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 왕은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발버둥 쳤던 왕입니다. 그런 신실한 왕에게 찾아온 것은 축복과 평화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와 앗수르라는 큰 적이었습니다. 예수살렘이 무너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큰 어려움 속에서,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붙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멸하시고 물러가게 하는 기적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과 버금가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놀라운 승리의 역사 앞에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고 국가적 위기와 벼랑 끝에서 건져 주시고 큰 승리를 주셨으면, 이제는 좀 쉬게 해주시고 평탄한 길을 걷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국가적 위기를 크게 넘고 나니까 찾아온 것은 개인적 위기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네가 죽을 병에 걸려 곧 죽을 거라는 청천 병력과 같은 소식을 들은 겁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에게 첫번째 드는 생각은 왜…라는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왜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섬기고 충성되게 섬겼던 정직한 왕에게, 국가적인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위기를 넘게 해 주시더니 왜 개인적 위기와 어려움으로 또 몰아가십니까? 하나님 제대로 믿어보려 하는 사람에게, 신앙 생활 제대로 해보려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이런 개인적 위기와 어려움은 참 마음을 무겁게 하며 탄식과 함께 가슴을 치게 합니다. 인과 응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않는 기가 막힌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하면서 그 깊은 탄식을 내는 것이 우리 인생이자 히스기야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국가적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반응을 보였듯이, 개인의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고 포기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넘어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놀라움을 발견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럴 수 있느냐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는 대신에 히스기야 했던 제일 먼저 했던 건 기도였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나아갔다는 것이죠. 그의 죽을 병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병에 걸리면 하나님에게 멀어집니다. 왜…라는 풀리지 않는 질문과 함께 원망과 낙심으로 하나님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기 쉽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위대한 점은 죽을 병이 걸린 그때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으로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려 개인적 위기 상황으로 벼랑 끝에 섰을 때도, 히스기야 왕은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갔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진심과 전심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며 눈물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통곡의 기도였고, 눈물과 함께 드리는 마음을 쏟는 기도였고, 그의 진심과 전심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상황 중심의 반응과 기도가 아니라 죽을병이 오려 더 하나님에게 가게 만드는 믿음 중심의 반응과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믿음의 대단함은 그의 삶에 하나님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다 피하게 해 주셨다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그의 형통한 삶은 고난과 어려움을 직면함애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의 놀라운 믿음은 놀라운 국가적인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개인적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오는 반응을 했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가 기도하며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그 태도, 그게 히스기야왕 믿음의 대단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피해 가서 형통한 삶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그 상황이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게 만드는 믿음의 반응이 형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잘될 때도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고 내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드는 삶, 내 인생이 오르막길을 갈 때도 하나님을 붙들고 내리막길을 갈 때도 하나님을 붙드는, 삶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삶이고 이것이 히스기야가 보여주는 놀라 믿음의 삶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며, 매달려 눈물과 마음을 쏟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기도를 들었고 내 눈물을 보았다고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통해 뜻을 돌이켰다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뜻을 돌이키셨던 여러 예가 성경에는 등장합니다. 대표적인데 요나 선지자를 통해 예고하신 니느웨의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가 곧 멸망할 거라는 것을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주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하며 회개하며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멸망시키려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켰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심,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주님 앞에 회개하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그 심판의 뜻을 돌이키셨다는 겁니다.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자비하심이 오늘 말씀에서는 히스기야의 왕을 향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중심을 보시며 국가적 위기에서나 개인적 위기에서나 한결같이 하나님에게 먼저 나오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걸 통하여 죽을 병에서 건져 주셔서 15년 연장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15년 연장의 선물, 그것을 통하여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해야 될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 이 성을 보호하는 놀라운 역사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이 세상에는 문제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 숨쉰다는 것은 계속되는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가지 문제의 연속인 이 세상, 국가적 위기와 개인적 위기가 계속 밀려오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문제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며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반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문제와 어려움과 고난을 만날 때마다 그 문제와 고난과 어려움에 압도당해 원망과 낙심, 절망으로 이끄는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구가 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설명되지 않는 큰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하는 대신 사람 붙들고, 눈에 보이는 것 붙들고 헤매는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을 붙드는 인생 되기 원합니다. 내 계획과 계산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삶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그 자리에서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그 믿음의 반응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내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는 그 믿음의 반응을 통해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내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형통하는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자비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 믿음의 반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형통의 은혜, 함께하심의 은혜를 누리며 오늘도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바라기는 문제를 뛰어 넘어 함께하시는 주님의 역사, 오늘 하루를 살아도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기를 열망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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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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