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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예배에 뜨거움이 있었던 교회였지만 동시에 문제와 어려움과 갈등과 분열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5-7장에 계속 강조하는 게 음행에 대한 말씀인데 고린도 교회는 음행의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도전이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 어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냐 하면 세상이 하고 있는 음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 나오는 성도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치리도 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모습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 자발적으로 이혼하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니까 결혼하고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가정을 경시하고 분방하며 마치 독신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게 독신으로 사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이혼을 하겠다 나오는 이런 사람들도 교회 안에 등장한 겁니다. 이 두 극단이 모두 몸에 대한 성경적인 다스림을 잃어버린 왜곡과 변질에서 오는 현상이었습니다. 내 몸도 내 가정도 다스리지 못하고 무너지는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많이 발생했던 겁니다. 이런 특별한 문제와 어려움에 직면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기에, 그런 맥락과 상황을 이해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계획으로 남자 여자가 가정을 이루게 하셨는데 그럼 결혼하지 말라는 권면인가? 모든 사람들이 혼자 지내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이 혼자 지낸다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 특별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께 받은 독신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독신의 은사를 하나님께 받은 자는 그렇게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임박한 종말론이 굉장히 유행했기에, 예수님이 얼마 안 있다 오실 텐데 결혼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에 그런 맥락 가운데 주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한 독신의 은사를 하나님으로 받은 자는 그렇게 결혼하지 않고 혼자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괜찮다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어떻다는 겁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혼은 하는 게 중요하고 결혼을 통하여 내 몸을 지키고 내 가정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음행의 죄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며, 반대로 영적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가정을 뒤로하고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동시에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는 하늘 소속의 백성으로 네 분야를 다스리도록 명 받았습니다. 그 네 분야가 어디냐 하면 내 몸과 마음, 내 돈과 시간, 내 인생에 잘될 때와 어려울 때, 그리고 내 가정과 창조 세계입니다. 이 네 영역이 성도로서 우리가 다스림의 권세를 통하여 잘 다스려야 될 영역입니다. 이 네 영역 중에 몸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 몸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죠.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 당시에 몸에 경시하고 함부로 하는 세상 풍조에 젖어, 몸은 쓸데 없는 것 혹은 어쩔 수 없이 입고 다니는 옷 정도로 여기며 내 몸을 다스리는데 실패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것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사단에게 틈을 주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타는 정욕을 절제할 수 없어서….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음행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핑계였죠. 이런 핑계는 나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고등 동물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부끄러움 밖에 되지 못합니다. 몸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고 음행의 도구로 전락시킨 부끄러움 밖에 되지 못합니다. 사단에게 틈을 줘서 내 몸을 다스리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내 가정을 다스리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 배경하에 오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몸이 정욕에 불타 음행의 도구로 쓰여지도록 방치하지 말고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는 겁니다. 또한 단순히 요즘 시대에 이해하는 이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에 특별한 상황 속에서의 이혼 문제였습니다. 이혼에 대해서 남편과 아내에 대해 평등한 언어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당시에 아내에게는 이혼의 권리가 거의 없었기에 이혼이란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버리면 이혼을 당하는 것이 그 당시에 일반적인 문화였기에, 남편들에게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버리고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그런 세상 문화를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동시에 아내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은, 그 당시 왜곡된 금욕주의로 가정을 내팽개치고 분방하며 살고 있던 많은 여인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결혼하고도 여자들 중에 마치 독신과 같이 분방하고 남편도 가정도 돌보지 않는 자들이 많아진 겁니다. 그렇게 아예 분방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는 이제 나는 남편과 갈라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막 늘어난 겁니다. 그런 맥락 속에서 부인은 신앙을 이유로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분방하지 말고 가정을 지키라는 겁니다. 거룩한 신부로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뭐냐? 지금 너에게 맡겨 주신 너의 몸과 너의 가정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될 가장 중요한 일순위는 너의 몸과 너의 가정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 잘 한다는 이유로 남편과 분방하지 말고, 남편과 갈라서지 말라는 겁니다. 왜 자꾸 몸도 가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자꾸 무너지고 깨지는가? 사단은 오늘도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미혹하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틈을 찾고 있습니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비집고 들어와 몸을 함부로 여기고 경시하게 만들어 몸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함부로 여기고 경시하게 만들어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결혼을 회피하게 만들고 결혼은 미친 일인 것 처럼 왜곡하고 변질시키며, 가정을 지옥 맛보기의 현장으로 계속 만드는 미혹이 가득합니다. 이런 시대와 문화의 홍수 속에서 성도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다스림의 영역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몸과 마음과 내 돈과 시간도, 인생에 잘될 때와 어려울 때와 나의 가정과 창조 세계가 다스림의 영역임을 잊지 마십시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맡겨진 내 가정을 경시하고 내 팽개치는 게 아닙니다.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고 네 몸과 가정을 함부로 경시하지 말고, 내 몸과 마음을 지키고 세우는 것과 우리의 가정을 지키고 세우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금욕주의 폐해와 쾌락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며 성경이 알려 주시는 이 균형과 조화 그리고 다스림의 원칙을 붙들고 내 몸과 가정을 지키고 다스리는 사명에 충성하기 원합니다. 선물로 주신 몸을 잘 다스리고, 가정을 잘 지키고 든든히 세워, 주의 거룩한 신부로, 준비된 가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선명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음행의 문제를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허락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해야 되는 절대 변하지 않는 명령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분명히 알고 그 시대에 맞는 허락을 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7장 말씀은 특별히 그 당시 시대 상황과 문화를 알고 맥락을 이해하는 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중요합니다. 타락과 성적 문란이 가득했던 고린도 한복판에 있었던 교회가 처한 문제와 도전이 무엇이었는가?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이 빠지는 오류 두 가지인 금욕주의와 쾌락주의였습니다. 그 당시 세속화의 물결에 젖어 산 쾌락주의도, 그 물결을 강하게 거부한 금욕주의도 모두 무엇에 근거했는가 하면 우리 몸은 썩고 없어질 거니까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변질되고 왜곡된 몸의 이해에 근거했습니다. 금욕주의는 우리 몸은 썩을 것이고 나쁘고 타락한 거니까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는 옷과 같이 그 몸에서 자유한다는 명목으로 극도의 고행을 한다거나 금욕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어떤 분위기기 교회에서 형성되었는가 하면 신앙 생활 열심히 하고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결혼을 아예 기피한다거나 결혼을 해서도 그냥 혼자 지내는 겁니다. 가정을 다 내팽개치고 가정에서 서로의 의무를 하찮을 것으로 여기는 이런 금욕주의가 교회 안에 팽배했었습니다.
금욕주의와 정반대의 극단은 쾌락주의입니다. 내 몸이 어차피 썩어질 거니까 내 마음 대로 굴려도 된다 여기며, 썩을 이 몸으로 짓는 죄는 영적 구원에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다는 왜곡된 사상에 빠져 쾌락주의가 만연하는 겁니다. 고린도 지역에 타락과 방종에 젖어 살며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나는 영적으로 구원 받았으니 예배 드리러 온다며 부끄러워 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이런 자들이 바로 교회 안에 극단적 쾌락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금욕주의와 쾌락주의가 물과 기름같이 서로 극단같이 보이는데 그 사상적 맥락은 똑같다는 겁니다. 몸을 쓸데 없는 거로 타락할 거로 사라질 것으로 별로 의미 없는 것으로 두고 경시하는 이런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한 겁니다. 몸에 대한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 변질되고 왜곡된 사상에서 금욕주의도 나오는 것이고 쾌락주의도 나오는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와 쾌락주의의 양 극단에 대해 엄중히 책망하면서 몸에 대한 왜곡된 이해, 가정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말씀을 통해 교정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그룹에 대한 이런 극단에 대해서 다 틀렸다고 말하면서 분명한 성경적 기준을 보여 주는 겁니다. 몸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영적이며, 가정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가정을 지키고 세우는 데 있어 남편과 아내에게서 몸이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정을 지키고 세우는 데 이 몸이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남편과 아내가 잊지 말라는 겁니다. 몸은 하찮는 것, 몸은 쓸데 없는 것, 함부로 해도 될 것이라고 여기는 그 당시의 사상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깨는 겁니다. 몸은 내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주도권을 서로가 내어주고 배려하는 겁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기에, 내 몸을 내가 주장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 의견도 내가 주장하는 게 아니듯 내 몸도 내가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몸이니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몸을 주장하는 것은 배우자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을 하는 거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적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고 그 몸에 대해서 본인이 주장하지 않는 삶입니다. 내 몸을 내가 주장하지 않는다는 건 서로 맞춰 간다는 거며 상대방을 위해서 내 몸을 내어주고 배려해 준다는 것이죠. 이건 단순히 성적 문제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전체적인 결혼 생활 전반을 의미하는 중요한 핵심입니다. 내 몸을 내가 주장하지 않듯, 내 의견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맞춰주며 살아가는 삶이 결혼 생활이라는 의미입니다. 내 몸을 내어 주듯 내 인생은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니라 배우자가 주관하도록 내어 주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근거에 의한 건강하고 거룩한 결혼 생활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몸을 내가 주장하지 않는 실천을 위한 구체적 조언을 합니다. 결혼 했으면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금욕주의에 빠져 가정을 경시 여기고 결혼하고도 결혼 생활을 원만히 하지 못하고 독신같이 지내던 여러 성도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신앙이라는 이유로 그냥 혼자 금욕주의에 빠져 분방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많았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맥락을 이해하며 이 말씀을 봐야 합니다. 쾌락주에 빠져서 음행하고도 회개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교회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금욕주의에 빠져 결혼하고도 가정을 내팽개치고 독신같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에는 임박한 종말론도 있었기 때문에 남편을 혼자 두고 아내를 혼자 두고 막 몇 달씩 나가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이 교회 와서 가정이 흔들리는 겁니다. 결혼은 했는데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금욕주의에 빠져 가지고 그냥 분방하고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결혼을 했으면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겁니다. 분방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는 바로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결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어디를 깬다는 거죠? 가정을 깬다는 거죠. 사단이 계속해서 틈을 보이는 곳에 파고 들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고 서로가 원수가 되고 가정을 지옥 맛보기의 현장으로 만들려 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너의 몸을 어떻게 하느냐가 너희 영적 생활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분방할 때는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합의 동안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는 구체적 지침까지 주면서 강조하는 건, 분방하지 않고 서로 합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겁니다. 내 몸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며 내 가정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영적인 삶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을 향하여 추구하는 동반 과정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넘어 거룩함을 향하여 서로가 힘이 되고 지켜주고 붙들어 주는 겁니다. 내 몸을 내가 주장하지 않고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내어주는 것, 그걸 통하여 피차 복종하는 것을 몸소 배우는 겁니다. 서로 의무를 다하며 서로의 몸과 인생을 주장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을 통하여 그것이 서로 피차 복종하여 주님의 마음을 배우도록 가정을 세우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몸을 함부로 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가정을 경시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는 가정을 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가정 생활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는 그 둘이 하나되는 신비를 결혼 생활을 통해 누리기 원하는 게 하나님 뜻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힘은 상대편이 주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몸을 배우자가 주장할 수 있도록 내어주고 배려해주며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서로가 힘이 되어 주는 그 관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주장하고 아내가 남편을 주장하며 서로 지켜주고 붙들어주며 늘 함께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며 서로 거룩함에 이르는 복된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5장 말씀과 긴밀이 연결된 음행의 문제를 부부 문제, 가정의 문제와 함께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라 타락과 세속의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젖어 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아버지의 여인과 음행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고 그런 문제를 7장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을 통해 이 음행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우리는 성경에 가장 근접한 교회라고 여기는데 고린도 교회는 완벽하거나 완전한 교회와는 거리가 먼, 여러 문제들과 도전에 직면해 있는 세상과 밀접한 교회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이유는 후대의 교회들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비슷한 문제를 직면할 때 참고로 갈 길을 보여주시는 큰 뜻이 숨어 있는데 바로 고린도 전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보여지는 교회 안에 성도들의 이런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느냐며 손가락질 하는 대신, 그런 직면한 도전과 문제를 교회가 영적으로 풀어가는 방식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7장 말씀을 보면 첫 세절에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언뜻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어떻게 보면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1절의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절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3절의 “의무를 다하고”입니다. 이 말씀을 배경과 맥락과 무관하게 바라보게 되면 굉장히 오해와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상황 안에서 이 말씀을 주고 계심을 이해하고, 시대 상황과 배경을 아는 것과 말씀의 맥락을 아는 것이 특별히 중요한 게 오늘 말씀입니다. 첫번째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1절의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입니다.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안 하는 것이 좋은가? 하나님은 분명히 창조를 통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통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앉는 것이 좋다는 말씀은 일반론이 아니라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한 상황과 배경에 대한 대답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가 쓴 문제”란 바로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큰 문제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문제를 연관하여 이 권면을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론이 굉장히 유행했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내일 예수님이 오실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지금 당장 그 날을 준비해야 된다는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던 게 초대 교회였습니다. 그렇기에 1절 말씀의 권면은 일반적이고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곧 오시는 임박한 종말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 종말의 때를 대비하는 것은 결혼 문제보다는 예수님 맞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런 맥락과 배경을 분명히 이해 하여야만 말씀과 말씀이 충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두번 째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2절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입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아내를 두고 여자도 남편을 두라니…결혼에 있어서 이 부분이 한 중요한 축이라는 분명하지만 이것을 목적으로 결혼을 한다? 조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혼의 제일 목적이 서로의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이혼의 1순위가 돈 문제와 배우자의 불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게 분명히 중요한 문제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본질적 목적이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인가…고민이 되는 말씀이긴 합니다. 이 말씀 또한 그 당시 만연한 타락과 성적 방종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음행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안다면,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는 깊은 뜻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지역은 음행을 죄라고 여기지도 않았고, 쾌락이나 방종과 문란한 타락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습니다. 고린도 도시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제사는 이 땅의 풍요와 함께 신전의 창녀들과 함께 쾌락을 추구하는 일들을 합법적으로 당연하게 여겼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의 문화와 흐름을 거스르며 하나님 보시기에 음행은 죄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음행은 피해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죠. 음행이 만연화 되어 있고 음행이 합법이어 문제 의식이 없던 그 때에, 교회 안에도 음행을 하고도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는 그 때에 성경적 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교회 안에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음행을 피하는 거룩함을 가지고 싸워야 되는 것을 강조하며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성도와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음행을 피해야 되는 것이며, 그 음행을 피하기 위해 주신 소중한 제도가 결혼임을 잊지 마라 권면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3절의 “의무를 다하고”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결혼 생활에서 음행을 피하기 위한 의무를 다라는 것이죠. 결혼 생활이 서로에게 의무 방어전인가, 서로 의무를 다해야 되는 것이 핵심 목적인가… 하나 하나가 결혼에 대해서도 가정에 대해서도 언뜻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도 그 시대에 유행했던 사조인 금욕주의 대한 지적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금욕주의라는 건 그 당시에 소위 말하는 좀 고상한 사람들이 혼자 고행을 하며 사는 것이 선한 길이고 더 고상한 삶이고 결혼하며 사는 건 2등 시민이나 덜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삶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영적인 것처럼, 결혼하는 삶은 덜 영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런 풍조에 대해 정확한 선 긋기를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말씀의 권면입니다. 결혼 생활이 독신보다 덜 거룩한 것도 덜 영적인 것도 아닌 정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적용되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결혼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은혜의 도구이자 영적 원리의 현장이라는 겁니다.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남편과 아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곳입니다. 남편과 아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붙들어 주는 것, 그게 바로 가정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서로가 지켜주고 거룩할 수 있게 붙들어 주는 것, 그게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는 삶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배우자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지켜주고 붙들어 주는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결혼 생활에 있어서 온몸으로 경험하는 영적 원리라는 겁니다. 무분별한 쾌락과 무질서와 방종으로 무너진 그 시대에 교회조차도 그런 세속화의 물결에 자유롭지 못하고 젖어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강력한 책망을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책망으로 받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합법이라고 하나님의 시선에도 모두 합법인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가 우리에게 항상 절대 기준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음행이 합법이었고 음행을 죄로 여기지도 않고 타락과 문란이 가득한 고린도 도시 한 복판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런 흐름을 거스르고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음행을 피하라고 권면하시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결혼 생활이 서로에게 의무 방어전이 아니라 결혼 생활의 중심이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편 중심, 배우다 중심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영적 원리의 현장임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기준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거룩하고 구별될 삶이 무엇인가를 잊지 말고 성도들에게 가정을 지키고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하기 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면서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이 혼란하고 타락한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비결임을 잊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기준을 붙들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거룩하고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 몸과 영성의 관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몸은 쓸데없고 하찮으며 결국 버릴 것이기 때문 몸으로 하는 어떤 것도 내 영적인 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런 왜곡되고 변질된 사상이 가득했습니다. 또한 내 몸은 내 거니까 내 원하는 대로 제한 없이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이런 왜곡되고 잘못된 사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세상에 왜곡된 사상과 문화에 젖어 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몸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이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알려주신 몸의 본질은 바로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쓸데 없고 하찮지 않고 왜 소중하고 귀하냐 하면 바로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에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지 아니하고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보이지 않는 성전을 담고 있듯, 우리 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겁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임을 분명히 알 때 우리 몸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그 맡겨진 몸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다스림의 영역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우리 몸이라는 그릇을 통해 거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이며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영은 죄와 함께 있을 수 없고 죄와 섞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하고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임재를 사모한다 그러는데 자기 몸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이 성경적 고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몸을 함부로 하고 내 몸을 거룩하게 그릇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 하나님만 구하고 갈망한다면 거기에는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고 싶어도 임하실 수가 없는 거죠. 거룩한 영인 성령은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영이시기 때문에 더러운 곳에 죄를 품고 죄가 쌓이는 곳에 섞이고 임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구하는 태도는 그분을 향한 우리의 갈망과 열망과 함께, 그 분이 오실 준비, 즉 그릇인 내 몸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준비하는 게 필수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싶고 그분과 사귐의 교제를 누리기 소망한다면, 그릇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내 몸은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게 임마누엘 하나님을 고백하는 성도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지금 내 안에 거하신다…는 고백이 교리적 동의를 넘어, 사변적 지식을 넘어, 내 삶을 통과하는 고백적 언어로 믿고 고백하는 삶이 성령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사는 복된 인생입니다. 두 번째로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몸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받은 선물이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내 몸과 마음도 내 것, 내 돈과 시간도 내 것이라고, 내 인생을 내 것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소유권을 나라고 여기게 만드는데 내 몸은 내 거라고 생각하고 내 소유권을 주장하기 쉬운데 성경에서 증언하는 나의 몸에 대한 이해는 내 몸은 내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소유이며 하나님으로 잠시 받은 선물이 내 몸입니다. 이 소유권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내 소속과 다스림이 어디 있는지를 딱 나누는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 다스림의 영역은 내 것인 줄 알고 착각하지만 사실 하나님 것을 잠시 빌린 것임을 분명히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분명히 고백하고 선포해야 되는 부분이 돈과 시간이고, 내 몸과 마음입니다. 내 돈도 내 것이 아니고 내 시간도 내 것이 아니듯, 내 몸과 마음도 내 것이 아니기에 소유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죠. 더 놀라운 건 나의 몸을 값으로 사셨다는 선언입니다. 이 몸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값을 지불하셨다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구원입니다. 내 영혼이 잘되고 내 영혼이 천국으로 이사 가는 거지만 동시에 나의 몸 또한 하나님께서 분명히 값을 주소 사셨다는 겁니다. 내 몸이 소중한 이유가 뭐냐? 내 몸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기 위해 이 몸을 위해 값을 지불하셨다는 거예요. 그것도 큰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내 몸이 소중하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소중하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함부로 하면 안되고 내 마음대로 쓰면 안되는 이유는 내 몸의 소유권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값주고 사신 귀한 것임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몸이 소중한 이유, 몸에 대한 성경의 이해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데 있습니다. 몸과 영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도전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릇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영 대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원론으로 몸 따로 영 따로 이렇게 구별하려 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기를 이 땅에서 잠시 살아가는 우리는 몸과 영을 구별해서 전혀 무관하게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는 겁니다. 본질적으로 몸을 통해 영이 주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내 영이 주를 찬양하는 건 뭡니까? 내 영이 찬양하는데 몸이 같이 찬양해야 내 영도 찬양을 하는 겁니다. 내가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내 영이 몸과 함께 와서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겁니다. 몸이 없이 영만 와서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늘 훈련하고 계속해서 단련하는 건 뭐냐? 내 몸을 단련시키고 훈련하는 거죠. 내 몸이 주도하지 않고 내 영이 몸을 도구로 주도하는 인생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영적 훈련의 핵심이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입니다. 몸이 살아가는 현실과 영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영적으로 더 훈련 받고 깊어 진다는 건 내 몸이 영의 주도함에 따라 쓰임 받는 그릇되고 도구 되도록 단련되고 훈련되는 것입니다. 내 시간을 드려 내 몸이 그 현장에 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몸으로 영광 들리는 겁니다. 내 몸이 움직여 다른 사람의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 남을 위해서 예수 이름으로 헌신하는 것. 주의 영광을 위해 선교지를 가는 것. 이 모든 건 다 영이 주도하지만 결국 영을 담은 몸이 움직이는 겁니다. 내 몸을 함부로 하지 않고 귀하고 소중하게 잘 관리해야 할 이유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나의 몸이 소중한 이유는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내 몸은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만드신 그릇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겁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고 그것을 값 주고 사신 선물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십시오. 내 몸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소유를 분명히 할 때 우리는 나의 몸으로 소중히 여기고 귀히 여기며 다스림의 권세로 몸을 잘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내 몸도 내 마음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되고 잘 관리하고 보호하는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가장 귀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항상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겁니다. 내 몸이 내 소욕을 위한 도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도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소중하게 잘 쓰임 받는 몸의 사용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 성경적 이해를 분명히 붙들고 내 몸을 통하여 소유권을 분명히 하며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며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귀한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것에 민감하면 육적인 것에 둔감하다는 것을 영적 원리로 알려주셨습니다. 영적으로도 민감하고 육적으로도 민감한 건 불가능하기에 민감한 것에 민감하고 둔감한 것에 둔감해야 하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민감할 것에 둔감하고 둔감할 것에 민감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이 아닌 육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에, 내 이익과 유익을 지키는 것에 모든 것을 쏟는 민감한 백성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민감했냐 하면 세상 법정에 나가 고소와 고발을 해서라도 내 유익과 이익을 지키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백성이었습니다. 반대로 얼마나 영적으로는 둔감했냐면 세상에서도 짓지 않는 음행을 짓고도 회개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그런 사람을 교회에서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런 둔감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에 직면했고, 그들은 영적인 것을 구하는 백성이라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노출되어 있었던 영적이지 못한 교회, 영적 미성숙이 가득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교린도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영적 생활에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아주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세속적인 타락의 문화와 함께 이원론의 영지주의가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화학 작용을 일으키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내가 영적인 삶을 산다 하면서 몸을 함부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몸은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제한 없이 나를 즐기면 된다는 이런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이 몸에 소망을 두지 않고 몸은 썩어질 거니까 나는 영적인 것만 구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내 몸은 버려질 것 쓸데 없는 것이라는 여기고, 이것이 좀 더 지나쳐 지니까 내 몸으로 짓는 죄는 내 영적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왜곡 변질되었습니다. 나는 영으로 구원받고 영적인 것을 구하니까 내 몸으로 짓는 죄나 내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은 상관없다는 거예요. 이런 상황 가운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경고하는 메시지는 육과 영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네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 알수록 음행은 피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한 몸과 한 영을 나누고 구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 의미로 한 몸이 된다는 건 한 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과 육이 나누어지고 상관 없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영과 육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 몸을 어떻게 하느냐가 나의 영적 건강과 영적 상태와 밀접하고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관 없이 작동하는 게 아니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음행을 사고 파는 물건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그게 영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향하여 음행을 피하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음행은 내 몸 안에 짓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라는 의미가 뭐냐? 그건 바로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동거나 합방이 아니고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한 영이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동거나 합방 정도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결혼은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내가 만나는 배우자와 합하여 한 몸이 되고 한 영이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결혼을 통해 그리스도와 내가 한 영과 한 몸이 되는 신비를 알게 하시는 영적 모델이라고 정확하게 증언합니다.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몸이 되며 한 지체가 되어 한 영으로 살아가는 게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도의 신비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제도를 주신 겁니다. 그렇기에 음행을 한다는 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돼야 될 나를 세상과 합하여 창녀와 한 몸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몸이 창녀와 한 몸이 되며 세상과 합하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게 음행이기에, 바로 음행이기 때문에 음행을 결코 가벼운 문제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창녀의 지체가 된다는 건 창녀와 몸이 합쳐지는 것이자, 창녀와 한 몸과 한 영이 되는 겁니다. 이걸 본능과 육이 주도하는 인생, 고깃덩어리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타락하여 영적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본능이 주도하는 고등 동물과 다름 없는 고깃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음행은 별 죄도 아니고, 그건 합법이자 당연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며, 내 몸이니까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상관하느냐며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럴 수 없다는 거죠. 우리는 창녀의 지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합한 자며 그리스도와 한 몸되고 한 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며, 내 몸은 음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몸은 누구와 합하는가에 따라 고깃덩어리가 될 수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내 몸이 누구와 합하는가에 따라 내가 세상과 합하여 세상과 한 몸이 되며 세상의 지체로 살아가느냐? 그리스도와 합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로 한 몸이 되는가가 결정되는 겁니다. 우리가 나의 몸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고, 내가 거룩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은 내 몸이 누구와 합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지체가 된다=몸이 합쳐진다=한 몸이 된다=한 영이 된다….이 명확한 그림을 마음에 새겨야 음행을 결코 가벼운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음행이란 내 몸 안에 죄를 짓는 것임을, 내 몸을 창녀와 세상과 합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음행은 세상과 한 몸이 되는 것이며, 창녀와 한 육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몸이 내게 아니니까 빌려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맞춰 잘 관리하고 쓰는 게 성도의 거룩한 의무이자 음행을 피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내 몸을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한 영으로 살아가는 삶이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음행을 가볍게 여기며 돈으로 사고 팔면서 합법이라 여길 때, 내 몸은 내 것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여길 때, 몸으로 짓는 죄는 영적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길 때, 음행을 피하며 단호이 그것을 거부하며 세상을 거스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 성도입니다. 내 몸은 고깃덩어리가 아니고, 그저 고등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주의 몸이다… 분명히 고백하며 내 몸의 소유권을 주께 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 질서와 영적 건강과 영적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귀한 몸을 그저 고깃덩어리로 전락시키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귀한 그릇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과 한 영이 되는 귀한 그릇으로 선명히 사용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소송의 문제를 뒤로 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직면하고 있는 음행과 관련된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루고 있습니다. 5-6장 그리고 앞으로 7장에도 계속 이 문제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음행의 문제가 고린도 교회 안에 굉장히 큰 문제였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이 문제에 철저히 둔감하며 이렇게 음행에 빠져 살면서도 별로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는가?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세상에 젖어 살았고 세속화로 말미암아 세상의 풍조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 풍조란 단순히 그 시대의 타락한 문화만이 아니라 몸에 대한 왜곡된 시대 사조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그 당시에 헬레니즘 문화의 사상적 특징이고 시대 사조를 대표하는 참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이고 너에게 네가 제일 중요하며 너 인생의 기준은 너며 너의 선택은 너고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거 제한 없이 다 해라….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근거한 그 당시 시대 사조였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건 제한 받지 않고 다 하는 것….그게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이런 사상은 그 당시의 시대 사조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합법이기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 제한 받지 말고 다 하라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의 중심이고 온 우주의 중심이고 나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니까 네가 행복하다고 여기면 뭐든지 제한 없이 해라… 내 느낌이 내 생각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건 마음껏 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행복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삶에 우리도 젖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 사조에 젖어 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성경이 그렇게 우리 인간을 정의하고 있느냐며 찬 물을 확 끼얹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 얘기하는데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모든 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나 중심으로 내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모두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고 모든 것이 합법이고 모든 거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인간의 행복이라 정의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봤을 때 모든 것이 ok가 되는 그런 삶은 오히려 너를 해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가하긴 한데 이 세상은 모든 것을 너 마음대로 제한 없이 하라고 말하는데 그게 너를 얽매이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마음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 네가 그것에 얽매이게 만든다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끝까지 하게 되면 거기에 결국 얽매이고 거기에 묶이고 거기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니 네 마음대로 해라…네 원하는 대로 살라는 이 세상 풍조에서 거스르고 말씀에 근거하여 자유를 제한하는 지혜로 이 시대를 거스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하면 나는 거기에 결국 얽매이고 결박되고 거기에 갇히게 되는 연약한 존재임을 분명히 아는 것, 나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 소속이 분명한 성도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문제는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며 교회를 들락날락 하는데 내 마음대로 제한 없이 살아가는 삶이 자유라고 착각하며 모든 것이 가하다 여기는 세상의 기준에 빠져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유익이 아니라 해악이 됐으며 이 세상의 것에 결박되어 얽매어 감옥에 갇혀 살듯이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내 몸이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되는데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가하다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하라는 이 세상 풍조를 거스르며 한계와 경계를 두며 분별하는 지혜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사도바울은 강조하는 겁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영적 도구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함을 통해 그게 나를 지키도록 해야 되는 것이죠. 내가 주일 성수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키지만 결국 그 주일 성수가 나를 지키는 도구가 되며 나를 거룩하고 구별하게 묶어 결국 나를 살리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면, 결국 십자가가 나를 지켜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도구들을 잊지 않으며 내가 이 세상과 같은 궤적을 살 수 없고 나를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세상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정확한 경계와 한계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시대 사조에 따르면 몸에 대한 그 당시 이해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제한 없이 내 몸이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몸이 내 몸이니까 내 몸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고 내 행복을 위해 내 몸을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냥 개인 문제로 프라이버시로 여기며, 개인의 삶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침해할 필요가 없다는 이런 생각이 시대 사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몸에 대한 왜곡된 이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잘못된 이해에 쐐기를 박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셔서 우리 몸을 지으셨는데 몸은 음란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오직 주를 위해 있다는 거예요.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몸은 아무렇게나 죄를 져도 상관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몸으로 짓는 죄와 음란은 내 영적 구원에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잘못된 사상을 향하여 쐐기를 박는 겁니다. 몸과 영은 따로 떨어진 객체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운동을 하면 몸만 개운한 게 아니라 내 정신이 맑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맑게 하기 위해 정신 차리기 위해 뛰어나가면 됩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도 정리되고 마음도 정리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예요. 반대로 몸과 영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 몸이 타락하면 내 영도 타락하고 결박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내 몸은 내가 원하는 대로 쓰는 도구가 아니라, 내 몸은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다는 겁니다.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아 잠시 사용하는 것이기에, 빌려 온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몸이 내 육신의 본능을 만족하고 그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신 것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삶이 세상의 풍조와 흐름을 거스르는 신앙입니다. 너 마음대로 하는 인생이 너에게 유익이 아니라 너를 무너지게 하는 해로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눈에 보는 이 세상에서 내가 열망과 갈망을 쏟으며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가 거기에 얽매이고 결박되고 그 감옥에 갇히게 되기에 그 자유에 스스로 제한성을 두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몸을 그저 나의 만족을 위해 본능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사용하도록 드리는 삶, 이것이 하늘 소속 분명한 성도들이 살아가야 될 영적 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몸의 소유권도 주도권도 나에게 없고 주님께 있으며, 내 몸이 나를 위함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함이라는 겁니다. 내 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그저 고등동물과 같이 그냥 썩은 고깃덩어리 같이 살지 마시고 내 몸이 하나님에게 소유권에 있으며 하나님이 빌려 주신 것임을 잊지 말고 내 몸은 주님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가장 잘 사용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몸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넘어 주님을 기쁘시게 사는데 쓰이도록, 주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빌려주신 선물임을 잊지 말고 내 삶이 모든 것이 가하고 원하는 대로 제한 것이 사용하는 세상 풍조와 똑같이 흘러가지 않도록 한계와 제한을 두며 거스르기 원합니다.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마음으로 사용하도 된다는 세상 풍조를 거절하고 거스르기 원합니다. 내 몸이 하나님 소유임을 분명히 하며 빌려주신 나의 몸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위해 잘 사용하는 복된 몸이 되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선명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교회 교회와 성도가 직면한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이 민감한 것에 민감하지 못하고 둔감할 것에 둔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일에는 철저히 둔감하며 세상 일과 땅의 일, 특별히 내 이익과 유익을 위해서는 목숨 걸고 민감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민감한 것에 둔감하고 둔감할 것에 민감한 삶을 살아갔던 그들은 땅과 세상에만 모든 것을 거는 육적 공동체가 되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세상 법정으로 나아가는 소송과 송사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좀 잘 먹고 잘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내가 소송과 고소를 불사하더라도 당연히 손을 봐야 하는 게 당연한 세상 원리이고 그런 원리가 당연하게 교회 안에 들어와 지체들 사이에도 쌍방 고소와 고발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내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나가서 서로 그렇게 쌍방의 고소를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사실 이기는 게 하나도 없는 모두 패배자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피차 고발함으로” 이미 허물이 있다는 건 교회 안에서 쌍방으로 고소해서 세상 법정으로 가면 둘 다 패배하는 게임이라는 겁니다. 왜 패자만 남느냐 하면 교회 안에 형제 자매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 서로 원수되기 때문에 승자 없이 모두 패자가 되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도 별 수 없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때문에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껍데기만 봤을 때는 소송과 고소를 통하여 얻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재판에서 이기기만 하면 내가 얻는 유익이 있고 갖게 되는 보상이 있을 겁니다. 그건 현상계의 껍데기 문제이고 본질계인 영적 문제로 봤을 때는 이기고 지는 게 없이 둘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영적인 것을 다 놓치고 포기한 대가로 그들은 세상에 나의 이익과 유익을 얻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작 그런 사소한 분쟁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서 밖으로 나가 내 이익과 내 것을 지키려고 지체를 고소 고발하며 세상 법정에 나가는 것 자체가 영적으로 봤을 때는 이미 허물이고 영적으로 봤을 때는 그게 모두 패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거룩하고 구별되게 존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영적 원리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역할이 다 마비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좀 속고 차라리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고소고발을 안 하는게 낫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성도니까 내 억울한 걸 그냥 방치해야 하고 그냥 교인들은 일방적으로 참아야 된다….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민감함과 둔감함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 마음을 쏟아 붙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야 영적인 것에 민감한 성도가 되는데 세상 것에는 그렇게 소송과 고소를 불사하고 얻으려 하는 그런 열망과 민감함이 주변 지체를 원수로 만들고 교회 공동체의 영적 기능을 다 마비시키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고소와 소송에서 이긴 결과와 대가로 너희가 영적으로 나머지를 다 잃어버리게 된다면 차라리 손해보고 속임을 당하고 좀 어려운 게 낫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이 반복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는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영적인 걸 다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얻으면 만족하는 존재냐는 겁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이런 문제는 너무나 둔감한 거 아니냐는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적 심각성이 없는 거예요. 그저 자기 유익과 이익을 지키는 것에만 목숨 걸고 불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눈에 불을 켜고 민감하고 인생을 던져야 될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유업 받는 거 아니냐고 엄중히 지적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철저히 너희가 둔감할 수 있느냐, 이런 문제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냐는 것이죠. 이런 것을 놓고 소송을 하고 이런 것을 놓고 정말 불의와 의를 따지며 정말 목숨 걸어야 되는데 그런 절박한 마음조차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존재의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함인데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이렇게 둔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음행 하고도 간음하고도 속이고도 이런 잘못된 일을 하고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고 회개하려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철저하게 둔감하며 죄를 쌓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 반면에 세상적인 일과 내 유익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 걸고 싸우고 민감하게 세상 법정도 불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그냥 먼 세상 이야기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고 반대로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서 내게는 그저 둔감한 문제가 되어 버린 그들의 영적 현실을 엄중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엄중히 경고합니다.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위기 가운데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본질은 이 땅에서 조금 잘 지내고 더 잘 먹고 좀 더 오래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도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넘어 다른 세상이 있음을 분명히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날을 준비하며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영적 원리가 이끄는 주의 백성들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분명한 고백 가운데 다시 태어난 존재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문제보다 더 큰 세상 문제는 없고,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결론 말씀과 같이 너희가 그렇게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고 소송과 송사하면서 라도 얻으려는 그런 세상의 유익과 이익보다 정말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겁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받는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하심입니다. 이 세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고, 더 민감해야 될 문제는 없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보다 더 큰 복은 없고, 이 세가지 문제 보다 더 큰 문제는 없기에 여기에 가장 민감하며 여기에 마음을 두고 눈에 불을 켜고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 성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부분을 우리가 분명히 붙들고 있으면 나머지 것은 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할 수 없는 세상 것에 좀 둔감한 존재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적으로만 자기 유익과 이익에만 너무 민감한 육적 활성화의 상태이고 거기에만 목숨 걸고 나오기에 하나님 나라의 유업과 영적 원리는 철저히 무시하고 경시하며 살아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고 교회 나와서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먹고 잘 지내기 위한 수단과 도구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변질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이런 영적 문제에는 철저히 둔감하며,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하심에는 전혀 관심도 마음도 두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저 세상에서의 내 이익과 유익을 지키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민감하게 살아가다 끝나는 육적인 존재 밖에 되지 못함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와 영적인 것에 민감하게 살기에 이 세상 것에 조금은 둔감해져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유익과 이익에 조금 둔감해져도 상관없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하심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눈을 켜고 목숨 걸어야 될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의 죄씻음과 거룩함과 그들이 의롭다 함을 얻었는지 아닌지에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들을 봤을 때 물어봐야 될 본질적 질문은 저 사람이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 아닌지…가 되어야 합니다.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하심이 없는 자들을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하며 그것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신앙 생활하는 게 우리 모습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고린도 교회의 책망을 통하여 우리를 돌아보고 우선순위를 교정하며 다시 한번 본질을 향하여 나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은 문제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여러 문제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뜨거웠고 영적인 것을 사모한다지만 사실 분쟁과 분열과 갈등이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영적 원리인 사랑으로 움직이는 힘을 삼는 대신 육적 원리가 이끄는 교회이자 갈등과 분열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교회였습니다. 그 안에는 세상의 세속 문화가 들어와 젖어 들어 음행의 문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음행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 교회 안에도 누룩과 같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오늘 말씀에 등장하게 되는데 고린도 교회 안에 빈번했던 바로 소송과 고발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회 성도들 가운데 다툼이 있는데 그 다툼을 가지고 굳이 교회 밖으로 가지고 나가 세상 법정에서 송사를 하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교회 성도들은 세상 법에 고발과 고소를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전혀 영적이지 않은 고소와 고발 내용, 전혀 영적이지 않은 고소와 고발의 방법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책망은 너희가 예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는데 어떻게 영적인 것에는 이렇게 둔감하며 어떻게 육적인 일에는 이렇게 민감할 수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성도들 사이의 고소와 고발의 내용은 다 자기 유익과 자기 이익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 혹은 영적인 이유로 고소나 고발을 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법정에 고소와 고발을 해서라고 해결하려는 그 다툼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다툼이 아니라 내 이익을 위한 내 것을 지키기 위한 다툼이었습니다. 그 고소와 고발에 몰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관심사가 오직 땅과 눈에 보이는 것과, 내 유익과 이익에만 가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문제가 있어서 다툼이 있어서 싸울 수 있는데 그것 까지는 100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는데 굳이 그것을 불의한 자들 앞에 광고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며 고소와 고발을 진행해야 하겠냐는 겁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들이란 단순히 악을 많이 행한 자들을 아니라 그리스도의의 밖에 있는 자들 즉 불신자들을 얘기하는 거죠.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장차 예수 은혜로 구원받아야 될 후보들인데, 그런 사람들 앞에 가서 굳이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성도들이 법정에서 서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투고 싸우는 것을 그렇게 보여줘야 되느냐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에 얼마나 걸림돌이 되게 하는지를 왜 모르느냐는 안타까운 지적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지적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민감할 것에 민감하고 둔감할 것에 둔감한 것이 영적인데 고린도 교회와 성도는 전혀 영적인 것에 민감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적인 것에만 민감하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 걸림돌이 되는가 아닌가에는 전혀 민감하지 않고, 오직 내가 손해보고 내 이익과 권리가 방해받는 것에만 민감한 철저히 육적 원리로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둔감하니까 음행 문제를 둔감하게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이 정도 하니까 교회에서도 이 정도 음행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둔감하게 이 문제를 치리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법이라 여기는 것에 대해 별로 민감하지 않았고 세상의 세속적 가치관이 교회로 그냥 휩쓸려 들어오는데 별 문제 의식 없이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이렇게 둔감한데 반대로 어떤 것에는 엄청 민감한 겁니까? 육적인 일에는 민감하고, 자기 이익과 유익에 대해서는 엄청 민감한 겁니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세상 법정에서 고소고발을 불사하더라도 나는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며 이 악물고 눈에 불을 켜고 옆에 성도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음행의 문제에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불법이라 여기는 음행의 문제에는 둔감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다가 어떻게 너의 유익과 이익에 대한 문제에만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교회 밖에 불신자들 앞에 소송과 고발을 하면서라도 내 것을 지키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 원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 문제와 육적인 내 이익의 문제가 나에게 그냥 흘러가는 문제로 부분적인 문제로 목숨 걸지 않는 겁니다. 내 유익과 이익에, 내 것 지키기에 그토록 목숨 걸지 않는 겁니다. 이 세상의 것은 얻으면 좋고 얻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둔감한 문제이지 거기에 내 인생을 걸지 않고 거기에 내 목숨을 걸지 않아야 영적인 원리가 작동하는 성도가 됩니다. 그런데 민감해야 할 하나님의 일과 영적인 일에는 철저히 둔감하고, 둔감해야 할 세상 일과 내 일에는 철저히 민감하면 고린도 교회와 같이 뒤틀려진 영성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교회 밖에 세상 법정으로라도 끌고 가서 내가 내 것은 지키겠다는 그 열망과 세상적인 것에만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너희들의 영적 현주소라는 것을 엄중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은 포기한 채 자신들의 이익과 내 것 지키기를 위해서는 소송도 불사하는 세상적으로만 육적으로만 민감한 자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건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다는 증거이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에 굉장히 둔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아무리 예배가 열정적이고 영적인 것을 사모한다 그래도 철저히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에 길들여져 살고 있는 자들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 또한 이 말씀에 자유롭지 못하기에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자화상이 엄중한 책망으로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 말씀으로 전해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민감할 것에 민감하고 둔감할 것에 둔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영적 우선순위를 나는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민감할 것에 둔감하고, 둔감할 것에 민감한 뒤틀려진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빨리 반응하고 민감하고 내 모든 것이 움직이고 눈을 불을 켜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음행의 문제에는, 영적 원리라는 거룩의 문제에는 철저하게 둔감하며 아무런 관심도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세상의 문제와 내 이익의 문제는 이렇게 민감하고 소송을 불사해서라도 지키겠다며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고린도 교회 철저하게 육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들. 민감할 것에 둔감하고 둔감할 것에 민감한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반복된 모습이 되지 않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한 일에 왜 그렇게 우리는 민감하지 못한지, 왜 그렇게 철저하게 둔감한지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보기 원합니다. 나에게 정말 민감하고 내가 불을 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되기를 사모하고 세상 일과 나의 이익이나 유익의 문제에는 덜 민감하기를 원합니다. 민감할 것에 민감하고 둔감할 것에 둔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분명한 영적 우선순위와 질서가 새겨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누구나 아무나 조건 없이 제한 없이 다 환영해야 되고 다 품어야 되는 곳이기도 한데 동시에 교회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품어 누룩이 되도록 방치할 수 없는 순전함과 진실함을 유지해야 할 영적 공동체이기도 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음행과 같은 큰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와서 누룩과 같이 변화되지 아니하고 악한 영향력으로 교회 공동체를 흔들게 된다면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치리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겉으로는 사람들도 모이고 영적으로 후끈하고 무언가 있어 보이는 데 그들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성령을 쫓아 살아가지 않는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데 바로 누룩과 같은 악한 자를 교회 안에 그대로 두고 방치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도 부끄러워할 것 같은 아버지의 여인과 동침하는 음행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고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여인과 동침을 해도 강제가 아닌 동의한 것이면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합법이고 세상에서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게 교회에 와도 아무 문제 없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 묵은 누룩과 같은 자가 교회에 머물러 있으니 누룩이 부풀고 커지며 교회 공동체에 파괴적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부끄러워하는 음행을 하는 것도 문젠데 그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을 방치한 교회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엄중히 지적하며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묵은 누룩과 같은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단순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교회가 유기체이기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영향력도 나쁜 영향력도 서로 주고 받으며 그들과 함께 사귐을 갖게 되고 함께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친교와 교통을 하게 되는데, 친하게 교제하게 되고, 소통하게 되면서 묵은 누룩과 같은 자의 파괴적 영향력이 부풀려 지고 확산되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묵은 누룩과 같은 자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죄의 악한 영향력이 묵은 누룩과 같이 퍼져 우리를 상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를 무너지게 만드는 겁니다. 음행을 한 것도 큰 죄인데, 음행에 대해 회개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오늘 말씀에 음행 하는 자들이라는 영어 표현이 되게 중요한데 sexually immoral pers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들이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들인데 이 부도덕이라는 원래 의미가 바로 불법의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음행하는 자들이란 성적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상 법으로는 합법이니까 아버지의 여인과 동침을 하는 짐승과 같은 나의 음행은 성적 불법이 아니라고 여기며 아무 문제 의식이 없는 겁니다. 법적으로 문제 없으니까 나는 상관이 없다며 부끄러워 하지도 회개하지도 않고 목을 꼿꼿이 쳐들고 교회에 머물고 주저 앉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가 왜 그렇게 사람 냄새 나고 세상 냄새 나는 육적 공동체와 같이 변질되었는가?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직도 영적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중요한 이유는 묵은 누룩과 같은 잘못된 기준이 부풀려 지고 퍼지도록 이런 악한 자들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엄중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도 회개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 세상에서도 합법이니까 나는 상관없다 여기는 이런 자들과 가까이하고 사귀며 교제권을 가지고 함께 섞이게 되면 우리가 자빠지고 넘어지며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기준을 붙들고 세상에서 합법이니까 하나님의 앞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는 이런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멀리하고 사귀지 말고 교제하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것이 누구를 살리는 길이냐 하면 나를 살리는 길이고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두번째로 묵은 누룩과 같은 사람은 방치하지 말고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은혜가 충만하게 되면 영적 감각이 살아나고 하나님에 대한 우선순위에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 관심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가에 집중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영적 감각이 회복되고 살아가는 변화가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과 사귀어 살게 되면 이렇게 죄를 품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과 사귀고 가까이하고 교제권을 두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에 매몰되며 영적 감각이 다 무디어지고 마비가 됩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에게도 둔감하고, 영적 원리로 살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는 겁니다. 저 사람도 저렇게 살아가니까 나도 저렇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되며 세상 사람과 별반 차이 없이 비슷하게 하향 평준화 되는 것입니다. 육적 원리로 작동하며 이렇게 악한 자들과 사귀어 살면 성도도 교회도 다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마비된다는 겁니다. 교회는 그저 껍데기로 운행하고 그리스도의 임재 없이 사람들만 모이고 육적 공동체로 눈에 보이는 것만 붙들다가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묵은 누룩이 내 마음을 마비 시키며 무너지게 만들고 교회 공동체를 마비 시키며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인 산토끼가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인 집토끼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상관할 필요도 판단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죄를 무시하고 경시하고 죄의 구덩이해서 살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부터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까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이 세상은 타락 이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죄와 사귀어 살며 죄의 영향력의 교재권을 가지고 살아왔던 게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늘 그렇게 살아온 밖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놀라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판단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떠냐는 문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해서도 망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된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한 겁니다. 성도의 힘과 능력도 교회의 힘과 능력도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움직이는 힘은 다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은사로서의 사랑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힘과 능력이 부어지는 원리는 거룩함과 순전함과 진실함을 통해서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의 빵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전하고 진실하게 나의 진짜 나로 겸손히 엎드릴 때 하늘의 힘과 능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묵은 누룩과 같은 악한 자들을 교회에서 내보내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누룩과 같은 자를 방치하지 말고, 부풀어져 퍼지기 전에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교재권과 친교의 관계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을 살리고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미국에는 아파트를 들어갈 때나 어디 집에 들어갈 때 반드시 해야 되는 게 background check입니다. 백그라운드 책을 해서 어떤 기록이 있는 사람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아파트에 들여보내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백그라운드가 좋지 않은 사람은 아파트에 살도록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전체 공동체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거르는 것을 가지고 누구도 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 때문에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파트에서 모든 사람을 받는 거 같지만 그런 background check을 통해 묵은 누룩을 거르는 것을 통해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성도도 교회 공동체도 영적 원리를 통해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순전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영적 원리가 운행하는 공동체로 유지되도록 묵은 누룩을 경시하지 말고 방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우리 교제권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의 죄의 영향력이 저와 여러분들을 무너뜨리는 누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말문이 막히는 음행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묵은 누룩을 내어 쫓으라는 이 엄중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내 마음을 지키며 교회를 지키며 영적 원리가 작동하는 주의 몸과 지체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음행의 문제, 또한 음행을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는 죄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에 파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이 음행이라는 죄는 아주 작지만 그것을 방치하게 되면 그것이 부풀어 교회에 큰 어려움을 가져오게 만들며 영적 원리를 다 멈추고 마비되게 만든다는 것이죠. 죄가 영적 유기체인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서 그것이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면 영적인 끈이 끊어지며 그냥 교회가 세상과 별반 다름이 없는 사람들만 보이고 만나는 육적 공동체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육의 원리로 움직이는 공동체는 사람들의 모임만 돼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냥 그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계속 추구하면서 영적인 능력도 생명력도 갈망도 없이 그냥 그것이 습관으로 그냥 머물러 있는 곳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죄라는 누룩을 방치했을 때 나타나는 파괴적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시는 음행과 같은 죄를 떨쳐 버리지 아니하고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자를 가볍게 여기고 교회 안에 방치하고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가 누룩이 퍼지듯이 그 죄의 영향력이 퍼져서 마비된 육적 공동체 같다는 겁니다. 누룩이 온 몸에 퍼져서 육적 공동체로 변질시키며 영적 공동체인 교회가 더 이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게 고린도 교회가 영적 어린 아이이자 미성숙한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런 누룩을 방치하지 말고 부풀게 놔두지 말고 당장 내어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죄와 섞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 묵은 누룩은 당장 내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회개하지 않고 음행한 자를 교회에 놔두지 않고 그 누룩을 내버려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누룩과 섞이는 교회는 영적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묵은 누룩은 온몸에 퍼져 영적인 연결이 다 끊어져 버리고 마비되게 하여 영적 생명을 다 잃어버리게 만들러 버립니다. 영적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공동체가 되며 세상에서 오케이 하고 합법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냥 사람들이 오케이 하고 문제없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곳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합법인지 불법인지,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ok인지 아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은 누룩이 온 몸에 퍼지인 것이 교회에 파괴적 영향력을 미치는 걸 알면 그 누룩은 당장 내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의 영적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거룩한 그릇이 되기 위해 영적 원리가 작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 누룩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누룩을 제거하고 내어 던지며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유월절의 떡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먹는 떡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이 아니라 누룩을 넣지 않은 딱딱하고 맛이 없는 무교병을 반드시 먹게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에 먹는 누룩 넣지 않는 무교병은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그 구원의 역사를 현재화하며 기념하는 것입니다. 누룩 없이 부풀러지지 않아서 먹기에는 맛이 없고 불편할지 모르나 그 유월절의 떡은 아주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으면서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살 것을 온 몸에 새기는 겁니다. 누룩을 하나도 넣지 않은 떡, 누룩을 제거한 떡인 무교병을 먹으면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죄와 섞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 영적으로 순전하고 진실할 수 있음을 분명히 고백하는 겁니다. 누룩이 없는 순전함의 떡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순전함이라는 것은 다른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돌려 말하거나 무슨 의도가 있는지 생각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면 그게 순전함을 잃어버렸기에 영적 원리들이 자꾸 마비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건 있는 모습 그대로 순전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의도성이 있고 목적성이 있나를 고민하지 않고, 그냥 영적으로 살아갈 때는 굉장히 단순하고 심플하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그걸로 끝입니다. 예수님이 하신다 그러면 하겠습니다...이런 단순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게 바로 순전함입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진실함의 떡이라는 건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가면 쓰지 않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진아로 살아가는 것이 진실함의 떡입니다. 죄와 섞이지 말고 죄를 품은 것을 방치하지 말고 죄라는 누룩이 온 몸에 퍼지는 것을 방치하지 말라는 겁니다. 죄라는 누룩을 방치하면 내 마음도 교회 공동체도 딱딱해 지도록 방치하는 것이고, 메마르도록 방치하는 것이고 쪼그라들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도하던 의지하지 않던 계속해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가벼운 가면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무거운 가면을 쓰기도 하면서 가면이 없는 인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는 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게 당연한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영적 원리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게 진짜 나가 아니라 보여지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쓴 나를 통해서는 육적인 원리는 잘 작동하지만 뭔가 포장되고 대단해 보이는 이런 거품들과 누룩들을 통해서는 가짜이기에 가면에서는 영적인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진실함의 떡이란 이 가면을 내려놓고 나의 거품을 다 걷어내고 내 누룩을 다 내려놓고 진짜 나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진실한 나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영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죄라는 누룩을 넣지 않는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인 유월절 떡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죄로 포장된 이 누룩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누룩을 방치하면 그 누룩이 부풀어 온 몸에 퍼져 영적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교회를 철저하게 세상 원리와 육적 원리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기준을 완전히 망각하고 사람들의 기준에만 휩쓸리는 곳이 되어버리게 만듭니다. 그 적은 누룩이 회개하지 않은 죄가 교회 공동체에 섞여 방치되는 것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싸움을 늘 벌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 성도들이 늘 날마다 새롭고 늘 새롭다는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묵은 누룩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묵은 누룩도 끊임없이 내버리고 던져 버리고 제거하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개인에게도 교회 공동체에도 죄로 포장된 묵은 누룩을 내버리고 제거하는 일이 우리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유지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먹는 떡은 유월절 떡. 누룩이 없는 떡인 무교병이며,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임을 잊지 않고 거룩함 가운데 주님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한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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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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