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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가장 개인적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담은 고백의 내용이 담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고 목회 할 때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고 좋은 관계 였는지, 순전한 복음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예전에 복음 아래서 만났던 끊을 수 없었던 관계와 순수한 복음 위에 세워진 그들의 신앙 생활을 상기시키면서 그 처음 순수했던 복음 위의 신앙과 끊을 수 없었던 관계가 깨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증언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해 목회할 때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적 가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육체적 가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데, 중요한 건 오늘 말씀에서 두번이나 강조했을 정도로 그 육체적 가시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사역을 감당하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큰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면 그 육신의 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을 힘들게 하지도 버리지도 않았던 겁니다. 그런 것들이 시험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간증거리가 되게 만들며 그 육신의 연약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렇게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던 이 연약한 사도 바울을 업신 여기지도, 버리지도 않은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누구와 같이 여겼는가 하면 하나님의 천사같이, 예수님 같이 영접했던 교회가 갈라디아 성도들이었습니다.
목회자는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천사도 아닌데 그런 마음으로 목회자를 지극정성으로 섬긴 자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이었습니다. 단순히 사도 바울을 인간적으로 그들이 좋아했고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복음 위에 기초한 갈라디아 교회가 천국을 맛보는 현장으로서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소통하는 그 놀라운 신비를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의 영적 관계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관계는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으리라….고백할 정도로의 친밀한 것을 넘어 끊을 수 없는 영적 관계였다는 겁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예수님 같이 섬겼으며 그들의 눈을 빼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도 바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로서의 동역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 아래서 끊을 수 없었던 친밀한 관계를 실체로 누리고 경험하는 교회, 약점과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업신 여기지 않고 몰아내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품고 지극정성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첫사랑을 경험한 은혜 받는 교회의 특징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자기 눈을 빼 주고 싶을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아끼는 관계가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이 누렸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관계와 영적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떠나온 지금 현재, 갈라디아 성도들과 사도 바울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예전에 그 끊을 수 없었던 사랑의 관계, 성도가 목회자를 위해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겠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맛보았던 관계가 다 사라진 겁니다. 굉장히 어색해지고 서로 만나기 불편한 사이가 된 겁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관계가 삐끄덕 하고 어색해진 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순전한 복음으로 양육했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해 다른 복음에 빠져 있어서 갈라디아 성도들과 지금 관계가 어색해진 겁니다. 그런 갈라디아 성도들을 방치할 수 없기에 사도 바울은 가만 있을 수 없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교정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니까 지금 관계가 어색해진 것입니다. 외부에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변질된 갈라디아 성도들, 다른 복음으로 인한 변질과 신앙의 왜곡을 막기 위해 항상 순전한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외침이 그들의 관계를 서먹하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그 친밀했던 관계가 금이 가고 만나기가 껄끄러워질 정도로 멀어진 슬픔이 구구 절절 우리 마음에 느껴집니다. 옛날에 사도 바울과 가졌던 그 놀라운 영적 관계, 눈이라도 서로 빼어 줄 것 같았던 그 관계가 아니라 어색해지고 얼굴을 붉히고 원수가 된 거 같은 서먹한 관계가 되어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아픈 마음으로 이렇게 강한 말씀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을 건져내고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매우 강한 어조로 책망합니다. 너희 가운데 복음에 덧칠한 흔적이 있고 의혹이 있으며 왜곡과 변질이 있어서 복음에서 이탈하고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복음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며 성도들이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하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좋은 관계만 생각한다면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좋은게 좋은 거지… 그러며 적절하게 가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적절하게 인간적으로 관계성을 맺으며 잘 가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에 그들을 강한 어조로 책망하고 질책했습니다. 그 가르침이 그들과의 관계를 점점 어색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진짜 그들을 사랑하기에 진리의 복음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언성을 높이며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관계가 어색해질 찌라고, 예전에 그 친밀한 관계성이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진짜 사랑임을 믿었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목자의 심정으로 간절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덧칠한 그 망한 복음을 가지고 결박되어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그 아픈 마음으로 지적하는 게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사랑임을, 아픈 마음으로 지적하는 게 사랑이라는 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게 필요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다면 다른 복음으로 계속 덧 씌우기를 한다면 사람들의 관계가 어색해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을 먼저 우선순위로 여기며 그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1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이 간절하고도 애틋한 마음을 마음에 새기며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이 선명히 새겨지기 원합니다.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를 통해 관계가 적절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아프지만 그를 책망하고 깨워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이 정말 그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믿었던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왜곡과 변질로 다른 복음에 빠지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관계가 어색해지고 서먹해질 찌라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향하여 참 진리로 경고하는 목자의 마음이 진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살리는 것임을 분명히 믿으려 진리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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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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