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까지 후반부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메세지입니다. 모든 것이 망한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들고 일어나 다시 한번 새 출발하고 새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말씀을 통해 소망을 붙들고 일어가기 위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서 있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에는 구원과 회복, 아니면 심판이라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 날이 구원과 회복의 날인데 하나님 밖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된다는 이 양면성을 선명히 드러내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리에서 있어야 되며 어떤 모습과 태도로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1-7절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향한 메세지로, 섬들과 민족들에 주시는 말씀, 8-16절은 하나님 백성들인 야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1-7절에 등장하는 첫번째 부류인 “섬들과 민족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고대시대에 전쟁은 사람들과의 전쟁만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이,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모두 망하는 것을 바라보며, 주변 섬들과 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망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 섬들과 민족들을 그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그 섬들과 민족들을 다 부르시며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는 겁니다. 재판의 자리란 시시비비를 따지는 법정,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대적하는 백성들 사이에 법정에서 선고하듯 이 시시 비비,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겁니다. 하나님 밖에 있었던 자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던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따지는 공의의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이신데, 하나님과 대적하여 시시비비를 따리는 재판의 자리에 선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의 메시지인 겁니다. 심판이라는 건 하나님이 사람들을 앞에 놓고 재판 자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시시비비를 따지는 겁니다. 누가 옳은지, 누가 그른지를 따지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심판의 자리입니다. 8-16절에 등장하는 두 번째 부류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의 종 이스라엘, 내가 택한 야곱, 나의 벗 아브라함입” 니다. 하나같이 호칭에서 드러나듯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하나님의 친구…이 모든 게 하나님 은혜 아래 있는 백성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시는 것 자체가 앞에 섬들과 민족들을 부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시는 소망의 구원의 회복의 메시지가 등장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놀라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를 도와주리라…모두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들을 주시는 겁니다. 왜 심판 대신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겁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보혈 아래 은혜 안에 붙들린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입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만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로 주님을 대면하게 되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대면할 때 이렇게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있는 존재,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대신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과 친밀감이 있는 존재로 서야만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따지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한 자들, 하나님과 대적한 자들이 장차 직면하게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과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재판정으로 그들을 불러서 네가 정말 공의로운지 내가 정말 공의로운지, 네 생각이 맞는지 아니면 내 생각이 맞는지 하나하나 따져보는 엄중한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홍해가 갈라지듯이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백성과 하나님 밖에 있는 백성, 하나님과 관계성이 있는 백성 하나님과 무관한 백성,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는 백성과 그리스도의 보혈과 무관한 백성,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나온 백성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기 의를 붙들고 나온 백성으로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소망으로 사는 유일한 길 우리가 회복과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택함을 받는 것 외에는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나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모습, 하나님 은혜밖에 구할 게 없는 전적 의존의 모습을 뭐하고 표현합니까?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안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발견할 수 없는, 나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얼마나 먼지와 같은 미물인지를 이렇게 버러지로 고백하는 겁니다. 찬송가 가사 가운데도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보혈을 흘렸네..” 찬양 가사 있지 않습니까? 그 찬양을 부를 때 예전에는 반항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귀한데 무슨 우리가 벌레고 버러지인가…그런데 나이가 들고 익어가면서 버러지 같다는 이 고백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던 그 절망과 똑 같은 고백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미물인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내가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엎드리는 겁니다. 목을 꼿꼿이 들고 내가 이렇게 대단하고 놀라운 일들을 많이 이루었다고 내 공로와 일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자격도 아무런 조건도 없는 자로 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시지 않으면 저는 끝장입니다… 주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망합니다…라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바짝 엎드리는 그 믿음의 태도가 구원과 회복의 은혜 가운데 있는 자들의 반응인 겁니다. 두려워 말라…놀라지 말라…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받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이 작은 모습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벗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을 때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놀라운 소망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담기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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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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