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이란 누구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이고 살 것인지, 무엇을 보고 주목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선택의 삶입니다. 귀 기울이고 주목하는 것에 따라 인생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결정되며 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은 벼랑 끝의 위기상황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 당하는 것을 지켜 봤고, 그들이 얼마나 강대하고 무자비한 민족인지 다 봤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협박하고 그들이 최후 통첩을 하는 게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앗수르는 산헤립을 통해 심리전으로 백성들을 향하여 유다 방언으로 항복하고 나아오면 목숨은 살려주고 먹고 살게 해 주겠다는 흔드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에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소망의 말씀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은 처한 상황을 비추어 볼 때 듣고도 믿을 수 없고, 머리 속 계산으로는 받아들 수 없는 약속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며 순종하느냐, 아니면 앗수르와 세상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택해야 할 결정사항이라는 겁니다.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최후 통첩을 받아 망하기 일보 직전의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귀 기울일 것인지, 앗수르로 대표되는 세상이 주는 말을 듣고 귀기울일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주목할 지, 눈에 보이는 환경과 상황에 주목할지에 대한 그 결정이 나아갈 길과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앗수르의 하나님을 향한 죄의 무거움, 그 무거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로 시작됩니다. 히스기야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는 자신과 백성들이 처한 위기 상황과 어려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고 능욕하는 앗수르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주목하여 바라본 것은 처한 상황의 어려움, 앗수르의 최후 통첩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훼방 당하는 무거운 죄였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을 반응하셨고 대답해주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똑 같은 죄도 가중 처벌이 있습니다. 모욕하고 훼방한 게 옆사람에게 한 것과 경찰서장에게 한 것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하물며 모욕하고 훼방한 것이 대통령에게 한 것은 얼마나 큰 가중 처벌을 받겠습니까? 앗수르의 범죄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능욕하는 중범죄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앗수르는 그 무거운 죄에 대한 대가가 있음을 선포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능욕하고 훼방한 죄의 결과를 약속으로 선포하십니다. 최후 통접을 한 강대국 앗수르가 예루살렘 성에 이르지 못하고,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왕은 돌아가서 죽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사야를 통해 약속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체로 믿으며 거기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리라.” 이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은 변수이고 하나님의 열심이 상수라는 고백, 내가 만드는 것은 변수이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 상수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삶, 그게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나의 열심히 이루는 삶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내 열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의 열심이 때로는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내 열심이 될 일도 안 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는 이유는 내 열심이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나아가는 삶이 중요한 이유는 내 열심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위한 수단이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열심은 변수임을 알기에 내 열심은 언제나 상수이신 하나님의 열심에 쓰임 받는 도구 되게 만드는 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상수라는 것을 믿으며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가 싸우지 않고 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은 머리로 이해되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약속이자 믿음 없이는 순종하기 어려운 약속입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애굽의 군대가 죽이려고 추격해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는 약속과 똑같습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절대 이길 수 없는 난공 불락의 여리고성이 성 주변을 믿음으로 도는 것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약속과 똑같습니다. 어떻게 싸우지도 않고 앗수르 군대가 다 도망갑니까? 어떻게 홍해가 가만히 있는데 길을 내며 갈라집니까? 어떻게 여리고성이 그냥 돈다고 무너집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는 하늘의 역사라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도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하늘의 일이 이 땅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라는 겁니다. 위기 상황에 있을 때, 절박한 벼랑 끝에 있을 때, 환경과 상황에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은,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약속으로 붙들고 취하는 것 이게 바로 기적의 삶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말 대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상황과 환경을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신앙 생활을 나를 넘어서는 기적의 삶이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죽게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뛰어넘는 하늘의 역사이며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많은 군인들이 모두 시체가 되었기에 그들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은 돌아가서 비참하게도 자기 아들들에게 살해 당하며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도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갈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살아갈지를 선택해야 하며, 환경과 상황에 주목할지 그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할지를 결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새벽에 우리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사모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이유도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일 수도, 하나님을 주목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사람들과 세상의 말에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 말씀에 주목할 힘을 달라고,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에게 주목할 힘을 달라고 은혜를 간구하며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민감하게 깨어 귀 기울이며 살아간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넘어 하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주목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며 살아가기 쉬운 우리를 깨우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역사를 주목하며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살아 그 약속을 실체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도로서 우리가 경험하고 사모하는 일들은 나의 열심이 이루는 것들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일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약속으로 취하고 믿음으로 붙들면서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놀라운 하늘의 일들을 맛보며 살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는 도구로 내 열심을 사용하시고 내 삶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합당한 삶이란 내가 열심히 살고 내가 열심을 내고 무언가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며 내 삶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쓰여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취할 때 여호와의 열심이 나의 삶을 통하여 일하시고 그 하늘의 일이 우리 가운데 경험되는 놀라운 일이 목도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만들어 내시는 일들이 내 삶에 펼쳐지며 그 약속을 실체로 경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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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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