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한 사람이며 우리가 본받고 싶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늘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왕 마저도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며 사단의 미혹에 빠져 가지 말아야 될 곳을 가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했으며 더군다나 그 죄를 가리기 위해 계속해서 죄의 사이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준을 선명히 붙들고 죄를 짓지 말고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고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알고 죄에서 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이 깨지고 악한 세상을 사노라면 죄를 짓게 될 때가 있음을 동시에 인정하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 무너졌을 때,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 용서를 비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회피하지 않고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에 직면하고 죄 용서를 위해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그 회개와 회복의 길을 돌아오는데 1년이나 걸렸고, 굉장히 돌아서 멀리멀리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나서야 정신차리고 그 죄에 직면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하게 되었고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여 주셨지만, 밧세바와 간음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금식하고 통곡하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그 아이를 데려 가셨습니다. 간음과 살인으로 죽어야 할 자는 다윗인데, 그 다윗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아이가 대신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죽어야 되는 자리에 예수님이 나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우리에게 설명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건지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은 완전히 용서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정죄함 가운데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으로 보여 주십니다. 간음 가운데 태어난 아이가 죽은 후, 밧세바와 동침하여 하나님의 용서 가운데 태어난 아들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 태어난 아이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 shalom입니다. 이제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히 회복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의 모든 것 변하고 하나님은 그의 구원되셔서 더이상 정죄함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다윗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과거를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이 시간 다윗을 향하여 너와 나의 관계는 솔로몬, 즉 샬롬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 아이의 새로운 이름도 보내주셨는데, 그 이름이 여디디아,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과 샬롬의 관계가 회복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심…을 아이 이름을 통하여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큽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미스러운 일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정죄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솔로몬이라는 샬롬의 관계로, 여디디야라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과거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며 완전히 용서하셨고 완전히 사랑하셨기에 너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 소망의 메세지인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하여 철저하게 무너진 죄에 직면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한 후 용서하시고 위로의 아들로 허락하신 솔로몬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통하여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용서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해 보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죄를 가볍게 여겨 죄 지어도 상관없다고 계속 우리를 미혹하고 틈을 보이게 만듭니다.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은 너를 평생 용서하시지 않을거야… 하나님은 너를 더 이상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 거야… 두려움과 정죄함에 사로잡히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깨 버리게 되고 회복으로 나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라는 것이죠. 죄를 짓기 전까지는 죄에 대해서, 죄의 무게에 대해 계속 경고하십니다. 동시에 죄를 짓고 무너진 우리에게는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죄에 직면하며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함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 주님 앞에 나와 자복할 때만 우리 인생에는 새 출발의 기회가 있으며, 솔로몬이라는 회복과 여디디야라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의 은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고 죄로 물든 나를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며 그 피로 구속 받게 하셔서 우리 안에 정죄함이 없는 기적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이 딱 끝나면 좋을 것 같은데 성경은 31절까지 또 다른 말씀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하고 정죄함 없이 이제 샬롬과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붙들고 새 출발하며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다윗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고 여전히 위험의 불씨를 안고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대장관 요압이 암몬 자손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대신 다윗왕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인데 요압은 하나님께 돌려야 되는 공로와 영광을 다윗 왕에게 돌리고 있는 겁니다. 예전 다윗 같으면 초심을 견지하는 다윗이라면 그렇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요압을 책망하고 전쟁에서 주신 승리,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을 것입니다. 예전에 다윗은 전쟁을 하고 승리하게 되면 가져왔던 모든 전리품들을 다 녹여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심지어 모든 마병과 병거들도 필요한만큼만 남겨 오고 나머지는 다 발목에 힘줄을 끊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방해되는 것은 다 끊어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모든 공로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자가 누구였냐 하면 다윗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전과 달리, 한 달란트나 되는 왕의 면류관을 머리에 썼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 왕관을 썼을 리가 없는데 자기가 영광을 취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려고 자기가 왕관을 써보는 초심에서 이탈하는 다윗의 모습을 성경은 비중있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장 이후부터 나오는 이야기들이 완전히 새출발해서 모든 것이 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해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반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샬롬으로 온전히 사랑하시며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새출발의 인생을 다윗에게 허락하여 주셨는데 그는 완전히 변하지 못한 것이고, 완전히 초심으로 돌아오지 못한 겁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출발해야 되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다윗과 밧세바가 모두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그가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회개하고 나니까 그 죄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가 다윗의 죄의 무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무너진 자리에서 사단에 미혹에 빠져 정죄함으로 도망가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죄에 직면하여 회개하며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붙들어야 될 진리는 바로 나의 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제나 더 크다라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죄의 무게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향한 사랑이 언제나 더 무겁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와 함께 동행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우리 인생이 주님이 주시는 솔로몬의 평화가 회복되며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의 여디디아로 회복되어 오늘도 초심으로 돌아가 새 출발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12장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라고 부제가 되어 있는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다윗을 향한 사랑의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고백하고 용서 받으면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나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하는 사람이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심령골수를 쪼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심령 골수를 쪼개는 말씀을 하실 때 마음을 찌르실 때, 마음에 담아 회개할 수도 있고 거절하고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 사람들의 심령골수를 쪼개는 마음의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회개 대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찍어 죽였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망을 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다윗 왕은 영적으로 완전히 둔감해져 있고 어두워져 있고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우리아도 간접 살인으로 죽인 왕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의 마음을 찌르는 얘기를 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찔림의 말씀을 주실 때 그는 고꾸라지고 회개했습니다. 다윗 왕이 믿음이 좋아서 즉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 먼 길을 돌아 1년이 넘어서 마침내 이제서야 그가 해야 될 말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다윗은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뭐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저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나 핑계를 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다윗은 완전히 하나님의 빛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회개란 말씀 앞에 내가 서서 말씀 앞에 나의 죄가 선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글씨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팍 박히고 찔려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삶의 흐르게 되는 실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마디가 그 마음을 담은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을 회개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자 마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시고 당신을 죽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회개하기만 하면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맞아 주시고 받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돌아오기만 하면 회개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사한다, 너는 멸망하지 않고 죽지 아니한다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교회 밖에 주님 앞에 돌아와서 회개하고 새 생명을 얻어야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사랑하는 자가 계속 죄 가운데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은 교회 밖 많은 불신자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다윗은 회개함으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지 않게 됬는데 누가 죽는가 하면, 밧세바와 간음을 통해 태어난 아기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돌아가자 마자 아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 아이가 왜 아픈지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밤새도록 땅에 엎드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이 어린 아이 살려주시고,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7일 만에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이가 원해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왜 다윗이 죽지 않고 다윗은 살려주시고 그 아이는 죽게 되는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다윗의 식음을 전폐한 기도가 자기의 원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도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자기가 원하는 뜻은 거절된 상태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가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우리에게는 딜레마이고 고통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그렇게 금식하고 간절히 기도했으면 그 아이가 살아나든지 아니면 어떻게 좀 회복이 되든지 그래야 응답일 것 같은데, 아무리 예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겁니다. 다윗의 범죄와 이 아기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봐야 될 건 이렇게 말이 안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자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죽지 않게 살려 주십니다. 약속으로 주시는 용서를 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아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다윗이 죽지 않고 우리아가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야가 죽은 자리는 사실 누가 죽어야 되는 자리냐 하면 다윗이 죽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근데 왜 마땅히 죽어야 할 다윗이 안 죽고 우리아가 죽었습니까? 말이 안 되고 이해가 안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아기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 아기가 죽은 자리는 사실 누가 죽어야 되는 자리냐 하면 다윗이 죽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마땅히 죽어야 할 다윗은 죽지 않고 그 태어난 아이가 대신 죽었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내가 죽지 않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말이 안되고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가 마땅히 죽었어야 될 자리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대속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말이 안 되는 신비의 사건을 그림자와 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마음에 새기며 묵상하는 이 십자가는 그냥 상징이 아니고 교회의 표식 정도가 아니라, 내가 마땅히 죽었어야 할 자리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될 자리, 내가 당연히 죽어서 대가를 치러야 되는 저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게 십자가입니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됩니다. 그런데 그 죄의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아무 죄 없은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죽어야 될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는 겁니다.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죄를 용서받고 내가 죽지 않은 겁니다. 이 말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는 신비를 감격으로 받아들이고 엎드리는 게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죽어야 자리에서 대신 죽게 하신 그 아들의 보혈로 내가 씻김을 받고 죄용서 받고 새 사람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내가 죽었어야 될 자리임을 마음에 새기시며 그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내가 깨어나고 각성되며 이 시간 십자가 사랑의 주님이 주시는 감격이 나를 풍성히 덮이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죄로 무너진 후 하나님 앞에 먼저 돌아왔으면 좋았을텐데, 다윗 왕은 1년 가까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을 책망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이 행한 죄들을 말씀 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행하신 일들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세워주고 지켜주며, 내가 이만큼 하늘에서 많은 것을 부어 주었다는 것을 구구절절 말씀하십니다. 너를 왕으로 삼기 위해 기름을 부어 주셨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보호해 준거 모르냐…내가 너에게 이거 다 은혜로 준 거 아니냐…집도 주고 아내들도 주고, 그 다음 너에게 왕이라는 권한과 자리도 줘서 내 백성들을 너의 손에 잘 치리 하라고 맡긴 거 아니냐… 다윗이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 자리는 오로지 하나님을 통하여 올라가게 된 자리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권한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자리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섬기라고 하나님께 위임 받은 자리이며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정말 그 많은 풍성한 것들을 다 다윗에게 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이게 부족하면 말만 했으면 내가 더 줬을 거다…. 네가 누리는 모든 것 다 내가 준 건데 이렇게 많이 줬는데 너는 이게 지금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운 거냐? 하나님이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느냐… 다윗의 마음을 찌르는 경고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냥 글씨로 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통로이자, 말씀하게 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김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악을 행했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눈을 가렸을지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한 일이라는 것을 다윗은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던 자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자이고 통일 왕국을 이룬 후 인생의 정점에서도 하나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쁨 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던 삶을 경주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처절하게 한 방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없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사람들의 눈만 가리면 되고,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악을 두 가지로 명시해 주십니다. 살인죄와 간음죄….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은 한 번도 직접 칼을 들고 우리아를 죽인 적이 없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고 본인이 직접 칼을 휘두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 이것을 아무 문제 없다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분명한 악이었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바라보는 생각이고 다윗이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는 방식일 뿐이고 하나님이 바라보신 평가는 뭐였습니까?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이지 다윗이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다윗의 죄는 뭡니까? 네가 우리아를 죽인 살인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왕이라는 자리와 권한 스스로 남용하여 우리아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야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아내를 빼앗아 너의 아내로 삼았다….그 방법은 왕의 권한 남용과 간음죄임을 실랄하게 지적합니다. 음욕이 다윗의 마음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면화 되어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주목하며 마음에 심기우며 파괴적인 결과가 결국 간음 죄를 범하고 분별력을 상실하고 그 부인을 빼앗아 와서 자기의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너에게 지금 아내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 두명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살인에 간음까지 하면서 남의 아내를 빼앗아 오냐….하나님의 탄식과 안타까움의 경고입니다. 너는 살인자이고 간음자…이게 바로 지금 다윗이 하나님 앞에 받는 평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다윗의 지은 살인죄와 간음자, 그 죄에 대한 결과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여 주십니다. 칼이 집에서 떠나지 않고 너의 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억지로 동침하는 일이 백주 대낮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너가 하나님 앞에 행한 간음죄와 살인죄가 얼마나 크게 두고두고 너의 집안에 화근이 될지 네가 보게 될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무서운 결과가 있고 무서운 상처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모든 문제가 지나가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다윗왕에게, 자신은 죽이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윗왕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미혹 할 때 그가 거절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리요…아무도 보지 않는 그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계심을 분명히 붙들고 간음의 죄를 거절했습니다. 그 요셉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계속 득죄하면서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득죄했는데도 그것이 문제인지 모르고, 회개할 수 있는 여러 기회들을 다 날려버리며 그것을 핑계와 정죄의 도구로 날려버릴 정도로 다윗은 영적으로 둔감해졌고 영적 감각이 다 마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상관하지 않고, 사람들이 뭐라 그러지 않으면 괜찮고 문제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으로 찌르시며 깨우시는 겁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그 하나님의 평가에 그 다윗 왕이 서도록 직면하게 만드시는 거죠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민감하게 체크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영적감각이 마비되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망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다 그러면 좋고, 사람들이 문제 없다 그러면 문제 없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존하시는 존재로 분명히 믿고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의 특권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인식하며 민감하게 바라보고 체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영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며, 영적으로 맑아지고 밝아지는 것이며,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비결입니다. 내 영적 감각이 살아나고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고 말하는가에 나의 인생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많은 것들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신 놀라운 은혜와 놀라운 일들이 무감각해지고 당연해지면 내 삶의 불평만 올라옵니다. 당연한 삶에는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얼마나 많이 부어졌는지, 얼마나 풍성히 나에게 주셨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 은혜의 시간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는 다윗을 향한 나단 선지자의 지적이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지적임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다 주관적이고 부분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임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중하게 여기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삶을 살아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 가느냐가 내 삶의 평가 기준이라는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이 다윗의 실패와 무너짐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 시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회복되며 주님 앞에서의 삶을 선명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11장 말씀은 다윗 왕이 했던 여러 일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굉장히 악한 행동을 계속해서 하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다윗왕을 경고하면서 12장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덮어졌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였고 사람의 눈들은 다 덮은 거 같이 보였는데 하나님에게는 하나도 덮어지지 않았고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시는데 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적어도 1년은 지난 후에 지금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 사이에 다윗왕의 의해 우리야가 죽었고 장례를 치렀고 밧세바를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았고 그 밧세바가 아기를 낳게 되니 적어도 1년이란 시간은 지난 겁니다. 그게 11장과 12장 사이에 간격이고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기다려 주신 겁니다. 다윗 왕이 스스로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년이 지나도 다윗왕은 회개하지 않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악한 일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눈을 가렸으니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고 시치미 뚝 되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다윗이 그렇게 잘못하고 나서 바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구나 생각하시면 안 되고 기다리시다 기다리시다 마침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으셔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 왕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회개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나단 선지자를 다윗왕에게 들어야 하는 쓴 소리를 하게 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고뇌와 갈등을 가지고, 두려움과 떨림을 뒤로 하고 다윗왕에게 마침내 나왔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왕은 예전에 영적으로 민감하고 하나님께 순전했던 그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왕은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져 있고 둔감해져 있었습니다. 듣기 좋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들어야만 살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바로 선지자가 가지고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철저하게 가리고 있으면서 문제의식이 없고,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죄를 드러내는 원인이 될 수 있는 우리야를 이유 없이 간접 살인을 했기 때문에, 왕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게 되면 나단 선지자도 죽을 확률이 굉장히 많은 겁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둔감하고 죄를 덮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나가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 다윗 왕 앞에 가서 왕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도록 부름 받는 자가 나단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선지자에게는 왕과도 백성들과도 창조적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가능하면 가까이 있는 게 좋습니다. 서로 얼굴 보기도 싫고 외면하고 싶고 그러면 은혜가 서로 담기지 않아요.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가 좋아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반드시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간격이 있어야 되냐면 창조적 긴장관계를 주는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는 어디까지만 친해져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보다 더 친해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가셔야 돼요. 만약에 내가 우리 목사님하고 이렇게 친해져서 하나님보다도 더 친해진다 그러면 창조적 긴장관계가 사라지는 것이죠. 그러면 그 목회자를 통하여 듣기 싫어도 나를 살리는 소리는 못 듣고 듣기 좋은 소리 밖에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하고 친하고 사람들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게 중요한데 어떤 사람들과도 하나님보다 더 친해지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고 가장 친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복 중의 하나가 뭐냐면 사람들과의 관계와 친밀함이 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2년간의 삶을 통하여 내가 가장 친해야 되는 분은 하나님 이시구나…라는 것을 믿음의 사람들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해도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간격을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간을 주고 그 사이에 예수님이 딱 들어가 계시지 않으면 이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이 창조적 긴장관계를 가지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적절하게 친해지는 게 좋습니다. 신앙 생활 할 때 목회자와 창조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여 들어야만 사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관계, 그 진리의 쓴소리를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 서로가 살아나며 믿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과 친한 성도 되는 것임을 꼭 붙드십시오. 나단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명령이 죽을 수도 있는 얘기라는 것을 알고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윗 왕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다윗왕에 가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바로 전하기 전에 1-6절까지 긴 이야기 하나를 전합니다. 왜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직접 왕의 죄를 얘기하지 않고 그 긴 예화를 꺼내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왕이 자신을 돌아보고 비추어 보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자신을 비춰보지도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철저히 둔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완전 마비되어 나단 선지자가 왜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벽 예배 중에 말씀이 선포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비춰보는 빛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는 대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모든 영적 감각과 영적인 민감함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나온 반응은 참 웃기고도 슬픈 반응입니다. 크게 화를 냈고, 그 사람을 죽여야 된다고 막 열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다윗 왕이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인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 이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화가 많이 났는가? 겉으로 봐서는 왕으로서 정의롭고 의로운 분노였고, 불쌍한 사람을 품는 거룩한 분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윗의 분노는 정의롭고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나단의 경고를 자신의 마음에 비춰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이자 그 얘기를 듣고 마치 남의 얘기 듣듯이 듣고 있는 영적 무감각의 현주소일 뿐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지금 자기 죄는 둔감하게 그리고 남의 죄는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정도로 화가 났는가 하면 이 일을 행한 자가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말할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양을 뺏어 가지고 대접한 일이 잘못한 일은 분명하나 죽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법에 따르면 4배로 갚아 주면 되는 일이었는데, 왜 다윗은 그렇게 화가 나서 이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있고, 그 적용을 자신에게 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분노의 대상은 다윗왕 자기 자신이어야 되는 것인데,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남의 죄에 이렇게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이렇게 다윗왕이 크게 노하고 죽여야 된다고 열을 내고 있는 그 현장에 나단 선지자를 찬 물을 끼얹듯이 한 마디도 선포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아마 이 순간 다윗은 아마 인생의 가장 시계가 천천히 가는 슬로우 모션과 같은 시간, 아니 시간이 멈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시간이 그에게 경고로 임한 것입니다. 그 부자가 당신이고 그 빼앗은 죽어야 마땅한 그 자가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하늘로 부터 정확하게 주시는 거예요. 당신이 그 사람이다…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 십자가 주변에서 뭘 하는지 모르고 예수님을 향하여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자, 소망 없이 살아가는 어둠의 사람,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결박된 죄인의 괴수가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씀 앞에 우리가 엎드리면 사는 거고 그것을 남의 얘기로 들으면 죽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핑계의 기회와 정죄의 기회로 날려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신 말씀을 나에게 비춰 보이는 대신 남에게 비춰보며 화를 내며 저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비춰 보십시오. 내 생각을 붙드는 대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영적 감각이 살아나고 영적으로 깨어 있고 민감해져서 다윗과 같이 회개의 기회를 날려버리며 무너지는 안타까운 삶을 단절하십시오. 다윗을 반면교사 삼아 당신이 그 사람이다…그 말씀을 내가 받고 고꾸라질 때 나를 살리는 복된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살아 있어 말씀을 통해 이런 변화가 내 삶에 선명하게 일어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회개하는 대신 본인의 죄를 덮기 위해서 또 다른 제2의 제3의 죄를 계속 짓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말씀은 증언합니다. 다윗이 보지 말아야 할 여인을 주목하여 봄으로 음욕을 타고 그 모든 악한 것이 들어와서 다윗을 죄악으로 움직이는 힘이 되어 버리며, 변질 시키고 무너뜨리는 파괴적 힘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자리, 그 무너진 죄의 열매를 맺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으면 사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실패했습니다. 대신 그가 한 것은 마치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며 악인의 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집으로 호출해서 집에서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목숨걸고 전쟁하는 우리야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자신의 죄를 가리고 숨기기 위해…그런데 그 계획이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로 계략을 세웠던 건 우리야에게 술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는데 또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두 번 계획이 꺾이게 되면 아 이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정신 차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어두워지고 마치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 착각하는 다윗은 모든 영적 감각들이 다 마비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죄의 현장 앞에서 이렇게 막으시는 하나님의 그 손 가운데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두 손들고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그 회개의 길을 가지 않고 또 다른 더 끔찍한 악인의 꾀를 계획하게 됩니다.
다윗은 또 한번 왕명이 담긴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는 뭐냐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맨 앞에 세워 죽이라는 명이 담긴 편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고 보호하라고 다윗에게 왕으로서 맡겨진 자리와 맡겨진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살리고 보호하기는 커녕 왕이라는 권한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자기를 위해 백성을 죽이는데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전쟁을 통해 죽게 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누가 죽이는 것인가 하면 다윗왕이 죽이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전쟁터의 현장에서 전사하며 죽기에 다윗이 죽인 게 아닌데, 사실 다윗왕이 죽게 만드는 간접 살인인 것입니다. 악한 자의 꾀가 이렇다는 겁니다. 겉으로 봐서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었던 것이죠. 하나님께 순전했던 다윗 왕이 이렇게 한 방에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눈으로 가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겉으로 그냥 멀쩡한 것처럼 계략을 통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죽이는게 아니라 마치 본인은 죽이지 않는 것처럼 간접 살인으로 몰아가면서 자신을 위협했던 우리아를 제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이유도 모른 채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우리야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왕이 보인 반응은 놀랍기만 합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사람들은 다 칼로 죽을 수밖에 없다…마치 자기가 계획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더욱 열심히 싸워서 그 성을 함락시키고 담대하게 나가서 싸우라 명합니다. 어떻게 다윗이 이렇게 뻔뻔해질 수 있습니까? 과연 이 사람이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 하나님께 합한 자, 순전한 다윗이 맞는가? 본인이 우리아를 죽이게 된 장본인인데 본인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속으로 안도하고 좋아하고 있는 그 속마음이 보이십니까? 이게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죄의 비참하고도 파괴적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 거짓의 사람으로 살게 될 때 이렇게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권세가 지금 다윗왕에게 놀랍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과 달리 뻔뻔하지 못한 밧세바의 모습을 말씀은 선명히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들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왜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을까요? 당연히 남편이 죽었으니까 슬퍼해서 울었습니다. 단지 그 남편이 전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 우리야가 억울하게 말도 안 되게 죽었다는 것을 밧세바는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몸에 자라고 있는 아이가 이 우리아의 아기가 아니라는 것도, 전쟁터에서 이유 없이 호출되어 자기와 함께 동침하도록 강요받은 것도 알고 있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동침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 하려고 했던 우리아가 당했던 결과는 뭐냐면 전쟁터에 나가서 억울하게 죽은 것을 밧세바는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슬퍼하며 통곡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결론은 다윗의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입니다. 전사한 우리야의 아내를 거둬서 왕궁으로 데려와서 부인을 삼습니다. 이 끔찍한 일이 사람들 눈에는 별 큰 문제 없이 마무리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거둔 씨앗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지금 잘 마무리 된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의 계획은 성공적인 것 같이 보였는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이 정확하게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있어서 늘 중요한 질문들, 하나님은 나에게 왕이신가,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 하나님을 나는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이 본질적 질문에 모두 실패하고 무너진 한 사람이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야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사실 죽어야 하는 사람은 다윗왕인데 죽지 말아야 되는데 우리야는 억울하게 죽었던 것이죠. 가인의 손에 아벨이 억울하게 죽은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순전하게 살았던 다윗왕, 하나님을 향하여 열망을 가졌던 그 다윗 왕이 하루아침에 변질되고 무너지며 죄의 권세에 눌려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악한 음식을 영의 눈과 귀를 통해 마음에 담아 꼭꼭 씹게 되면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 다윗을 움직이는 파괴적인 힘이 되고 있는 비참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뭐냐면 실패와 실수와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가리고 거짓을 가리려면 구구절절 변명해야 될 게 많습니다. 죄를 덮으려면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지면 우리도 하루 아침에 변질되고 이렇게 무너질 수 있음을 잊지 말고 경각심을 가지고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 삶에 왕이 아니신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고 이렇게 철저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눈물의 자리, 죄를 지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그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돌이키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다시 한번 새 출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다윗의 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변질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삶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고 계시는 그 주님을 붙들고 무너지고 죄진 자리에서 주님을 향해 두 손 들고 돌아가 새 출발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크게 무너지기 전에 그에게 있었던 영적 전조 증상이 있었음을 배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전조증상을 무시하고 다윗은 죄가 열매를 맺도록 방치하였고 결국 밧세바라는 여인을 궁으로 데려와서 동침하게 되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딱 한 번 실수했고 딱 한 번 잘못했는데 그 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애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딱 한번 실수 했는데 아이가 생길 수 있습니까? 딱 한번 내가 잘못했는데, 딱 한번 내가 일탈했는데, 딱 한번 내가 혈기를 부렸는데 어떻게 일이 그렇게 커질 수 있습니까? 인생이 그렇다는 겁니다. 딱 한 번에 그 실수와 딱 한 번의 죄가 걷잡을 수 없이 일을 크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 밧세바가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다윗이 하나님이 경고로 생각하고 그 죄진 자리 무너지고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으면 그는 살아날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 저 잘못했습니다…저는 죄인입니다…고백하며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일이 이 정도로 커지고 그렇게 나라 전체가 고통받는 그런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비극은 물론 밧세바와 동침하며 큰 죄를 짓는 것에 있습니다만 동시에 그 죄를 짓고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대신 그 죄를 가리기 위해 두번째, 세번째 죄를 계속 짓는 패턴에 빠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을 때 주여 절 죽여 주시옵소서… 고백하며 그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으면 일이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회개대신 하나님 낯을 피하고 숨고 가리고 핑계와 자기 합리화로 무너지는 것, 그게 바로 죄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죄의 속성은 한번 죄 짓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죄를 가리기 위해 또 죄를 짓는 패턴에 빠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그 자리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자기 합리화를 위해 계속해서 죄의 사이클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 위대한 다윗 왕이 큰 죄를 짓고 나서 한 무너짐의 패턴이었습니다.
다윗왕이 죄를 가리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 사용한 방법은 뭐냐면 공권력/왕권 남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 주신 왕권은 자기가 잘나서 올라간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명을 위해 잠기 맡겨 주신 자리,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잘 섬기라고 위임된 권한이자 자리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위임된 권한과 자리를 계속 해서 죄를 짓고 죄를 덮기 위해 사용하는, 소위 말하는 공권력 남용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권력과 왕권을 남용하며 그가 가져온 계획은 아주 얄팍한 계획, 악인의 꾀였습니다.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아를 집으로 호출하여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어명을 내리는 겁니다. 겉으로는 우리아를 호출해서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물어보는 척, 백성들과 군인들을 위하는 척 합니다. 우리아를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하라고 어명을 내리면서 우리아를 위하는 척 합니다. 왜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집으로 불렀습니까? 왜 우리야를 집에 가서 아내와 함께 쉬라고 어명을 내렸습니까? 다 새빨간 거짓말들입니다. 전쟁의 상황이 궁금해서도 아니었고, 전쟁에서 우리 군사들이 잘 싸우는 걸 정말 알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아가 전쟁에서 너무 고생했으니까 집에 가서 재충전해서 다시 가서 열심히 잘 싸우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이건 다 그럴듯한 포장이고 실제 다윗의 본심은 우리아를 집으로 돌려보내서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게 만들어서 자기를 통해 생긴 씨앗을 우리아 때문에 생긴 아이처럼 덮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자기의 죄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데 본심은 결국 자신이 지은 죄를 덮기 위한 악한 자의 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사람이 복음서에 등장하는데 바로 가롯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한 여인이 아주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있는데, 겉으로 봐서는 의로움에 불탄 한 사람 가룟 유다가 막 화를 냅니다. 이 비싼 돈 왜 이렇게 허비하고 낭비하냐고…이 정도 돈이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데… 막 몰아세웠습니다.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었지만 가롯유다의 본심은 헌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 악인의 꾀에 빠지면 우리가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오고, 겉으로는 그럴듯한 포장을 하는데 진짜 본심은 나의 죄를 가리기 위한 나의 합리화와 변명, 나의 악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계획대로라면 그 왕의 명령을 받고 우리아는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 계획에 우리아가 따라가질 않는 겁니다. 집에 가서 아내 밧세바와 동침을 했어야 되는데 전쟁터에서 수고한 우리아가 집을 내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야는 분명히 어명을 받았습니다. 근데 왕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집에 들어가서 자는 것을 거절하는 겁니다. 악인의 꾀가 지금 먹히질 않는 겁니다. 다윗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겁니다. 집으로 내려가는게 아니라 자기 부하들과 함께 자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 집에 안 내려갔냐고 이걸 또 물어봅니다. 집으로 내려가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는 것도 참 안타깝습니다. 그때 다윗에게 전달한 우리아의 대답은 신하의 말이 아니라 마치 선지자가 다윗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얼마 전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저 목욕하는 여인이 누군가 알아봤을 때 그 신하들이 대답했던 말이 저 여인은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였습니다. 그 말은 그냥 사실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왕이시여 저분은 아녀자이며 남편이 있는 우리아의 아내, 그것도 전쟁에 나가 싸고 있는 군인의 아내가 아니니이까….신하의 입을 통해 선지자와 같이 다윗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신하의 고백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으면 다윗은 죄에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근데 그걸 무시하고 큰 죄를 지며 무너졌습니다. 또 한번 하나님은 우리야를 통해 다윗의 마음을 찌르시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군사들이 목숨 걸고 전쟁 중이고 나의 상관 요압도 고생하며 밖에서 자고 있는데 어찌하여 내가 지금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며 내 처와 자리이까….영적 전쟁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내가 어찌 지금 집에 가서 먹고 마시며 처와 잘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지자의 음성으로 받았으면 다윗은 그렇게 심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번 다윗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그 경고를 무시합니다. 대신 그가 한 행동은 또 다른 악인의 꾀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아를 불러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 취하도록 막 마시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아가 당연히 자신의 이성을 마비되어 집에 들어갈 거라고 계략을 짜고 꾀를 낸 것입니다. 근데 안타깝게도 그 두 번째 꾀도 실패를 돌아갑니다. 술을 취하도록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지켜야 될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우리야의 모습과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다윗 왕이 너무나 대조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 바라보고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사는데, 항상 합리화시키고 감추고 또 다른 죄로 덮으려 하는 죄의 사이클에 들어가게 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눈이 가려져 하나님 나와 지금 함께 하심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자처럼 계속 죄를 덮으려고 하고 가리려고 악인의 꾀를 내며 완전히 무너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죄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죄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단이 주는 잘못된 생각이자 미혹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고 얼마나 많은 죄를 계속 지으며 얼마나 악인의 꾀에 빠져 큰 희생을 치르게 되는지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해야 될 선택은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죄진 자리, 무너진 자리, 실패한 자리에 주저 앉아 있습니까?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그 현장에 있습니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이며 하나님께 돌아올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그때 하나님께 엎드리면 삽니다. 죄를 가리거나 숨기거나, 죄를 덮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으며, 죄짓고 무너진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회개하며 돌아와 새 출발의 기회를 얻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빠졌으면 하는 말씀이고 다윗의 인생에서도 빠졌으면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합한 왕, 구약 전체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앙의 거목 다윗의 인생이 한방에 훅 가는 아주 안타까운 말씀이자 다윗의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흑 역사입니다. 불경 같은 것을 보게 되면 나쁜 이야기가 거의 없이 좋은 얘기들로 가득한데 성경에서는 이런 부분을 빼지 않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좋은 면과 부끄러운 면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우리에게 증언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들은 남의 실패를 통하여 자신에게 배움과 반면교사를 삼는 자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남의 실패가 아니라 결국 자기가 실패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배움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스스로 실패를 경험해도 그 실패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다른 사람의 실패를, 그것도 그 위대한 다윗 왕의 실패를 말씀으로 주시는 이유는 다윗 같은 사람도 무너지는 실패를 통해 배움과 반면교사를 삼으라는 주님의 뜻과 마음이 깊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다윗과 밧세바 사건의 무너짐, 다윗 전체 가문과 이스라엘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 사건을 며칠 동안 말씀을 통해 마음에 새길 때, 타인의 무너짐과 실패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반면교사가 되는 지혜로운 성도로 우리가 깨어 말씀을 받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기 전에 있게 된 세 가지의 영적 전조 증상에 대해 증언합니다. 얼마 전에 터키에서도 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전조 증상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일에도 이렇게 다윗 왕이 완전히 한 방에 훅 가고 무너지기 전에 조짐을 보여주는 영적인 전조 증상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확 무너지기 직전에 있었던 세 가지 전조 증상에 대해서 증언하는데 첫번째는 영적 전쟁에 혼자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전쟁에 솔선수범하며 나를 따르라…앞장섰던 다윗 왕이 혼자 나가지 않고 본인은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이제 승승장구하고 모든 게 안정 됐으니까 모든 전쟁에 따라 나가야 될 필요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강조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를 깊이 새겨보면 이 전쟁은 왕이 나가서 싸워야 되는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왕들이 나가서 출전하는 전쟁인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혼자 있었다는 겁니다. 아랫사람들만 보내고 자기는 편하게 예루살렘에 남아 보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왕의 영적으로 무뎌지고 나태해 지고 있는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전조 증상이었음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영적 전조 증상은 저녁때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난 것, 즉 그의 영적 게으름이었습니다. 다윗왕이 있어야 될 영적 전쟁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 혼자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을 넘어 그가 저녁이 되서야 침상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밤에 늦게 자도, 아무리 잠을 좀 설쳤어도 웬만하면 12시 전에 다 일어납니다. 그런데 저녁에 일어났다는 건 밤새 놀고 아침에야 잠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 중에 하나가 뭐냐면 새벽에 나오기 위해서 반드시 저녁에 일찍 자는 습관을 주는 것입니다. 일찍 잠에 드는 습관이 들지 않으면 새벽 기도는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영적 민감함과 영적 부지런함을 몸에 체득하게 해주는 게 새벽 기도의 유익인데 새벽 기도하는 왕이었으면 저녁에 이렇게 침상에서 일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 다윗은 새벽 기도를 안한 것 뿐 아니라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밤새 놀고 아침에야 잠에 든 겁니다. 아침을 넘어 점심에도 못 일어나고 저녁 때야 일어난다는 것은 다윗의 영적인 나태함과 게으름의 불길한 조짐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영적 전조 증상은 보지 말아야 할 것에 눈이 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영적 나태함과 영적 게으름의 틈을 비집고 눈에 들어온 것은 목욕하는 여인입니다. 그 당시에는 망원경도 없는데 저 멀리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뭐냐면 내가 영적으로 게을러지고 나태 하며 있어야 할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그렇게 보지 말아야 될 것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녁 때에 이 일이 일어났는데, 저녁때에 일어났다는 것은 시간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바로 다윗 왕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의 마음이 이렇게 어둡고 죄에 끌리는 어두운 상태가 되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이 시간 주목하고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가가 내 영적 상태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을 보게 되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을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복 없는 어리석은 자는 그러면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 왕이 바로 이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세가지 영적 전조 증상들을 통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간 다윗왕, 여기서 딱 멈췄으면 생각 만으로 범죄했기 때문에 죄가 겉으로의 열매를 맺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은 이 마음속에 있었던 영적 전조 증상이 눈에 보이는 열매로 맺는 길로 나아가며 완전히 무너집니다. 내 눈에 목욕하는 여인이 들어왔다면, 이런 상황이 있을 때 영적으로 깨어 있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정신이 확 들며 빨리 잊어버리면 됩니다. 다윗 왕 본인에게는 이미 여러 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어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다윗왕은 이미 죄인의 길에 서 버린 겁니다.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미혹을 받고 나서 선악과를 볼 때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은 빛도 하였습니다. 지금 사단의 미혹이 틈을 비집고 다윗에게 들어가고 나니까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어두워져서 목욕하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겁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는 선악과가 되버리고 말았고, 그 죄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머무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여인을 알아보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 통해 그 여인이 누군가를 알아보게 합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자기의 권한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자리, 위임된 자리입니다. 백성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그런데 지금 다윗은 왕이라는 지위와 권한을 죄를 짓기 위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이 여인은 처녀가 아니라 남편이 있는 기혼자였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이 말을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로 다윗이 받았으면 여기서 멈추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읽어보면 그 전령이 다윗 왕을 깨우는 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통하여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여러분들을 이렇게 깨워 주시는 말씀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딱 멈췄으면 사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불행은 이 경고를 듣고도 여기서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는 것을 넘어 사자를 보내 그 여인을 데려와서 결국 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남편은 지금 자기가 나가야 되는 그 전쟁 현장에서 목숨 바쳐 싸우고 있는 군인인데 다윗왕은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치열한 현장에 있는 그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 여인을 통하여 범죄의 씨앗을 뿌리며 하나님 앞에 한 방에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자입니다. 그런 다윗왕도 이렇게 영적인 전조 증상이 있는 것을 방치했고 죄로 발전되는 것을 방치하여 밧세바를 데려와 동침하며 죄의 열매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이렇게 무너진다면 저와 여러분들 같은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 배우고 반면교사를 삼아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깨어나는 지혜가 있기 원합니다.우리 인생의 문제는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될 자리가 있는데 그 기억하고 지켜야 될 자리를 떠나면서 생기게 되며 그곳에서 영적 균열과 틈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될 자리들을 하나님은 알게 하십니다. 그게 예배 자리이기도 하고 기도의 자리이기도 하고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지키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성도됨을 살아내야 되는 자리들 이 있는데 그 자리들을 기억하고 지키지 않고 떠나게 될 때 이렇게 영적인 전조 증상으로 우리에게 오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일이 벌어지기 전에, 크게 무너지기 전에 항상 영적 전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새벽기도가 그 영적 전조 증상을 알아차리고 영적 나태함과 영적 게으름에서 깨어나 주님 앞에 돌아오는 시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왕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예전 눈물 젖은 빵을 먹었을 때 어려웠던 자기를 도와줬던 사람을 잊지 않고 호의를 베풀며 조문을 보냈습니다. 왕의 사람들을 보내면서 고마운 마음을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 진심과 호의를 의심하고 이 다윗의 사람들을 스파이로 몰아 세웠습니다. 이 사람들이 문상을 온 것이 아니라 나라를 정탐하고 정복하려는 나쁜 의도로 왔다고 몰아세우고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 잘 나가고 승승장구할 때 내가 어려울 때 받은 도움들을 잊어버리고 망각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이렇게 좋은 의미로 선의를 가지고 어려웠을 때 도움을 감사로 표현할 때도 나의 선의를 악의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고 행동했는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렇게 선의를 악의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하몬이라는 왕은 먼저 다윗을 향하여 연합군을 조직해서 공격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지금 다윗왕에게 잘못했다는 걸 알고 소위 말하는 용병들을 대거로 고용하는 겁니다. 지금 러시아가 많은 돈을 주고 군인들을 사와서 용병으로 전쟁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에서 용병을 사와서 연합군으로 다윗과 대항해 싸우려 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와 싸우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나라가 합쳐 연합군으로 싸우게 되면 이기기 어렵고, 연합군으로 처들어 온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두렵고 불안하고 벌벌 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장관 요압 입술을 통하여 여호와의 백성들이 가지는 마음 담대함이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너는 담대하라…우리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을 위하여 담대하라….이 담대함이 바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될 말씀입니다.
선의를 악으로 갚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모자라 연합군을 조직해 우리를 치러 오는 가운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을까? 세 가지의 중요한 믿음의 확신이 그 기적의 반응을 가능하게 한다는 걸 발견하게 합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나에게 정말 왕이신가? 두번째, 그 왕이시니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하시는가? 세번째, 내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이 세가지를 머리로 아니면 지적 동의로 믿는 게 아니라 실체로 내가 믿느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진짜 왕이시고, 그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지금 나와 함께하실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일 때 두렵고 무서운 상황 가운데 압도되지 않고 그 가운데 담대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합니다. 지금 다윗과 다윗의 군대가 어쩔 수 없이 연합군을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 이유는 다윗이 보낸 사신들을 오해하고 욕보이고 망신 주며 스파이로 몰아 세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사람들, 다윗이 보낸 사신들을 수염을 자르고 엉덩이를 보이며 욕보이고 망신 준 것은 다윗왕을 욕보이고 망신 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멸시하고 부끄럽게 한 것은 다윗 왕을 멸시하고 부끄럽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자, 이 세상에 보냄받은 사신임을 분명히 안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보냄 받은 자들이 욕보이고 멸시와 부끄러움을 당할 때, 하나님 자신이 당하시는 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분명한 신앙 가운데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은 내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며 하나님이 나에게 왕이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나와 지금 이 시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당하는 일들을 하나님 자신이 당하시는 일로 여기신다는 걸 분명히 믿고 살아갈 때, 담대함의 힘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단순히 내가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게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같이 어려워하시며 아파하시는 “너는 내 사람이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걸 넘어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며 살기 원한다면 왕이신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고 악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이란 하나님의 힘을 철저히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믿고 붙들고 살아가는 게 선이에요. 반대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은 왕이 보낸 사람인데 마치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살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 내 힘을 의지하며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나아가려는 자체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 우리를 악한 길로 몰아가는데 내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라는 걸 망각하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만들어, 얼마 되지도 않는 내 힘과 능력만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를 늘 점검하고 반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맨날 내 뜻대로 살고 하나님 없이 살고 늘 하나님과 무관한 자처럼 살고 있다면 이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특별히 내가 연합군의 적에 우겨 쌓여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거룩한 습관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하나님은 나에게 왕이시구나…나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께 보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매일 내 마음에 새기고 끊임없이 조율하며 사단이 주는 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움직이며 내 힘을 따라 움직이며 내 힘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싸우려 하는 것들 다 내려놓고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며 하나님의 뜻과 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라면 당연히 보내신 분의 힘을 의지하고 보내신 분의 능력을 의지하며 붙들고 살아갈 때 그게 선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한 비결은 내가 누군인가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이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가 상황과 사람들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연합군이라는 환경에 무서워하지 않고 벌벌 떨지 않으며 그 가운데 담대하게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능함을 아는 능력…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 할 수 있는 비결, 사람들이나 환경에 압도 당하지 않는 비결은 나의 무능을 아는 겁니다. 나에게는 힘이 없음을, 무능을 알고 전능 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전능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능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이 승리의 삶이고 선한 삶임을 믿으십시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내 힘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속한 것을 믿으며 나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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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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