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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두 번의 여호와의 말씀이다…라는 선언을 통하여 심판과 회복이라는 놀라운 주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지에 대한 심판의 실체를 증언하고, 그 심판이 끝이 아니라 심판 뒤에 회복으로 세워 주실 것임을 약속으로 주십니다. 첫번째,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선언은 심판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할지를 보여줍니다. 16장 앞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세 가지의 금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자녀를 낳지 말고 초상집에 가지 말고 잔치집에 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잔치집에 갈 필요도 초상집에 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직면할 심판이 그렇게 끔찍하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심판이 임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는가 하면 어부가 고기를 낚듯이 잡혀 죽게 되고, 포수들이 사냥꾼이 사냥을 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낚시줄에 고기가 잡혀가듯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사냥하듯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그 끔찍한 심판의 실체를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남유다 백성들이 그런 끔찍한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나서 무거운 죄값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죄를 쌓아두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 이시자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다 들으시듯, 우리의 행위와 죄악을 다 감찰하시고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나의 행위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숨을 곳이 없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바라보고 계신다…내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못한다…이게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니까 하나님 앞에 죄악을 숨길 수 있다 착각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에 빠져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죄값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여러 죄악 중의 특별히 무거운 중죄 두 가지를 명시하시는데,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한 것으로 가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무겁게 다루시는 죄악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역죄라는 것입니다. 심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죄악의 본질,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기업을 가증한 것으로 가득 채운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고 요새이시며 피난처 되심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힘도, 요새도 아니기에, 나의 피난처가 아니기에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하나님과 겸하며 붙들고 섬기는 것, 이것이 남유다 백성들의 죄의 본질이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되는 내 인생 내가 지키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지키려 하는데, 내 인생을 내가 지킬 수 있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결국 신 아닌 것들을 신으로 붙들고 살면서 내 인생 내가 지키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 삶이 하나님 앞에 불신앙이자 대역죄였습니다. 이 첫 번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남유다 백성들이 직면하게 될 끔찍한 심판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죄에는 무거운 값이 있으며 죄에는 대가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죄가 없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나의 행위를 살피시는 주님의 눈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 길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주신 여호와의 말씀은 그 끔찍한 심판이 끝이 아니라 그 심판 뒤에 회복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그들의 인생을 건 신앙 고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정체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현재형으로 기억하는 것인 것 그 기억의 핵심은 출애굽이었습니다. 출애굽, 우리를 애굽의 땅에서 건져 내시고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그들의 오랫동안의 신앙고백 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늘 이 출애굽 사건을 삶에 중심에 두고 애굽 땅에서 구원내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심판 이후 포로로 잡혀 흩어진 후, 앞으로는 그 출애굽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신 북방 땅과 쫓겨났던 모든 나라로부터 건짐을 받아 돌아오는 출 바벨론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심판 이후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다시 인도하여 드릴 이것을 고백할 때가 온다는 회복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출애굽을 기억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이제 나라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끌려가 신음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통하여 출 바벨론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소망의 약속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냐 하면 심판을 하셔서 너희는 죄값 받아라… 꼴 좋다 맛 좀 봐라… 이러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심판으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망하는 게 끝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심판을 경험한 후에 다시 회복하여 돌아오게 될 날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실 남유다는 지금 현재 죄에서 돌이키지도 않아 임박한 심판을 직면하기 직전입니다. 아직 회개하고 돌아오지도 않은 남유다 백성을 향하여 심판 뒤에 회복이 무엇일까를 미리 알려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죄의 실체를 잊지 않고 죄에 대한 심각성을 늘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일 정도로 죄값은 무거운 것임을 잊지 않고 그 끝은 심판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동시에 그 심판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소망의 약속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겁니다. 세상에 결박되어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예수 십자가 보혈로 출 세상하게 하셔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하늘의 백성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성도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 출바벨론, 출세상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이여 살아갈 길이라는 것을 선명히 알려주고 계신 것이죠 출애굽을 기억하며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찾았던 백성, 출 바벨론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였던 포로기 후기 백성, 지금은 십자가 은혜로 주신 출 세상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성도,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겁니다. 출애굽 하게 하시며, 출바벨론 하게 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출세상 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 사랑을 바라보며 회복과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망각하면 그 끝은 심판과 멸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힘과 요새로, 피난처로 고백하지 아니하면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붙들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대역죄를 범하게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이시며 출바벨론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며, 출세상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출바벨론, 출세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기억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 하나님만을 믿고 고백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유다에 임할 임박한 심판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한가에 대해서 세 가지 금지 명령을 통해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고 하나님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붙들고 우상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죄를 향해 철저히 무감각해지며 그 죄에 대한 판단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런 양심에 화인 맞은 백성들,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는 그들을 이제 엄중히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세 가지의 금지 명령이 바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자녀를 두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자녀를 둔다는 것은 인간이 남기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이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질서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창조 질서를 거스르면서까지 지금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애 낳지 말라는 겁니다. 믿음의 가정을 세우며 자녀를 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정말 기뻐하는 일이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인데 그 아내를 두지 말고 자녀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그 태어날 자녀들이 나와도 이 땅에서 별 살 가치가 없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직면하게 될 재앙과 심판이 얼마나 끔찍하고 심각하면 이제는 애 낳지 말라 얘기하시는 겁니다.
자녀가 태어나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곧 짐승의 밥이 되고 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태어나도 다 죽으니까… 아이들이 기근으로 죽고 독한 병으로 죽어요. 그렇게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묻어주지도 못할 정도로 칼과 기근에 망하고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애를 낳지 않는 문화가 팽배하고 자녀를 낳는 것을 복보다는 부담으로 여겨 기피하는 문화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심판이 임할 때 그 자녀 낳는 기쁨이 사라지며 자녀를 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어마어마한 심판이 임하니까 아내를 두지 말고 지금 자녀 낳지 말라는 겁니다. 자녀가 태어나서 그 자녀가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으면 당연히 자녀를 낳죠. 그런데 자녀를 낳아도 그들이 고생만 하고 고통만 당하다 그 자녀들이 죽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도 슬퍼할 사람도 없고 묻어줄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럼 자녀들을 낳고 싶어도 애 낳을 수 없는 것이죠. 지금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엄중히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주변에서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하는 게 당연한데 초상집에 들어가서 통곡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슬퍼할 수 없을 정도로 줄초상이 너무 많이 나서…너무 많은 사람들이 심판 앞에 죽게 되기 때문에….한두 명 죽을 때야 초상집에서 초상을 치르고 함께 위로하고 슬퍼합니다.그런데 수백명 수천 명이 한꺼번에 죽게 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애곡할 겨를도, 마음도 없는 겁니다. 그들을 매장할 곳 조차 찾지 못해 집단 매장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전염병이 갑자기 일어나도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데 코로나 초기에 기억하실 겁니다. 냉동 창고를 만들어 가지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을 집단 수습할 정도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으니까 감당이 안 되는 것이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애곡하고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겁니다. 집집마다 다 죽어 나가고 집집마다 다 초상집인데 어떻게 그 초상을 다 찾아가 애곡 하겠냐는 것이죠. 감당할 수 없는 시신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게 되기 때문에 초상집 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그 지역 전체가 가족들을 잃어 눈물 바다가 되며 그 지역 전체가 통곡하는 현장이 될 거기 때문에 초상집에 가지 말라…그게 하나님께 범죄한 남유다 백성들이 조만간 직면하게 될 끔찍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마지막은 잔치집에 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지 말라 명령하신 잔치집은 그냥 잔치집이 아니라 결혼을 위한 잔칫집입니다. 결혼식을 위한 잔치집에 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결혼식 전에 잔치를 한 일주일 정도 모든 공동체에게 풀었습니다. 그런 결혼을 위한 잔치집에 가지 말라는 것은 더 이상 결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에 그 즐거워하는 소리들이 다 사라지고 끊어지게 될 거라는 것이죠. 심판이 임하게 되면 그런 모든 잔치집의 소리가 다 끊어지고 모든 결혼하려는 사람들이 다 죽어 버리기 때문에… 이 세 가지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통과 의례입니다. 자녀를 낳고, 결혼 잔칫집에 가고 장례식에 가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삶의 일상이자 삶의 가장 중요한 묵직묵직한 순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 그런 일상적으로 살면서 누리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삶의 순간들이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당연하게 여겨왔던 수많은 일상들, 그 소중한 일상들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사라지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심판의 실체라는 겁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필요도, 초상집에도 잔치집에 갈 필요도 없는 그런 끔찍한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는 겁니다.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도시가 망하고 무너지게 되며 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하고 약탈당하며 살아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이 끔찍한 실체를 그들이 조만간 경험하게 되게 된다는 겁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남 유다 백성들은 내가 하나님을 떠나야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우상을 섬겨야지… 그러면서 주먹 쥐고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의도적으로 막 이탈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 그냥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쌓이다 보니까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과 무관한 삶과 우상을 겸하여 붙드는 삶이 된 겁니다. 내가 너무 중요해지고 내 삶이 너무 중요해지고 오늘 하루 사는 게 너무 중요해 지니 점점 이 세상에 젖어 살게 되며 악을 자연스럽게 그냥 짓게 되고 그러면서 하루하루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이 반복적으로 살아간 그 삶의 결과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이탈해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과 사람과 우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죄에 대해서 둔감해져 하나님 앞에서 뻔뻔하게 “우리가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 “우리가 뭐가 그렇게 문제냐?” 고 소리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이 정도면 됐지…이 정도면 신앙 생활 잘하는 거지… 여기서 더 할 게 뭐냐…말하고 있는 겁니다. 남 유다 백성들의 죄에 대한 둔감성이 이렇게 무서운 일이고 죄에 대해서 직면하지 않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지 못하자가 죄에 대해서 둔감하게 살고 깨닫지 못하고 살다, 그 날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야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거였구나…온몸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의 때에 심판이 있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영적으로 대비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채,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기 일상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다가 그날이 오게 되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물 심판으로 망하게 된 것과 똑같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남 유다에게 임박한 그 심판의 경고가 과거의 남유다 백성들 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한 경고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결혼하지 말고 자녀를 낳지 말라…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결혼 잔치집에 들어가지 말라…이 세 가지의 금지 명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엄중히 경고하신 직면할 심판의 실체를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준을 붙들고 늘 말씀으로 나를 비춰보며 돌아보아 죄에 대해서 둔감해지는 나를 깨우기 원합니다. 나의 교만함을 녹이고 썩게 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은혜로 주신 소중한 일상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감사로 누리며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를 향한 약속과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동시에 증언되고 있습니다. 이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은 여러 번 반복되어 말씀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오늘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갖는 외로운 심정과 그의 고뇌와 답답한 마음, 또한 선지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해 보기 원합니다. 지금 선지자로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삶의 자리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다 자기를 저주하고 계속 충돌하고 부딪히는 사람들만 만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순전한 선지자이자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 주신 말씀의 내용은 다 순종과 불순종 가운데 너희가 지금 불순종하고 있으니까 기회가 왔을 때 얼른 돌아와라… 그 하나님께서 엄중한 심판 가운데 망하기 전에 지금이 회개하고 돌이켜야 될 때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때이다….나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로 나아갈 때만 너희에게 소망이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이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예레미야는 선포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하기는 커녕, 하나님 말씀을 농담과 같이 여기며 경시하고, 주신 그 말씀과 부딪히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인기 없는 말씀만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전하는 가짜 선지자들에게만 몰리는 겁니다. 심지어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욕하고 저주하고, 맨날 와서 싸움닭같이 싸움을 걸어 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로부터 배척이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면서 늘 경험하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귀를 막고 변하지 않는 것까진 제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조롱당하고 저주를 당하며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해야 하겠습니까….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고뇌와 탄식이었습니다. 그 예레미야의 고뇌와 탄식이 사실 이 땅에서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길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성도들의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부대끼고 손해보며, 갈등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부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주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고 오해와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게 되는 게 당연한 삶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고뇌와 탄식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내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내게 간구하게 하리라… 하늘의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겁니다. 내 사람인 예레미야,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서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부대끼고 있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힘과 능력, 복과 은혜 주시고 단단히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겁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장차 이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땅에 어떤 일이 있게 될지를 미리 다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책임을 가지고 더 간절하게 말씀을 외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사람들과 충돌하고 부딪히더라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저주의 소리를 들어도, 그 시대를 향한 안타까운 외침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많이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월등히 더 많이 배우고, 월등히 돈을 더 많이 벌고, 월등히 더 오래 살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게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눈 앞에 현실에 매몰되는 인생을 넘어 멀리 보는 인생입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넘어 저 멀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겁니다. 그렇게 멀리 보는 만큼 내 인생 하나에 매몰되는 것을 넘어, 이 시대를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는 더 큰 책임을 갖고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하면 이 세상과는 외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삶의 자리는 뭡니까? 주님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식당에서 친구도 없이 홀로 앉아서 먹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사람들의 모임 가운데 가지 아니하고 거기서 즐거워하지 않는 겁니다.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예레미야의 삶의 자리였고 성도의 삶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란 얘기가 아니라 세상 사람과 전혀 구별이 없이 그냥 세상 안에 주저 앉아 있고 거기서 즐거워하는 삶은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흘러가지 않고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는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의 자리에서 나와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새벽 기도의 은혜이며 말씀을 홀로 대하는 은혜이며 기도하는 은혜입니다. 하늘을 품고 있는 삶이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잘나가고 전문가가 되고 탁월한 사람들은 다 홀로 있는 시간을 갖습니다. 사람들에게 늘 그냥 엮여 있고 사람들에게 머물러만 있는 사람 치고 큰 사람이 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큰 사람은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떠나 스스로가 홀로 고독한 싸움을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세상에서 하늘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떠나, 사람들에게서 떠나, 그 즐거움과 기쁨에서 떠나 내 자신을 홀로 둘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게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능력의 통로였고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된 놀라운 은혜의 통로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젖어 사는 자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사람들 가운데 주저 앉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말씀이 있고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말씀과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서 부대끼며 부딪히고,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미움을 당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원합니다. 때로는 말씀과 사명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거리 두기도, 세상 즐거움에서 거리두기를 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기도 하는 겁니다. 나를 세워 주시고 지켜 주시는 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가 되십시오. 이 세상에 젖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그냥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을 떠나 거리두기를 하며, 하나님 앞에 나를 두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한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일상 가운데 떼어 내 시간과 마음을 구별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 하나님과 만나는 말씀을 통해 내가 이 땅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하늘 소속임을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성도는 우리를 지키는 방식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내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레미야와 같이 하늘 위로와 능력을 공급받으며, 이 세상에서 맡겨진 말씀과 사명에 충성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가올 그 심판의 날에 대한 끔찍한 죽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남유다에 대한 이야기, 뒷부분은 남 유다에 대해서 사망 선고를 하시고 심판을 내리신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잡지 않는 교만한 모습은 “ 우리가 어디로 가야 나아가리요…” 묻는 그들의 질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 정말 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원해서 “저희가 길을 모르니까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세요.” 라는 마음으로 물어보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아주 뻔뻔하고 당당하게 묻는 겁니다.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도 우린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어떻게도 상관없어. 하나님의 심판 같은 거 어디 있어….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인데…우리가 어디로 가도 상관 없는 거 아닙니까….라고 조롱하듯 묻는 겁니다. 양심의 화인을 맞아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어디를 향해 질주하는지도 모르고 임박한 심판 가운데 마지막 기회마저 날리는 겁니다. 양심에 화인 맞고 교만에 쩔어 사는 남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며 포로될 자는 포로됨으로 나아갈지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죽음과 칼의 전쟁과 기근과 포로됨으로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엄중히 선언하시는 겁니다. 전쟁 중에 칼에 맞아 죽던지, 기근에 굶어 죽던지,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죽든지 너희는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남유다 백성들이 돌아올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심판만 남게 된 결정적 사건, 방아쇠를 당이게 되는 trigger point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므낫세 왕의 악행입니다. 모든 기회를 날려버리며 남 유다의 심판과 사망 선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히스기아의 아들 므낫세 왕 때문이라는 겁니다. 히스기아 왕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통치한 왕이자 하나님의 은혜로 15년을 더 산 은혜의 왕이죠. 그런데 그 아들 므낫세는 은혜의 왕 아버지와 정반대로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므낫세가 어느 정도로 악한 왕이었냐 하면 북 이스라엘의 어떤 왕보다도 더 악한 왕이었으며 자기 아들을 우상에게 내어주어 죽게 할 정도로 끔찍한 왕이었습니다. 그 므낫세의 하나님을 향한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 뿐 아니라 온 백성이 악한 길로 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므낫세 왕의 이런 끔찍한 악행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모든 남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망 선고를 하시며 너희는 끝났다는 겁니다. 마지막 기회를 날려 버리고 남은 건 심판 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겁니다.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키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남유다 백성들을 엄중히 심판하시며 벌하시는 겁니다. 네 가지로 심판하신다는 건 동서남북이 다 막혔다는 것으로 빠져 나갈 구멍이 하나도 없이 어디를 가도 죽는 엄중한 심판입니다. 빠져나갈 구멍 없이 어디를 가도 심판 받는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 말씀을 예레미야를 통하여 남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칼과 기근과 포로됨으로 죽게 하시고 다 흩어 버릴 것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재앙이 너희에게 찾아와 너희를 완전히 벌하게 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그 완벽한 재앙과 심판이 찾아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불쌍히 여기는 자도, 울어 줄 자도, 평안을 물을 자도 없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특별히 여기서 평안이란 날이 샬롬으로 그냥 잘 먹고 잘 지내며 이 땅에서 그냥 호위 호식하는게 평안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심 자체가 샬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자체가 샬롬이고 평화이고 복이고 형통입니다. 그렇기에 평안이 사라진 삶이란 화와 저주의 삶이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샬롬이 있을 수 있고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도 샬롬이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그건 평화가 아니라 저주와 화의 인생인 겁니다. 남유다에 샬롬이 없다는 건, 하나님의 임재가 백성들 중에 더 이상 없게 되고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임재를 거두어 가신 것이 샬롬이 사라진 화와 저주의 삶, 그들이 직면하게 되는 건 하나님이 가져오실 엄중한 심판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냐면 하나님은 너무 지쳤다..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마음을 하도 많이 바꾸니까, 하도 하나님 말씀을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바라보기에 너무 지쳤다…어느 정도 하나님이 돌아올 기회를 주셨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출애굽으로 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으며 그들의 왕이 되셨으며 그들을 기다려 주셨는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보호하고 인도하신 왕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 숭배하며 무너지는 그런 불순종과 반역에 하나님은 이제 지치셨다는 겁니다. 마지막 기회마저 날려 버리고도 문제 의식 조차 없는 양심에 화인 맞은 남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며 이제 내가 지쳐서 하나님의 평강을 거두어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신 축복을 거두어 가시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거두어 가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남유다 백성들에게 남는 건 저주와 화 밖에 없고 심판 밖에 없는 겁니다. 남유다 백성들을 끊는다…멸한다… 이게 전형적인 하나님의 심판 언어입니다. 빠져나갈 구멍 없이 너희를 끊고 너희를 멸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본질적 이유는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그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기에…. 앞뒤 좌우가 동서남북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재앙과 심판만이 그들에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바꾼다는 게 회개 아니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을 향한 길로 내가 바꾸는 것이 회개이자 돌이킴입니다. 회개는 내가 가는 길을 바꾸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돌이 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 아버지의 길로 돌아가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회개인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무리 불러도 자기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끝은 멸망이고 심판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이죠. 이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말씀 듣고 돌아올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죠. 돌이킬 기회가 있으며 하나님의 길로 돌아설 기회가 우리에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생으로 돌이키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며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기다리시고 부르시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그것을 멈추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거두어 가시는 날이 오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거두어 가시는 날이 와, 죽음과 심판밖에 남는 게 없는 때가 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유다 백성들을 반면교사 삼아, 끔찍한 전쟁이 임하고 기근이 임하고 죽어 모두 흩어지는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며, 주의 길로 나아가는 하나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 백성들이 왜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되었는가를 끊임없이 고발하며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가운데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찔러주는 말씀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유다 백성들이 멸망과 심판을 직면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 듣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들을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런 눈에 보이는 문제들인 현상과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본질의 문제를 좀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와 백성들의 무지함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 선지자만 있는 게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있으며, 백성들이 듣고 싶은 말씀에만 몰입하고 귀를 기울이는 한, 거짓 선지자들은 계속 인기에 영합하여 판치게 된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겁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문제와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되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은 들어야 될 말씀을 도외시하고 듣고 싶은 말에만 몰입하며 살았던 이 영적 무지함, 그런 인기 몰이에 편승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있었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젖어 내가 듣고 싶은 말에만 귀 기울여 살아가는 백성들의 무지함이 결국 심판과 멸망으로 그들을 이끈다는 이 본질적인 문제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영적 문제를 증언하는데,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와 그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놀아나고 미혹 당하는 백성들의 문제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고 말씀을 전한 겁니까? 칼을 보지 않고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며 확실한 평강을 주겠다…는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전한 겁니다. 사실 예배에 와서 나쁜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왕이면 예배 드리러 와서 편한 이야기와 좋은 얘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집중하는 게 뭐냐면 전하는 말씀이 진리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가에 있는 겁니다. 그들의 필요와 듣기 원하는 것에 늘 민감하여 귀에 듣기 좋은 소식만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면 잘 나가는 선지자, 인기 있는 선지자가 생기는 겁니다. 소위 말하는 백성들이 야 저 말씀 좋아…박수치는 그런 인기 있는 선지자들이 생기는 겁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거짓선지자들이 말하는 칼과 기근이 없다는 건 하나님의 심판 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고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겠다고 꿀을 바른 말씀만 전하는 겁니다. 듣고 싶어하는 말씀과 함께 나는 계시를 받았다 이런 말도 하고 무당과 별로 구분도 되지 않게 자꾸 점 치듯 미래를 점지하고 눈에 보이는 헛된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는 겁니다. 쉼과 위로라는 명목 아래, 왜곡되고 변질된 가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 당시에 인기 있는 선지자들의 말씀들이었고 사람들이 모이게 만드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의 말씀과 선포는 어땠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어요. 늘 전하는 말씀이, 죄 문제 회개 문제, 임박한 심판…지금 회개 안하고 지금 돌아오지 않으면 너희는 가능성 없고 큰일 나는 존재야, 가만히 있으면 망해…라는 말씀만 끊임없이 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심지어 말씀 듣기를 싫어하려 귀를 막아 버립니다. 심지어 조롱과 멸시를 받고 박해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그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인기 있는 메시지와 참 선지자의 인기 없는 메시지 중에 정말 참 선지자의 인기 없는 메시지 선택할 자신이 있느냐고 말씀을 엄중히 우리에게 선택지를 내미는 겁니다. 어떤 것을 듣고 싶고 어떤 것을 믿고 싶는가…이 질문에 솔직하게 예레미야가 전하는 참 말씀, 마음이 불편하고 나를 찌르는 그 말씀을 나는 정말 원하냐는 겁니다. 그게 참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들어야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부대껴도 나는 그 말씀 듣기를 사모합니다…라는 그 순종의 선택을 정말 할 자신이 있냐는 겁니다. 성도들의 본질적인 도전은 내가 듣고 싶은 말씀에만 몰입하는가 아니면 나는 정말 들어야 될 말씀 가운데 엎드리고 순종하는가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과 들어야 될 말씀이 같이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많은 경우에 듣고 싶은 말씀과 들어야 될 말씀은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듣고 싶은 말씀을 내려놓고 들어야 될 말씀 앞에 내가 나아가며 순종하며 거기에 귀를 기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영적 도전이 옛날 남유다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되는 동일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게 예전에도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고 지금도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듣고 싶은 말씀에만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에 귀를 닫아버린다면 우리도 남유다 백성들이 직면한 심판과 멸망의 우매함에 똑같이 빠지게 된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겁니다. 왜 진리를 떠난 거짓 선지자들이 계속 나오냐 하면 그들을 찾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 대신 듣고 싶은 말씀만 듣겠다며 찾는 손님들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인기라는 것까지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가 판치는 겁니다. 내가 들어야 될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하면 인정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악과 죄악을 인정하게 하는 말씀,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인정하게 하는 말씀, 내 안에 소망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말씀, 썩지 않는 교만이 여전히 존재하는 자임을 인정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처절한 가능성 없는 죄인입니다.. 나를 붙드는 교만이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내 귀를 막아버립니다… 주님 앞에 나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부대끼고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다면 이 말씀이 내가 들어야 될 말씀임을 분명히 고백하며 그런 참 진리를 선포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여러분들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씀만 전하고 가짜 평안을 정한 가짜 선지자들도 칼과 기근에 망하게 되고요 그 말씀을 분별없이 받고 그냥 거기 앉아 있었던 백성들도, 듣기 좋은 말씀에만 길들여져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백성들도 모두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된다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분명히 영적 책임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만 동시에 성도들도 몰랐다고 그 책임이 면제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백성들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영적 책임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들어야 될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 듣고 싶은 말씀에는 귀 기울이는 죄, 거짓 선지자들의 가짜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빼앗긴 백성들의 죄….결국 거짓 선지자들도, 백성들도 모두 예외 없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정말 얼마 있으면 심판이 임하고 정말 얼마 있으면 죽을 인생들인데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보지 못하고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착각하다가 아무런 대비 없이 한 방에 가버리게 되는 겁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될 말씀 가운데 나를 두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렇게 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영적인 무지는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쉼과 위로의 명목으로 내 영적 현실 직면하지 않게 하고 말씀으로 돌아보지 않게 만드는 하는 가짜 평안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참 진리 가운데 나를 돌아보며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임을 소망 없음을 나는 여전히 교만한 인생임을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죽는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인정하며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주의 백성 되기 원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내가 들어야 될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 있는가를 늘 분별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하며 빛보다는 어둠을 좋아하고 들어야 될 말씀보다는 듣고 싶은 말씀에 내 마음이 치울 칠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듣고 싶은 말씀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내 마음을 쳐 복종시켜 듣고 싶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영적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들어야 될 말씀을 통하여 거짓을 분별해 내며 참과 진리 가운데 거하며 이 어두운 시대 심판이 임박한 시대에 깨어 영적으로 대비하며, 영적으로 대비하며 살아가는 주님이 찾으시는 남은자, 단단한 알곡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딸과 같은 남유다 백성들이 아무리 부르짖고 외쳐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진노와 심판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14장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과 함께 그들이 직면할 심판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구약 성경에 항상 세 가지가 하나님이 치시는 경고로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칼과 기근과 재앙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임하게 될 때, 공동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와 나라를 경고하시는 일임을 알고 깨닫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들을 치심으로 온 땅에 상상할 수 없는 가뭄이 임합니다. 요즘에도 가끔씩 물이 없는 가뭄 때문에 고생하고 어려워하지만 요즘에 경험하는 가뭄과 고대 시대에 가나안 땅에서 경험하는 가뭄은 기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은 저수할 공간도 있고 뭐 수도도 나오고 여러 시설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던 것이 고대 시대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전혀 지을 수 없는 땅입니다. 물이 그냥 쭉쭉 빠지는 땅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셔야만 하늘을 바라보고 주의 은혜를 먹고 사는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남 유다였습니다. 가뭄은 그들에게는 목숨을 담보하는 문제이고 정말 죽는 거 외에는 답이 없는 국가적 위기, 그게 바로 가뭄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심각한 가뭄이 찾아옴으로서 생명줄이 끊어지는 위기 가운데 놓였습니다.
그들에게 임하는 가뭄이 얼마나 심각하고 그들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가를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사람으로부터 해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가뭄의 고통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물,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며 빈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러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머리를 가렸다는 것은 극도의 수치와 그리고 풀어낼 수 없는 절망감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인간들만 고통 당하는 게 아니라 동물들도 그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 당합니다. 풀이 하나도 없고 물이 하나도 없으니까 오죽하면 동물들이 낳은 새끼를 내버리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디에도 땅에도 하늘에도 물이 하나도 없는 가뭄 가운데 온 백성과 심지어 동물들도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가뭄이라는 것은 물이 없다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영적 가뭄도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은 마실 물 조차 메마른 극심한 가뭄이지만 하나님이 그 극심한 감음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은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의 영적 가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가뭄, 은혜가 완전히 바짝바짝 메말라 다 사라진 가뭄, 그래서 백성들의 심령이 쫙쫙 갈라지고 메말라 있는 빈그릇이라는 겁니다. 극심한 가뭄을 바라보며 말씀과 은혜 없이 가물어 메마른 땅이 되어 버린 심령의 가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남 유다 백성들이 경험하고 있는 극심한 가뭄, 심판으로 임하는 경고의 가뭄입니다. 그 가뭄으로 인해 온 백성들이 슬퍼하며 땅에서 하늘을 향하여 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애통하고 부르짖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회개나 기도로서의 애통과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저 가뭄이 너무 힘들다…라는 하소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국가적인 극심한 고통과 가뭄을 직면할 때 백성들은 기도하지도 않는데, 예레미야가 중보자의 탄원 기도를 간절히 주님께 드립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도 기도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온 백성들을 대표하며 중보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두 가지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데, 첫 번째는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입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범죄하지 않았고 남 유다 전체의 공동체 죄악에 공헌한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남 유다 백성들의 공동체 죄악은 나와 무관한 너희들의 죄악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너희들의 죄악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의 죄악임을 고백하는 게 예레미야가 가졌던 중보자로서의 자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잘못 안 했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문제와 나의 죄악으로 품고 주 앞에 나아가는 태도가 이 시대를 살리며 기도하는 중보자의 자세라는 겁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할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런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저 사람을 고쳐 주시고 저 사람의 문제 해결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닌 그 사람과 함께 저를 고쳐 주시고, 저 사람의 문제와 함께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끌어 앉는 중보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 이 세상 너무 타락했다…세상은 망할 곳이야 그러면서 기도하면서도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뒤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대한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이 교회가 문제다… 저 교회가 문제다…마치 남의 교회 같이 이야기하면서 나는 아니다…라고 쑥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교회 문제는 목사님 문제고 장로님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야 그러고 쑥 빠집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중보자로서 뭐라고 선언합니까? 이 세상의 문제도 우리 문제, 교회의 문제도 우리 문제…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그것을 나와 무관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우리의 아픔으로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의 죄로 품고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냥 저들 만의 문제가 아니고 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이며 우리의 문제입니다…라는 고백이 중보자의 기도의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 예레미야의 기도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입니다. 공동체와 나라의 죄를 우리의 죄로 품고 예레미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고 우리 죄의 민낯을 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를 구해줄 가치나 용서해 줄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고난 당할 때에 구원자이신, 그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응답하시고 일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겁니다. 그 변함없으시며 언제나 한결 같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 그 이름을 위하여 일하여 달라 간구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을 구할 때 무엇을 의지해야 되냐 하면 내 상황과 환경의 절박함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해 일하심을 믿음으로 붙들고 우리가 구하는 겁니다. 그 거룩하신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 나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나의 부족함 주님이 다 아시지요. 그런데 주님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머리 숙여 고백합니다. 변치 않는 그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이 시간 일하여 주옵소서…이 고백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될 기도라는 겁니다. 불신앙이라는 것은 하루 종일 상황과 환경만 묵상하고 종일 자기 생각만 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병들면 병들수록 하나님이 아닌 내 생각만 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란 내 생각을 넘어 하나님 생각하는 거며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소망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 극심한 가뭄 가운데 남 유다에는 소망이 다 사라진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그때 필요한 게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늘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상황과 환경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본질인 구원자를 바라보는 겁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는 그 기도의 삶 가운데 소망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기도의 자리에서 그의 구원자 되심을, 소망되심을 믿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가뭄이 가득한 삶 가운데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길을 열어 주시고 소망을 주심을 체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베로 만든 썩은 허리띠라는 그림을 통하여 더 이상 썩어 사용할 수 없는 그 모습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가 썩은 남유다의 영적 현주소이자, 교만으로 쩔어 살아가는 너희의 교만을 썩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들 문제의 본질은 교만이 썩지 않아 하나님 말씀 듣지 않는데 있다는 선언하시면서 그들의 교만의 문제를 심판과 직접적으로 연결해 다루고 계신 겁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교만하지 말고 제발 나의 말을 들으라고 반복하며 강조하시는데, 그것 만이 심판해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썩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만하지 않는 것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안 듣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교만이 썩어졌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듣는 거보다 중요한 일이 없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 백성인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거보다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 얼마 남지 않는 다급한 시간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심판이 코 앞에 닥쳤으니, 망하기 전에 심판이 오기 전에 너희의 교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선언하시는 겁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제발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 외치시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면서 그의 진짜 속마음은 뭐라는 겁니까? 이 하나님의 경고가 현실이 안 됐으면 좋겠다…라는 간절함이 있는 겁니다. 말씀대로 지시한 그 심판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겁니다. 망하기 전, 심판이 임하기 전 제발 그들의 교만이 썩어 하나님 말씀 들음으로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예레미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고 이 예레미야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제발 이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되는데, 너희들에게 정말 시간이 얼마 없어… 그 어두움이 오기 전에, 죽음과 심판이 오기 전에 그 모든 게 그늘로 변하며 모든 어둠이 깔리기 전에 제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는 거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죠 그들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리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백성들이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교만한 상태로 있으면 너희의 그 썩지 않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말씀대로 풀어지는 심판이 곧 임하게 된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 심판은 너무나 끔찍하기에 내가 은밀한 곳에서 울고 너희의 사로잡힌 것을 바라보며 통곡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끝까지 그들의 교만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뒷부분은 말씀이 결국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심판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는 북방에서 몰려오는 이방 백성 바벨론입니다. 그들이 북방에서부터 그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 심판하기 위해 몰려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는 겁니다.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은 특별히 남유다의 영적 간음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성으로 의인화하며 그들의 치마가 들어올려가는 수치를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 천하에 그들의 치마가 들어올려지는 끔찍한 일들 수치스러운 일들이 그 심판과 멸망 가운데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 유다 백성들은 사막의 바람에 불려가는 덤불같이 다 흩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망하고 무너지며 백성들은 포로로 이렇게 다 흩어지는, 말씀이 말씀 그래도 이루어지는 비극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을 엄중히 선포하는 겁니다. 남 유다 백성들이 심판을 면치 못하고 멸망하게 되는 교만의 본질, 그토록 썩지 않은 교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말씀 대신에 거짓을 신뢰하는 겁니다. 하나님 대신 거짓 우상을,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신뢰하는 겁니다. 교만에 빠져 자신의 소견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니까 하나님 말씀 듣는 대신 세상의 말과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우상과 세상을 신뢰하는 자들이 된 겁니다.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되며,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 말씀 안 듣고, 자기 생각만 하고 세상 생각만 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며, 의지하는 것은 세상밖에 없고 거짓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들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닥칠 심판은 이렇게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할 것이며 그들을 괴롭게 하고 통곡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썩지 않는 영적 교만을 방치해서 결국 남 유다에 영적 사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경고이자 저와 여러분들을 깨우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죄를 물처럼 먹고 마시며 공기와 같이 마시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죄악된 우리 모습을 스스로 바꾸고 개선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어 보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으면 이게 죄라는 거 자체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으로 나를 비추어 보는 것 만이 살 길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내가 얼마나 죄인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교만을 버리고 말씀을 듣는 것 뿐입니다. 말씀으로 나를 비추어보고 돌아보는 것 뿐입니다.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나를 드리고 내가 죄인이며 소망이 없음을 철저히 고백하며 내 교만을 내려놓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 비결입니다. 교만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교만하기에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썩지 아니한 우리의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하게 만들며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어 심판으로 질주하게 만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제발 교만을 버리고 나의 말을 들으라…외치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 엎드리기 원합니다. 그 끝은 심판이자 사망임을 잊지 마시고 나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말씀 앞에 낮아져 회개하며 주안에서 새 출발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13장 말씀은 썩은 베 허리띠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 남유다의 영적 현주소인 썩은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남유다 백성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과 같은 존재이자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딸과 같은 남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이 곧 망하고 심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을, 선명히 시각화 하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썩은 베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썩은 베띠와 같은 남유다 백성들이 직면하는 심판이 무엇인가를 함께 마음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가서 베로 만든 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당시 베로 만든 허리띠라는 것은 굉장히 고급소재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왕들이나 귀족들이 베로 만든 옷이나 허리띠를 차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전 한국도 평소에 베옷을 입지 않지만 장례식 때는 꼭 베옷을 입지 않습니까? 좋고 귀한 옷인 베옷 입고 하늘나라 잘 가시라고 장례식에는 베옷을 다 입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삼베로 만든 옷은 굉장히 귀한 것이죠. 그 베로 만든 귀하고 비싼 것 소중한 허리띠가 물에 젖으면 안 되니까 허리에 띠고 절대 물을 적시지 말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비싼 베로 만든 허리띠를 띠고 어디를 가라 명하셨는가 하면 유브라레로 가서 그걸 숨기라는 명령하셨습니다. 유브라데는 예레미야 선지가가 있는 곳에서 어느 정도로 먼 거리였는가 하면 26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 하루 이틀 걸어서 갈 곳이 아니라 세 달을 걸어가야 될 그 먼 곳을 갔다 오라는 겁니다. 그리고 도착해 유브라데 바위 틈에 가서 베로 만든 귀한 허리띠를 숨기라 명하셨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좀 가까운데 숨기면 좋은데 그 멀리 세 달을 걸어가고 세 달을 돌아오면 6개월 아닙니까? 그 먼 거리를 갔다 오라는 명령도 이해가 안 되지만, 더 이해가 안되는 건 그렇게 멀리까지 바위 밑에 허리띠 하나 숨기고 오라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6개월을 걸려 그 베 허리띠를 유브라데까지 가서 숨기고 왔습니다. 더 놀라운 건 여러 날 후에… 여기서 여러 날은 며칠이 아니라 몇 년입니다. 몇 년 후에 하나님께서 또 세 달을 걸어가서 그걸 가져오라 명령하신 겁니다. 참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정말 막중하고도 어려운 사명,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을 주시는 겁니다. 한 번 갔다 온 그 먼 길을 또 6개월 걸려서 갔다 오라는 겁니다. 그 갔다 오는 길이 얼마나 멀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가서 뭐 대단한 일을 하고 오는 것도 아니고 숨겨놓은 허리띠 찾아오라고 하시니 더 순종이 어려운 겁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믿음과 순종의 선지자 아니겠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말씀을 순종하여 다시 한 번 6개월을 걸려서 유브라데에 가서 베로 만든 허리띠를 바위 밑에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가서 보니까, 바위 밑에 감추었던 베 허리띠가 썩어서 쓸 수가 없게 된 걸 발견한 겁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예레미야에게 그 멀리까지 가서 허리띠를 묻고 몇 년 후엔 다시 가져오라고 명령하셨을까? 3개월이나 걸어가야 했던 이 유브라데 지역은 바벨론이 있었던 지역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굳이 그 멀리까지 가라 명하신 거는 남유다에게 닥치게 되는 일,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포로생활을 하게 될 것을 그림 언어로 시각화 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썩은 관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가 이렇게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의해서 먼 길을 떠나게 될 거라는 것을 시각적인 표현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썩은 베 허리띠를 보여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비싼 베로 만든 허리띠를 그렇게 썩게 놔두셨고, 그 베 허리띠를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묻고 오게하셨는가…이제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비싼 베의 허리띠가 썩는 것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썩게 하겠다는 겁니다.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그 멀리까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통해 유다를 썩게 하는 게 아니라 유다의 교만을 예루살렘의 교만을 썩게 하겠다는 선포입니다. 결국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되는 본질적 이유가 뭐라는 겁니까? 경고하고 외쳐도 썩지 않은 그들의 교만, 하나님 앞에 썩지 않는 그들의 교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들의 관계를 썩게 만들었고, 결국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통해 너희의 그 교만을 내가 완전히 썩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을 그 썩은 베띠를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겁니다. 남유다의 썩어야만 하는 교만은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를 오늘 말씀은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두번째, 그 마음에 완악한 대로 행하며…세번째, 다른 신을 따라 섬기며 그에게 절하는 겁니다. 그들의 썩어야만 하는 교만의 첫번째는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교만입니다. 항상 교만이 문제가 되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싫어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사하고 교만하면 사람들의 말도 안 듣습니다. 남의 얘기 안 듣는 사람들은 물어볼 것도 없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냥 내 편한 대로 내가 원하고 좋은 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도 하나님 말씀도 듣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고 듣기를 싫어하는 거 자체가 이미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썩어야만 하는 그들의 교만은 마음에 완악한 대로 행하는 삶입니다. 완악하다는 것 딱딱해진 마음, 나 밖에 모르는 완고한 마음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의 마음 상태가 바로 교만으로 인한 강팍하고 완악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시는 생명의 길을 거절하며 내 마음대로 내 원하는 대로 내 기분대로 나아가며 마음에 완악한 대로 사는 겁니다. 나 밖에 모르고 현실밖에 없고 현상과 물질 가치밖에 없는 그런 인생으로 완악한 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가 되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게 남유다 백성들의 교만이었습니다. 세 번째 썩어야만 하는 그들의 교만함은 바로 다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고 그들에게 절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며 자기 마음과 뜻대로 행하고 완악한 대로 살아가면 자유롭고 평안할 것 같은데,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사람에 매이고, 환경에 매여 살게 되고,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찾아오게 되는 겁니다.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 없으니까 하나님을 대치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내가 원하는 다른 신을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그 가짜를 만들어 하나님을 수단과 도구로 만들고 다른 신을 붙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이게 교만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필연적으로 귀결하는 우상숭배입니다. 그 썩지 않은 교만으로 쓰임 받지 못하는 썩은 허리띠 같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허리띠 같은 존재 아니었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남유다 백성들은 어떤 존재라고요? 나에게 귀한 허리띠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 거야…라고 자랑하고 싶은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셨던 게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너희야 말로 내 백성, 내 딸이야…라고 자랑하며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그들이 지금 썩은 허리띠가 되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썩지 않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썩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 교만을 완전히 썩게 망하게 하시고 심판하시고 세 달이나 걸어서 가야 하는 그 멀리까지 끌려가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그들의 교만이 다 썩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듣기 싫어하는 것, 완악한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에게 마음을 내어 주고 절하는 것… 이것이 그들을 심판에 직면하게 만드는 썩지 않는 교만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 썩으면 망해서 포로로 잡혀가서 그 교만이 썩을 때까지 뿌리를 뽑겠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렇기에 썩어야만 하는 남유다 백성들의 세 가지의 교만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경고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교만을 경고하신 주의 음성을 마음에 새겨 속히 돌이켜 이 썩어진 베 허리띠가 되기 전에 내 교만이 녹아지고 다시 한번 주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며,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우상에게 마음을 계속 주는 이 교만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의 허리띠와 같은 존재가 되어 나는 하나님 소속입니다…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 꼭 붙들고 그분의 말씀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며 거기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와 사귐 속에서 하늘의 것에 민감하며 빠삭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했던 남유다 백성들을 내 소유,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셨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여기셨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언약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복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는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별 관심이 없이 살아가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원하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관심가지고 땅의 복만을 자꾸 구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을 아는데 빠삭한 대신, 세상과 친밀하고 민감하며 세상 것에만 빠싹한 인생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주목하며 현실과 현상만 바라보며 살아가니까 하나님도 어떤 존재로 여기냐 하면 이 땅에서 원하는 복을 채워 주시는 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내가 원하는 복을 받는 게 신앙생활의 전부, 하나님을 믿는 전부가 되어 버리니까 하나님이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게 되니까 나중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땅의 복을 다 주시지 않는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아 내가 잘못했구나..”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놔두고 다른 이방신들과 우상을 찾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복을 줄 또 다른 대체물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붙들고 우상도 붙들고 살아가는 이 변질과 타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바로 남 유다 백성들의 심판을 향한 질주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남 유다 백성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숲 속의 사자같이 으르렁거린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숲 속의 사자 같이 으르렁거린다는 말은, 숲 속의 사자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공격하며 소리치는, 불순종과 반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과 충돌하며 내 길로 가겠다며 하나님께 소리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숲 속의 사자 같이 으르렁 거리는 반역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을 의지하고 주변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남 유다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대항하고 충돌하고 부딪히는 이런 불순종과 반역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숲 속의 사자 같이 으르렁 거리는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두 가지 심판의 모습을 보이실 것을 경고하십니다. 원수의 손에 그들을 넘겨주시는 심판과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시는 심판입니다. 첫번째 심판의 모습은, 원수의 손에 그들을 넘겨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자 마음으로 사랑하는 남유다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셔서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남 유다를 원수의 손에 넘기시는 게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죽 하시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신다는 겁니다. 원수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은 멀쩡한 그 사람들을 갑자기 다 끌어다가 원수에게 던져 놓으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은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유다 백성들이 별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게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세워 주시고 지켜 주시고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채 마치 자신들의 안전과 성공이 내 힘과 능력에 달린 것처럼 착각하고, 주변 강대국의 힘에 있는 것처럼 착각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는데, 그런 하나님 앞에 으르렁거리며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향해,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거두어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딱 거두어지면 남유다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그들을 동네북과 같이 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원수의 손에 그들을 넘겼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손길이 그들에서 떠나자마자 그들이 직면하는 건 주변 나라들에게 완전히 당하는 겁니다. 그때야 그들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나를 지킨 게 아니고 주변 나라들이 나를 지킨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나를 지켰구나…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는다는 겁니다. 두번째 심판의 모습은 그들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그들에게서 거두시는 겁니다. 이걸 통하여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열심히 그 땅에서 일해서 거두며 결실을 얻으며 살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결실을 얻고 열매 얻는 것은 그들의 열심과 노력의 결과로만 착각한 겁니다. 내가 심은 대로 거두고, 내 노력대로 거두고 내 열심대로 거두고 있다라고 착각하며 산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말 그렇습니까? 내 열심대로 내 심은 대로 내 땀 흘린 만큼 거두는 겁니까? 저희는 적게 심고 훨씬 많이 거두는 존재, 즉 하늘의 은혜가 부어지는 대로 그 복 가운데 우리가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의 결실과 열매는 하나님이 하늘의 축복을 주심으로 우리가 거두게 되는 겁니다. 내 노력과 내 땀과 내가 열심히 뛰는 모든 것들은 반찬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착각하고 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인생은 내가 심은 대로 거두는 줄 알고 내 노력대로 거두는 줄 알고 내 열심대로 거두는 줄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착각할 때 하나님이 뭐라 그러신다고요? 그럼 내가 그동안 줬던 내 은혜를 한번 거두어 볼께….은혜로 주신 하늘의 복을 딱 걷어 가시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아무리 남유다 백성들이 뛰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소출이 없고 결실이 없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수고해도 소독이 없고 내가 아무리 뛰어도 텅 빈 그 곳간을 바라보며 내가 수치를 당하게 되는 거예요. 하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거죠. 내가 아무리 심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결실 못 얻는구나 내가 아무리 땀을 흘려도 내가 빈 가방이구나…그동안 내가 거두었던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하늘에서 부어진 축복을 내가 거두며 살아갔었구나…라는 것을 그들이 온몸으로 깨닫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아무리 노력하고 땀흘려도, 아무리 많이 심어도 빈 그물인 우리의 처절한 탄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남유다 백성들의 반항과 불순종, 숲 속의 사자와 같이 하나님께 으르렁거리며 저항하 반역하여 망하는 그 길을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걷어가는 순간 우리는 큰일 나는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지키는 건 하나님의 손길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빼앗기고 온몸으로 깨닫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셨던 그 은혜의 손길을 딱 거두어 가시는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을 지켜 주시는 힘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입니다. 내 인생의 열매와 소출을 거두는 것도 내가 아니라 하늘의 은혜입니다. 제발 심은 대로 거둔다…내 노력과 열심대로 거둔다는 이런 이야기 하지 말고,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그 은혜의 소산을 거두는 존재일 뿐임을 철저히 인정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이 지금까지 무탈하고 보호함을 받은 것이 내 힘과 돈과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지킨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 은혜의 손길 때문임을 잊지 않을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착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나를 지키고 보호하심을 철저히 믿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내 인생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오늘도 결실을 얻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그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하늘의 백성,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진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진리의 소리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남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괴되다는 사실을 선포했고, 그들은 그 언약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을 직면하며 그들이 선물로 받은 그 땅과 나라를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될 것, 즉 하나님께서 주신 그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있는 그대로 선포하라 말씀하신 진리의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있을 때 그 진리의 소리를 받아들여 변화 받아 생명과 빛을 얻는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그 진리의 소리에 충돌하고 부딪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진리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변화 받고 주님께 돌아오기 원하는 게 주님의 마음이었는데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의 반응은 안타깝게도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진리의 소리와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을 넘어 그 진리를 전하는 자인 예레미야 선지자를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막장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의 소리가 듣기 싫었으면 그들의 귀를 막는 것을 넘어, 그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 하겠습니까? 그들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데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소리와 충돌라고 부딪히며 듣기 싫다고 귀를 막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계속 말씀을 선포하니까 남유다 백성들이 찾아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진리의 소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계속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예언하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겁니다. 더 안타깝고도 놀라운 건, 그렇게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협박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러 가고 예배 드리러 가는 남유다 백성들의 막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외면은 종교 생활로 꽉 차 있었는데 그들의 내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말씀에 귀를 닫으며, 하나님 말씀이 선명하게 선포되면 선포될수록 그들은 그 진리의 말씀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충돌하고 부딪히며 심지어 진리를 전하는 자를 죽여 없애려고 하는 그들의 악한 모습은 어둠이 되어 버린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 남유다 사람들이 아나돗 사람들임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남유다 백성들 중에 바로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로 아나돗 출신이고 그 가족들은 소위 말하는 좌천당해 귀향 살이 하는 레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잘 알고 있는 레위 지파의 후손들, 예레미야를 잘 알고 있었던 고향 사람인 아나돗 사람들이 앞서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말문이 막히는 예레미야를 향한 고향 사람들의 핍박과 살해 협박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는데 유독 고향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셨습니다. 고향에서는 환영 받지 못한 것 뿐 아니라 배척당하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과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빛과 진리를 영접하여 새 생명 얻으며 어둠이 물러가는 구원, 천국 백성 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대신에 어둠의 백성들은 그 진리와 충돌하고 부딪히며 진리를 거절하며 그 진리의 소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게 다 예레미야가 구약 성서에서 이미 경험했던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하는 말씀, 듣기 싫지만 들어야 하는 말씀 앞에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자 그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아가는 대신에 죄를 덮고자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고,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이 도전은 계속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쫓아다니고 내가 들여야 할 말씀에는 귀를 막고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영적 현주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 회개하며 하나님의 얼굴 앞에 엎드려 그의 은혜만을 구하며 회개하는 백성, 그리하여 새 출발과 새 은혜를 경험해야 살아나는데, 많은 백성들은 그 진리의 소리를 듣기를 불편해 하고 싫어하는 겁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할 말씀을 통해 진리의 빛 가운데 내가 서야만 살 수 있는데,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씀에만 취해 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 영적 무감각이 신앙 생활에 만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가 판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저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듣고 싶어하는 말씀만 전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듣고 싶은 말씀이 뭔지를 정확하게 캐치해서 듣기 좋도록 진리를 왜곡하고 변질시킵니다. 말씀이 그들의 심령 골수를 쪼개는 생명의 말씀 대신에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그들의 마음을 그저 즐겁게 하는 이야기로 끝나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말문이 막히는 상황 가운데 예레미야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신 말씀을 생명 걸고 전하는데 사람들이 말씀 듣고 변화하기는 커녕 말씀을 듣기 싫다고 귀를 막고 충돌하고 부딪히며 심지어 나를 죽이려 하니….이런 이해되지 않는 말문이 막히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탄식하며 질문하는 겁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가운데 주님의 의로우심이 어디 있습니까…그때 하나님께 주신 말씀은 그런 일시적인 현상이나 잠깐의 일들을 통해 마음이 흔들리고 그걸 통하여 본질을 해석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십니다. 잠깐 악인이 흥하여 보이고, 잠깐 잘되는 거 같지만 결국 그들은 다 사라질 가라지라는 겁니다. 반대로 어떤 위기와 고난이 와도 결국 하나님 안에 서 있는 의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승리가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깐의 눈에 보이는 현실과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면 결국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임을 비전으로 알려주셨습니다.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 아나돗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합니다. 칼과 기근으로 그들을 심판하여 남은 자가 없게 만들겠다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친히 보호해 주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가운데서 있다고 해서, 주신 말씀을 진리로 선포한다고 사람들은 모두 아멘으로 고마워하며 기뻐하며 말씀 받아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귀에 듣기에 좋은 말씀만 찾아다니기에 들어야 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을 잊지 마십시오. 진리의 말씀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내 죄를 지적하며 내가 하나님께 돌아올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대신, 그들은 그 진리의 소리와 충돌하고 부딪히며 귀를 막으며 진리를 전하는 자를 진리의 소리를 죽이려 합니다. 이것이 심판 외에는 남겨 둔 것이 없던 남유다의 영적 현주소였고 우리들의 영적 현주소 일 수 있음을 말씀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영적 어둠 가운데 헤매지 않는지요. 이런 영적 어둠에 빠져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깨지고 진리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며 진리를 죽이려 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들여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주님께 회개로 이끌며 주님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생명의 말씀이 되도록, 내 삶에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 어둠이 물러가고 내가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며 나에게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출발이 열리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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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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