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8장 말씀은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는 모습, 그러고도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경고하시며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범죄하고 무너지고 있는 남 유다 백성들의 심각한 영적 현주소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과 하나님께 범죄하는 모습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인 줄 믿습니다. 첫 번째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물러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항상 하나님을 떠나고 항상 물러가 있었다는 것이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운지 먼지, 친밀한가 아니면 어색한지가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그림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 유다는 겉으로는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고 종교 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고 하나님에게서 물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리하고 방황하며 갈길 몰라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 물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께 묶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라가야 하는데 자꾸 세상을 따라가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마음을 두고 살아가니까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떠나고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남유다의 영적 현주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물러나 있는 것도 문제인데,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우리는 엎드려질 때가 있고 하나님을 떠나 삐끗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빨리 일어나야 되고 돌아오면 사는데, 엎드러진 자리에서 떠나간 자리에서 돌아올 생각을 안 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면 망하는 것 외에 답이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돌아오기를 거절했는지 그 불신앙을 철새에 비유하며 너희는 철세보다도 못한 인생이라는 것을 경고하십니다. 철새들은 멀리 떠났다가도 때가 되면 아 이제 돌아가야 될 때구나…라는 것을 알고 돌아오게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정한 시기를 알고…입니다. 스스로 그 때를 정하는 게 아니라 돌아가야 될 때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타이밍을 알고 돌아가야 될 때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게 그들의 몸속에 심겨 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적인 삶이라는 거예요. 그 철새들은 그 정하신 시기를 알고 돌아오지 않으면 죽기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게 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놓치는 것이 철새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남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간 것도 문제고 방황하는 것도 문제인데,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와 때를 전혀 알지 못하고 철새보다도 못한 인생으로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능력을 상실한 남 유다 백성들, 하나님의 정한 시기와 때를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은데 모르는 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니까 인생에 때는 내가 정하면 되는 줄 아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뛰면 되는 줄 아는 것이고, 내 열심의 소산이 내 인생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철새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와 때를 알고 돌아올 때에 돌아와야 산다는 걸 아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시기와 때를 알지 못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죽으려고 작정한 인생이고 망하려고 작정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조물주가 정한 때를 알고 시기를 알고 돌아가는 하늘의 철새들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으라는 겁니까?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돌아가지 아니하면 큰일나는 것임을 깨닫는 겁니다. 그건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 번째 그들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 앞에 거짓을 고집하며 욕심 내고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니까 그들 인생에 남는 건 뭐냐면 자기 욕심과 타인을 향한 거짓만 남는 겁니다. 껍데기는 교회 생활과 종교 생활을 하는데 그들의 삶은 욕심만 가득하고 타인을 향하여는 거짓만 가득한 거죠.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아주 총체적인 난국으로 그 백성 전체가 지금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거짓 가득 살고 있는 것, 그것이 남 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욕심과 거짓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은 타인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내 옆에 이웃이 피흘리며 상처받아 너무 힘들어 하는데 평강이다 평강이다…즉 뭐 그딴 거 가지고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야지…이러고 있는 겁니다. 자기 욕심과 거짓에 사로잡혀 너무나 쉽게 타인의 상처에 대해서 어려움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고 경시 여깁니다. 또한 욕심과 거짓의 삶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범죄하고 불순종했음에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잃어버렸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고 거짓을 행하며 욕심 가운데 살아가는데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었다는 것이죠. 오히려 목을 꼿꼿이 세우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이 정도면 신앙생활 잘하는 거 아니냐고…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이게 그들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영적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남 유다 백성들의 심판을 부르는 세 가지 영적 현주소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악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뉘우치지 않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떠나고 물러가 있고, 철새들보다 못하게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를 거절하며, 욕심을 내며 거짓을 고집하는 인생… 그 모든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건 심판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남 유다를 향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내 스스로 열심 내면 상관없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알지 못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며 오늘도 무너지는 그 길을 향할 질주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고 반성하기 원합니다. 자신들의 욕심과 타인을 향한 거짓으로 가득한 인생이 나의 인생이 아닌지 말씀을 통해 비추어보기 원합니다. 남 유다 백성들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반면 교사를 삼아 우리는 떠나갈 수도 있고 엎드려질 수 있지만 그때가 일어설 때이며 돌아갈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와 때를 알고 말씀으로 돌아오며 내 거짓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오늘도 진실하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변화 받으며 나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고 안타까우시면 이제 남 유다 백성들의 기도와 간구를 하지 말라고 선언하시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렇게 쉽게 잊어버리고 원망하는 그들, 아무리 말씀해도 듣지 아니하고 아무리 불러도 듣지 않는 그들을 보시며 하나님에게 멀어지고 심판을 향하여 질주하는 그들을 향하여 이제 너희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구나…라는 심판의 선언을 하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기다리심을 계속하지 아니하시고, 기다림을 멈추며 그들에게 심판과 재앙이 임할 것을 선포하시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결정적인 trigger point. 임계점이라 그러죠. 이 선을 넘어버린 그들의 불순종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남 유다 백성들은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자곡 차곡 쌓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눈앞에 악을 계속 행해 왔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계속 말씀해 주시고 찔러 주시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외면했으며 농담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끊임없이 기다리시며 경고하시며 돌아오기를 외치셨는데,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제 심판과 재앙을 임하게 하시겠다는 결정적인 트리거 포인트, 임계점에 이른 두 사건이 바로 오늘 말씀인데요
첫 번째 사건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증한 것을 두며 성전을 더럽혔다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집은 바로 성전이죠. 하나님의 성전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며,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 외에 다른 것들을 계속 성전 안에 두는 일을 자행한 겁니다. 하나님의 집에 여호와의 성전에 가증한 것을 둠으로써 거룩한 집이 구별되지 아니하며 구별되지 않게 된 겁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겁니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람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더럽혀진 모습을 참지 못하시고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일맥상통합니다. 두 번째 임계점에 이른 사건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인신제사를 드렸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다 미워하시고 우상숭배를 다 미워하시는데 이것 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인신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가증히 여기시는데 이건 선을 넘어도 완전히 막장으로 넘은 것 그 가증함의 대표는 바로 인신제사,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사르는 것이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가장 가증한 일을 지금 이방 제사를 드리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그 이방 제사 중에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가증이 여기시는 인신제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는 것이죠. 자녀들을 불에 살린 걸 통하여 남 유다 백성들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며 막장의 인생으로 질주하고 있는 겁니다. 자녀를 불에 태우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 유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너희에게는 소망이 없다 이제 너희는 선을 넘어갔다…막장이다 선언하시고 지체하지 않고 심판과 재난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는 임박하게 임할 재앙과 심판이 너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일 것이라는 것을 세 부분으로 정확하고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 상상할 수 없는 심판의 모습은 머리털을 베어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예전 양반들도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과 똑같이 수치스럽게 여긴 것과 같이 머리털을 베어버린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대표하는 겁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것을 경험하며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 세대를 끊어버리는 심판이 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1세대를 모두 진멸할 때까지 방황하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이 세대를 심판으로 다 끊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것도 수치를 감내하며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들이 망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심판의 모습은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끔찍한 모습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비참하게 죽냐 하면 그 시체들이 다 짐승의 밥이나 새 밥이 되게 다 길바닥에서 죽는 것이죠. 이 말씀은 예루살렘 전체를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무서운 선언입니다. 예루살렘 전체가 사람을 묻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는 무덤 터가 될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매장할 시간도 매장할 사람도 없을 정도로 모두 죽어서 공중의 새와 짐승의 밥이 되는 이런 끔찍한 심판이 임한다는 겁니다.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백성들을 망하게 할 때 얼마나 많이 죽으면 그 지역을 죽임의 골짜기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며 심판으로 멸망하게 되는 겁니다. 세 번째 심판의 모습은 바로 능지처참입니다. 이미 죽은 왕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훼손하는 겁니다. 조선 시대에도 능지 처참이 있어서 이미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꺼내서 그 시신을 목을 자르고 거기에 끔찍한 일을 하는 이런 심판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죽은 시체에다가 무덤을 파서 그 뼈들을 다 꺼내 펼쳐, 가장 비참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겁니다. 그렇게 능지처참을 통해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일이 벌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예루살렘 땅에 일어날 일이라는 겁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살아있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죽지 못해 산다는 겁니다. 뒷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끔찍한 모습으로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파괴된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차라리 저 때 죽을 걸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저 비참한 광경을 보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며 남유다를 향해 엄중 경고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소망 없는 세대를 완전히 갈아엎고 새롭게 시작하시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며 동시에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손을 내미시는 안타까운 탄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내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영원히 기다리시는 게 아닙니다. 임계점을 넘어가면, 때가 차게 되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그 막장의 길로 질주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다림을 멈추시며 말씀하신 그대로 그 일이 이루어지는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남 유다 백성들에게 그 임계점은 바로 그들의 자녀를 불사르는 인신 제사였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기다리시며 그것을 미루시는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남 유다를 향한 이 혹독한 심판의 실체를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시하지 아니며 마음에 깊이 담아 그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삼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배 드리고 제사드리러 가는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성전 문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외치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배와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가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도 말씀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육의 예배, 껍데기 예배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무너진 성전을 그냥 놔두고 껍데기의 성전을 들락날락하며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면죄부를 스스로 주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마음도 들을 의지도 없는 것이죠. 그들을 향하여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기도하지 말라…부르짖어 구하지 말라…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아무리 기도하고 간구해도 너희 기도는 내가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고 답답함 가운데 계신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아프시면 오죽하시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겠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정도로 지금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막장이고 모든 것이 무너져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성전에 와서 예배와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내 간구와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니까 그들이 예배 드리고 제사 드리는 목적은 와서 내 기도와 간구를 주님 앞에 보고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겁니다. 주님 이게 내 필요이고 내 간구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내 기도를 들으셔서 응답하셔야 되는 분입니다… 이것 만을 위해 오는 겁니다. 이게 내 리스트예요….주님께서 이거 다 들어 주셔야 됩니다 이러고 예배와 제사를 온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 욕심과 내 필요에 따른 내 기도를 쏟아내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셔야 되는 분이라는 이 공식만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은 망각하며 사는 겁니다. 자신들의 기도는 들으셔야 되는 분인데 하나님이 나의 삶과 우선 순위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까맣게 있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기도와 간구를 쏟아내고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셔야 되는 분이라며 선언하고는, 그들은 뒤돌아서 하나님과 다른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똑똑히 보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셔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남유다 백성들,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신들을 겸하며 붙들면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내가 뭐가 문제냐고 목을 세우고 있는 남유다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간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경고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고입니다. 우리도 주일날 교회 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임재 앞에 엎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임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내 기도를 다 들으셔야 되고 다 응답하셔야 되고 내 필요는 즉각즉각 채워 주셔야 된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배당을 나와서 나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이 사실은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이 진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카페트 밑에 집어넣어 놓고 그냥 내가 주일날 한두 시간 와서 꺼내 보듯, 주님은 내 필요만 채워 주시는 분으로 만드는 이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을 경고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들락날락하고 예배와 제사와 모든 것은 겉모습 보기에 돌아가는 것 같은데 실제론 껍데기와 육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하나님이 전혀 받으시지 않는 예배이며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 행위만 남발하는 그런 일들이 성전과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직시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분명히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는 그 믿음이 나의 분명한 신앙 고백이라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도 믿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이 내 말을 무조건 들으셔야 된다고 외치고 있다면 이게 반역과 불신앙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셔야 되고 내 간구를 들으셔야 된다는 외치는데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심을 철저하게 잃어버리는 반쪽 신앙,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우상 숭배하는 남유다의 망하는 길을 뒤따라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옛적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번제나 희생제사에 대한 거 하나도 강조 안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명령한 것은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것, 그 말씀에 응답하며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 되는 비결이고 하늘의 복을 받는 비결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 조상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지 않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망하는 길로 나아가 40년을 생고생했는데, 너희 남유다 백성들은 그 모든 1세대가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조상들의 죄보다 악이 훨씬 더 크다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도 너무 안 듣고,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며 그러면서도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고 착각하며 지금도 성전을 아무 문제 의식 없이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강력하게 얘기하시는 건 뭐냐하면 여전히 남유다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냥 심판하시면 되는데 심판 전에 계속이 말씀을 경고하시는 건 뭡니까? 아직도 기회가 있으니까, 아직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돌아오면 된다는 것을 외치시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오래 참으심이 끝나면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로 모든 것을 이 땅에 부으시며 불같이 살라 꺼지지 않는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 기도하지 말고 간구하지 마 내가 더 이상 기도 안들을 거니까….하나님이 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 쏟아 부으시는 것을 멈추시겠다는 선언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오죽하시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을까…그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내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가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정말 들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 들으심이 나에게 분명한 확신이 되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들을 마음도 없는데 하나님은 내 말을 반드시 들으셔야 하고, 내 기도를 무조건 들으셔야 한다고 오늘도 부르짖고 있는 그 모습이 불신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붙들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면서도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 전에 순종이고 제사 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붙들어 주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때, 하늘의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내 기도를 들으셔야 한다 외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며 그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 남 유다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남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하시는 장소가 오늘 말씀엔 중요한데 그 장소가 바로 여호와의 집 성전 문 앞에서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이 여호와께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러 가는 성문 앞에서 회개 촉구 말씀을 선포하라는 겁니다. 남 유다 백성들은 제사 드리려고, 예배 드리려고 성전에 들어가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겁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만나러 가는 사람들, 예배와 제사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그 문 앞에서 지금 하나님이 주신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 하면 겉보기에는 많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사하고 예배한다고 성전에 들어가는데 껍데기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하지 않고, 말씀이 임하던 임하지 않던 상관하지 않는 껍데기 중심의 가아, 육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제사와 예배의 형식은 있고,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과 프로그램은 있고 사람들은 거기 있는데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느냐 임하시지 않느냐에는 별 관심이 없고 중요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린다며 나아가는 습관적 성전 신앙, 왜곡된 껍데기 신앙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배와 제사를 드리러 가는 그들을 막아 서고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경고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고 계셔도 상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려도 상관없이 예배당만 들락날락하는 그들을 향하여 멈춰 세우고 그 성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성전 문 앞에서 백성들이 꼭 들어야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즉 남 유다 백성들의 길과 행위가 엉망진창이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데 이 말은 내가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나는 지금 예배와 제사 드리러 성전에 왔으니까 상관 없다…말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도 상관없고 말씀이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고 그들의 삶이 하나님과 조율되지 않아도 상관없고 나는 주일에 예배 드리러 성전에 왔으니까 문제 없다고 착각하는 게 바로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제사 드리러 오고 예배 드리러 오면 나는 엉망 진창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착각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그들이 하는 무익한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나열하며 그들의 민낯을 다 보이고 있습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사는 삶, 그들의 보이지 않는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증거이자, 하나님의 길과 행위에서 완전히 멀어진 증거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주일에 성전에 와서 껍데기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나는 구원 받았으니까 상관없다…이러고 있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하고 무너진 삶을 일주일 내내 살고 있으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안 하고 교회 왔으니까 난 예배 드리니까 난 구원받은 자야… 난 뭘 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이러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 것을 불의하게 빼앗아도 나는 구원받은 자니까 나는 오늘 성전에 예배 드리러 왔으니까 어차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건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면죄부를 스스로 발행하는 착각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고 있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는 것이며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 삶이라는 것이라 경고하는 겁니다. 예배 지상주의에 빠져서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자인 냥, 십자가 복음과 구원을 가지고 왜곡하고 남용해 내 방종과 무질서를 정당화하는 이 착각과 거짓말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이 이렇게 다 무너져 있는데 보이는 성전만 있고 보이는 성전에 들락날락한다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착각에 빠져 있는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남은 건 심판 밖에 없는 백성이라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 모든 것들이 화를 자초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임을 왜 모르느냐…선포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너희들…그래서 결국은 너희를 망하게 해서 쫓아낼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와는 상관없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는 제사와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하는 그들에게는 심판이 곧 임한다는 겁니다. 남 유다 백성들을 세워놓고 성전 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는 예레미야의 선언이 저와 여러분들을 깨우는 주님의 찌르시는 말씀 되기 원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과 무관하게 계속 살아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며 성전을 들락날락하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성문 앞에서 오늘도 외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주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라…우리의 신앙 생활, 예배 생활이 본질이 빠진 채 습관에 젖어 왜곡과 변질이 되 버리는데도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지는 않은지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대신, 내 몸과 껍데기만 있으면 되고 보이는 성전만 있으면 된다는 이 착각에서 모두 깨어나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이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그분을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께서 진짜 함께하시는지, 하나님 말씀이 임하는지를 주목하며 점검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습관적인 신앙에 빠져 몸만 오고 육으로만 껍데기로만 드리는 예배에 젖어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 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고 강력하게 외치는 그 찌르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을 깨워 본질로 돌아오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이 찌르는 말씀을 마음에 담아 말씀이 내 영혼을 깨워 본질로 돌아가며 주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예배가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6장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남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으니 얼른 피하고 도망가라는 그 심판 공습경보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죽 하시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심판 공습 경보를 내리실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 공습 경보를 내리실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는가를 세 가지의 큰 이유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우리가 가지 않겠노라…우리가 듣지 않겠노라…우리는 율법을 거절하겠노라…입니다. 이 세가지가 바로 남 유다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게 된 이유이자 이 세 가지 모두 그들의 잘못된 생각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는 가지 않겠노라….는 그들의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을 길로 표현하며 결국 어느 길로 가는가가 우리 인생을 좌우하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너희가 살길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십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에 어떤 길이 복된 길이며 어떤 길이 화의 길인가를 강 저편과 강 이편으로 나누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결국 화로 가는 길이 아니라 여호와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복으로 가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알려주셨고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된 길로 가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그 마음이 무너져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길을 가는 대신에 화의 길로 가며 자빠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시편 1편을 보게 되면 의의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우리에게 선명히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들고 망하는 악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의의 길로 진리의 길로 나아가야 산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들에게 동일한 경고를 주시는 것이죠.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인생 길을 갈 때 그냥 무턱대고 뛰어다니지 말고 먼저 멈춰 서라는 겁니다. 멈춰서 볼 것을 봐야 한다라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서 위험한 때는 멈추지 못하는 겁니다. 그저 나의 길을 질주하며 나아가는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어딘가 막 그냥 가려 그러지 말고 멈춰 서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멈춰 서서 이 길이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선한 길인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의 길인지를 내가 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가를 돌아볼 수 있고 내 자신도 돌아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의 삶에 평강이 임하며 너희 삶에 생명이 임한다고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은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그 길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로 가면 생명과 평안 가운데 살게 되고 그 길로 가면 망하지 않게 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주님 저 그 길 가지 않겠습니다…멸망의 길을 고집하며 내 마음대로 가겠다고 거절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가지 않겠노라 선언하는 이 고집스러운 남유다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망하게 되고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의 문제는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고 나팔 소리로 경고하시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리는 불순종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는데 바로 내 인생에 계속해서 찔러 주시고 깨워 주시는 알람 소리, 나팔소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계속 찔러 주시고 교정해 주시고 그리고도 듣지 않으면 나팔 소리로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선언은 알람 소리가 계속 울리는데 듣기 싫으면 알람을 꺼버리는 거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시오 나는 듣지 않겠습니다…말씀의 알람을 꺼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인생에 정답과 해답을 주시고 말씀으로 정확하게 갈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귀를 막으면 아무리 정답을 줘도 무슨 소용이냐는 겁니다. 아무리 생명의 길을 알려 줘도 들을 마음이 없는데 어떡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아무리 나팔소리 같이 크게 외치셔도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 버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남유다 백성들은 망하고 심판으로 질주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번째 남유다 백성들의 문제는 우리는 율법을 거절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려고 오는데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신 율법은 거절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 없는 제사, 순종 없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몸은 분명히 와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이미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절하겠다고,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훨씬 더 제사보다 중요한데 그들은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니까 나는 상관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와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이유이자 심지어 그들의 제사를 싫어하시는 이유입니다. 이 세가지 모두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생각은 진짜 나의 생각이 아니라, 나 중심, 육신 중심, 현상 중심 물질 중심으로 있는 완악하고 교만한 껍데기의 자아이니 가아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내 마음대로 하는 생각, 교만과 완악이 이끄는 생각,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생각입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조차도 내 생각에 끌고 가려고 계속해서 고집하고 충돌하고 부딪히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저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교만대로 끌고 가는 길은 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는 딸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딸 가진 자만 아는 마음이에요. 그렇게 사랑하고 애지 중지하는 그 딸을 향하여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멸망시키겠다 선언하시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야 될 길이 있고 들어야 될 말씀이 있으며 순종해야 될 주의 율법과 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가지 않겠다고, 말씀을 듣지 않겠다고, 율법을 거절하겠다고 주님과 충돌하고 부딪히고 있지 않은지요. 이게 남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문제라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거절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길 가겠다며 멸망의 길로 질주하며 망하는 남 유다의 불순종이 저와 여러분들의 불순종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경고하시는 그 심판 공습 경보의 말씀을 우리에게 새기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주의 은혜로 조율되기 원합니다. 이 새벽 기도 시간이 귀한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잠시 멈춰서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멈춰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어딘지를 알아보고 내 가는 길이 지금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인가를 말씀과 함께 돌아보기에 이 새벽 기도가 복된 겁니다. 우리의 완악함과 교만함에 근거한 생각, 내 마음대로 하는 생각,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생각이 결국 우리를 심판과 멸망으로 질주하게 만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 중심, 땅 중심, 육신 중심, 현상 중심, 물질 중심인 이 나의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생각을 내 마음에 담아 남 유다 백성이 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의 길로 나아가며 주의 말씀과 나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주의 율법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5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의인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안타까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사실 이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로 가장 타락한 도시로 알려진 소돔과 고모라의 마지노선도 의인 열명의 1/10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도성으로 알려진 예루살렘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선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6장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과 함께 이어지는 심판 공습경보입니다. 이 나라와 예루살렘이 의인 한 사람을 찾지 못해 곧 멸망하니까 피난하고 도망가라는 대피명령이 담긴 심판 공습경보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한 사람이 없어서 결국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하나님 말씀만을 순종하고 따르는 의인 단 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더 이상 지체될 수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은 곧 멸망하니까 얼른 대피하라 빨리 도망가라…북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적군들이 내려 올테니 당장 피해라… 그 공습 경보가 바로 6장 말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아름답고 우아한 나의 딸이라고 표현하실 정도로, 말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온의 딸 예루살렘을 내가 스스로 심판으로 멸절 시키겠다 선언하시는 겁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잘 예배하고 제사 드리는 거 같이 보였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보시는 그들의 영적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에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고 있고, 선지자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의인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을 지경으로 모두 탐욕을 부리고 모두 거짓을 행하는 겁니다. 평화를 잃어 버린 지 오래여서 백성들이 상처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백성들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고 우리는 평강하다 우리는 문제 없다 우리는 살만하니까 괜찮다 이러고 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에서 오직 포악한 거 밖에 보이지 않고, 샘이 물을 솟구쳐 내는 것과 같이 악이 지금 막 뿜어져 나오고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남유다 백성들의 막장에 다다른 영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을 향한 욕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말문이 막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떠드십시오…나는 내 갈길 가겠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욕하고 계시는군요…이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시온의 딸과 같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이 관영한 곳,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곳, 심판밖에 남지 않은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다 못해 남아 있는 게 포악한 것 밖에 없는 그런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산이라고 말하는 그곳은 이미 거룩함을 잃어버렸고 평화의 도시라고 말하는 그곳은 이미 평화를 다 잃어버리고 있는 곳 결국 도망쳐야만 되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남은 건 심판밖에 없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곳을 하나님은 쓸어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다는 주님의 선언이 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시온의 딸인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심판 공습 경보를 울리신 겁니다. 북방에서부터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예루살렘을 벌하고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바벨론이 얼마나 치열하게 예루살렘을 칠 준비를 하는가에 대해 정오에 올라가자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정오가 너무 더운 때이기에 대부분이 움직이지도 않는데 그 땡볕 정오에 올라가자, 즉 그 더위를 무릎 쓰고라도 가서 남유다를 파멸시키고 멸망시키자고 선언합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얼른 달려가서 그들의 요새를 헐어버리고 멸망시키고 파멸시키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시온의 딸인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이렇게 처절하게 무너뜨리고 정신 못 차리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남유다를 심판으로 철저히 무너지도록 진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죽하시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가를 우리는 바라봐야 합니다. 눈물과 함께 탄식하시며 가슴을 치시며 심판 공습 경보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심판 공습 경고가 내려져 피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시온의 딸, 그 남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무너지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예루살렘이 처절하게 무너지며 도망가야 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하는 시온의 딸을 멸절하기로 작정하셨는가…그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탐욕과 거짓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샘솟듯 죄가 뿜어져 나오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깨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즐겨 듣지 않는 것을 넘어 욕으로 여기고 귀를 막고 있는 그 남유다 백성들을 영적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똑 같은 실수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됩니다. 똑 같은 길을 가지 말아야 됩니다. 바라기는 남유다의 어리석음을 반면 교사 삼아 주님의 훈계를 받고 돌아서서 심판을 직면하지 않으며 은혜 가운데로 돌아가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인 남유다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안 계신 분으로 여기며 심지어 하나님을 버리며 우상을 섬기는 악행으로 결국 심판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고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경고의 말씀을 자신과 무관한 남의 이야기와 같이 듣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 이유가 그들의 영적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그들이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가? 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지고 영의 귀가 닫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본질은 들을 마음 자체가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아무리 반복적으로 경고의 말씀을 주셔도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말씀에 무관심하며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듣기를 거절하는 그 마음 자체가 불신앙이고 불순종이고, 그것을 고의적 무지 혹은 선택적 무지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취사 선택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선택적으로 내가 어두워지는 것이고 고의적으로 어두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못들은 것처럼 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어둠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셔도 그 말씀을 심각하게 취하며 그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 계신 분 취급하니까 하나님 소리에는 둔감하고 대신 어떤 소리에만 민감하겠습니까? 세상 소리에만 민감하며 사람들의 말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거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까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겁니다. 지금 분명히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우리는 괜찮아 상관없어…우리는 아무 문제 없어… 착각하며 아무런 영적 대비도 준비도 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 어둠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에는 교만과 배반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는 그들 마음에 가득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교만과 배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남유다에게 주신 축복은 바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와 한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놀라운 은혜가 바로 그 안에 있으면 복된 한계선, 경계선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피조물 나는 하나님, 하나님이 세워 주신 그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 안에 있을 때 복되도록 만드신 겁니다. 그 정하신 질서와 우선순위 가운데 순종할 때 행복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경계선을 지킬 때 복된 인생이 되도록 만드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 정해 주신 한계와 경계선을 뛰어넘어서 스스로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 하나님 판단자의 자리에 나아가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한계와 경계선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겠다…그게 바로 그게 바로 교만과 반역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본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이 세워 두신 한계선과 경계선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경계선을 넘어가며 불순종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있으면, 그 경계선을 지키고 순종하면 주실 수많은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하고 배반하는 마음이 하나님이 세우신 경계선을 계속 무너뜨리면서 질서가 깨지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과 좋은 것들을 막히게 하는 겁니다. 그대로 순종하면 하늘의 복이 풍성히 부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니 하나님의 질서와 경계선을 따르지 않고 계속 충돌하고 부딪히며 좋은 것들이 계속 막히게 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하늘의 복을 스스로 가로막았던 여러 구체적인 죄가 열거되는데 특별히 강조 되는 것은 그들은 번창하고 거부가 될 정도로 돈은 많고 부유해졌는데 그 속에 가득한 속임수입니다. 마음속에 속임수가 가득한 인생, 그게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실이었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가장 힘없고 약했던 고아들이나 과부 같은 사람들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고 속여 자기의 이익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그들이 오히려 수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불순종과 속임수가 가득하게 되면서도 자신들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주님이 마음이 아프시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건 심판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마음에 교만과 배반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속임수로 채워져 하나님이 세우신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불순종함으로 하늘의 복을 막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과 불의, 속임수가 가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 남유다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떻게 벌하지 않고 어떻게 징계하지 않으실 수 있겠냐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기 원합니다. 죄인들은 사랑하지만 그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벌하지 않을 수 없고 보복하지 않을 수 없고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우리 마음에 담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우시고 찌르십니다. 혹시 내 마음에 교만과 배반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속임수가 가득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둔감해져서 주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임박한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남 유다 백성들의 본질적 죄는 교반과 배반, 속임수가 가득한 악을 그들이 보지 못하는 죄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남 유다 백성들을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내내 반복되는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입니다 그냥 예레미야 선지자,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대언자일 뿐임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주신 여호와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 남 유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 즉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아야 될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선언합니다. 왜 거룩하게 구별된 그들은 용서 대신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바로 하나님 앞에 심히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로 범죄했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분으로 여기는 반역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며,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늘의 통치에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자들인데 거룩하게 구별된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세상이 주는 것들을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 대신 세상의 힘과 능력을 붙들고 의지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으로 여겨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이 지속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이 반역의 본질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심판을 직면하게 되었다고 하나님은 엄중히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남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칼과 기근을 보지 않고 재앙이 임하지 않은 게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들이 대단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그런 건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니까 이 모든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이만큼 노력해서 기근도 안 생기고 재앙도 임하지 않고 평화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자들의 특징은 잘 되는 모든 원인과 이유를 나로부터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의 이유에는 하나님 대신 믿고 붙들었던 눈에 보이는 견고한 성들이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리에 남유다 백성들이 붙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있는 거죠. 눈에 보이는 견고한 성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견고한 성들, 그게 눈에 보이는 성을 넘어 정치력일 수도 있고 군사력일 수도 있고요. 돈의 힘이나 권력의 힘일 수도 있습니다. 인맥의 성벽을 계속 세우고, 주변의 정치력 군사력이라는 성벽을 계속 세우며, 내 인생에 하나님 대신 믿을 만한 구석을 계속 만드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내가 믿고 있는 견고한 성들을 세우면서 그걸 붙들고 사는 겁니다. 내가 이거 믿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대신 믿고 살아가는 성벽들을 계속 세우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의 믿을 만한 구석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내 스스로 내가 믿을 만한 구석을 계속 만들어 세워 성벽을 만드는 것, 그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거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며 결국 하나님을 버리는 반역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남 유다 백성들이 심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눈에 보이는 성벽이 나를 지키는 줄 착각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심판을 자초하게 된 이유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계시지 않는 분으로 여기며 살기에,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산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 가지가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악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하나님을 마치 안 계신 분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죠.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붙들고 절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성벽이 되어 주셔서 지켜 주셨는데, 자신들이 대단해서 평화와 안정이 있는 줄 착각하고 눈에 보이는 성벽 자체가 그들을 지켜주는 거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 남 유다의 반역과 패역에 가속도가 붙어서 결국은 멸망으로 질주하게 되고 심판 외에는 답이 없는 백성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남유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나님의 때가 되면 강하고 큰 민족을 먼 곳에서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손에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게 되며, 치명적으로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자녀들이 먹을 추수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내 양떼와 소대를 먹으며 내 포도나무와 무화가나무 열매를 먹으며 내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며 치명적으로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대신 믿고 있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다 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대신 믿고 살아가는 성벽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무너뜨리신다는 겁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었던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견고한 성들, 보호와 힘의 근원이라고 착각하는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시면서, 하나님만이 그들의 성벽 되시고 하나님만이 그들의 보호 되시고 믿을 만한 구석이 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을 구석은 하나님밖에 없게 만드신다는 것이죠. 그들을 지금까지 지켜 주셨던 것은 보이는 견고한 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견고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선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람과 같이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고 너희가 멸시하고 무시하는 그 말씀들이 심판의 말씀이 될 거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남유다 백성에게 임할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심판은 심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을 베푸셔서 제한적인 심판을 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성벽을 무너뜨리시긴 하시는데 다 무너뜨리지는 않고 가지만 꺾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들을 분명히 심판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치시는데 진멸하지는 아니하시겠는 겁니다. 제한적으로 무너뜨리시고 제한적으로만 죽게 하심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서 거두지 아니하시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남 유다와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이 세상에 나왔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지금도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안 계신 분 취급하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이런 영적 반역의 패턴을 우리도 범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다 말하며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지 않는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눈이 가리워져 진작 봐야 되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세워 주신 든든한 은혜의 성을 보지 못하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믿을 만한 성벽들을 계속 붙들고 하나님 대신 세상의 믿을만한 구석들을 붙들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주신 이 엄중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하나님 대신 믿을 구석이 많아지게 되고,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성벽들이 계속 생기게 되면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다 하나님을 버리는 백성,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파멸과 심판밖에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에게 믿을 구석은 하나님임을 고백하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돌아오며 그분을 인정하며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을 온전히 섬기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안타까움의 부르심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왜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들을 용서하실 수 없는지, 왜 그들이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강력한 언어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을 왕으로 아버지로 모신 백성들이며, 하나님의 길과 뜻을 따라가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무너지고 망가졌으면 그들에게 심판 외에는 방법이 없는 백성, 용서받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는가를 우리는 돌아보며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열명의 의인을 찾으면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얘기하셨고, 안타깝게 그 의인 열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면하는 그 마지막 의인 숫자가 열 명이었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거기서 1/10로 줄이셔서 이 땅에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탄식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그 시대가 타락하고 망가졌으면 오죽 하나님이 답답하시며 멸망의 도시 대표인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탈출 기준 의인 10명의 10%, 의인 한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냐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건 이렇게 의인 한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도시가 예루살렘이라는데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도시 전체가 타락하고 음란하며 거기는 모든 게 막장의 도시들이라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10%인 1명을 찾기 어려운 도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각한 경고를 하시는 도시가 예루살렘이라는 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 드리고 제사 드리는 곳이며, 소위 말하는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은 뭐라고 경고하시는 겁니까? 이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하면 타락했지 절대 낫지 않다…심지어 내가 10%로 줄여줄 테니까 열명이 아니라 의인 한 명이라도 내가 찾으면 내가 이 도시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지경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게 바로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실이었고,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답이 없이 타락한 예루살렘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어쩌다가 예루살렘이 심판 외에는 답이 없는 이 지경이 되었으며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는가….하나님의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심각하고 무겁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남유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고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어 보였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 말끝마다 은혜 은혜 그러면서 살았는데, 실상 그들의 신앙은 거짓 신앙이었다는 게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너희의 예배는 거짓 예배, 너희의 제사는 거짓 제사, 너희의 맹세는 거짓 맹세였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예 예배에서 떠나 있었으니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누구나 알기라도 했지, 너희들은 겉으로는 안 떠났을지 모르나 너희 마음을 나를 떠난지 오래라는 겁니다. 마음을 드리지 않는 껍데기의 제사와 예배에 그들이 길들어지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를 드리는데도 얼굴이 굳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얼굴이 딱딱해지고, 마음이 딱딱해져서 돌아올 생각도 마음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타락할 지경으로 그들의 거짓은 심각해 졌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변화되고 말씀으로 돌아오고 진리 가운데 굳게 서야 될 주의 백성들이 껍데기와 거짓 예배와 제사에 길들여져 얼굴과 마음이 굳어지니까 어떻게 됩니까? 반복된 제사와 예배에도 불구하고 교정해 주시고 찔러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거절하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도를 알지 못하는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랫동안 들락날락하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예수 믿어 받는 구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믿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익숙하게 오래 다녀도 내가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면 그 이름 가운데 주의 법과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지도자들 사이에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는 일이 벌어집니다. 신앙 생활이란 이 땅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반드시 우리에게 지워 주시는 부담감이 있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에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뭐가 있다 그러냐 하면 견뎌야 하는 왕관의 무게가 있다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 세상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물 흐름을 거스르는 삶이기에, 이 땅에서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삶이기에, 멍에와 결박과 우리를 지켜주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도자들이 어떻게 믿기 시작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왜 꼭 이렇게 부담스럽게 믿어야 돼? 하나님 내 마음대로 좀 믿을래…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식대로 믿을래…이러면서 멍에를 끊어버리고 십자가에 묶여 있는 삶을 풀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남유다 백성들이 결과적으로 맺게 되는 삶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을 버리는 영적 간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겉으로 예배 드리고 제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만 예배 드리지 않는 게 하나님을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도 예배하고 우상도 예배하는 게 바로 하나님을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도 붙들고 세상도 붙드는 게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자 영적 간음인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만 있어야 되는데 내 마음에 하나님 아닌 걸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하나님 외에 수많은 다른 것들이 내 마음에 가득차 있게 되니까 이 시간 결국 하나님을 버리는 인생이며 그 인생은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해 모이는 영적 파산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멸망 면제 기준이 의인 열 명이었는데, 예루살렘 땅에 멸망 면제 기준이 의인 한명이라고 선언하시는 그 참담한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원합니다.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했다고 선언하시는 이 말도 안되는 영적 현주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듣기 원합니다. 내가 어찌 이런 땅을 용서하겠느냐… 내가 어찌 이런 땅에 보복하지 않고 벌하지 아니하겠냐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진리의 기준을 붙들고 십자가에 묶여 살아가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 주의 법도와 진리의 길을 부단이 따라가는 의의 백성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이 세상에 대다수는 언제나 어둠이었고, 그런 세상을 살리는 비결은 언제나 남은자 들, 소수의 의인들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도 예루살렘이 망한 것도 결국 그 의인들이 없어서 결국 그 열 사람이, 그 한사람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남 유다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며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며 십자가와 멍에의 부담감을 메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진리의 길을 오늘도 뚜벅뚜벅 정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장차 있게 될 남유다를 향한 심판을 거의 현재형과 같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부분은 예언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 같이 미래의 사건을 현재형으로 바라보는 환상과 같이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부터 27절까지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말은 내가 본즉…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셨던 끓는 가마, 북으로 기울어져 있는 끓는 가마가 실제로 터져서 남 유다의 멸망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게 될 것을 환상으로 미리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임박한 남 유다의 멸망하는 모습을 지금 바라보면서 생중계하듯 우리에게 선명히 그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인데, 이미 심판을 환상으로 경험하고 와서 그 심판이 이렇게 다가올 것임을 눈으로 보고 와서 지금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통하여 앞으로 이것이 남 유다 백성들이 처할 심판의 현실임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상을 현재형으로 보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와서 그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는 예례미야의 선포는 강력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거라는 것을 다 눈으로 보고 나서 그것을 지금 알려 주는 경고, 이런 일이 너희에게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선언하니 그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날의 심판을 환상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그들의 비명소리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소리 또한 그가 듣고 있는 겁니다. 그 아우성의 소리가 얼마나 비참했으면,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이 백성들이 고통 소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다 들림으로 말미암아 지금 내 심령이 피곤하다 선언합니다. 단순히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이 심령이 아프고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힘들고 슬픈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 남 유다는 예레미야의 이 환상 이야기를 믿지도 않고 경시 여겼습니다. 마치 농담과 같이 여기며 흘러 들었다는 겁니다. 노아의 때에도 홍수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고 이미 알려 주셨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고 가볍게 여기며 흘려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저 자신의 일상에 그냥 충실하며 아무 긴장감 없이 편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때가 되니까 확 홍수가 밀어 닥치게 되는 것과 똑 같은 겁니다. 그날 분명히 모든 것이 황폐해지고 땅이 황무지가 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무너질 게 확실한데 그걸 환상으로 직접 목도하고 돌아와, 본 것을 그대로 전하는데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답답하고 눈물나는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가 깨졌으면, 그 언약을 깨뜨린 사람들의 마음이 더 힘든 게 마땅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힘든 게 당연하고, 깨뜨린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매달려야 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들이 잘못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가 깨졌으니까…그런데 지금 보여지는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특별히 남 유다는 하나님께 전혀 매달리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매달릴 마음도 의지도 없는 거예요.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달리는 거 같습니다. 누가 더 힘들어 보이냐 하면 하나님이 훨씬 더 힘들어 보입니다. 누가 매달리는 거 같냐 하면 꼭 하나님이 매달리는 거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올 마음이 없는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얼른 돌아오라고 하나님이 계속 매달리고 있는 것이죠. 이 그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죄를 짓고 잘못한 건 인간인데, 죄를 짓고 잘못한 건 우리들인데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는 것 같은 이 모습…우리들이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매달려야 마땅한데 그림은 정반대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마치 우리에게 매달리는 거 같은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더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이 힘들고 아픈 겁니다. 사실 예레미야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심판에 대한 경고 말씀들도 남 유다를 하나님이 이만큼 사랑하시니까 그렇게 경고도 하시고 돌아오라…매달리시는 거예요. 제발 돌아오라고 계속해서 전쟁 경보의 심판 경고를 보내시고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매달리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다 하다 마지막에 결국 심판이란 방법을 쓰시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 잘못한 거 다 알아…이 놈들 맛 좀 봐라… 심판이란 뜨거운 불을 받아봐라…물 좀 받아봐라 이러시고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매달리다 매달리다 안 되니까 최후의 방법으로 심판이란 방법을 쓰시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지시는 겁니다. 심판 당하는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시면서, 그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통곡과 눈물을 그대로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참담한 마음을 보여 주시는 겁니다. 제발 돌아와라 제발 회개해라 제발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그것만이 너희가 살 것이라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마음인 겁니다. 그리고도 하나님은 심판의 현장 거기서도 또 피할 길을 하나 더 열어 주십니다. 그날이 되면 예루살렘에 심판이 분명히 임하게 될 텐데, 그런데 그때 내가 온 땅이 황폐하게는 되지만 진멸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면 그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또 다른 회복의 길을 여신다는 것이고, 구원의 빚줄기를 계속 비춰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시면서도 드러내시는 사랑의 마음인 겁니다. 더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더 매달리시고, 더 사랑하시기에 우리보다 더 많이 아프시고 힘드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깨지고 무너진 언약, 죄로 무너뜨린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만히 있는데, 돌아올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만 매달리고 하나님만 힘드신 겁니다. 죄를 진 우리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매달리는 거 같은 이 안타까운 마음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비참한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영의 눈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을 마음에 담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알람과 심판 경고를 계속 보내시다가 결국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눈물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심판을 하시며, 그리고도 그 가운데 그루터기를 남겨 두시며 남은 자들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 주님의 이 답답한 마음을 내 마음에 새기며, 심판이 임하기 전, 멸망이 임하기 전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 안에서 새 출발하는 은혜, 그 믿음의 선포가 우리 가운데 현재형으로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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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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