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만약에 편지를 쓴다면 마지막에 어떤 내용을 쓰기 원하십니까? 대부분 좋은 이야기를 쓰고 결말을 맺기를 원 할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가장 마지막의 결론은 “나 좀 그만 괴롭히라.” 였습니다. 나를 그만 괴롭게 하라는 것이 그의 결론일 정도로 사도바울은 참 많이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향해 질주할 때마다 주변에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참 많았던 것입니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주변에서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소위 말하는 유명한 사람 치고 주변에 악플과 공격과 안티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유명해지면 당연히 지고 가는 십자가가 되듯 조금 이름이 알려져 있으면 그 사람을 공격하고 괴롭게 하는 일이 참 많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그렇게 강력하게 표현할 정도로 그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도권을 가지고 괴롭혔습니다. 사도바울이 정식 사도가 아니라는 의심과 공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자가 아니니까 진짜 사도가 아니라는 사도권을 가지고 흔들고 공격하는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과거를 들먹이면서 힘들게 하는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너의 과거는 살인자 아니야… 스데반 집사를 죽인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무슨 네가 사도냐…하는 이런 공격과 괴롭힘이 계속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육체의 가시로 인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도 설교를 지속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그 육체의 가시로 시비를 붙이고 괴롭게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괴롭힘의 이유를 훨씬 더 넘어서는 본질적인 괴로움은 사도 바울이 전한 순전한 복음에 계속 물타기를 시도하며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빠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이 괴로움을 사도 바울은 피하지 않고 가감없이 그대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괴로움이 있었는데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복음을 들고 앞서 나아가고 제대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 앞서 나가 면 항상 이런 괴롭힘과 공격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빠진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괴로움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건 바로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 받은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구원의 외적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적 증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결론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빠진 사람들은 구원받은 증거로서 몸에 흔적인 할례를 외적 증거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너에게는 외적 증거로 몸에 흔적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몸의 흔적인 외적 증거가 바로 할례이기에, 그 할례의 외적 증거를 통해 너는 구원받은 것을 확증할 수 있다면서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계속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겉으로 육체의 몸에 흔적을 받는 할례나 할례 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외적 증거가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내적 증거인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이자 거듭남입니다. 이 내적 증거가 구원받은 증거이자 내 마음의 할례 받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겉에 몸의 흔적은 하나의 그냥 증거일 뿐이지 구원의 절대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증거 없이 단순히 내 몸에 흔적으로 할례가 있느냐는 것으로 구원의 유무를 삼으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 분명한 내적 확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이지, 그 내적 증거가 없이 외적 증거인 몸의 흔적을 찾게 되면 결국은 무너지고 다른 복음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내가 그리스도께 내가 진정한 고백이 없는 세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찬도, 어떤 특별한 체험도 내적인 증거가 없는 외적 증거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내적 증거인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내가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은 바로 내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을, 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담고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너희 몸에 할례의 흔적을 찾지 말고 뭐를 찾아야 된다는 겁니까? 예수의 흔적을 찾아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은 그리스 원어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스티그마,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스티그마, 흔적이란 말은 그 당시 로마 시대에 짐승이나 노예는 불도장 같은 낙인을 찍어 소유권을 표현했습니다. 그 도장을 보면 이 종이 누구 소유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 그게 바로 스티그마,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란 말은 예수 소속으로의 불도장이 찍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장을 보면서 누구든지 저 사람은 예수 소속이라는 것을 선명히 알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드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괴로웠어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그에게 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은 그 괴로움을 내가 예수님의 영광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죠. 나를 위해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내가 받는 영광의 상처다….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멈추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흔적인 스티그마를 품고 살아가는 예수 소속의 사람으로 오늘도 더 선명하게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의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내 삶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 주시는 그 분명한 흔적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예수님 소속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영광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괴로움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영광의 상처, 스티그마임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이웃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새생명을 세우기 위해이 시간 사랑의 아픔과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거구나….고백하며 내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살아가는 방식임을 믿으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그 십자가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내 심령에 뭐가 담기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기는 것입니다. 내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기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라는 것은 죄를 마음대로 짓는 자유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아니라 내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에 매어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내 몸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며, 내가 예수님 소속이고, 오직 십자가에 매어 살아가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기는 겁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으심을 받는 내적 증거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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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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