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3장 뒷부분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탄원하며 탄식하는 기 도와 대화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뒷부분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말씀 이해에 중요한데 마지막 두 절에서 나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굉장한 충격이었지만, 더 큰 절망과 충격은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멸망입니다. 신앙적으로 더 큰 절망과 어려움은 절대 망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유린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수가 그 주의 성소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유린하며 무너뜨린 것이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삶의 자리에서 느끼는 감정은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절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스림도 떠나고 하나님의 이름도 사라진 거 같은 하나님의 철저한 부재와 하나님의 버리심의 절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탄식하며 부르짖는 건 반복해서 하나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탄식입니다. 그게 11절부터 16절까지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탄식입니다.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들 가운데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십니까…탄식합니다. 광야에 있는 말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어디 계십니까….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습니까…하나님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그들이 탄식하는 겁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아니 말씀에 그렇게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선 어디 계십니까?...간절하게 탄식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이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의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 삶의 자리에 신음하며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버리심을 실제로 느끼는 거 같은 그 절망 가운데,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동일한 고백으로 탄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반복하며 탄식 하는 그들을 향하여 오늘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었던 은총과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베푸신 큰 은총 모든 자비와 사랑을 따라 베푸신 큰 은총 이것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을 통해 비추어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셨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선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우리를 모든 자비와 큰 사랑으로 주신 큰 은총을 베푸시기를 아깝지 아니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환난 가운데 동참하시고 우리를 꼭 안아 주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총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거 같고 안 계신 것 같은 삶의 자리에서 탄식하는가? 그 이유는 10절에 등장하듯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 가운데 드러나는 삶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죄 문제라는 겁니다. 그들이 반역했고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서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간 겁니다. 그게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탄식하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나를 구원해 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울부짖으며 탄식으로 주께 기도할 때 그 기도 끝에 발견돼야 되는 건 하나님의 많은 자비와 사랑으로 부으신 큰 은총입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은총과 함께 나의 반역과 성령을 근심하게 한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문제가 보여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탄식과 통곡의 자리에서 부르짖을 때, 그 기도를 통하여 발견하기 원하시는 건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땐 그냥 마음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설하며 주님 앞에 탄식하며 나오십시오. 그 탄식의 기도를 주님은 들어 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그것을 허용해 주십니다. 그 탄식의 기도를 쏟아내면서 그 탄식의 끝에 여러분들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발견할 것이며 그 기도 끝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기억하며 나의 반역과 성령을 근심하게 한 불순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바로 내 삶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고 멀리 계신 것 같은 하나님 부재의 상황 속에 탄식하며 나아올 때에 그 탄식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하고 내가 누군가를 발견하며 주님 앞에 내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고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께 두 손 들고 돌이켜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은총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신 하나님의 은총이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베푸실 하나님의 큰 은총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찬양 고백과 같이 이제껏 내가 산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그 주님의 베푸신 큰 은총을 기억하며 주님의 자비와 사랑 가운데 조율되며 머무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의 말씀과 함께 동시에 등장하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장차 에돔을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거라는 것을 예고하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자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전부인 줄 알고 있을 때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원수를 갚아 주시는 이런 모습이 등장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게 내가 정의되고 이해하는 사랑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품어주고 기다리고 모든 것을 안아 주시는 그런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때가 되면 공의를 보이시는 것 또한 하나님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동전 양면과 같이 구원의 날은 동시에 심판의 날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날과 심판의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받는 날이고 하나님에게 떨어져 있고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예수 공로를 힘입어 예수 안에 있을 때 바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성이 모두 심판과 진멸로 무너지고 있을 때 붉은 줄 아래 있었던 라합의 가족들만 살았던 것과 같이 내가 누구 아래 누구 공로 아래 있느냐가 결국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특별히 오늘 63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친하 갚아 주시는 분이심을,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 직면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있어서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에돔이 어떤 나라입니까?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자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에서의 몸이 붉었기 때문에 에돔이라는 이름 자체가 붉다는 의미를 가졌고 에돔 땅 자체도 붉은 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온통 빨간 땅이 바로 에돔 사람들이 살던 지역인데, 하나님이 에돔을 심판을 하시는 그날,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온몸에 붉은 피가 이리 저기 튄 옷을 두르고 계신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옷이 그렇게 빨개질 수 밖에 없는가….하나님의 노하심으로 무리를 밟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아서 그들의 피가 튀긴 옷 때문에 그렇게 시뻘건 옷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포도주 틀을 혼자 밟으면 포도즙이 옷에 다 튀듯이 심판으로 인해 피가 이리 저리 묻어서 옷이 빨간색인 것을 넘어 시뻘건 옷이 되는 겁니다. 옷이 그렇게 시뻘건 이유는 심판하시는 중에 묻은 핏자국이라는 이 엄중한 선언, 이게 얼마나 끔찍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그림 언어라는 겁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면서 에돔을 밟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인 에돔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피가 낭자하는 끔찍한 심판이 임할 것을 선명히 보여주십니다. 왜 에돔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는 날이라고 명하시면서 그들의 피가 다 튀고 묻을 정도로 노함과 분함을 표출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는가? 바로 에돔이란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때 했던 용서받지 못할 끔찍한 일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망하는 날, 특별히 남 유다가 바벨론으로 인해 망하는 날에 에돔은 상처에 소금 뿌리듯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습니다. 사실 에돔은 조상으로 올라가면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이니 형제의 나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먼 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에돔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날에 이스라엘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비웃고 조롱하며 저 나라 별거 아니라 그러면서 꼴 좋다고 막 비웃은 겁니다. 도망가는 백성들에게 걸림돌이 되며 아픈 상처에 소금을 막 뿌리는 자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도와주지 못한 망정, 망하고 힘들고 눈물나는 그 비극을 보며 좋아하고 박수치고 약을 올리며 소금을 뿌린 자들이 바로 에돔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이게 얼마나 남유다 백성들에게 상처가 됐으면 바벨론에 끌려와서 바벨론에서 마음을 쏟아내는 탄식을 할 때 이 에돔 사람들 제발 하나님 가만두지 말아 주세요,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하나님 에돔을 제발 가만 두지 말아 주세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그 에돔을 심판해 주세요… 그게 바벨론으로부터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 화가 나고 더 마음이 아프고 더 상처가 되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식으로 고백한 겁니다. 그 에돔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예고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에돔을 향한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울함을 대신 갚아 주시는 심판입니다. 그 에돔을 향하여 하나님은 친히 너의 원수를 내가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에돔은 나의 원수다….선언하시며 그 에돔을 향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면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를 친히 갚아 주시는 심판이 온 에돔 땅에 이처럼 피가 튀기듯이 임하는 겁니다. 온몸에 피가 다 튀길 정도로 철저하게 진멸하시며 밟고 그들을 향하여 심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에돔을 향한 하나님 심판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과 회복의 날이 되고 에돔에게는 철저한 심판의 날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하실 놀라운 역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믿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뭡니까? 최종 승리와 최후 승리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 옳고 그름을 하나님이 나누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며 우리의 원수를 다 갚아 주신다…는 분명한 고백입니다. 내 원수를 갚지 못한 억울함으로 잠을 자지 못하며 그 슬픔으로 탄식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억울함을 풀어 주시겠다 약속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원수는 내가 갚아 준다… 때가 되면 에돔을 철저하게 심판하심으로 너의 억울함을 내가 풀어 준다…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 편에서 있다면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한을 기억하시고 풀어 주시며 해결해 주시며 대신 갚아 주시는 그 심판의 날이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붙들고 신실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내 기준과 내 생각과 나의 기대의 모습으로만 한정하지 마십시오. 심판을 통하여 철저하게 원수를 갚음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크신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순종하며 엎드리십시오. 그 완전하신 하나님 사랑 가운데 오늘도 정의와 공의를 이루시며,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이루신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선명하게 그 길을 순종하며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에 대해서 놀랍게 선포하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62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축복받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선택하셨고 먼저 그들을 새우셔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모든 역사는 그들이 여호와께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성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백성인 걸 망각하고 여호와께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다 결국 망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었고 그들은 바벨론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으며, 소망을 잃어버린 삶의 자리에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 가운데 상황이 어렵고 절망스러운 것도 있지만, 더 절망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거 같은 절망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여겨지는 절망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무엇을 선포하십니까? 하나님은 시온을 위해 잠잠하지 아니하시며 쉬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고 깨어 계시고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음을 분명히 믿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게 나라를 잃고 폭삭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오게 될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의 미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눈앞에 처한 현실은 잿더미 위에 절망이고 포로됨과 결박인데,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는 그때에 이 모든 것들을 뒤집어 엎으시는 회복과 구원의 날이 임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 날에 주실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만을 얘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결박되고 포로 된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를 동일하게 주신다는 것이죠. 바로 죄인을 구원하고 잃어버린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씀을 통해 동시에 주시는 겁니다. 상황과 환경에 매몰되어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쉬지 않고 일하심을 쉬지 않으심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감각적으로 눈과 귀로 보고 듣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와 여러분들을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심을,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심을 분명히 믿는 것이 구원과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일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1차적인 의미는 시온과 예루살렘은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워지게 될 거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서를 통해 증언되듯이, 때가 차매 바벨론이 멸망하고 그 다음 페르시아의 제국이 생기자마자 그들에게는 이 일들이 하늘의 기적과 같이 풀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는듯 예루살렘 성전이 말씀대로 다시 세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차적인 이유이고 더 본질적인 건 그 시온 안에 예루살렘 안에 뭐가 회복되는 겁니까? 보이지 않는 성전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회복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재건되며, 그들의 무너진 예배가 다시 재건되는 것임을 말씀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다시 온전케 하시며 그들의 예배가 예루살렘에서 시온산에서 놀랍게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 때가 올 것임을 예언의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소와 비웃음의 대상입니다. 이제 너희는 버림받은 자손이야…이 곳은 버림받은 땅이고 예루살렘은 끝났어…비웃고 수근대며 조소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는 깊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이런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를 주시는 겁니다. 다시는 너희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내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부를 것이다. 헵시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로 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쁨이다…하나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헵시바…너는 나에게 기쁨…이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이냐면 신부를 바라보는 새신랑의 기쁨, 이게 바로 헵시바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실 때 너희는 이렇게 나에게 기쁨이다…라고 선언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선민으로 선택하셨고 언약으로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복 받은 백성이 되었는데 그 결혼과 언약의 관계가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다 깨져 버렸죠. 그런데 그 깨진 언약의 관계를 다시 하나님께서는 세워 주시며 다시 회복시켜 주시며 너희는 나의 기쁨…헵시바 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언약이며 사랑이라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자꾸 느끼지 못하고 안 계신 분처럼 착각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잠잠하지 않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망각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사람들과 처한 상황에만 매몰되어 살아갈 때에 하나님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깨달으며 하나님이 알아보시는 게 중요하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게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이 무너져 있음을, 보이지 않는 예배가 무너져 있음을 돌아보고 직면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부흥과 회복이라는 것은 영적인 부흥과 영적인 회복이라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는듯 보이지 않는 성전이, 무너진 예배가 말씀대로 다시 세워지는 것이 진정한 부흥과 회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배를 다시 세우시며 보이지 않는 성전을 다시 세우실 때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볼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볼 것이라는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그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며 무너진 예배를 다시 세우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확실히 믿으며 내 느낌과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내 상황에 매몰되지 않으며 말씀을 분명히 믿음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구원과 회복의 시작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말씀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것이며 나를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며 그분의 영광 가운데 나아가게 되고, 내가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다시 한번 회복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생기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삶,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 그때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며, 하나님에게 내가 어떤 존재임을 알고 하늘의 기쁨이 나에게 임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잠잠히 계시지 않고 일하시며 쉬지 않으심을 잊지 않으며 너는 나의 기쁨…이라 선언하시는 헵시바의 은혜가 회복되며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예언을 통하여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구원에 대한 예언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에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있고요. 그 삶의 자리를 넘어 장차 오실 약속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1장에서 이사야가 선포하는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은 지금 나라를 잃고 어려운 상황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 그게 바로 아름다운 소식의 일차적 의미입니다. 동시에 장차 약속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실 복된 소식, 즉 그의 이름으로 주실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아름다운 소식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지금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 바벨론 포로라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그들의 삶의 자리를 네 가지로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슬픈 자….이 네 가지는 그들의 삶의 자리이자 마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게 망해 나라 없는 백성으로 포로가 되어 갇혔고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한 채 큰 슬픔으로 마음이 상했습니다. 동시에 이 네 가지 단어는 죄인 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의 삶이 바로 죄의 포로가 되고 죄에 갇혀 살아가는 인생… 마음이 상하고 슬픈 인생…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고슴도치에 가시와 같이 서로를 찌르고 모든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모든 인생은 슬프고 마음이 상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된 인간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살고 있는 실존, 영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결박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죄에 결박되어 포로된 모든 인간들에게도 주실 아름다운 소식은 분명한데 바로 외부로부터 건져 주실 구원자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와 결박에서 그들을 건져 주실 구원자가 필요하고, 죄와 사망의 결박과 포로됨에서 자유케 하시고 풀어 주실 영원한 메시아 구원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주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음이 상한 자가 고쳐지고 포로된 자가 자유케 되며, 갇힌 자가 놓임을 선포하며 슬픔 받은 자들이 위로를 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그저 상황과 환경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을 조금 증상을 완화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 결과 기쁨의 기름이 부어지고 찬송의 옷이 우리에게 입혀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포로됨과 결박으로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데 그날이 오면 기쁨의 기름과 찬송의 옷이 그들을 가득 채울 거라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여호와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며 하늘의 기쁨인 이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겁니다. 그 기쁨은 상황이나 환경이 변하는 기쁨이 아니고 잠시 있다 사라지거나 변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기쁨이기에, 하늘의 기쁨이고 영원한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 이것이 내 안에 부어지고 채워지는 게 바로 구원의 날에 있는 놀라운 역사인 기쁨의 기름입니다. 또한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심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데, 메시야가 오심으로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고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신다고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죄와 사망의 결박에서 자유케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며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으로 인하여 찬송하고 그분의 공의와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통하여 찬양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날에 여호와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며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여호와의 영이 어떻게 누구에게 임하는가….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누구에게 임하는가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 겸손하게 엎드리는 자에게 오는 겁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의 기름과 찬송의 옷이 누구에게 부어지는 겁니까? 나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고백하며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 나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여호와의 영에 대한 철저한 소망을 붙들고 주 앞에 서는 자….그들에게 임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내 심령이 가난해야 돼요… 주님을 갈망하고 갈구하는 영적 목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주님이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영적으로 높아진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열망, 나는 주님 은혜 아니면 큰일 나는 존재임을 철저히 인정하는 영적 가난함, 그 절박함과 영적 갈증을 가진 자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놀랍게 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자들에게 삶의 구원과 회복을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주시며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시며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겁니다. 이사야의 예언, 이 모든 것들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차원의 말씀을 항상 입체적으로 바라볼 때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가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도, 죄인된 인간이 처한 영적 현실도 모두 포로 되어 갇혀 있으며 슬픔 가득하고 마음 상한 상태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되어 결박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죄에 포로되어 결박된 모든 인간들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루실 구원임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가 지금 포로 되어 있음을, 결박되어 있음을 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슬프고 마음이 상해 있음을 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주님 없이는 영적으로 내가 파산입니다…주님 없이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부어 주시는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듣기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기쁨의 기름에 흠뻑 적셔지며 찬송의 옷을 입기 원합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음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나를 구원하셔서 자유하게 하시며 상한 마음을 고쳐 주시는 그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그 아름다운 소식으로 기뻐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말씀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초대, 하나님의 빛을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자들에 대한 일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굉장히 잘 알려진 말씀이고 이 성경 말씀을 근거로 여러 유명한 찬양도 나올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 유명한 말씀 구절 가운데 두 가지 하나님의 명령, 일어나…빛을 발하라…이 두 단어를 먼저 주목하기 원합니다. 첫 번째 명령은 일어나라…입니다. 이 말은 그냥 앉았다가 일어나라는 의미보다는 어둠과 절망 가운데 앉은뱅이와 같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로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의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비슷한 말씀이 복음서에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실 때 하셨던 달리다쿰…이란 말입니다. 달리다 쿰이 소녀여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죠. 그러니까 죽었던 야이로의 딸과 같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쿰” 일어나라 명령하시는 게 오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일어나라는 겁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이 이렇게 절망과 어두움이었고, 영적 상태도 이렇게 어둠과 죽음의 상태였던 그 처지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일어나라는 것이죠. 처한 현실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고, 어둠과 절망이 나를 덮으며 캄캄함이 나를 가리고 있어 주저 않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둠을 깨고 일어나라…절망을 깨고 일어나라 선언하시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던 스스로 일어날 수 없었던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곧 일어나 걸으라….명령했던 그 일어나라….가 바로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나라….명령하십니다. 이 짙은 어둠과 절망과 캄캄함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앉은뱅이와 같이 주저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일어나라 선포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은 구원이고 생명이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말씀을 힘입어 앉은뱅이가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듯, 내가 어둠을 깨고 절망을 깨고 주님의 이름 붙들고 일어나는 그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일어나라는 하나님 말씀으로 개인이 일어서고 교회가 일어서고, 나라와 민족이 일어서는 놀라운 은혜를 현재형으로 맛보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빛을 발하라는 명령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 스스로 빛을 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대신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로부터 받는 빛을 반사체로 비추라고 명하시는 겁니다. 이 빛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냥 눈에 보이는 빛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빛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 빛이자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한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로부터 빛이 임할 때 우리는 그걸 통하여 어둠이 물러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빛을 발하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빛은 늘 음이 있고 양이 있습니다. 볕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 겁니다. 빛 뒤에는 그림자가 항상 있게 되어 있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빛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빛은 명암 일색이라 하는데, 명과 암이 하나의 색인 그림자가 없는 빛이라는 거예요. 이 명암 일색의 참 빛을 우리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 그림자가 없는 빛을 가장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일출이나 일몰 때에 오는 빛입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 참 빛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늘이 없고 구김이 없고 어두운 그림자가 없는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빛이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 우리를 비추게 되면, 모든 그늘과 어둠과 그림자는 사라지고 여호와의 영광이 내 위에 임하게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는데, 모든 사람들, 즉 각각에게 임한다는 겁니다. 마치 성령 하나님의 불이 각 사람에게 임하듯 여호와의 영광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되면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게 되고, 그 영광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참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힘과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겁니다. 그 참 빛이 나를 비출 때 나의 죄 문제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참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바라본 우리는, 나의 정말 속사람의 민낯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민낯이 하나님 앞에 그림자 없이 드러나니 나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하고 소망없음을 고백하는 죄인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게 되는 겁니다. 나에게 유일한 소망은 참빛이신 예수님이 나를 비추어 주셔서 어둠이 물러가는 것 밖에 없음을 철저히 고백하며 그 빛을 붙잡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사는 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참 빛은 우리에게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빛이며 공허함이 사라지게 하는 빛이며 특별히 혼돈과 무질서가 사라지게 하는 빛입니다. 예수 진리의 빛이 나에게 임하면 질서가 생기고 내 삶에 의미가 생기고 내 삶에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영광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이 변화를 로마서 8장 말씀을 우리에게 빌려오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그 생명과 성령의 법이 내 삶을 새롭게 재편하는 것이자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복과 구원이란 하늘의 빛이 나에게 임하는 사건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이 주의 명령이 현재형으로 내면화되는 사건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게 바로 내 삶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바뀌는 삶이며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바뀌는 놀라운 삶입니다. 개인적인 변화를 넘어 무리가 다 모여 내게로 오느니라….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내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이 놀라운 역사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방과 민족이 그 빛으로 주님께 나오며 하나님의 뜻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임하는 겁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듯, 우리를 부르시는 이 구원의 손길을 우리가 마음에 담아 기대하며 마음으로 응답하기 원합니다. 달리다 쿰… 소녀야 일어나라는 음성으로, 주저앉아 있는 앉은뱅이와 같은 우리들을 일어나라…명령하십니다. 예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일어서기 원합니다.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 나에게 임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원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에 그런 빛으로 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반사하며 살아가며 예수님 참 빛만이 세상의 소망임을 전하여 살아가는 사명자이며 그 빛 가운데 걸어가는 주의 백성 되는 것입니다. 그걸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 나에게 임하며 그걸 통하여 나라와 민족들이 자석과 같이 붙어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며 돌아오는 자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이 세상에 빛을 비추며 살아가는 방식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의 이름으로 일어서며 참 빛을 내 마음에 담아 그 빛을 비추며 살아가는 하늘의 백성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9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과 함께, 그런 하나님의 지적에 대한 믿음의 반응인 회복의 길로 나아가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 응답 지연 앞에 자신들을 돌아보는 대신 하나님 구원의 손이 짧아졌다느니, 하나님 귀가 둔해졌다느니 하면서 하나님 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기도응답 지연의 본질적인 문제는 너희들의 죄문제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며, 하나님께 문제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문제임을 깨달으라 경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죄의 지적 앞에 회복으로 나아가는 첫번째 믿음의 반응은 바로 착각에서 깨어나 그들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반응이 하나님 백성이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길로 인도함을 받는 유일한 길이자, 하늘의 회복과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은 “우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찌르시는 말씀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돌아보게 되는 것, 그게 믿음의 반응이라는 겁니다.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고 우리 문제입니다…. 고백하게 되는 죄의 인정과 자복이야 말로 살 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며,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과 가까워 집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죄를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며,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죄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나의 상태를 솔직히 바라보며 본질적 문제인 죄 문제를 인정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 어떤 상황이라는 겁니까?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기도가 막히고 죄로 말미암아 평안이 사라진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둠과 죽음이 가득하고 하나님께 응답 받지 못하는 그런 상태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고 자신들을 말씀으로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기도응답이 지연될 때에도 하나님 문제라며 하나님 탓하며 자신들을 돌아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내 인생의 본질적 문제가 죄 문제인 것을 바라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하늘의 능력과 은혜, 하나님의 해결책이 나에게 임하지 않는 것이죠. 주의 말씀이 나를 비출 때, 내가 빛을 바라나 어둠 뿐이고 캄캄한데 행하며 죽은 자같이 있다는 나의 영적인 현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찌르시는 말씀을 나를 깨울 때, 나를 바라보고 돌아볼 수 있는 믿음의 반응이 죄 문제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나를 말씀으로 돌아보고 비추게 되면 문제의 본질이 죄문제임을 인정하고 반드시 분명한 회개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는 죄에 가득 차 있는 짙은 어둠입니다. 나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죄인입니다….철저하게 회개하고 주님을 바라 때에만 우리는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이처럼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게 중요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나는 죄인입니다…자격이 없습니다… 나에 대한 소망 없음과 무능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된 자들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각하는데 있습니다. 나를 말씀으로 돌아보고 죄를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회복의 길은 바로 자신들을 돌아보며 내가 하나님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철저하게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주님 앞에 올 때만 우리에게 회복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 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면 가질수록 내 죄에 대해서 깨닫고 그 나에 대한 무능함의 자각이 하나님 앞에 나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로 죄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면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 하고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며 나가는 대신에 내가 혼자 무엇을 하려고 발버둥치며 하나님 탓하고 사람들 탓하고 세상 탓하면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두 개 주셨습니다. 한 눈을 감아도 보이긴 하는데 두 눈으로 봐야 잘 보일 수 있게 만드신 거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두 차원의 눈을 정확하게 뜨고 하는 것인데, 한 눈으로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가시적인 땅을 바라보고 또 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상 영적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이 두 차원을 동시에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우리 눈이 두 개인 이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한 눈으로는 나를 바라보고 처한 현실을 바라보되, 또 한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는 것이 눈이 두 개인 이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눈 앞에 상황과 처한 현실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믿지 아니하는 삶, 환경과 상황으로 바라보는 눈을 넘어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나를 볼 때도 나만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믿음 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은혜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는 게 믿음 생활 잘하는 겁니다. 이사야 59장 1절은 절망으로 시작하는데 마지막 절인 21절 끝은 소망으로 끝납니다. 그 놀라운 반전의 비결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돌아보며 내 죄악을 고백하고 자백하며 하나님께 가능성 없는 존재로 은혜만을 구하는 존재로 나아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급히 흐르는 강물같이 오실 거라는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는 놀라운 하늘의 복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반전의 역사가 나의 인생 되기를 사모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사람들 문제가 아니고 환경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문제가 아니고, 내 죄 문제라는 것을 알고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고백하십시오. 철저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나를 돌아보게 되면 하나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그 눈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것도 주장할 자격이 안되며 하나님께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죄인으로 나아가십시오. 저는 주님이 은혜 안 내려 주시면 큰일나는 사람입니다….주님 앞에 겸손히 두 손들고 나아올 때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은총이 부어지며, 회복과 치유의 길이 열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두손들고 나오는 백성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며 품으시며 그들을 향하여 강물과 같은 은혜를 주시며,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는 그 축복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백성들의 죄악을 규탄하고 지적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 그리고 성도로서 저와 여러분들의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죄를 돌아보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들의 원하는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는데 바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죠. 지연되고 기다리는 기도 가운데 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가….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하나님 구원의 손이 짧던지 귀가 둔해져서 그런가보다…하나님이 문제시구나…이렇게 결론 내린 겁니다. 여호와의 구원의 손이 너무 짧아서 우리를 구원 못하시던지, 혹시 귀가 너무 둔해져서 우리 얘기를 듣지 못하시는 게 분명하다며 기도 응답 지연의 모든 탓을 하나님에게 돌린 겁니다. 내 눈앞에 처한 상황과 현실에 압도 당하여 왜 하나님은 지금 당장 나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는가…원망하며 응답 지연의 문제를 다 하나님 탓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 착각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두 번에 걸쳐 분명히 찌르는 말씀으로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구원의 손이 짧으신 것도 아니고 귀가 어둡거나 둔해져서 못 들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응답 지연 앞에서 너희들은 다 하나님이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탓하고 있는데, 그 모든 이유와 원인은 오직 너희 죄악 때문이라, 즉 너희들 때문이라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 너희를 당장 건지지 아니하시고 바로 응답하시지 않는가? 모든 게 너희 죄 문제 때문이다…찌르는 말씀으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핑계대고 하나님 탓하며 하나님이 문제 있다고 착각하는 그들을 향하여 찬 물을 확 끼얹지는 것입니다. 본질적 문제는 너희가 죄를 돌아보지 않아서, 너희의 죄 문제 때문에 이런 기도응답 지연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도응답 지연을 만드는 우리들의 죄 문제, 죄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과 영향력을 세 가지로 강조하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갈라 놓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도의 응답을 막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평안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겁니다. 죄의 세 가지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힘을 너희가 절대 과소평가 하지 말고, 죄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야 하나님께서 너희를 건지시고 너희 기도를 들어 주실 거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죄의 부정적이로 파괴적인 심각성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는다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의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문제는 관계가 무너지고 깨진 문제라는 것이죠. 하나님과 너희 사이가 지금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무너지고 깨졌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가 다 깨진 것과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갈라 놓는다는 겁니다. 죄의 영향력은 친밀한 영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깨지게 하며 갈라놓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대신 하나님 탓하고 하나님 문제라고 착각하는 우매함에 빠지는 겁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만 갈라놓는 게 아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를 갈라 놓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갈라놓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들고 마음이 부대끼는 문제는 인간관계 문제입니다. 많은 분들이 인간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유가 여러가지 인데 그 깊은 본질을 들어가보면, 인간 사이를 계속 갈라지게 하는 죄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계속 갈라지고 부대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죄가 우리 사이를 갈라 놓는다는 것을 정확하고도 민감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 대해서 둔감해져서 죄악이 이렇게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게 되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죠. 죄가 그들 사이를 그렇게 벌려 놓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계성, 사람들 사이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계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죄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영향력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렇게 갈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두 번째, 죄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력은, 기도 응답을 막아버린다는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얼굴을 임재를 가리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은 죄와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쌓아두는 죄가 우리 손에 피가 묻듯이 가득하고, 거짓과 악속이 가득한 입술에 가득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실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의 얼굴을 돌리시니까 당연히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고 지연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손에 여전히 피를 묻히고 거짓이 있으며 입술은 악독이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이 너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얼굴을 너희에게 보이시겠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문제라고 착각하고 하나님 탓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하시겠습니까? 죄 문제로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면을 돌아 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돌리시고 멀리 가신 듯 느껴지고, 하나님 탓을 하며 원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지며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고 죄 문제를 경시하고 등한시할 수록, 영적으로 둔감해지며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죄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죄에 대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에 대한 심각성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신앙 착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문제라 착각하지 않으며 하나님 탓하는 우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는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키고 막는다는 것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죄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심각성은 우리 안에 평강을 다 빼앗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내 마음이 평안하다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뻔뻔하게 그럴지 모르나 그 내면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평안과 평강이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어두워지고 불안에 사로잡히고 억눌리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죄의 파괴적 결과입니다. 숨어버리고 억압하고 어두워지며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게 만드는 그 파괴적인 힘, 내 마음에서 평강과 평안을 다 사라지게 만드는 그 파괴적인 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 외부 문제인 것처럼 몰아가고, 하나님 탓 하고 하나님 문제인 것처럼 몰아가며 하나님 탓하는 이런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말씀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 나의 내면을 말씀으로 비춰보며 나의 죄 문제 때문임을 발견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죄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영향력을 우리는 늘 경계하며 돌아볼 수 있어야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나의 죄가 보이고 죄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보이기를 원합니다. 영적 착각에 빠지는 대신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두 손 들고 죄인이라 고백하고 나아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겸손한 자세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충돌하고 부딪히며 하나님의 초대에 관심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우상숭배하고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초대에 대해서 거절하고 충돌하는 악인들의 삶이 있는가 하면 그 초대를 받아들이는 의로운 자의 삶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악인이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인데, 그들은 눈에 보이는 땅과 세상을 중심으로, 하나님 대신 나 중심으로 살게 되니까 하늘의 힘을 공급받지 못하고 나 혼자 아둥 바둥 살게 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세상을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아 될 존재들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메여 사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의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과 영적 가치를 중심으로, 나 대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게 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회복과 소생의 본질은 하늘에서 주시는 그 놀라운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다시 일어날 힘을 부어 주시는 겁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살아가는 자유의 인생, 평강의 인생이 됩니다.
그 하늘의 힘을 누구에게 부어 주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영적으로 겸손한 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땅 중심, 내 자신과 물질 중심으로 살아가는 나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통회하는 자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들에게 그들의 영을 소생시켜 주시고 하늘로부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겁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자들은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위로해주시고 고쳐 주시고 영을 소생케 해주시고 의와 능력으로 공급해 주신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겸손한 자에게 그의 영을 소생시켜 주시고 마음을 소생시키는 놀라운 하늘의 역사라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자들은 마음에 탐심이 가득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가는 길로 걸어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는데 우상숭배는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도구가 되기에,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과 단절되어 결국 내 힘으로만 살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결국은 우상숭배가 그들을 망하게 하고 그들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죠.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 우상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게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가게 만들어 결국 무너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결론 말씀으로 의인과 악인의 길의 끝이 어떤지를 큰 주제로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바로 나의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이란 말하는 대로 되게 하시는 분, 우리가 말하는 입술의 고백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말이라는 것은 놀라운 창조의 능력도 있고 파괴의 능력도 있다는 것이죠. 죄로 말미암아 우리 입술로 타락했고 말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내 입술을 통하여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결국 입술의 열매가 하늘의 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계속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영을 소생시켜 주시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고쳐 주시고 그들을 인도하 주시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에는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절대 평강과 평안이 누려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심을 분명히 믿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치유와 회복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영을 소생케 하시고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 관심과 초점을 두지 않고 살아간다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는 전혀 무관한 말들만 가득 나오게 되는 것이죠. 악인이 계속 생각하고 골몰하는 것 늘 머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과 땅, 내 자신 밖에 없으니 입술의 열매가 악한 것이 맺어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악한 일을 많이 해서 악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되며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삶 자체가 악인인 겁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이 땅과 세상, 내 자신과 물질 가치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악인인 겁니다. 그 결과 악인은 평안을 얻지 못하고 늘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들의 삶은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 당하며 살아가고 그들의 마음은 진흙과 더러운 곳을 솟구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계속 솟구쳐 올라오는 게 진흙과 더럽고 요동하는 것들, 쓰레기와 쓴뿌리만 올라오는 인생인 겁니다. 내 마음에서 요동 치듯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계속 쏟아내는 것, 그게 결국 내 입술의 열매인 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솟구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것이 내 입술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나의 입술의 열매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 삶이 바로 악인의 삶이고 악인의 입술의 열매가 가득한 삶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란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내 힘으로 어깨 힘 가득 주고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어깨 힘 빼고 하늘의 힘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겁니다. 우리들을 가만두지 아니하시며 구원의 초대에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을 겸손히 붙잡으십시오.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내 영을 소생 시키시며 회복시켜 주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고쳐 주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음에 두며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때 나의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나의 인생에 부어 주시는 힘과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인생은 결국 악인의 삶으로 결론이 나는 인생, 내 마음으로부터 진흙과 더러운 것이 솟구쳐 올라오는 인생이 되며, 공급함 없이 불안함과 두려움에 압도당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 결론이 하나님에게 붙들린 인생, 하나님 은혜 안에 있는 인생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겸손한 자로 회개하며 주님 앞에 두손들고 나아가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으며 주와 함께 영원히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차 약속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하실 놀라운 일이 바로 대속자 되시며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며 그 메시아로 말미암아 나 대신 고통당하고 죄값을 대신 치루시며 내가 치루어야 할 죄값을 모두 선결제 해 주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 메시아를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의 선물과 함께 하늘의 빛이 임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장차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준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는 됐는데 메시아를 통하여 하늘의 복과 구원의 선물이 준비됐는데 그 초대를 거절하고 거부하고 본질적으로는 그 초대에 관심을 살아가지 않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초대를 충돌하고 부딪히고 거절하고 심지어 관심도 없는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이 바뀔 때마다 불순종과 우상의 문제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점점 악화되면서 그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결국 그들이 망하게 되었다는 게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입니다. 그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구원의 놀라운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며 아예 관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렇게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시대가 어두워질 때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 두 가지를 증언합니다. 첫째로, 의인들이 점점 사라진다는 겁니다.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은 자들,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점점 사라지고 그냥 팍팍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런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가신다고 말씀은 증언하는데, 이 말은 갑자기 이런 의인들과 남은 자들이 이 땅에서 빨리빨리 천국으로 이사를 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저런 믿음의 사람들, 남은 자들은 이 땅에 좀 오래 계셔야 될 거 같은데 빨리 하나님이 천국으로 불러 가시는 겁니다. 시대가 어두울 때 남은 자들과 믿음의 의인들이 그렇게 빨리 죽고 진실한 자들을 빨리빨리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일을 통하여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내리신다는 겁니다. 세상이 너무 어둠도 악하니까 더 있지 말고 너희 믿음의 사람들과 남은 자들은 빨리 천국으로 돌아와… 그래서 하나님이 빨리 그들을 천국으로 부르신다는 겁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어두우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냐는 거예요. 남은 자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믿음의 의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빨리 불리어 가는 일들이 일어날 때 아 세상이 이렇게 악해서 세상의 죄와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관영해서 저런 사람들을 빨리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구나….하나님의 시대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민감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영적으로 어두우니까 이런 이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남은 자들이, 믿음을 지키던 의인들이 빨리빨리 죽어도 진실한 이들을 거두어 가셔도 마음에 두는 사람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이것을 통하여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감각이 아예 사라진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과 초점은 오로지 이 땅과 세상, 눈에 보이는 것에 다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하여 주시는 경고의 음성을 들을 마음도, 들을 의지도 없으며 이렇게 의인이 죽어 나가도 마음에 두지 않고 진실한 이들을 빨리 천국으로 거두어 가도 깨닫는 일이 없는 이런 영적인 무감각의 시대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어두운 시대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하여 주시는 이런 경고들을 민감하게 받고 해석하며 그걸 통하여 하나님의 징조를 볼 수 있는 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입니다. 이렇게 사인을 주시고 전조 증상을 보여 주셔도 마음에 담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 결과를 그냥 직면하는 영적인 무감각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두번째,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는 우상 숭배에 완전히 사로잡혀 살아가는 시대임을 강조합니다. 전혀 깨닫지도 마음에도 두지 않는 영적 무감각의 시대에는 필연적으로 백성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천국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가치에 관심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경외하지 않는 겁니다. 오직 관심과 초점이 땅에만, 이 세상에만, 육신의 일에만, 물질 가치에만 있게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이 땅에 것에 모든 것을 걸고, 물질 가치에 몰입하여 초점을 맞추게 되면 결국 내가 원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 욕망을 투영하는 도구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반드시 영적인 피해가 있고 폐해가 있는데 그게 바로 거짓과 영적 간음입니다. 우상에 사로잡힌 그들은 자식들이 거짓의 후손이 되고 영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하는 일이 일상화 보편화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삶은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살게 되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대신 우상을 붙들고 함께 무너지고 망하는 인생으로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영적으로 둔감한 시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멸망을 향하여 질주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쩔어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결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정말 어려울 때 나 찾지 말고 우상들에게 살려달라고…구해달라고 기도하고 붙들라는 겁니다. 아무리 우상에게 부르짖고 헌금하고 거기서 피를 흘리면서 제사를 드리면서 아무리 구해도 우상들은 결국 다 허망하고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무익하고 허망한 우상, 그저 나의 욕망을 그냥 투사한 우상이 너희들을 구원하고 살리는지 직면하라는 겁니다. 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너희가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는데 너희가 정신 못 차리고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둔감해져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초대를 거절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범죄인지 잊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초대에 무감각하고 관심이 없고 충돌하고 부딪히는 본질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관심과 초점이 이 세상과 땅, 육신과 물질 가치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경시하고 영적으로 둔감해질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무너뜨리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와 말씀에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선명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먼저 세우시고 부르신 이유는 그들 만을 위한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삼기 위해서 였습니다. 약속대로 오실 메시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은 구원이 이스라엘의 담장을 넘어 온 열방과 민족을 구원하시는데 있다는 것은 수백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예언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인들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담장을 허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나만 구원받으면 되고 자기들끼리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신앙 안에만 머물고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는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이고, 나중에 약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끊임없이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강조하시는 핵심은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선을 넘어가는 신앙, 내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두었던 담을 넘어서는 신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 하나 구원받으면 되고 우리 민족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회복되면 된다는 그 담 안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담을 쌓는 신앙에서 길을 내는 신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안전지대를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 길임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먼저 강조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를 멈춘다는 종교행위를 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공의와 정의가 만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인정하는 것이며 나는 내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존재임을 고백하며 안식일을 지킬 때, 더럽히지 않고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정신을 통하여 온전히 나를 말씀으로 비추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최우선에 두며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 안식일 준수를 이스라엘만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그들 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자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우리는 이방인과 다른 존재임을 선언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백성이라는 아이덴티티와 존재감을 지키려 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안식일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그들 만이 자부하는 존재감과 아이덴티티를 무너뜨리고 선을 넘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립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여호와께 연합할 수 있는 백성들은 오직 이스라엘인데, 여호와께 연합하는 이방인이란 있을 수 없는 모순인 겁니다. 이방인이란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이며 지옥의 땔감이 여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어떤 일을 이루신다는 겁니까?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선택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그동안 유대인 만이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들의 아이덴티티와 정체성을 지켰는데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모든 예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충격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존재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왜 저러시지? 왜 하나님이 눈을 이방인에게 돌리시지? 이방인들은 그저 지옥의 땔감들이고 구원과 무관한 자들인데….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선언하시는 겁니다. 약속의 메시야가 오심으로 너희들이 만든 선을 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너희는 만민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먼저 선택 받은 것을 정확하게 알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희를 시작으로 만민과 열방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 너희들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약속의 때에 오실 메시아가 오셔서 일어날 놀라운 일은 이스라엘이라는 담장을 넘어 여호와와 연합하는 이방인들이 일어나며, 그들이 너희와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언약을 굳게 지키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우주를 뒤흔드는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정의이고 하나님의 공의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그 하나님의 공의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만민이 구원받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접하는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는 은혜가 부어지는 겁니다. 장차 주의 백성 될 그들을 향하여 내 눈이 열리고 내 마음이 열려야 되는 것이고, 내 관심과 기도가 열려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셨듯이 저 담벼락 밖에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도 장차 영접하여 여호와와 연합할 이방인이 될 것을 바라보시며 그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지금은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과 무관하게 불신자로 살아가지만 장차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며 하나님께 기뻐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며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들이 될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이 확산되는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 계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으로 순종하면 놀랍게 쓰임 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고 여전히 담을 쌓고 선 안에 있게 되면, 충돌하고 부딪히면서 빛이 어둠을 알지 못하듯 어둠이 빛을 거절하는 거며 결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저 나만 구원받고 내 민족만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그저 그 담벼락과 선 안에 머물고 있기 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담을 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저 나 만을 구원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내 주변에 몇몇 사람만 구원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만민과 열방이 주께 돌아오는 꿈을 가지고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내 시각을 훨씬 뛰어 넘는 높고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만을 위한 우리 가정과 우리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님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여호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구원하며 누구나 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임을 믿고 예비하신 그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공의임을 잊지 마십시오. 담을 쌓는 신앙에서 길을 내는 신앙으로 조율되어 그 하나님의 큰 뜻 아래 놀라운 하나님의 일이 펼쳐지는데 귀하게 쓰임 받는 주의 선명한 도구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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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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