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창세기의 하갈과 사라를 통해 얻은 두 아들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복음 아래 있는 자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대조하는 비유입니다. 자유인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 이삭, 몸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삭,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를 얻은 자들인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 율법 아래 종 노릇하는 자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율법 아래 종 노릇하는 자들과 같이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었던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율법 아래 있는 자냐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은 자냐…선명히 대조하는 것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을 깨워 주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 라는 말은 내가 율법을 지켜 내가 의로워지려 하는 결국 자력 구원과 같이 내 스스로 무언가을 행함을 통해 구원받을 자격과 조건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것, 이게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입니다. 즉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자기 의라는 겁니다. 내가 뿌린 대로 내가 거둔다는 받아들이기 쉽고 계산에도 맞는 삶의 방식, 내 머리와 논리의 틀 안에 딱딱 들어오는 나 중심의 삶의 방식을 구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려 하는 겁니다.
이렇게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이스마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나온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을 주실 것을 언약으로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고 신뢰하지 못한 채, 조급한 마음에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먼저 나오긴 했는데 하나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과는 반하고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자유인이 아닌 여종을 통해 나온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온 아들, 자유인인 사라를 통해서가 아니라 종인 하갈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내 계획과 내 뜻을 따라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부산물, 이게 바로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로 대표되는 것입니다.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을 대표하는 비유로서, 한 어머니는 하갈인 종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또 다른 어머니는 자유인인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입니다. 어머니의 태가 종인 이스마엘은 태어나도 신분이 종인 것이고, 어머니의 태가 자유인인 이삭은 자유인인 것입니다. 율법 아래 머무려는 자들은 바로 하갈이라는 몸종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과 똑같기에 여전히 종노릇하며 종의 신분에 머물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자들은 약속 가운데 태어난 자유인 사라의 아들이었던 이삭과 똑같다는 거예요. 복음 아래 자유한 자들은 자유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이삭과 똑같기에 상속자의 신분으로 자유를 누리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기를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를 통해 계승 되는가?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한참 지나 태어난 이삭을 통해서 계승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주신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불가능한 사라의 태를 통해 이삭이 태어나는 것을 통해 약속의 아들은 100% 하나님이 은혜로 마침내 주신 아들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게 하시며 자유인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이삭에게만 모든 상속권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늦게 태어났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유인인 진짜 부인 사라를 통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먼저 태어났어도 이스마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에 태어난 아들 이삭에게 있는 것입니다. 먼저 태어났음에도 그 상속권이 이스마엘에게는 하나도 없는 이유는 종의 몸을 통하여 태어난 아들이자, 하나님의 언약이 아닌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에 따라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 이삭은 나의 의를 믿는 대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고백이고, 나의 때와 방법을 믿는 대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믿는 고백이고,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를 통해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 됨과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을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브라함 자손 됨은 육신을 입고 혈통을 통해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육적 아브라함 자녀됨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는 이런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 따라 주시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은 혈통으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자손 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함으로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인이던 종이던, 유대인이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는 이 믿음에 따라 그들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은혜를 주신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그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로마에 식민지로 종노릇 하듯, 율법에 머무려 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모든 자들은 율법 아래 식민지로 종노릇한다는 겁니다. 내 스스로 율법을 지켜 내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종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똑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매어 살고 율법에 결박되어 살아가고 노예의 길 종이의 길로 들어가게 만드는 인간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서 율법 아래 머물려 한다면, 마치 종이었던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되어 종의 신분이 되고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종인 하갈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과 같은 율법 아래 머무려는 자들은 하갈과 함께 모든 자녀들이 더불어 종 노릇 한다는 겁니다. 율법에 계속 매여 종노릇 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종노릇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내 스스로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믿지 않고 내 스스로 인간적인 때와 방법을 만들어가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아니하고 자기 의를 믿고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삶이며 결국 그게 불신앙이라는 겁니다.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신 이삭만이 참 상속자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의 모형라는 겁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바로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육적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고,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사모하는 자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예루살렘을 사모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영적 이스라엘 자손 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종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워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복음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며 천국 소망과 영생은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십자가 은혜안의 성도들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 보이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배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느냐는 이 중심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겁니다. 율법 아래 머물기 원하는 삶을 이끄는 율법 아래 결박된 예배, 종노릇 하는 예배에서 참 자유가 있는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로 우리를 부르시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삭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믿음으로 태어난 영적 아브라함 자손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은 여전히 종노릇에 결박되어 살아가고 아무런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주인인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삭만이, 약속의 아들로 참 자유를 우리며 상속자가 되는 법적 권한을 갖는 아들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언약을 따라 가느냐가 그 인생이 종노릇 하느냐 자유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 상속자가 되느냐를 가른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래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본질의 사명, 온 백성들을 위한 복의 통로와 복의 근원이 되어, 땅끝까지 이 복을 전하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이게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자유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의 영적 의미이자, 영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복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는 구원 받아 새 사람 되었으며,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되어 복음 안에 참 자유를 누리며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는 자가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복음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선명히 붙들고, 나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임을, 하갈의 종노릇하는 언약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언약 가운데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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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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