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여전히 버리지 않으며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꾸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하여 두 마음을 품으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꾸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미혹에 잠시 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영혼을 파는 그런 일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곡과 변질로 찬 다른 복음에 그들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결국 돌아와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라 믿음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를 합니다. 너희를 요동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아주 강력한 말이죠. 너희에게 잘못된 미혹된 복음을 전하여 다른 복음으로 다른 마음을 품게 하는 자 마음을 요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또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결단을 촉구합니다. 스스로 배어 버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배어 버린다…는 강력한 표현은 할례를 떠오르게 합니다. 피부의 포피를 스스로 자름으로 구별된 유대인이 된다고 믿었고, 구별된 아브라함 자손이 된다고 믿었던 그 외적 증거,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통해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잘못 가르쳤던 스스로 베어버리는 예식이 할례였습니다. 스스로 포피를 베어 버리는 행위를 통해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만들었던 그 다른 복음을 향하여, 너의 포피를 베어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 만들려 하지 말고 순전한 복음을 왜곡하는 불순물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할례를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이렇게 자꾸 두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걸림돌이 되며 내가 지금 이렇게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참 자유함이 나에게 생명으로 전해졌기 때문임을 증언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 상황도 사도바울이 처한 상황도 평탄한 시대가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견디는 시대였습니다. 그 박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평화와 감사를 놓치지 않은 이유는,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데 인생을 던진 이유는 하늘로부터 주신 그리스도의 참 자유함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시는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분명했고, 그 순전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사명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게 순전한 복음에 덧칠하고 페인트칠하여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에 대해, 성도들이 그런 다른 복음에 미혹되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참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기 원한다, 스스로 베어 버리기 원한다… 둘 다 굉장히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흔드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마음을 품게 하는 다른 복음의 불순물들을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베어버리라… 그렇게 버리고 그 모든 미혹에서 과감하게 잘라내고 거절하여 나아가는 것만이 너희들이 살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어떤 모습으로만 남아 있어야 되는가?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라는 겁니다. 율법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할까 라는 그 정신을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도구만 되게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면서 복음 안에서 율법의 정신이 구현되는 것을 보는 기쁨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을 이루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베어내고,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에 확고히 서 있는 겁니다. 동시에 앞으로 나의 삶은 율법의 정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 가운데 구현되는 도구로서 잘 선용되는 겁니다. 그 정신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대표적인 삶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면 그 자유가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 삶에 구현되는 겁니다. 나의 자유가 육체의 기회를 삼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근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대로 내가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주님의 기쁨 되는 것으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주님을 바라보며 스스로 복음에 메여 사는 겁니다. 내 자유를 남용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삶을 거절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 마음대로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몸이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그 자유를 통하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가기에, 서로 기쁨으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으로 순종하는 자유이고, 예수님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갈망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않는 자유이자, 죄를 내 마음대로 지어 결박 당하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스스로 짓지 않도록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너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 된 거로 충분하다는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자유를 누리며 그 할례에 대한 모든 조건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기 원한다는 사도바울의 강력한 경고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단이나 사이비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조금 다른 게 아니라 그 다름이 복음의 본질을 흔들게 되어 예수님을 향해 두 마음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겸하여 섬기는 것이고, 그건 결국 불순종과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표피를 베어내듯, 순전한 복음을 왜곡하는 불순물들을,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스스로 잘라내고 제거하여 그것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표현하는 것이 교회의 거룩함과 본질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요동치게 하는 다른 복음을 스스로 베어 버리며 분명한 선을 긋는 거룩한 결단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그리고 저희 교회 성도들에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음을 선명히 믿으며, 우리는 더 이상 초등교사 아래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믿으며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자격과 조건이 되지 않음을 선명히 믿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두 마음을 품도록 미혹하는 다른 복음을 거절하고 스스로 배어 버리는 결단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있기 원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이 남용하여 육체를 망가뜨리는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종노릇하는 순종의 자유함으로 선용되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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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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