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8장은 앞부분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건져 주셔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마치 그들이 이쁨 받을 만하고 그들이 뭔가 잘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포로됨에서 풀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손에서 구해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오직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근거해서 구원과 회복을 주시는 전적인 은혜일 뿐임을 강조하는 게 48장의 주제이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대한 분명한 고백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절대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지 끝까지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48장의 약속을 나의 분명한 믿음의 선포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왜 그들을 잊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의 언약으로의 초대,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내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죠. 야곱아…이스라엘아…부르시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와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구원 회복을 너에게 부어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부르시는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 되시는 겁니다. 그 언약에 기초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내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끝은 하나님이 본향으로 부르심으로, 내 숨을 거두어 가심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내 인생의 시작이 나인 줄 착각하고 내 인생의 끝이 나인 줄로 착각하며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살아가려고 하다가 무너지고 망하는 겁니다. 이처럼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믿고, 처음과 마지막 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내가 놓인 자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 눈앞에 처한 상황, 문제, 어려움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맺은 언약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않고 분명히 붙들며 살아가는 겁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한 들음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가르침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는 것, 그게 신앙 생활입니다. 그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목할 것은 그 모든 가르침은 “내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삶이 풍성해지고, 하늘의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원리와 다스리는 원리가 있는데 말씀의 가르치심을 듣고 주의하여 마음에 새길 때, 말씀으로 조율되어 나아가고 우리의 삶에 복이 있고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가르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부어지는 인생의 유익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내가 주의하여 듣게 되면 나에게 임하는 게 하늘의 평강입니다. 평강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하늘의 축복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와 진짜 함께하시기에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는 겁니다. 내가 하루를 살아도 주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하늘의 복이 임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며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다스리시는 질서에 조율되고 순종하며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다스리시는 질서에 조율되고 순종하지 않고 부딪히고 충돌하면 살아가긴 살아가는데 하늘의 풍성한 복이 임하지 않고, 놀라운 하늘의 역사가 내 안에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메마르고 풍성하지 않으며 하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뭐냐면 내가 뭐를 하는데 실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실패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강조하시는 겁니다.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지 않고 듣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인은 단순히 악한 행동을 한 자만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 있는 자,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자이자 듣지 않는 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망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주시는 평강이 내 안에 없을 때는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며,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고, 내 입술에 찬양이 사라지고, 메말라지고 인생의 샘이 막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평강이 없는 인생입니다. 언약으로 여전히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의 유익을 위해 가르치시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럴 때 내 눈이 열리고 내 귀가 열리며 내가 사슴같이 기뻐 뛰놀며 내 입술이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내 삶에 생수가 터지며 광야에 강물이 흐르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을 유의하여 내 마음에 주님의 약속을 새길 때 하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여전히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영원히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는 그 하나님을 붙들고 하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상황이나 환경이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시는 평안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심으로 주시는 절대 평강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불안해 보여도 아무리 이 세상에 문제가 많아 보여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기에 하늘의 평강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절대 잊지 아니하시며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7장까지 말씀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망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께 잠시 쓰임 받는 도구임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교만하여 스스로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고 하나님 자리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멸망시키시는 심판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데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그 믿을 수 없는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은 이방인이자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통해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떠나 배반하고 불순종해서 망하고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수 있는 기회,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구원과 회복의 은혜 앞에 사람들은 계속해 원인과 결과를 따지려 하고 까닭과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히 회개해서 이제 돌아올 만해서, 혹은 이제 하나님께 이쁨 받을 만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스스로에게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 본인들이 이제는 잘해서 하나님의 기준 커트라인에 넘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은혜와 구원과 회복을 주시는 것이다…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48장 말씀은 그런 생각과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이유는 너희가 잘하거나 무언가 이쁨 받을 만해서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에게 이유나 원인이 있는 거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48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질책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너희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에는 너희에게는 까닭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백성이라 그러면서도,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그들에게 뭐가 없다는 겁니까?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정의롭지 않고 진실하지도 않고 공의롭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주소였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주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말한대로 그 믿음이 따라가지 못하고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그 모습들, 사실 그것이 우리들의 영적 현주소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그들은 배교하고 불순종하고 심지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철저하게 그들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말도 안 되는 죄가 가득하고,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고 교만한 모습, 이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바벨론 사람들이나 이방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하나님 말씀에 귀를 안 기울이고 죄악에 빠져 살아가며, 정의와 와 진실함이 없는 삶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가능성 없고 구제불능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구원과 회복의 길을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통해서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전적으로, 일방적으로 이유와 까닭없이 부어 주시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듣게 하시고 하나님이 홀연히 즉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완전히 뛰어넘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행하셔서 그 구원과 회복의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됐는지, 어떻게 이렇게 이루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역사를 너희가 보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어떠하심 외에는 이유와 원인과 자격과 조건이 하나도 없음을 잊지 말라… 그게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듣게 하시며 말씀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바벨론의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주신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불순종과 죄악으로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진 잿더미, 대부분 사람들이 종으로 끌려간 바밸론 포로 생활, 그렇게 신음하는 하나님 백성들을 여전히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바벨론에서 포로에서 구원하여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우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다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된 거죠.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위하여 이 구원과 회복의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한 거예요. 전적인 하나님의 이름 전적인 하나님의 영광 전적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우리의 어떠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뭔가를 잘해서 남들보다 탁월한 선행을 해서 우리의 정의와 공의가 대단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저와 여러분들을 회복하시는 것도 아니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영광 위해, 하나님 이름을 위해, 하나님 그분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한번 회복과 구원의 길로 열어 주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가 구원 받음에 있어서 내 스스로에게 원인과 이유나 자격과 조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고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가 나를 구원받게 하시고 이 시간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셨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착각에 빠지지 말고 깨어나 정신 차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좀 잘해서, 우리가 좀 우월한 DNA가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쁨 받을 만해서…. 이렇게 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하여 구원과 회복의 주신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에 묶여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내가 못나고 아무리 흔들리고 자빠지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잊지 아니하시며 사랑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손길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철저히 믿는 겁니다. 은혜를 알면 알수록, 이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에는 감사가 흘러나오지만, 이 은혜가 사라지는 만큼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리고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구원하시는가…..나에게서 이유와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 나에게서 까닭을 찾으려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어떠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그분에 엎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될 믿음의 반응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 그분의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그분의 전적인의 은혜만이 이 시간 나를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에 묶여 살아가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47장 말씀은 46장과 동일하게 앞으로 일어나게 될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잿더미 위에 있는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는 전혀 믿을 수도 없고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완벽한 대국이자 제국인 바벨론의 멸망 소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무너진다는 약속의 성취로만 이루어지는 하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나만이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이 놀라운 일을 믿음을 취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바벨론이 언젠가 망하게 되는 것을 믿음을 취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누구신지를 기억하는 것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제 말씀이 바벨론이 언젠가 하나님의 손에 무너진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믿으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권면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바벨론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바벨론은 그 당시에 완전한 승리를 상징했고 대영제국과 같이 해가 절대 짓지 않는 나라처럼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사용하시는 도구로 이룬 대국인데, 세상에서 제일 부강하고 대국이 되니까, 세상의 모든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바벨론이 언젠가 하나님의 손에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치시고 무너뜨리는 그 날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고 다른 신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바벨론을 향하여 선포하시는 말씀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바벨론 멸망을 향한 질문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하나님이 바벨론을 치시고 무너뜨리는 날에 하루 아침에 처참하고도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1-5절은 어떻게 바벨론이 무너지는가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을 무남 독녀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처녀딸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렇게 소중한 외동딸 같은 바벨론이 보좌에서 내려와 곱고 아름다운 옷에 티끌을 뒤집어 쓰고 앉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맷돌을 간다고 증언하는데, 그 당시 맷돌은 가장 천한 노예가 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치마가 드러나고 속살이 드러나고 부끄러운 것이 보이고 수치가 하루 아침에 망하고 멸망하는 바벨론의 모습을 엄중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흑암으로 돌아가라 선언하시며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그동안은 이 온 세상에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았는데, 다시는 보좌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다시는 높은 자리 올라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바벨론 제국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대국 바벨론이 하나님이 치시니까 하루 아침에 팍삭 주저 앉아 멸망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은 바벨론이 왜 무너지게 되는가? 왜 이렇게 바벨론이라는 그 큰 제국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냐는 것이죠. 바벨론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을 스스로 이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영이 여주인이 되리라….내 마음에 이르기는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이게 다 바벨론이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착각들입니다. 바벨론에게 하나님께서는 온 나라들을 평정할 정도로 큰 힘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잠시 사용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힘과 능력을 잠시 받은 일종의 도구에 불가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꾸짖기 위한 도구였던 바벨론이 스스로 교만해 져서 스스로 중심이 되고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는 착각에 까진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자다 내가 하나님이라 선언하고 교만에 쩔어 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했는가….마치 그들이 능력과 힘이 있어서 남유다를 제압한 줄 착각하며,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며 멍에를 무겁게 지우며 학대한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여주인이 될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바벨론이란 제국은 절대 망하지 않는 제국, 언제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될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바벨론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일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거라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교만에 빠져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착각하는 바벨론….그 바벨론 제국을 하나님께서는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시는 겁니다. 한 날에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고 멸망하게 되는 겁니다. 자녀와 남편을 하루 아침에 잃는 거 같은 그런 비참한 운명에 하루 아침에 처하게 된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큰 제국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망하는 것은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하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바벨론이 스스로 교만을 빠져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모든 왕국들의 여주인이 되려 하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착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절대 망하지 않고 영원한 제국이 될 거라고 착각한 바벨론은 하루 아침에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착각하는 바벨론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고 진정한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사용하셔서 놀라운 능력와 힘을 부어주 시며 도구로 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능력을 넘어 일이 너무 잘되고 잘 풀릴 때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내 능력 넘어 승승장구하고 위로 올라갈 때 하나님이 날 도와주셔서 그러는 것임을 잊지 않고, 아 하나님이 뭔가 나에게 맡기시는가보다…생각하고 엎드려 겸손하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승리하고 사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승승장구하고 잘되고 위로 올라갈 때에 마치 내가 다 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일이 다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으로 결국 거기서부터 결국 내 욕심과 야망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고 한 방에 확 무너지는 겁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나를 반성하고 비춰보는 반면 교사로 삼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쓰신 도구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내가 잘해서 된 줄 알고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며 착각했기에 바벨론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망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내가 모든 것을 붙들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루는 자라고 생각할 때 그 바벨론의 속성에 빠져서 결국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푸라기 같이 다 불에 타버리고 순식간에 다 타버리는 하루 아침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바벨론의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벨론의 멸망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착각하지 말고 교만하지 않으며 내가 주인 되려 하지 않는 처절한 싸움을 벌이기 원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영광 돌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임을 잊지 않는 도구됨을 잊지 않고 엎드리는 것만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망각한 채, 내가 잘해서 된 줄 알고, 나 때문에 된 줄 착각하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망합니다.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늘 겸손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에게 모든 이유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잿더미 위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그 처참한 현장 가운데 하나님을 통하여 먼 훗날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처한 눈에 보이는 상황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모든 것이 무너진 나라, 그들을 무너뜨린 바벨론은 세계 최대 강국이 되어 그 어떤 나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나라가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까? 세계 최대 강국 바벨론이 하나님의 손에 무너지게 된다는 약속의 예언을 주시는 거죠. 사실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가능성이 0%에 가까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지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지 말고 현실을 넘어 보이자 않지만 분명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라보라는 것이죠. 현실을 통해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언약을 붙드는 신앙이라는 겁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어떠함을 내가 어떠함을 붙드는 대신, 하나님의 어떠하심 붙들고 믿음으로 취하며 기대할 수 있는 구원과 소망과 다시 일으켜 주시는 메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을 수 없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알고 붙들라는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진짜 알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실체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통해 일어나게 될 일을 보게 될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죠. 말씀을 통해 주신 이전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라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때의 방법으로 반드시 건지고 구하신다는 그 분명한 믿음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초월하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며 이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분명히 붙들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호 되심을 믿고 고백하며 다시 일어나라….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이자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품고 구하며 심지어 업고 다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태어나면서부터 노년이 되어 백발이 될 때까지 너희를 안고 다니고 품고 다니시는 분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그냥 뜬구름 잡듯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심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알려준 말씀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피부에 와닿게 표현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백발이 되기까지 너희를 업고 키우고 품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그 하나님이 나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고, 나를 품고 안으시며 구원해 주실 거라는 것을 분명히 믿을 때,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되어 절망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로는 절대 바벨론이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 현실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어짐을 믿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이 역사가 이루어짐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바벨론이 그렇게 무너지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증언하는데 바로 교만과 우상숭배입니다. 교만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바벨론이 그렇게 무너지게 되는 것임을 명확하게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이게 모두 우상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신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는데, 그런 우상들은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함을 선언하시며 우상의 한계와 허상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우상의 허상과 한계가 분명함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대체물과 유사품인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고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본연의 문제인 불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지고 살아야 된다는 불안과 걱정이 결국 우상을 만들어내고 우상을 섬기기도 하고 의존하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의지하는 우상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실체도 없는데 그 우상이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기대며 의지하며 오늘도 거기에 엎드리는 것이 바벨론이 멸망하게 된 이유라는 겁니다. 바벨론이란 나라 자체가 겉으로 봐서 거대한 대국이고 어떤 나라도 이길 수 없는 대단한 나라 같지만 허망한 우상과 같은 나라가 바로 바벨론의 실체임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바벨론은 한 때 크고 대단했다 우상숭배로 그렇게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 허상과 같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뻥튀기 같은 나라가 바로 바벨론, 실체가 없고 능력도 없고 결국은 한 나라가 일어났다 한 나라가 끝나는 게 하나님의 손길에 한 번에 무너지게 됩니다. 하루 아침에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함께 무너지는 바벨론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우상들에게 인생을 걸고 기대며 거기에 무언가를 붙들려 그러는데 하나님은 너희를 품고 구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믿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세워지는 신앙이 되기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반드시 시행되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나를 안아 주시고 나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이루시는데, 그 모든 일들이 내 머리와 생각에 다 담길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와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해야 될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섯번이나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다섯번의 반복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누구시며 내가 하나님만 믿고 붙드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첫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고 붙드는 신앙입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인데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게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즉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게 계시지만 분명히 내 안에 함께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고백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내 시선 밖에서 내 생각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며 그 하나님을 분명히 붙들고 나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만 믿는 신앙입니다. 보이지 않으시지만 나와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대용품과 유사품을 만들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치하며 살게 되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욕을 당하며 된다고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과 대체하려는 인생의 끝이 이렇게 비참해진다는 겁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견고하게 지으셨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이란 뭐냐면 하나님만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혼동하게 창조하지 않고 견고하게 지으셨다는 분명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동과 무질서에서 질서를 주신 창조이며, 사람이 살만 하게 견고하게 지으신 창조라는 겁니다. 살만하게, 견고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믿는 고백은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혼동과 무질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견고하게 지으시고 질서 가운데 지으셨음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에 살만하게 만드셨고 견고하게 나를 만드셨음을 믿으며 무질서가 아닌 질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세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나에게 듣게 하시는 분이고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내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길과 방향성이 결정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는 분이 계시며 그것을 알게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신앙 생활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지혜를 구하는 것도, 이 세상에 갈길을 아는 것도 나를 듣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분의 듣게 하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통하여 보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이 은혜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네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은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공의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오는 구원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구원을 믿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만 오는 공의를 믿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공의를 행하셔서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자체가 공의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섯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받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분명히 믿는 신앙에 기초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에게 돌이켜 구원을 받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내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나의 삶을 방향을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겁니다. 회개함으로 주님께 돌이켜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동시에 나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공로로, 내 이름이 아닌 예수 이름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가 받는 선물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공의도 구원도 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이 짧은 말씀 가운데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선언을 통해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자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계속 붙들고 찾으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만 믿는 신앙이며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내 안에 있음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공의를 행하시는 분, 구원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의 손을 놓지 아니하시며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나를 살리시며 나를 붙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듣고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회개함으로 돌이키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음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시는 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만을 분명히 믿고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45장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선언하시며 그 하나님의 주권을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어제 1-7절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시아 왕인 바사왕 고레스에게 기름 부으심으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대해서 증언했고 오늘 말씀인 8-13절은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충돌하고 부딪는 것을 얼마나 하나님이 심각하게 생각하는가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그들의 멸망은 겉으로 봐서는 군사력이 약했고 강대국 사이에 정치적으로 줄을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이유와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들이 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죄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망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고 회복하시는 방법도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심을 통해 회복하시고 세우시는 방법도 우리가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 전혀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옳음이 있고 정의가 있습니다. 내가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의와 선과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의와 불의, 선과 악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의를 행하셔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게 선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게 의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선과 공의를 바라보며 그건 공의가 아니고 그것은 선이 아니라고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늘 상처받았다 그러는 거죠. 왜 하나님은 내 기준으로 내가 생각하는 공의와 선과 옳음을 행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그런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불순종이 뭐냐면 그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누가 판단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순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대해 거부반응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경험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옳음, 선, 공의에 딱 갇혀 있는 겁니다. 그걸 벗어나거나 넘어서면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도 내 경험과 생각 안에 들어오셔야 하고, 하나님의 선과 정의, 옳음 또한 내 경험과 생각 안에서만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하고 충돌하고 부딪히는 겁니다.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난파하고 신앙에서 계속 이탈하는 자들의 특징은 늘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대해서 늘 충돌하고 부딪히는 자들입니다. 내 경험과 생각 안에 들어오는 것만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는 겁니까?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같이 미물이라는 거예요. 정말 미천하고 작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런 우리가 토기장이 조물주 하나님에게 충돌하고 부딪히고 다투는 자가 되면 뭐라고요? 9절 말씀을 보면 화 있을 진저….저주를 부르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조물주이자 창조주인 하나님께 다투고 부딪히고 충돌하는 질그릇 조각은 망하는 길로 질주하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왜 내가 생각하고 내가 정의하는 옳음을 안 행하시고 공의를 행하지 않으며 왜 하나님 내 기준에 맞게 일하지 않으세요?...라고 말하며 충돌하고 부딪히면 화를 부르는 인생, 저주를 부르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런 인생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 엄마 아빠에게 뭐라 그러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까? 나를 왜 낳았냐는 겁니다.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이렇게 부모에게 충돌하는 자들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자, 저주를 부르는 인생인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거기서 조물주인 토기장이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고 내 경험과 생각에 갇혀 내 나름대로 정의한 공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화내고 싸우면 화를 부르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맨날 나만 쳐다보고 있기에 내가 힘이 없으면 안 되는 줄 알고 내가 힘이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다 그런 비슷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힘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고요, 내가 힘이 없어도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 힘과 능력이 일이 되고 안되고의 결정적 요소가 아님을 경험할 때가 너무 많은 겁니다. 내 힘과 능력의 유무가 일이 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 그 주권적인 역사가 일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건 내 기준과 생각으로 정의된 옮음, 선과 공의에 대한 정의를 내려 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믿으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언제나 선이고 공의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내가 판단하고 내 기준으로 옳음과 선과 공의를 행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순종이라는 겁니다. 내 머리와 내 생각과 내 기준과 내가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날지 담기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심을 인정하며 고백으로 엎드리는 겁니다. 미물인 나의 머리에 이해가 안 되고 동의가 안 돼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내 머리에 담기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의, 선, 옳음이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엎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정의에 담기지 않을 지라도, 심지어 충돌할 지라도, 하나님의 손안에 모든 공의와 선하심과 옳음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과 옳으심이 있다는 것을 내가 믿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중심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판단자가 되어 내가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선과 악을, 공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자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내가 엎드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게 믿음입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믿음이 시작되는 거예요. 내 경험과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설명되지 않고 내 이해를 넘어서는 일들을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무엇을 고백하게 됩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경험과 생각으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기에 옳고 하나님이 하시기에 선이고 공의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함 믿음이 있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우리 머리에는 담기지 않는 일들인데, 내 시선 밖에서도 내 생각 밖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피조물로서 우리는 질그릇 조각 중 하나일 뿐, 조물주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는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경험과 생각에 담기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함에 엎드리며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에 조율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증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내 머리에 담기지 않을지라도 이 세상 우주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끄시는 분이 바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오늘 말씀인 1-7절 말씀은 바사왕 고레스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대강 보게 되면 이 세상은 굉장히 의롭고 정의롭고 좋은 사람들만 많아 보이지만, 좀 깊이 들어가 보게 되면 세상은 깨지고 아프고 병들고 죄악된 곳이자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세상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질문들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만 했던 고민이 아니라 오래전 나라가 망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했던 고민입니다. 그런 깊은 고민과 질문을 안고 잿더미 위에서 아무 소망도 없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복과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훗날에 있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서 약속으로 주시는 거죠.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하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시는데 언젠가 바벨론의 포로에서 자유케 되는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며 그 바벨론은 멸망하며 이 세상이 바로 잡히고 모든 질서가 회복되어 너희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그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이루시는 방법은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을 뛰어 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장차 페르시아, 바사가 일어나 고레스 왕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이 예언으로 선포되는 당시에는 너무 미약했던 변방의 나라 페르시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말이 안되는 건 고레스 왕이라는 페르시아 왕은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믿는 자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을 들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이루시는 도구로 쓰겠다는 약속을 주신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랍게 사용하실 때가 있다는 겁니다. 고레스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레스를 통하여 하늘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그 권세를 주셔서 높이 세우시는 것이죠. 더 말이 안되며 놀라운 것은 오늘 말씀은 그냥 고레스 왕을 사용하신다… 정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인 고레스 왕에게 기름을 부으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운 사람들, 예를 들면 왕이나 제사장 같은 사람들에게 부으시는 게 기름부음 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적 역사를 기름 부은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 가시는데 그 기름 부으심을 누구에게 주신다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불신자이자 이방인 고레스 왕에게 기름 부으셔서 하나님의 뜻하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누구를 강권적으로 쓰실 수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도구로 쓸 수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거룩한 기름 부음을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왕 조차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이 이루시게 한 주권적 역사이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불신자이자 하나님을 모르는 고레스 왕이 자기 힘과 능력을 넘어서서 있는 이런 모든 일들을 바라보며 이건 내 힘과 능력을 넘어서는 하늘의 기름부음이 있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분명한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거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면 도구로 쓰임 받다 구원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자기 힘과 능력인 줄 알고 그냥 교만하고 자만하다가 막 살게 되면 한때 하나님께 쓰임 받다가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과 삶의 자리를 바라봤을 때는 도저히 일어날 수도 일어날 수 없는, 가능성도 전혀 보이지 않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이 망한 백성들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믿어지지도 않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해도 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말도 안되는 약속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받아들이라…이게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내 머리에 담기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이방 왕인 페르시아 고레스 왕을 사용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회복과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이게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순종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내 기대와 상상을 훨씬 넘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말 외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 머리에 담기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주권적으로 이루십니다…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내가 처한 상황은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잿더미 위에 서 있습니다. 나 하나 살기도 바쁘고 그냥 서 있기도 힘든 절망의 상황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약속은 그저 뜬 구름 잡는 이야기 같고 가능성 0프로의 약속 같이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과 기대, 나의 계산과 머리를 다 내려 놓고, 어떤 것을 계산해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그 일을 약속으로 취하며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믿으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기 원합니다. 나에게는 방법도 도구도 이루어질 수 있는 통로도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께서 주님의 방법으로 이 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주님의 뜻을 나의 생각과 기대를 훨씬 뛰어 넘는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모르는 불신자 고레스 왕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회복시키셨던 이 놀라운 주권적 역사를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믿으며 그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며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 야곱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 강조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이 일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일인 것이지요. 쉐마…를 번역한 게 기억하라는 말인데, 기억 보다는 기념이라는 말이 훨씬 더 근접한 번역입니다. 기억은 그냥 과거 사건을 잊지 않는 것이고, 기념은 과거 사건을 잊지 않는 것을 넘어 현재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건 뭡니까? 이 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념하여 현재화 시키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합니다. 그걸 선택적 기억이라 하는데,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기억들은 내가 잠을 설칠 정도로 선명하게 현재화 되어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기억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가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에서 이미 망각으로 다 빠져나간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도 없고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취사 선택하여 선택적 기억을 하게 되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만 기억하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일과 하늘의 일들을 기억해야 하는데, 대부분 나에 대한 일과 땅의 일과 이 세상의 일들을 익숙하게 기억하려고 하겠죠. 그리고 죄성을 가진 우리는 좋은 것보다는 안 좋은 것을,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더 선명하게 기억하려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고백이 뭡니까? 그때 과거에 그 일이 지워지지 않고 기억되어 여전히 기념하는 현재화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잊혀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현재 내 삶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현재화 되는 거예요. 그게 체득화 되고 패턴화 되게 되면 늘 어떤 기억만 내가 취하는 겁니까? 나에 대한 일들, 특별히 부정적인 얘기들, 안 좋은 얘기들, 나에게 아프게 하는 것들만 모아 모아 내 마음에 심기우는 겁니다.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게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어서 옛날의 사건들이 여전히 현재화 되어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선택적 기억을 하는 것이죠. 나의 과거의 사건을, 특별히 부정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안타깝게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그리고 늘 땅의 일만 기억하고 세상의 일만 기억하고 나에 대한 일들만 기억하며 차곡차곡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지고 멸망한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진 잿더미 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고 도전하십니다. 너희는 이 일을 기억하라….하나님 앞에 내가 누군가를 잊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고 현재화 시키라는 겁니다. 신앙 생활이란 내가 한 일을 기억하는 대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고 사는 삶입니다.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이것을 넘어, 무엇을 기억하는 것인가 하면 내 일을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겁니다.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먼저 기억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무엇을 기억하기를 힘써야 되냐 하면 과거에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기를 힘써야 되는 것이고, 나의 삶에 현재화 시키는데 힘써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놀라운 영적 도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에 대한 일이 무엇인지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을 구구 절절 반복하시는데 특별히 마음에 깊이 담기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될 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게 우리는 잊혀지지 않는 존재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잊어 버릴지 몰라도 하나님에게 나는 절대 잊혀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고 방황하고 하나님을 잃어 버릴지 모르나 하나님은 나를 절대 떠나지 아니하시고,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절대 하나님에게서 잊혀지지 않는 존재…그런 존재가 저와 여러분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이런 존재임을 분명히 붙들고 현재화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현재화 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계속 노래할지어다 노래할지어다….가 반복되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합당한 반응은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반응으로 찬송하고 찬양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냥 분위기 뛰어서 그냥 뭐 기분 좋은 노래 불러서 함께 찬양합시다…그렇게 가볍게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역사하시는 그 임재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묵직하게 찬양하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절대 잊지 아니하시는구나…내가 하나님 손 안에 있구나…물 가운데 지나가도 불 가운데 지나가도 나를 지켜 주시는구나…그것을 깨달으면서 기억하면서 현재화 시키고 내면화 하는 믿음의 반응이 찬양으로 고백 되는 겁니다. 찬양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일들이 내 삶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까? 어떤 과거의 일들이 여전히 현재화 되어 내 안에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으며 내 현재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계십니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기억하고 붙들고 살아가느냐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원하는 것과 익숙한 것을 기억하는 나의 삶, 하나님이 하신 일 대신 내가 한 일만 기억하는 나의 삶, 나의 부정적인 일과 어렵고 상처받았던 일만 잘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는 나의 삶, 이런 악순환이 패턴을 끊어 내십시오. 주목하고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고, 하늘의 일을 붙들고 살아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란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붙들고 살아갈 때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이 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소유됨을, 내 인생이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분명히 붙들고 살아갈 때 내가 얼마나 놀라운 역사로 쓰임 받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내 선택으로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 선택으로 나왔고, 하나님 계획으로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잊지 말고 망각하지 않고 사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언가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며 현재화 시킬 때 그 영광을 바라보며 찬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분명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붙들고 기념하며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 44장 앞 부분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는 야곱과 같이 뭔가 움켜줘야 되는 줄 알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같은 인생을 하나님은 여수룬이라고 불러주시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하나님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선명 기억하게 되면서 내가 하나님께 은혜 받는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목마른 존재 서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영적 선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정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는 인생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우상을 만드는 인생, 하나님 대신 우상을 붙드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우상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모조품, 혹은 하나님의 대용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껍데기는 그럴듯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런 우상, 하나님의 모조품과 대용품을 인간은 끊임없이 만드는 겁니다. 이처럼 우상은 허망하고 무익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모조품이고 대용품인 우상을 계속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해 만든 허상, 그 눈에 보이는 우상에 매달리고 거기에 소망을 걸고 사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끊임없이 허망하고 무익한 우상을 그렇게 만들게 되는가? 오늘 말씀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뭐에 집중하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해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사는데,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 나에게 집중하게 되면 나를 집중하며 살아가니까, 사람들의 말과 세상의 말만 듣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사람들의 말과 세상의 말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모조품과 하나님의 대용품을 만들어 그것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삶, 내가 하는 일만 바라보고 사는 인생의 결과는 바로 불안이 두려움입니다. 나를 집중하면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나를 위해 만드는 게 바로 하나님의 대용품이자 모조품인 눈에 보이는 형상,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집중하면서 살고, 그 결과 나를 위해서 허망하고 무익한 우상,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드는 겁니다. 두번째, 인간이 하나님의 모조품과 대용품인 우상을 계속 만드는 이유는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의 등불인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으로 나를 비추지 아니하니까 필연적으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내 눈이 가리워지는 겁니다. 내 마음이 어두워지고 눈이 가려지면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하신 일,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듣는 것은 사람들 소리와 세상 소리뿐, 바라보는 것은 땅과 눈에 보이는 세상 뿐인 인생이 되는 겁니다. 결국 마음이 어두워져서 우상이 얼마나 허망한지 얼마나 무익한지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반복적으로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듣는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내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눈이 가려지면 결국 내 마음에 안 좋은 것들만 계속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내 마음이 건강함을 잃어버리고 딱딱해지고 무감각해지며 마음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을 붙드는 대신에 내가 만든 눈에 보이는 우상을 붙들고, 그 허망하고 무익한 모조품이 무언가 나를 거 건져 줄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나님의 대용품 모조품인 우상을 만들고 사람들이 “나의 우상”이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데, 우상은 나의 소유인 겁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내 소유, 나의 우상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엎드려 경배 하고 기도도 하고 정성도 다하면서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협박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생의 끝은 무엇입니까? 세번 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는데 수치를 당하는 인생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모조품과 대용품인 우상을 만들어, 허망하고 무익한 우상을 붙들고 내 눈이 흐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진 인생의 끝은 결국 수치를 당하며 다 무너지게 될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하신 일을 기억하면 영적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악순환으로 가는 겁니다. 영적 악순환은 뭡니까? 기억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망각하며 살아가니까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세상의 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만 계속 듣고 땅과 사람과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가니까 결국 수치를 당하며 망하는 길로 질주하는 겁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 악순환을 끊어내고 영적 선순환의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내 삶에 영적 악순환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기억해야 사는 겁니다. 내 눈이 하나님을 바라봐야 사는 겁니다. 기억할 것을 기억할 때 선순환이 일어나고, 기억할 것을 망각할 때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대신 나에게 집중하며 나의 불안을 떨치기 위해 나를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모조품과 대용품은 우상은 다 허망하고 무익한 것 뿐입니다. 이 안타까운 인생에서 돌이켜 나의 삶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말씀으로 나를 비추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4장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보고 듣는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며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고,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행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가장 큰 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1-8절에서는 “들으라”는 명령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들으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마음 다해 들으라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억하는 그의 말씀을 들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며, 내가 누구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소속, 소유격의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 존재감은 하나님에게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 소유, 하나님이 택한 백성됨에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 수록 모든 주도권이 다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너희는 내 것이다…너희는 하나님의 소유다…이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 백성됨의 존재감과 자존감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겁니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 대한 가장 중요한 약속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택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부르시며 하나님이 먼저 나를 소유로 삼으신 그 은혜 가운데 내가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부르시는 이름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곱을 부르시는 이름 세 가지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야곱, 이스라엘, 여수룬….이스라엘이란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수룬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은데 하나님이 야곱을 부르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내가 택한 종 야곱, 내가 나의 소속으로 부는 야곱이 여수룬이라는 겁니다. 놀라운 건 여수룬의 뜻인데, “정직하다, 곧다”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여수룬, 정직하고 곧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야곱의 인생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heel-grabber…발목을 붙드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쌍둥이로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그 이름대로 치열하게 무언가을 붙들고 사는 존재였습니다. 태어날 때만 그렇게 형의 발굼치를 움켜진 게 아니라 야곱의 인생 전체는 움켜지고 살아가는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야곱은 그 이름대로 움켜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로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움켜 져야만 되는 그런 야곱의 인생은 사실 모든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간은 계속 무언가를 움켜 쥐어야… 내가 무언가를 붙들어야만 살 것처럼 오늘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야곱과 같이 무언 가를 움켜 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야곱을 향하여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은 여수룬이라 바라보시고 부르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여수룬이 부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눈에 바라보는 야곱은 바로 여수룬이라는 것이죠. 내가 너를 여수룬이라…정직하고 곧은 인생으로 부른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겁니다. 이건 마치 너무 두려워 떨어 숨고 있는 기드온을 향하여 용감한 자여…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똑 같은 겁니다. 기드온이 용감해서 하나님이 용감한 자라고 부르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드온을 그렇게 바라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 흠 많고 부족하고 이 세상에서 늘 자빠지고 넘어지는 인생, 야곱과 같이 무언가를 붙들어야 살 것 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 또한 동일한 겁니다. 결국 나의 어떠함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내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여수룬이라 불러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함이 나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돕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 지어내신 하나님이 너를 도와 주신 여호와라는 선언입니다. 그 여호와가 도와 주실 내용이 3절 이하에 계속 증언되는데,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신다는 겁니다. 광야에 길이 없는 이유는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으니까 길이 없고 모든 게 메말라 버리는데 마른데 그 메마른 땅 광야 같은 땅에 시내가 흐르게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그냥 우물을 하나 파주시는 게 아니라 강이 흐르게 하시는 겁니다. 강을 계속 흐르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들이 가는 길 옆에 계속 물이 있게 하시겠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래서 강물이 쭉 따라오게 만드시면서 내 인생 가는 내내 목마르지 않도록 물을 풍성히 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나님이 강을 내시면, 하나님 백성만 그 물을 먹고 잘 지내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 말미암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도 그 흐르는 강물 때문에 더불어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 사막에서 생수의 물을 마실 때 우리만 복된 게 아니라 우리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도 그 물을 먹게 되는 복을 누리는 겁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주시기를 도와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들으라는 겁니다. 그 놀라운 사막의 시내가 흐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전제 조건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목마른 존재로 서야만 이런 놀라운 도움과 복을 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주님 저는 목마릅니다…주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그 목마른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로 해갈하는 놀라운 은혜, 내 인생 옆에 강을 만들어 주시는 그 놀라운 역사가 삶 속에 풀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도와 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너를 만들었고 너를 계획했고 지었고 너를 도와 주기를 기뻐하는 그 하나님이 옆에서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도와 주기를 즐겨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목마른 존재로 서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부르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 외에 다른데 가서 자꾸 도움을 구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맨날 신세한탄 하고 있는 것이죠. 영혼이 말라 가는데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목마르다고 부르짖지 않는 겁니다. 도움 주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 주님께 은혜가 목마른 자로 서는 것만이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근거한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불쌍하게 여겨 주심이 바로 복음의 진리입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하나도 없고 내 안에 선한 게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 사는 하나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택한 백성된 자임을 철저히 붙들고 살아가는게 은혜 안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우리를 여수룬 정직한 자 곧은 자라고 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제대로 살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분 만이 나의 도움 이시고 그분 만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분 만이 우리의 삶과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만이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목마른 자로 서며, 은혜에 목마르고 도움에 목마른 자로 주님만을 붙들고 두 손을 드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생명수를 부어 주시고 시내가 흐르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을 놀랍게 부어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정확하게 들으십시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만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의 그 시선과 시각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존재감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2월 2025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