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39장 말씀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 예고의 말씀들이었습니다. 또한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열방과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와 만물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39장 말씀은 히스기야 왕으로 말미암아 결국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아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끝났어… 저 사람들은 끝났어…단정하고 대부분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망하는 것으로 딱 끝날 것 같은 말씀은 39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0장으로부터 새로운 막이 열리는 겁니다. 나라가 망하고 폐허가 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주심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며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게 될 것이라는 이 놀라운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사야 40-6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 눈에 보이게 어떠함을 따라 마침표를 찍기 쉽고 모든 것을 그냥 단정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아직 끝이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다…라는 새로운 소식을 듣게 하시는 겁니다. 내 눈에 보기에는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무너져 끝났고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모든 소망이 무너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40장부터 66장까지의 말씀을 구약에 있는 신약의 말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의 서론으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과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의 위로 선포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과 심판과 무서운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딱 구별하여 이원론으로 나누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말씀인 이사야에서도 심판과 함께 위로와 용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말은 측은지심을 넘어서는 말로 “애간장 타는 마음으로 함께 고통 가운데 서 있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타는 그 느낌, 설명할 수 없지만 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고 절박하면 나의 몸이 타들어가는 겁니다. 애간장 타는 심정으로 그 자리에서 함께 있는 마음이 바로 위로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심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목자 없이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심, com+ passion…함께 고통 당하는 마음이 바로 위로하는 선포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간장 타는 마음으로, 함께 고통을 당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에게 이 하늘의 위로를 선포하시는 겁니다.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며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졌고, 나라는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잿더미 위해서 그들은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고, 모든 것이 끝났다며 절망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빛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이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한 두번 말씀하시고 끝나신 게 아니라 마음에 닿도록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선포하신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두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여전히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첫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라는 겁니다. 너희의 하나님…내 백성…2인칭이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도 여전히 나와 하나님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면 우리나라…라는 말 대신 이 나라…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이 나라 문제야…이 나라 망했어…이 나라 지도자가 망조야….나와 이 나라를 구별시키고 객체화 시키는 게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이 망한 나라가 우리 나라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객체화된 하나님, 나와 무관하고 떨어져 있고 나를 신경 쓰지 않는 하나님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하심의 첫번째는 나와 여전히 함께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될 때만 가까이 계시고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라 감옥 속에서도 눈물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모든 것이 끝난 거 같은 그 절망 가운데서도 나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 것,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를 위로하시는 겁니다. 내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당연히 감각으로는 하나님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이 느껴지지 않기에 멀리 계신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내 감각과 내 생각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고백하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데서 모든 위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너희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우리에게 반찬고 붙여주고 진통제를 주면서 위로하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 주시며 암덩어리와 종양을 잘라내고 수술하시는 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그냥 잠시 공감해 주고 잘 들어 주시는 위로함을 넘어서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 선언이 바로 우리에게 위로라는 겁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를 미혹하며 죄 짓기 전에는 죄를 져도 문제 없다고, 죄 져도 상관없다고 계속 흔들어요. 그리고는 죄를 딱 지고 나면 하나님은 너 같은 거 용서하지 않아… 하나님에게서 도망가…우리를 끊임없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나의 죄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어떻게 해결해 주신 겁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 죄문제를 해결해 주신 겁니다. 이 십자가 은혜 없이는 그냥 괜찮다 위로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보혈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신 선언이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되고 가장 큰 위로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절망 가운데서도 마침표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쉼표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침표를 찍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마침표를 찍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마침표를 찍고 싶은 상황이 있습니까? 마침표를 찍고 모든 것을 그냥 끝내 버리고 내려놔야 되는 절망의 때가 있으십니까? 그때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고 선포하시는 그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붙들기 원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취하시기 원합니다. 절망과 깊은 어둠 속에서도,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이 고백을 믿음으로 붙들고 하늘의 위로가 담기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죄 문제이고 그것을 해결받는 것이 구원과 회복이라는 것을 믿으며 오늘도 십자가 앞에 나왔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해 주심이 우리에게 위로의 본질이 됨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죄악이 사함을 받고 용서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음을 선명히 붙드십시오. 내 눈에 보기에는 완전히 망하고 모든 게 불타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주님의 소망을 붙들고 다시 한번 회복과 구원의 역사로 일어나는 소망을 붙들고 일어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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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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