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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했던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먹는 문제를 오직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풀어야 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갈등과 분열을 만들며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덕을 세우는 사랑으로 푸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면서 우리에겐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한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고백하는 그 신앙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신앙이 분명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내가 무엇을 먹느냐가 나를 정하거나 부정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후 유통된 고기를 먹은 것이 나를 거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냐 먹지 않느냐가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멀어지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게 복음에 기초한 분명한 지식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분명한 지식이 사랑을 통과하여 덕을 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 가체가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잘 사는 게 아니냐 맞냐를 나누는 기준은 분명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겁니다.
너희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먹든지 특별히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든지 아니든지 그게 아무 것도 아니다…그러니 난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겁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란 여전히 옛 율법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 유대인 회심자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냐 하면 여전히 옛 습관에 영향을 받고 육적인 것에 끌려 다니며 갈 지자를 그리는 사람들, 이 두 부류가 모두 믿음이 약한 자들이겠죠. 그런 믿음 약한 자들이 봤을 때, 이런 자유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문제가 술 담배의 문제일 겁니다. 술, 담배 문제가 분명히 우리에게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술담배 안 하면 구원받고, 술 담배 하면 구원 못 받고 이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성도들이 술 담배 하는 거 여전히 덕스럽지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말씀대로 믿음이 약한 자들은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님과 장로님이 같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고 있다면, 그게 구원에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게 분명함에도, 그 모습 자체가 덕스럽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은 당연히 실족하게 되고, 당연히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는 겁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가 구원받고 받지 않는 문제, 정하고 부정한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랑을 품고 나아간다면 그 지식에 대한 자유에 스스로 제한성을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자유가 내 주변 믿음 약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사랑 없는 지식이고 교만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닌 게 그 말이 분열과 갈등을 가져오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게 만드는 겁니다. 성도는 사랑 없는 지식을 구하면 안 되고 오직 사랑을 통과한 지식으로 덕을 세우며 자유에 스스로 제한성을 두며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비단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문제에만 국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계속해서 영적 어린아이에 머물고 갈등과 분열로 신음하는 데는, 사랑이 빠진 지식을 구하고 사랑이 빠진 영적인 은사를 구하며 사랑이 빠진 자유를 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사랑 없는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영적 은사가 그들을 무너지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그들의 자유가 주변 사람들을 실족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유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겁니다. 바울이 본인이 결단하는 문제 푸는 방법이 정확하게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는 삶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분명히 음식은 구원 문제와 상관이 없어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고 내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음식을 안 먹는다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구원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는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이, 그 자유가 내 주변의 믿음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와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여전히 옛 율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여전히 옛 습관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이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실족한다면 사도 바울은 내 자유를 내려놓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히 고기 안 먹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을 통과한 지식이고 사랑을 통과한 자유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이걸 가지고 서로 싸우고 갈등하며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이 갈라져 있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며 으르렁거리고 분열하고 분쟁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넘어서는 교회의 참된 문제 해결 방식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사랑을 통과한 지식, 사랑을 통과한 자유로 나 중심이 아니라 내 지체 중심으로 모든 걸 내려놓는 겁니다. 사랑을 통과한 지식, 사랑을 통과한 자유를 가지고 그 지체를 배려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으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 지체들을 배려하는 그 자유의 제한성, 지식의 제한성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문제를 푸는 방식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를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겁니다. 내 주변에도 교회에도 풀어야 될 문제들과 일들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잊지 말아야 될 건 누가 옳으냐 틀리냐를 말하기 전에 접근하는 방식이 사랑으로 통과한 지식인지 사랑으로 통과한 자유인지 먼저 분명히 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없는 자유가 바로 내 주변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 중심이 아니라, 내 주변 지체의 중심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지체를 중심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내 자유와 내 지식이 아무리 옳고 정당하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면, 내 자유와 지식을 스스로 제한하며 덕을 세우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경험되고 고백되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다 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내 주변 지체를 위해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내 자유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주변의 지체를 위하여 그게 바로 사랑이 덕을 세우듯 제한된 나의 자유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과한 지식만이 사랑을 통과한 자유 만이 나를 살리고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것을 잊지 않으며 이 본질의 정신을 붙들고 내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고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심을 알아주심을 믿으며 오늘도 끝까지 그 바른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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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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