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이사야 전반부 1장부터 39장까지 심판에 대한 예언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은 히스기야왕의 무너짐은 결국 남유다의 무너짐이 되고, 남유다는 결국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예수믿는 신앙 생활에 입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작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신앙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도 중요하고 신앙의 중간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의 끝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안타까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신앙의 전반전은 좋았는데 후반전이 좋지 못해서 용두사미와 같이 무너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히스기야 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얼마나 대단한 왕이자 얼마나 위대한 왕이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전심을 다하는 신실한 왕이었습니까? 그의 시작은 너무 좋았고 그의 국가적 위기 앞에서, 개인적 위기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중간은 너무 좋았습니다. 앗수르 공격이라는 국가적인 큰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갔고, 죽을 병 앞에서도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공격할 때는 정신이 확을 정도로 긴장감이 생겨 하나님께 나아가 그렇게 의지했는데, 자기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는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벽을 향하여 하나님께 통곡하며 하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큰 승리 이후에, 죽을병에서 건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치유하심 이후에 안타깝게도 교만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기적의 치유하심으로 15년을 더 살게 된 히스기야왕의 교만과 그걸 통해 개인 뿐 아니라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사신들이 선물을 보내왔는데, 선물이라고 덥석 받으면 안 되고 의심해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신들이 주는 선물에는 대가가 있고 의도성이 있기 때문이죠. 선물과 뇌물의 결정적인 차이는 의도성과 목적성에 있습니다. 선물에는 목적성이 없는데 뇌물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바벨론 왕의 사신들이 가져온 것은 겉으로 봐 선 선물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선물이 뇌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기적의 치유 이후에 영적 긴장감이 사라지고 풀어지면서 이게 뇌물을 선물로 착각해서, 뇌물을 받고 좋아하면서 마음이 그냥 확 열려 버렸습니다. 뇌물 받고 얼마나 좋았던지 사탕 발림으로 호리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줄 거, 안 보여줄 거 다 보여줬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보물 창고와 무기고에 있는 것들을 다 보여준 겁니다. 왜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사신들에게 군사 기밀들을 다 공개하면서까지 모든 걸 다 그렇게 보여줬을까요? 자기를 과시하고 싶었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내 나라가 이렇게 대단하고 내가 가진 게 이렇게 많다고 뻐기고 싶었던 겁니다. 교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 자랑의 본질에는 죽을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내 죽을 병이 나왔다는 자체에 빠져 자기 교만에 모든 것이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할 때 거룩한 분노가 있었고 하나님을 자랑하는데 앞장섰던 자였는데, 지금은 내 이름과 내 병고침과 내 군사와 내 보물들이 자랑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사신의 사탕 발림의 미혹과 뇌물에 눈과 마음이 어두워 져서 보여 줄 거 안 보여 줄거 다 보여주며 자랑하며 교만에 사로잡힌 히스기야 왕, 그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 다 바벨론에게 털리고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너희 자손 가운데 몇명은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가 되어 거기서 환관이 된다고 증언합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비극의 소식을 들었으면 예전 히스기야 같으면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한 번만 기회를 다시 주옵소서…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교만해진 히스기야는 말도 안 되는 반응을 보입니다. 내 생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다행이네요… 결국 남유다가 누구 때문에 국운이 기울어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겁니까? 히스기야 왕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히스기야 왕에게는 놀라운 큰 치유를 경험한 형통이 결과적으로는 복이 아니라 화였다는 겁니다. 죽을 병에서 건짐 받고 찾아온 형통이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자기를 자랑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고난이 우리에게 큰 어려움과 고통이기 하지만 영적으로는 고난보다 형통이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께 잘 나아가며 은혜를 구하다가 고난이 끝나고 형통이 시작되면 하나님을 망각해서 무너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모순과 같이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이라 선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난 이후 찾아온 형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고난 뒤에 찾아오는 형통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면 그 형통은 복이 아니라 화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나에게 복이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이사야서 말씀은 우리에게 냉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에서 고쳐주셔서 15년의 삶을 연장시켜 주시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대로 살지 못한 히스기야, 차라리 15년 전에 죽었으면 더 좋았을 인생이라는 겁니다. 15년을 기적적으로 더 산게 히스기야 왕과 남 유다에게 복이 아니라 화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인생을 살면서 끝에 그렇게 무너짐으로 나라 전체가 무너지게 만드는 인생이 되었다… 이것이 히스기야 왕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라는 것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이것이 바로 우리가 붙들어야 될 말씀의 진리입니다. 나에게 주신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와 축복이, 고난 후에 찾아온 형통의 시간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그게 복이 아니라 화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은 완주하는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신앙은 끝까지 가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이 끝까지 가는 믿음을 놓친 안타까운 인생을 반면 교사로 삼아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끝까지 지속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끝까지 영적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붙어 있어 완주하는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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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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