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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셉 목사의 새벽묵상

​새벽묵상 "내 진심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9,1-8 | 2-13-2026

2/13/2026

 
오늘 말씀은 소위 말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을 사도 바울이 온몸으로 경험하며 가감없이 마음으로 표현한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배반을 당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게 되는 우리 인생을 돌아 보게 되면 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공감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무관한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생각하는데 내가 정말 믿었던 사람들 나와 가까워서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그런 비난과 비판 혹은 오해를 받게 되면 그 마음에 오는 답답함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딱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쪼개지고 분열되고 나눠지고 서로 비판하며 세상에서도 하지 않는 음행을 하기도 하고 세상 법정으로 나가 소송을 하기도 하고 이것 저것 계속 시비거리가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신전에서 제사하고 유통된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또 한번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갈등과 어려움들이 교회 안에 많이 생기니까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 하면 이런 모든 문제를 제공한 자가 누군가…라는 원인 찾기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며, 전임 목사이자 초대 목사였던 사도 바울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긴 거라고 모든 탓을 돌려버리는 겁니다. 이런 여러 도전들과 문제들 앞에 자신들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우리가 주님 앞에 다시 바로 서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게 아니라 핑계 논리로 사도 바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려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사도 바울은 사실 목사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생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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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 아니냐…. 사도 바울은 다메색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로 부름 받은 후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끊임없이 그의 사도권을 문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2제자도 아니었고 더군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헌신된 일꾼이었던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권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늘 꼬리표와 같이 사도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나의 사도권을 의심해도 적어도 너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내가 분명한 사도 아니냐….이 말을 탄식으로 하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도 바울에게 어떤 자들이라는 겁니까?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사역의 열매이자 증거였다는 겁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내가 사도권을 의심받고 내가 과거가 있는 살인자라고 비난과 욕을 먹어도 적어도 고린도 교회에 있는 너희들에게는 내가 목사였고 내가 사도였는데 어떻게 너희 마저도 나를 이렇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을 넘어 너희 마저도 당신은 사도가 아니라는 이런 말을 막 하고 다니느냐는 겁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고 바쳤던 그 교회에 자신의 수고와 노력은 몰라 주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비난하고 오해하고 몰아세우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답답함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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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도끼와 같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발등을 찍힌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가 모두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권리를 제한한 세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이게 먹을 것에 대한 자유를 스스로 제한한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구원받고 받지 않는 거에 상관이 없고 내가 정하고 부정한 것에도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로 실족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스스로 자유를 제한했던 내 진심을 왜 모르냐는 겁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도들은 다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동역하며 선교 여행도 같이 다녔습니다. 그런 권리가 당연히 사도 바울에게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독신으로 다녔다는 겁니다. 내가 더 부족한 모습이 많으니까 더 순전한 모습으로 쓰임 받겠다고 열망이 스스로 당연한 권리를 제한하며 혼자 그 모든 사명을 다 감당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바라보고…그 진심을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세번 째는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않을 권리가 없겠느냐? 그 당시 대부분의 사도들은 작긴 했어도 분명히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았습니다. 그 사례를 받아 생활하면서 그 힘들지만 어려운 목회를 감당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런 권리가 당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서 월급 안 받고 목회한 겁니다. 스스로 자비량으로 텐트 만드는 일 하면서 그 당연한 권리를 제한하면서 목회한 겁니다. 그건 마치 군복무를 하는데 자기 돈을 내고 복무하는 거랑 똑같다는 겁니다. 군 복무하면 당연히 월급을 받는데 그 당연한 사례비와 월급을 내가 스스로 받지 않고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비량으로 섬긴 이 진심을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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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가 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포기한 사도 바울의 모습인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그런 그의 자기 포기가 반복되니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호위를 계속 베풀어 주면 그 호위가 권리인 줄 아는 게 사람이고요.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이렇게 내려놓는 것을 계속 반복하면 그 사람은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 사도 바울은 늘 저랬으니까 당연히 자비량으로 해야 돼. 당연히 혼자 독신으로 일해야 돼. 당연히 저렇게 스스로 자유를 제안하며 살아야지. 고마워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당연히 여겼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사도 바울이 참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뭔가 부족하고 꿀리는 게 있으니까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거라고 수군대기 시작한 겁니다. 왜 다른 사도들과 목사님들은 다 월급 받고 사례비 받는데 왜 사도 바울은 사례비를 안 받아? 뭔가 부족하니까 진짜 사도가 아니니까 저러는 거야…라는 데까지 나간 겁니다. 나의 호의와 나의 진심, 나의 스스로 권리를 포기함을 몰라 주는 것까진 괜찮은데 이걸 가지고 너희 마저도 나의 사도됨을 의신 의심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거기서 사도 바울이 이게 너무 답답한 겁니다. 그게 비난 사도 바울의 고민이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 많은 헌신자들이 경험하는 동일한 어려움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꼭 사도가 아니고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어떤 분야에서 헌신하고 정말 주님을 향하여 권리를 포기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 많은 헌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고마워하고 수고했다고 말하지 않는 건 괜찮은데 내 헌신은 몰라 주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내 헌신과 자기 포기를 당연히 여기는 걸 넘어 그걸 오히려 의심하고 그거 가지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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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하고 놀라운 헌신의 사람 사도 바울에게도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가장 가깝고 믿을 만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조차 사도 바울을 이렇게 비판하고 비난하고 오해를 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일들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런 일들이 당연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성경 말씀은 이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몸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십니까? 헌신자로 나아가십니까? 이걸 꼭 결론의 말씀으로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 하고 오해 받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로 내가 헌신하고 권리를 포기해도 비판할 사람들, 오해할 사람들은 여전히 비판하고 여전히 오해하더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며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사람들에게 너무 기대하지도 의지하지도 마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에 너무 목마르지도,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에 너무 실망하지도 말고, 오직 좋으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부름 받은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성도와 목회자가 아닌 오직 좋으신 예수님만 있을 뿐입니다. 그 예수님만 바라보고 붙들고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선명히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믿음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8,9-13 | 2-12-2026

2/12/2026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했던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먹는 문제를 오직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풀어야 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갈등과 분열을 만들며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덕을 세우는 사랑으로 푸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면서 우리에겐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한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고백하는 그 신앙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신앙이 분명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내가 무엇을 먹느냐가 나를 정하거나 부정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후 유통된 고기를 먹은 것이 나를 거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냐 먹지 않느냐가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멀어지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게 복음에 기초한 분명한 지식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분명한 지식이 사랑을 통과하여 덕을 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 가체가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잘 사는 게 아니냐 맞냐를 나누는 기준은 분명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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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먹든지 특별히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든지 아니든지 그게 아무 것도 아니다…그러니 난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겁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란 여전히 옛 율법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 유대인 회심자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냐 하면 여전히 옛 습관에 영향을 받고 육적인 것에 끌려 다니며 갈 지자를 그리는 사람들, 이 두 부류가 모두 믿음이 약한 자들이겠죠. 그런 믿음 약한 자들이 봤을 때, 이런 자유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문제가 술 담배의 문제일 겁니다. 술, 담배 문제가 분명히 우리에게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술담배 안 하면 구원받고, 술 담배 하면 구원 못 받고 이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성도들이 술 담배 하는 거 여전히 덕스럽지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말씀대로 믿음이 약한 자들은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님과 장로님이 같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고 있다면, 그게 구원에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게 분명함에도, 그 모습 자체가 덕스럽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은 당연히 실족하게 되고, 당연히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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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가 구원받고 받지 않는 문제, 정하고 부정한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랑을 품고 나아간다면 그 지식에 대한 자유에 스스로 제한성을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자유가 내 주변 믿음 약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사랑 없는 지식이고 교만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닌 게 그 말이 분열과 갈등을 가져오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게 만드는 겁니다. 성도는 사랑 없는 지식을 구하면 안 되고 오직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덕을 세우며 자유에 스스로 제한성을 두며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비단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문제에만 국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계속해서 영적 어린아이에 머물고 갈등과 분열로 신음하는 데는, 사랑이 빠진 지식을 구하고 사랑이 빠진 영적인 은사를 구하며 사랑이 빠진 자유를 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사랑 없는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영적 은사가 그들을 무너지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그들의 자유가 주변 사람들을 실족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유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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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본인이 결단하는 문제 푸는 방법이 정확하게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는 삶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분명히 음식은 구원 문제와 상관이 없어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고 내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음식을 안 먹는다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구원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는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이, 그 자유가 내 주변의 믿음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와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여전히 옛 율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여전히 옛 습관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이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실족한다면 사도 바울은 내 자유를 내려놓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히 고기 안 먹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을 통과한 지식이고 사랑을 통과한 자유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이걸 가지고 서로 싸우고 갈등하며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이 갈라져 있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며 으르렁거리고 분열하고 분쟁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넘어서는 교회의 참된 문제 해결 방식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사랑을 통과한 지식, 사랑을 통과한 자유로 나 중심이 아니라 내 지체 중심으로 모든 걸 내려놓는 겁니다. 사랑을 통과한 지식, 사랑을 통과한 자유를 가지고 그 지체를 배려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으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 지체들을 배려하는 그 자유의 제한성, 지식의 제한성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문제를 푸는 방식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를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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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도 교회에도 풀어야 될 문제들과 일들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잊지 말아야 될 건 누가 옳으냐 틀리냐를 말하기 전에 접근하는 방식이 사랑으로 통과한 지식인지 사랑으로 통과한 자유인지 먼저 분명히 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없는 자유가 바로 내 주변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 중심이 아니라, 내 주변 지체의 중심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지체를 중심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내 자유와 내 지식이 아무리 옳고 정당하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면, 내 자유와 지식을 스스로 제한하며 덕을 세우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경험되고 고백되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다 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내 주변 지체를 위해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내 자유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주변의 지체를 위하여 그게 바로 사랑이 덕을 세우듯 제한된 나의 자유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사랑을 통과한 자유 만이 나를 살리고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것을 잊지 않으며 이 본질의 정신을 붙들고 내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고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심을 알아주심을 믿으며 오늘도 끝까지 그 바른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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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상처 없이 덕을 세운다." 고린도전서 8,1-3 | 2-10-2025

2/10/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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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장 말씀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는 또 다른 문제인 우상에게 바쳐진 문제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참 고린도 교회는 복잡 다단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분열과 갈등, 분파의 문제도 있었고, 교회 안에 음행의 문제도 있었고 또 고소와 고발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먹어도 되느냐 아니냐, 먹지 않는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냐의 사도 바울에게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이 문제가 교회 안에 굉장히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먹는 문제가 왜 그렇게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는가에 대해 맥락과 그 당시 상황을 통해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라는 도시에 납품되는 고기들은 대부분이 우상에게 신전에서 드렸던 재물들을 시장에다 판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육류의 유통 과정에 있어서 알든 알지 못하든 대부분의 고기들이 재물로 드려졌던 것들을 내다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고 변화된 성도로서 제물로 바쳐졌다 유통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되지 않느냐, 이것이 신앙 생화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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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전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거 자체가 찝찝하고 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적 불편함을 넘어서 먹으면 안된다는 강제 규정으로 가거나, 먹지 말아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명제로 가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여전히 중시하며 그것을 문화로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 회심자들이 봤을 때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거 자체가 불경한 것이며 이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기를 먹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먹지 않고 거절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게 그들의 분명한 신앙관 이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 회심자들이 봤을 때는 그게 좀 찝찝하고 불편할 수는 있으나, 우리가 신전에 가서 제물을 바친 것도 아니고, 시장에 유통된 고기를 먹는 것이 우리 신앙에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킬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로 교회 안에 고린도 교회에서 안 그래도 나눠져 있는 유대인 크리스챤과 이방인 크리스챤이 딱 나눠지면서 첨예하게 대립하며 분열하고 갈등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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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아니면 먹지 말아야 되는지 자문을 구하고 있는 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조언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우상에게 받쳐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 너머에 있는 본질에 대해서 먼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덕을 세운다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너희들에게 지식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몰라서 결정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그것이 갈등과 분열과 어려움을 가져오는 도구가 된다는 겁니다. 지식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이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다루니까 교만하게 되며 그것이 교회를 어렵게 하고 갈등과 분열로 가게 한다는 겁니다. 그 지식이 반드시 무엇을 통과해야만 하는가 하면 사랑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사랑을 통과한 지식인지 사랑 없는 지식인지를 먼저 점검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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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표면적인 문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의 문제이지만, 현상 이면의 깊은 본질적 문제는 사랑없는 지식으로만 이 문제를 풀려하는 데 있는 겁니다. 옳고 그름만을 따져 반대편을 적으로 만드는 문제를 다루는 그들 만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이죠. 그들은 사랑 없는 지식으로 교만해지고 그것으로 옳고 그름만을 따지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뭘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랑 없는 지식으로 문제를 만드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는 계속해서 파가 나눠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파가 나눠져 있다는 건 결국 자기 그룹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객체가 되어 사랑 없는 지식으로 교만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만을 의지하게 되면 결국 내 견해와 내 입장을 가지고 교만하게 되어 그것은 갈등과 어려움과 분열을 가져오게 됩니다. 나와 같은 입장과 내 편에서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게 되는 겁니다. 비단 이 우상에게 고기를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사노라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으며 교회 안에서 갈등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며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갈등 관계를 해결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문제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상처 없이 덕을 세운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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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왜 사람들이 자꾸 교만해지고 내 지식을 자랑하고 뽐내려 하는가 하면 결국 알아 달라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대단하고 내가 이만큼 중요하고 내가 이만큼 큰 사람이다…이걸 알아 달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이 알아 주시기 원하는 것에 대한 갈망은 별로 없이, 누가 알아주는 걸 좋아하냐 하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걸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기 원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게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기 원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먼저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아서 섭섭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섭섭한데 알아주는 게 먼저가 아니라 사랑하는 게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과한 지식이 덕을 세우는 것처럼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알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하고 대단한 프로그램을 하고, 많은 것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알아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순종하며 사랑하는 것들, 그것을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거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을 바라볼 때, 바로 그걸 하나님이 알아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분명하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 하나님이 알아 주시지…이걸로 섭섭한 모든 걸 넘어설 수 있는 놀라운 영적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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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기는 사랑 없는 지식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덕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은 지식으로만 푸는 게 아니라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푸는 것입니다. 문제를 다루기 전에 너희는 지금 이 문제를 사랑 없는 지식인 교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덕을 세우고 있는가?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생각하는 지식의 교만함, 내가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사랑 가운데 녹아져야 합니다. 사랑 없는 지식이 아닌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면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답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덕을 세우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될 때 하나님은 나를 알아 주심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구하는 순전한 신앙생활의 본질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 주심이 나에게 가장 큰 복임을 알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무엇을 염려하고 누구를 기쁘게 하는가?"고린도전서 7,32-40 | 2-6-2026

2/6/2026

 
계속해서 고린도전서의 삶의 배경과 자리가 극도의 핍박과 박해, 임박한 종말의 때를 전제로 하는 특수 상황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특수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 살아갈 때 하늘 소속을 분명히 하는 성도로서 영적 원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제 말씀에 이어 오늘 말씀도 계속 증언하고 있습니다. 영적 원리를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외형,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지나갈 것들, 사라질 것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 세상이 주는 것들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아 너무 끌려다니거나 휘둘리지 않는 삶이 바로 영적 삶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영적 원리를 더 증언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을 신경 쓰고 하늘의 일을 주목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늘의 일을 염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삶임을 증언합니다. 즉, 무엇을 염려하고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사느냐는 겁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들은 결국 나의 관심사이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 관심이 없는 것들은 걱정하지도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내 염려가 내 관심사와 나에게 중요한 가치관을 드러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염려하는가가 중요한 영적 원리의 기준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사는가에 있어서도 나에게 관심과 중요한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에 누구를 신경 쓰며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사는가가 우리 삶에 영적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내가 염려하는 것도 내가 기쁘시게 하는 대상도 하늘의 것이 1번이 되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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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항상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고 보이는 것에만 감정을 쏟아붓기 쉽습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일반적인 삶이자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기쁘고 보이는 것 때문에 슬프고 보이는 것 때문에 화도 나고 낙담도 되는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인데 우리가 영적으로 살게 되면 보이는 것만 주목하고 반응하는 삶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에 반응하며 주목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영적 원리를 놓치면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의 것에만 빠지게 된다는 거예요. 즉, 아내를 기쁘게 하고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닌데 남편과 아내를 기쁘게 하는 데에만 정신이 다 팔리고 정신없게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일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열심히 잘 살아가는 게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 성실함과 충실함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에만 모두 정신을 다 쏟고 정신 없이 살아가다 보면 영적 원리라 다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하늘의 복을 세어 보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세어 보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에 반응하는 삶입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주목하며 그 임재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하늘 소속이 분명한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 내가 염려하는 1번이 하늘의 것이 되며 내가 누구를 기뻐하며 살아가는가에 있어서 1번이 하나님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게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신경 쓰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에 우리 관심과 고민이 집중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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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영적 원리와 우선 순위가 흐트러지지 않는 인생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본질적으로 주를 섬기는 건데 까딱 잘못하면 이치에 합당하지 않게 영적으로 흐트러지면서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치에 합당하지 않게 흐트러지게 주를 섬긴다는 건 영적 질서가 무너지고 우선 순위가 흐트러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러고 예수님을 섬긴다 그러는데 늘 질서와 우선 순위가 흐트러지는 거예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누구를 믿고 의지하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흐트러지며 무너지는 인생이 바로 영적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하고 남편을 기쁘게 하고 가정을 잘 섬기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정도로만 중요한가 하면 상대적으로만 중요하고 2번으로서 중요한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혼과 같은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자기 뜻대로 하는 게 중요하긴 한데 어느 정도로만 중요하다는 겁니까? 상대적으로만 중요하고 2번으로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닌데 그것만 있으면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가 흐트러진다는 거예요. 그 가운데 더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바로 주 안에서 나의 뜻대로, 주 안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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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이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가 흐트러지지 않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될 분명한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1번과 2번이 흐트러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1번, 세상 일이 2번, 보이지 않는 것이 1번 보이는 것이 2번, 생명의 떡이 1번, 그냥 떡이 2번이 분명한 인생입니다. 이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가 흐트러짐이 없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적 원리가 분명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다음에 너희의 것을 구하라는 겁니다.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양식으로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원하는 것이 있고 우리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내 뜻과 내 원함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주 안에서 분명하게 통제 받는 겁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조율되는 인생으로 살아갈 때 하늘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며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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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하늘 소속이 분명한 백성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에만 반응하며 주목하며 사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반응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누구를 신경 쓰고 인식하며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아갈까?가 분명한 인생 되기 원합니다. 허락하신 잠시의 시간동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우리가 하늘의 것을 염려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신경 쓰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늘의 일이 우리 고민과 관심이 되는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고민하며 집중하는 삶이 영적 원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신경 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집중하는 삶 나눠지지 않는 마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내 원함과 내 뜻이 주 안에서 통제받는 삶, 그리하여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가 흐트러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내 염려도 내 관심사도 누구를 기쁘시게 할까도 하늘의 것이 1번이 되는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가 흐트러지지 않는 인생, 나의 뜻과 나의 원하는 것이 주 안에서 통제 받는 인생 되어 늘 주님과 감사함으로 동행하며 살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사라진다."고린도전서 7,25-31 | 2-5-2026

2/5/2026

 
오늘 말씀은 하늘 소속이 분명한 성도, 영적 백성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선명히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잠시 살아갈 때, 이 땅이 아닌 하늘을 주목하고,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기 위해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언뜻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는 듯이 여겨집니다. 결혼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구나….생각하기 쉬운데 사도 바울의 관점은 지금 시대가 결혼하느냐 아니냐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예수님 믿는다는 것으로 인한 환난과 핍박이 실체로 있었던 때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미루게 되고 전쟁이 끝나게 되면 결혼이 급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냐하면 전쟁통에 지금 결혼하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가….하면 바로 임박한 환난과 종말이 곧 다가오는 때를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게 산다는 것,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깨어 산다는 건 이 땅에 우리가 이렇게 잠깐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주님의 때가 곧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에 대해서, 타이밍에 대해서 분명한 감각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하늘 소속 백성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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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땅을 잠시 살아가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살아갈 때, 이 땅에서 결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같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집 가고 장가가는 게 죄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닌데, 시집 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몰두하고 그 이상의 삶이 없이 살아가게 되면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 땅에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결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너무 절대 가치를 두고 살아가게 되면 그거 외에는 내 삶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말씀을 보면 부활의 때에는 시집 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하늘의 천사와 같을 거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기의 현장으로,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무엇이고 그 연합의 신비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는 매우 중요한 축복의 제도인 건 분명하지만 그게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혼하는 문제와 같은 이 세상의 일들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모든 소망을 다 두고 살아가는 것이 위험한 인생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은 어떻다고요? 다 지나가고 사라진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말로는 무상이라 합니다. 우리 인생에 변하지 않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영적으로 깨어 살아가는 우리가 붙들어야 될 이 세상을 향한 삶의 가치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다 흘러가는 것들이고 지나가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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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그런 지나갈 것, 사라질 적에 목숨 걸지 않고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라는 겁니다. 결혼을 했어도 마치 결혼 안 한 사람 같이 거기에 너무 목숨 걸지 말라는 겁니다. 결혼이 아무리 소중해도 다 지나갈 것이며, 마지막에 가면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떠나 혼자 남아야 되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무 결혼에 목숨 걸지 말고 반드시 혼자가 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자로 살아가라 권면하는 겁니다. 죽음 앞에서는 나 혼자 가야 되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의 손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두번째로 이 세상 일에 너무 슬퍼 하지도, 너무 기뻐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면 이 세상의 기쁜 일에 하늘을 얻은 거 같고 이 땅에서 슬픈 일이 있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은 겁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처럼 너무 기뻐하게 되고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하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 것으로 천국과 지옥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사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 세상에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너무 휘둘리지 않는 겁니다. 이 세상의 기쁨도, 이 세상의 슬픔도 다 사라지고 다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며 내 소망과 인생의 방점이 하늘에 있음을 분명히 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울고 충분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되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끌려 다니지 말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찾아올 때 삶의 감정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 삶의 중심을 거기에 두지 않게 되면 슬픈 일이 있어도 그 슬픔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이 세상에서 기쁜 일이 있어도 그 기쁨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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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세상 것에 너무 매이지도 목숨 걸지도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매매한다는 것은 내가 열심을 통해 얻게 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내가 돈을 벌 수도 있고 권력이나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무언가 이 세상이 주는 것들을 얻을 때 그것도 없는 자같이 살라는 겁니다. 돈 좀 얻었다고 권력과 명예 좀 얻었다고 거기에 목숨 걸고 그것 때문에 끌려 다니고 휘둘리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오게 되면 많은 것이 바뀌게 됩니다. 가족을 잃고 아내를 잃은 자에게 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큰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모든 가진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음이 눈앞에 오면 모든 게 다 달라 보이는 겁니다. 이거 없으면 큰일 날 줄 알았는데 진짜 아무 것도 아니고요. 이게 있으면 모든 걸 얻은 거 같았는데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겁니다. 성도의 지혜는 그것을 미리 당겨서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임을 분명히 믿고 이 세상 것에 소망 두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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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흘러가고 사라집니다. 이 세상 것들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땅의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고 흘려 보내는 것이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 것을 너무 붙들고 그거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착각하며 살지 않기 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소중하고 귀하지만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져서 그것은 다 상대적이고 사라질 거며 변하는 것이며 지나가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영적 지혜입니다. 이 사라질 것들, 지나갈 것들에 인생의 방점을 두고 거기에 모든 곳을 쏟아붓고 살아가는 삶이 어리석은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영원한 것을 주목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영적인 삶인 것입니다. 세상 것들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기를 소망하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사라질 거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하늘 소속이 분명한 백성입니다. 내 인생의 소망을 이 땅에 두지 마시고 눈에 보이는 것에 두지 마시며 하늘에 두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영원한 것은 주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고 그의 은혜임을 분명히 믿으며 오늘도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내 방식과 스타일을 고집하지도 강요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7,17-24 | 2-4-2026

2/4/2026

 
사도 바울은 7장 말씀을 통하여 그 시대와 상황 가운데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결혼과 이혼, 불신자와 함께 살아가는 문제와 같은 실천적인 문제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토대로 성도의 삶 두 가지의 큰 주제를 결론으로 권면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부르심 대로 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먼저 나눠 주신 그대로, 부르신 그대로 행하고 살라는 겁니다. 부르심 그대로…라는 부분이 오늘 말씀에 세번이나 반복될 정도로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보편적이고 핵심적 삶의 원칙이 있다면 바로 그건 하나님이 각각에게 나눠 주신 그대로, 부르신 그대로 살고 행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곳, 숨 쉬고 살아가는 문화적 상황 가운데 우리가 태어나 자라가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살게 하신 곳, 상황과 환경과 우리가 주어진 자리가 우리에게 부르심을 받은 곳입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곳에서, 부르신 대로 살고 부르신 대로 행하며 살아가되,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절대화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으면 내가 익숙하고 편한 내 스타일과 내 방식이 절대화되어 그것을 고집하게 됩니다. 나에게 절대화된 내 스타일과 방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고집을 부리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 그게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유대인 회심자들과 이방인 회심자들 사이의 도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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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봤을 때는 자신들의 스타일과 방식대로 따라오지 않는 이방인들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게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할례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멀리하고 교제도 하지 않는데 그래도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마음을 열고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밥 먹고 같이 섞어서 지내는 것도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 것이라고 여긴 유대인 회심자들에게, 이방 회심자들이 할례를 받지 것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유대교 배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기에 이방인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림돌이 되었고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 방식으로, 유대인 스타일로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만드는 일이 교회 안에 벌어진 겁니다. 이방인들은 할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 겁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비슷한 도전과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기도할 때 통성 기도를 해야 됩니까? 아니면 조용히 침묵 기도를 해야 됩니까? 찬양을 할 때 두 손 들고 열정적으로 찬양을 해야 됩니까? 아니면 너무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찬양을 해야 됩니까? 나에게 편한 스타일이 있고 나에게 맞는 스타일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손들고 찬양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게 지나쳐서 손들고 찬양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제대로 찬양하지 않는다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영적이지 않다고 규정한다면 그건 내 스타일과 성량을 절대화하고 고집하는 우를 범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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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식과 내 스타일을 절대화하기 시작하며 고집을 부리는 자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내 방식대로, 내 스타일대로 가는 게 나에게는 중요할지 모르나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내 방식과 내 스타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화 할 필요도 강요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방식이나, 내 스타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의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부르신 그대로, 하나님이 맡겨 주신 내 식과 내 스타일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내 문화와 성향에 맞는 내 스타일과 나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로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절대화하고 고집하는 순간, 억지로 짐을 지우는 강요가 일어나며, 내 주변 사람들을 부르심이 아닌 얽매임으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내 식대로, 내 스타일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고 여긴다면 이거 다 십자가 앞에 내려 놓기 원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방식과 스타일을 강요하지도, 그것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오직 부르심에 따라 충성 다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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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 십자가에서 죽으신 핏값으로 건짐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람의 종이 되면 안 되고 상황과 환경의 종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하례를 이방인 회심자들이 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본받고 싶은 전통이 되어 내가 할례를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자원하는 마음이 들면 전혀 문제가 안되는데, 이 할례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며 억지로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게 메이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종이 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 육안으로만 살아갑니다. 육안으로만 바라보기에, 이 땅만 바라보고, 처한 상황과 환경만 바라보고, 내 주변 사람들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물론 처한 상황과 환경이 중요하고, 물질과 이 땅의 필요도 중요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눈에 보이는 것 전부라면, 육안으로만 살아가게 되면, 결국 상황과 환경의 종이 되며 사람들의 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종의 멘탈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종의 멘탈로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돈과 물질만을 의식하며, 사람들만 의식하며 상황과 환경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의 멘탈로 사람들은 자발성이 없는 강요로 자유함이 없는 억지로 살아갑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사람들 신경 쓰고 사람들 눈치 보며 사람에게 메여 살아가고, 상황과 환경에 매어 살아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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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신앙 생활이란 종의 멘탈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강요하지도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마음을 담아 사는 겁니다. 의식적으로 마음을 담아 진심과 전심으로 하는 게 중요함을 알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망으로 하는 것이 영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기 위해, 억지로 하고 강요해서 하는 삶을 넘어 자발적인 마음으로 전심으로 살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각각 나누어 주신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르심 대로 살지 아니하면 이렇게 사람의 종이 되며 상황과 환경의 종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음을 담지 않은 곳에서는 자원하는 마음과 자발성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억지와 강요로는 영적인 일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또한 하늘 소속이 분명한 성도로서, 내가 육안으로만 바라보고 살아가지 말고, 육안과 함께 영안으로 동시에 바라보고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에 묶이지 말고, 사람들에게 묶이지 말고, 처한 상황과 환경에 묶이지 않는 비결은 육안을 넘어 영안으로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럴 때 보이는 것을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내 신앙생활은 마음을 담아 드리는 전심과 진심이 되며, 자발성과 열망이 이끄는 영적인 일이 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심 그대로 살아가며, 종으로 살아가지 않는 자유함을 누리며,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취하며 내 삶의 기준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성도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고린도전서 7,12-16 | 3-2-2026

2/3/2026

 
​오늘 말씀은 임박한 종말론과 특별히 핍박과 박해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직면하는 여러 결혼과 관련된 질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일반적인 상황속에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상황과 환경에 처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조언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런 조언이 나의 개인적 조언이지 주의 명령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나 이혼, 불신자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바울의 조언이 모든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의 말씀이 아니라 이 핍박과 박해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하는 권면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불신자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이혼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그 당시에 초대교회는 아주 소수였고 대다수는 불신자에서 예수를 영접한 회심자들 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믿는데 한 사람은 믿지 않아서 불신자와 결혼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불신자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새 사람이 된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어 복음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너무 크다 보니까 어떤 고민을 하게 되냐 하면, 예수 믿는 신앙이 이렇게 좋으니까 나는 예수님이 너무 좋으니까 결혼 생활을 고만하고 그냥 신앙 생활에 올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나는 남편보다 예수님이 훨씬 좋고, 나는 아내보다 예수님이 훨씬 좋으니까 이건 그냥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게 맞지 않은가….특별히 임박한 종말론이 유행하며 주님이 곧 다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배우자가 신앙생활을 같이 안 하는 게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이걸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생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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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민을 하던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신앙 생활을 이유도 배우자를 버리지 말고 갈라서지 말라는 겁니다. 불신자 배우자와 신앙을 이유도 갈라서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거룩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불신자 상대방이 거룩의 영향력 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불신자 배우자와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 그 가정을 통해 지켜내야 되는 게 바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본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사명을 가지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걸 불신자 아내, 남편만이 아니라 좀 더 확대해 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계속 접촉하고 만나며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서 불신자들을 만나고 관계성을 가지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사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자들이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적으로만 살다가 세상적으로 살지 않는 자들과 대면하게 되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죠. 거룩함으로 영향력을 주며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 이것 때문에 불신자와의 이혼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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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믿지 않는 배우자가 거룩해지는 것을 넘어 구원받을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의 영향력을 주는 것을 넘어 불신자의 배우자가 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불신자와 이혼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불신자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가족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변 이웃들 가운데 불신자의 구원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모든 본질은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를 통하여 그들이 거룩함의 영향력을 받으며 주 예수 이름으로 구원함을 받는 통로가 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믿으며 사라지지 않음을 믿으며 오늘도 가족 구원을 위해, 이웃 구원을 위해 간절히,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기도하라…이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이자 불신자와의 이혼을 신중하게 하라는 조언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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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되도록이면 믿는 자 신자와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이혼을 신중하게 하라고 강조하는 말씀 깊이 숨겨진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 생활에서 불신자와 같이 사는 게 이처럼 어려우니 되도록이면 믿는 자와 결혼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늘 말씀의 고민은 둘 다 불신자였다가 한 사람이 회심하여 믿음의 생활을 시작할 때에 고민이라면 결혼하기 전이라면 믿는 자와 가능하면 결혼하라는 겁니다. 결혼은 가능하면 믿는 자와 신자와 해야 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불신자들과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는 자와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가치 문제에 있어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착해도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 물질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본질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와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괜찮아도 나 중심, 이 땅 중심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 중심과 천국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과 반드시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믿는 자와 결혼하라는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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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불신자 배우자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혼하기를 원하면 이혼 시켜 주라는 겁니다. 둘이 관계가 문제에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건 다 괜찮은데 예수 믿는 신앙 하나가 너무 크게 걸린다는 것이죠. 이것 때문에 난 너처럼 예수 믿는 사람은 같이 살기 싫다…이렇게 갈라서기 원하면 불신자 배우자가 원하는 대로 헤어지라는 거예요. 모든 건 다 괜찮은데 예수 믿는 신앙과 믿음 때문에 걸림돌이 된다면 결국 혼자 사는 게 더 날 수도 있다는 것을 권면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충돌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더 우선순위에 두라는 것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나를 행복하기 위함을 넘어, 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고, 주 안에서 화평을 누리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도구이자 주 안에서 화평으로 이끄는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불신자 배우자, 불신자 가족, 불신자 이웃들을 만나며 그들과 함께 접촉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로 말미암아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기적을 위해 우리는 그 자리에 두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더 나아가 그들이 구원을 받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위해 우리를 그 자리에 두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불신자 배우자와 가족, 불신자 이웃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성도의 존재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이 거룩함으로 영향력을 주며, 구원받는 도구로 그들을 건지는데 쓰임 받으며 이것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리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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