 바벨론에게 군사력으로만 지면 우리가 힘이 없어서 망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데, 전염병이 그 다음에 오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통하여 이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심판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 주시는 겁니다. 나의 변화와 회개 없이 그저 상황 변화만 원하는 너희들, 마지막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마저 날려버린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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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남 유다 백성들에게 수 없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끊임없이 주신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돌이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여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회를 다 날려 버리고 시드기아 왕조차도 다급한 마음에 사신들을 보내지만 회개할 마음도 돌이킬 마음도 없이 그저 상황만 모면하는 우리를 위한 존재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주신 마지막 기회마저 날려 버립니다. 그렇기에 이미 때는 늦은 것이고 심판을 직면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엄중히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너와 너희 백성은 이미 늦었다. 하나님은 강한 손과 팔로 너희를 구원 하시는 대신, 너희를 진노와 분노로 치실 것이라는 이 엄중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기다리시지만 언젠간 끝이 있다는 겁니다. 영원히 말씀하시고 영원히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면 말씀을 듣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어둠의 백성들을 친히 진노와 분노로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고, 알곡과 가라지가 갈리는 날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드러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손과 강한 팔이 진노와 분노로 우리를 치는 손이 되기 전에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은혜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며 이 남유다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불붙는 마음,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예레미야 20,7-18 | 7-22-2025

7/22/2025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뇌와 답답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알려주신 믿음의 길을 걸어가지만 이 세상을 사노라면 우리의 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어떤 날에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나…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고 내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내 삶에 탄식이 터져 나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들과 다르게 예레미야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올 때 이런 답답함과 외로움이 찾아와 이렇게 신앙생활이 맞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그게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가 처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던 광야에 외치는 소리와 같았던 예레미야 선지자, 그렇게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사람들이 변화하며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들이 생기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살아갔으면 얼마나 신바람 나고 좋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데 그걸 통하여 변화하고 회개하고 새생명을 얻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신바람이 나고 계속 나가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처한 삶의 자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은 고사하고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하기는 커녕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무시하고 조롱 하고 치욕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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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됐다는 것이죠. 여호와의 주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전하면 전할 수록 한 두 번 당하는 게 아니라 온종일 종일토록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마음에 찾아오는 힘들고 어려운 심정이라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치욕과 모욕을 계속 당하니까 그 예레미야의 삶 자체에 계속 두려움이 있고 회의와 의심이 드는 거죠. 아 이렇게 계속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신 말씀을 이렇게 전하는데 이렇게 지내는 게 정말 옳은 것인가? 적어도 치욕과 모욕은 당하지 않아야 될 것 같은데 말씀으로 말미암아 전하면 전할수록 하루 종일 치욕과 수치를 당하면 그 삶에 아무래도 멍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영적 침체와 탈진 가운데 예레미야가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가 쏟아 놓는 그 답답한 마음은 14절부터 17절까지 구구 절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에 복이 없다면…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런 얘기를 쏟아낼 정도로 예레미야는 지금 영적 침체에 빠져 심히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지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고 놀랍게 쓰임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런 영적인 침체를 경험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는 것 때문에 예레미야를 향하여 그렇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달라 붙었다는 것이 사실 그 당시 예레미야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비난을 당하는 시대가 되기도 하고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했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시대가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게 이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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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영적 침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피곤함과 고통스러움으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포기함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 침체를 넘어 주님의 은혜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면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금 내 심정과 상황을 보면 당장이 말씀 전하는 거 그만둬야 될 거 같은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더 이상 말하지 않아야 될 거 같은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어떤 마음이 있는 겁니까?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불붙는 듯이 그 마음에 주신 뜨거운 마음이 있는 겁니다. 주신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면 답답하며 견딜 수 없는 마음, 그 뜨거운 마음을 주신 겁니다. 모욕과 치욕을 당하는 것이 반복되어 삶에 침체가 오고 말씀을 전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하는데 그 마음 중심에는 불붙는 거 같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뜨거운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그의 마음 안에 뜨거운 불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신 겁니다. 내 주변과 상황을 봤을 때는 사람들의 반응을 봤을 때는 당장 말씀 전하는 거 그만둬야 되는데, 마음 속에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주시는 겁니다. 불 붙는 마음, 전하지 아니하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 모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 붙붙는 마음과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결국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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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향한 시선,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주신 그 마음, 불붙는 마음과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붙들고 상황과 환경을 넘어 사람들의 반응을 넘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외부로는 하나님 말씀을 외친다는 것 때문에 조롱 받고 치욕과 모욕을 당하는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땅을 바라보면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어 보이고 사람들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도, 여전히 예레미야는 하늘을 바라보며 위를 쳐다보기로 작정한 겁니다. 밖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내면을 바라보며, 그 마음에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을 가지고 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며,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내가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며 주님이 주신 마음에 집중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마음에 담아 살아가는 것, 그것만 이 고난과 어두움을 벗어나며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좌지 우지 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바라보며 그 사명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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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주님 앞에 살아가려고 발버둥칠 때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예레미야를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같이 그 대단한 선지자도 이런 탄식 기도를 하며 영적 침체를 경험한다면 우리도 당연히 이런 영적 침체와 이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영적 침체가 찾아올 때마다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하늘을 향하고 주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며 늘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반응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내려 놓는 것 밖에 없고 멈추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땅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상황을 계산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기에 그 주신 말씀이 나의 마음에 불붙는 거 같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심지어 무시와 조롱을 넘어 모욕과 치욕을 당할지라도 ​ 끝까지 소망을 붙들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생명을 건지는 그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길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오직 전해야 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을 선포하며 그 말씀을 붙들고 뚜벅뚜벅 나아가는 선명한 주의 백성, 주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고 생각하시는가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선명한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진리와 빛의 말씀을 거짓과 어둠은 싫어한다." 예레미야 20,1-6 | 7-11-2025

7/11/2025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한 바스훌의 박해와 그에게 임할 재앙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스훌이라는 사람은 제사장이자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었습니다. 21장에서도 바스훌이 등장하는데, 시드기야 왕이 사신으로 보내는 바스훌은 오늘 말씀의 바스훌과는 다른 동명이인입니다. 바스홀이라는 이름 자체가 평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의 총 감독이자 제사장이면, 그 당시에 가장 영향력이 많은 종교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계속 재앙과 심판의 말씀을 계속 전하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함을 듣고 나서 하는 반응이 놀라운데 예레미야를 때리고 고랑으로 목을 채워 모욕을 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제사장이자 성전의 총 감독인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그렇게 격한 반응으로 때리고 모욕을 주었는가…단순히 개인적으로 예레미야가 싫고 기분 나빠서 라기 보다는 이건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사장이자 성전의 총 감독이니 그가 뭐 주중에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지 않았겠습니까?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바스훌에 대한 평가인데, 그는 거짓 예언하는 자였다…라는 평가하시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너의 생각을 말하고 전하는 거짓 예언자…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데 관심이 없고 백성들의 민심만 살피기에, 백성들이 뭐 듣기 좋아하는가 이것만 신경 쓰는 거짓 예언을 하는 자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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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사장 바스훌이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모욕을 주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으로 기분이 나쁘고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둠이 빛을 대했을 때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를 대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면 선포할수록 어둠과 거짓은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다 주고 모욕 주는 일을 벌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과 빛을 싫어하고, 거짓은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거절합니다. 듣기 싫어하고 거절하는 것을 넘어서 그 진리와 빛을 때리고 가두어 두려 하고 심지어 죽이려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엄중한 사실을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참 진리자 생명의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그 당시의 어둠의 세력들,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어둠의 세력들은 예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무시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때리고 가두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예레미야가 당하는 이 모욕과 고통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진리이고 빛이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어둠과 거짓의 반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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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리와 빛을 붙든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며 세상 사람들과 굳이 부딪칠 필요도 없고, 갈등을 겪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아무리 여러분들이 잘하고 잘 살고 환대해도,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히 부딛히고 부대끼는 부분이 있고, 심지어 모욕과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세상과 세상 사람들과 모든 것을 다 잘 갈 수 없는 지점이 반드시 등장한다는 겁니다. 내가 진리와 빛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어느 부분에서는 갈등하는 부분이 있고, 어느 부분에서는 이렇게 모욕과 어려움을 당하는 부분이 생길 수 있음을 미리 알고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이걸 모르게 되면, ​ 세상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세상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하게 되거나, 말씀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면 갑자기 확 사그러들거나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하고 바라보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위대하고 탁월한 예레미야 선지자조차도 말씀을 전했다는 것 때문에 이유 없이 매맞고 고통과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는데 우리들에게 그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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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아닌 어둠이 되어 거짓 예언을 하고 있는 제사장이자 성전 감독인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때리고 모욕을 준 후 그 다음날 예레미야를 풀어 줍니다. 풀어 준 건 예레미야의 목숨을 해하려 하는 마음은 없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자, 목숨은 살려주되 다시는 이런 예언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엄중한 경고만 하고 하루만에 풀어준 제사장 바스훌을 향해 예레미야는 하루만에 풀어줘서 고맙습니다…이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듣기 원하시는 말씀, 들어야 되는 말씀을 선명히 선포합니다. 제사장 바스훌의 이름이 ‘마골밋사빕’으로 바뀌게 된다는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바스훌이라는 이름은 평화를 의미하는데, 바뀐 이름인 마골밋사빕은 “사방으로 두려움과 공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바뀐 이름대로 너와 이 온 나라가 사방으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며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바스훌의 바뀐 이름대로 너와 너의 나라가 경험하게 될 끔찍한 일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방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와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지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바벨론에 사로잡혀 포로가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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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때 모든 부와 소득과 귀중품과 보물들을 원수의 손에 넘긴다는 것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여기에서 콕 집어서 부와 소득과 귀중품과 보물을 얘기하는 건, 이 네 가지가 하나님을 망각하고 붙들고 있었던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하나님 위에 두고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바로 이 네 가지였던 겁니다. 하늘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이 땅에 매몰되어 붙들고 있었던 부와 소득과 귀중품과 보물들이 모두 원수들에게 털리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라는 겁니다. 이걸 통하여 아, 내가 헛된 것을 붙들고 있었구나…하나님 대신 붙들고 있었던 거 다 거두어 가시는구나…라는 것을 그들이 온몸으로 경험하며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될 거라는 겁니다. 제사장이자 성전 감독관이었던 그 높은 지위의 바스훌은 사실 하나님의 눈에는 거짓 선지자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거짓 예언을 선포하는 자도 엄중한 심판을 받고 거짓 예언을 듣고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거기에 젖어 살아가는 백성들도 엄중한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리와 빛의 말씀을 듣고 진리와 빛의 말씀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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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이 시간 빛과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 자체를 사모하며 그 진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까? 내 생각을 넘어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는 걸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데 내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까? 제사장 바스훌은 그러지 못했고 남 유다 백성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만 말하고 백성들의 민심만 살피다 결국 거짓과 어둠에 빠져 진리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방으로부터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하며 철저하게 망하고 죽임을 당하는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인 바스훌의 빛과 진리를 향한 박해와 그에게 임하는 심판과 재앙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다수결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 생각이 무엇이고 백성들의 민심이 무언가를 살피는데 인생을 거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 계신지를 살피는 자들입니다. 빛과 진리의 말씀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하며, 빛과 진리에 거하기에 직면하는 오해와 어려움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끝까지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빛과 진리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깨지고 부서지고 박살 나기 전에 속히 돌아오라."예레미야 19,1-15 | 7-10-2025

7/10/2025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유다 백성을 향한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옹기를 깨는 시각화를 통해 주고 계십니다. 옹기 그릇이 깨지고 부서지고 박살 나듯이, 너희의 운명과 이 나라가 깨지고 부서지고 박살날 것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실히 보이시고 있습니다. 그 옹기를 깨뜨리는 곳은 바로 흰놈의 아들의 골짜기인데, 그곳에서 심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시체들이 굴러다니게 되는 죽음의 골짜기가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남유다 백성들은 그렇게 옹기가 깨지듯 나라가 완전히 산산 조각나고 깨지고 박살 나게 될 수밖에 없는가?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이유를 통해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결국 하나님에 대한 태도인데 안타깝게도 남유다는 그들의 목이 곧아지는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마음은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마음이고 그게 곧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직결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만 산다고 우리에게 강조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첫 단추는 결국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귀와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겁니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주님께 드려 겸손한 마음 되기를 원하는 이유는 목이 곧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말씀을 들어야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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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들이 그렇게 깨지고 박살 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주신 땅을 더럽고 불결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곳을 더럽고 불결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다가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것, 이게 영적으로 무너지는 패턴입니다. 어떻게 불결하고 더럽게 만드냐 하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을 원어 그대로 더 실감나게 번역하면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내던진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신앙을 내던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신앙을 내던지며 은혜로 주신 거룩한 땅을 불결하고 더럽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를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존재로 거룩하고 구별되게 우리를 부르셨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내던지며 불결하게 되며 더러워지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차별이 없이 똑같이 더럽고 똑같이 냄새 나며 똑같이 불결하게 되는 인생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함과 구별됨이 다 사라진 채 이 땅에 세상 사람과 똑같이 더러워지고 불결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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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그들이 깨지고 박살나는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버리고 더러워진 후 필연적으로 우상숭배로 빠지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절하고 분향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고, 건축해야 될 것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도록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함이 무너지고 불결해지자 허망한 다른 신들, 우상에게 분향하고 바알에 산당을 건축하는 겁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며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위해 산당을 건축하고 절하고 제사 드리는 이런 더러운 일들을 벌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우상숭배의 끝은 무죄한 자의 피로 바알 신전을 채우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무죄한 자의 피로 여기를 채웠다는 말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혐오하시는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리는 인신 제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기 자녀들을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불살라 번제로 드리는 이런 인간이길 거절하는 패륜의 행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겁니다. 이런 인신 제사의 끔찍함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에게 더 이상 회복과 소망의 가능성이 없음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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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남유다가 이렇게 산산 조각 나고 깨지듯이 심판하게 되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모든 자의 귀가 떨린다는 건 스피커 볼륨을 올리면 우퍼가 막 떨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 커서 그것을 듣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모든 자의 귀가 떨릴 정도로 큰 소리로 심판을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 너희들과 이 나라는 산산 조각 나고 깨지고 부서지며 박살 나게 될 것을 그 큰 소리로 심판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데, 심판의 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고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더 끔찍한 상황이 묘사되는데, 살아 있는 자들은 자녀들의 살을 먹고, 각각 친구의 살을 먹게 되는,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목을 곧게 하여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삶, 하나님을 버리고 거룩함을 불결하게 만드는 삶, 허망한 것에 절하고 분향하고 건축하는 삶,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녀들을 번제로 불살라 드리는 삶… 이런 삶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들에게 남은 건 심판밖에 없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멸망밖에 없는 겁니다. 완전히 깨지고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고 무너지는 인생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만간 그들이 경험하게 될 철저한 심판과 멸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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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말씀을 깊이 들어가보면 그렇게 끔찍하고 깨지고 박살나고 무너지는 심판 선언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한 걸음 떨어져서 깊이 들어가보면, 이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복음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우는 것”이 자녀들을 번제로 불살라 드리는 그들의 끔찍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망 없이 죽어야만 하는 그들을 위해 또 다른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을 채우는 역사”를 준비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소망 없는 백성들을 향한 대안이 뭐냐면 바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겁니다. 무죄한 자, 죄가 없으신 분의 피를 흘림을 통하여, 이 남유다 백성들의 비극을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심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게 바로 흠 없는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무죄한 자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몸을 우리를 대신하여 깨뜨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그의 몸을 던져 깨지심으로, 그 무죄한 피를 흘리심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복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대안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절망 가운데 바라보는 소망이고 희망이며 십자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이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가볍게 듣지 마시고 무겁게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을 버리고 거룩한 것을 불결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하나님 섬기는 대신 다른 신들과 허망한 것을 절하고 분향하며 결국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녀들을 번제로 불사르는 이런 패륜과 막장의 길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 끔찍한 모습으로 깨지고 산산조각 부서지기 전에 주님께로 돌아오기 원합니다. 동시에 옹기가 깨지듯 산산조각 나 부서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무죄한 자의 피로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랑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이 나를 찌를 때 돌을 들지 말고 회개하라." 예레미야 18,13-23 | 7-9-2025

7/9/2025

 
18장 앞 부분 말씀을 통하여 남유다 백성들이 그릇으로서 자신들의 세 가지를 망각하고 살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흙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고, 하나님 마음대로 빚어지는 그릇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으며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 중요한 세 가지를 망각하고 살아가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살려 하고 내 마음대로 행하며 마치 내 인생이 내 손 안에 있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 버렸음을 오늘 말씀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은 나의 사랑하는 딸과 같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가증한 일이 세 가지로 오늘 말씀에 증언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을 잊은 것이며 두 번째는 허무한 것에 분향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는 남유다 백성들의 악행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하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잊어버리게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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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고 살아가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현재 형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이 무디어지거나 말씀을 멀리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멀리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 여기지 않으며 중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잊지 않는 비결인데 안타깝게 남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귀를 막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말씀을 경시하며 듣기를 거절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나라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백성들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어리석은 삶을 살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인생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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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들의 가증한 일은 허무한 것에 분향하는 것입니다. 분향한다는 것은 절한다는 말과 똑 같은 말로 성경에서 절하고 분향한다는 건 내 마음을 내어주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랑하는 대상이 돼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인데 그들이 하나님 대신 허무한 것에 절하고 분향하고 예배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 대상으로 삼고 엎드리고 절하며 분향해야 될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하나님의 대체물인 허무한 것을 분향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우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며 우상에게 분향하고 세상 신들에게 분향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으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없어지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그게 없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아는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보다 더 위에 올라가 절하고 분향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허무한 것에 절절 매며 허무한 것을 내 삶의 예배 대상으로 붙들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 하고, 하나님에게도 엎드리고 세상에도 엎드리려 그러며, 허무한 것을 예배 대상으로 삼으며 그거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예배하게 되며,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에 마음을 내어 주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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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그들이 행한 심히 가증한 일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들은 살 수 있는데 그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귀를 막는 것을 넘어 그 전하는 자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혀로 그를 치고 구덩이를 파고 올무를 만들어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왜 말씀의 대언자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싫어서라기 보다는 그 예레미야가 전하는 그 말씀이 마음을 찌르고 부대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찔림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 찔림을 주시는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설교와 같이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마음에 찔림을 주시는 말씀을 듣고 돌을 들어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후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한 놀라운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그 찔림을 받은 그들은 돌을 들어 말씀을 전한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찔림을 주면 그것을 통하여 회개를 하는 대신 돌을 들어 전하는 자를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말씀만 들으려고 그럽니까?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들, 내 귀에 불편하지 않고 마음에 불편하지 않은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고 내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적절하게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는 악한 백성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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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모든 가증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는 심판과 멸망밖에 남지 않은 백성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남유다 백성들은 더 이상 구원에 소망이 없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담아 나를 돌아보는 말씀 되기 원합니다. 항상 변하지 않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늘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잊지 않으십니다. 망각하고 잊는 것은 늘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경시하지 않고 중시 여기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필히 우리는 허무한 것에 절하고 분향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백성 되게 도와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찌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십니까?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시며 심령 골수를 쪼개실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내는가가 바로 내 신앙이고 내 영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분명한 기도 제목이 되기를 소망하며 말씀이 나를 찌를 때 회개하는 반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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