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경고의 말씀으로,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 같은 나라들이 군사와 정치 강대국들이었다면 두로와 시돈은 무역을 통하여 큰 부를 얻은 경제 강국이었습니다. 다시스의 배들, 바다에서 무역하는 상인들과 같은 언급을 통해 두로와 시돈이 고대 시대에 독점적으로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특별히 다시스의 배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다시스는 요나서를 통해 알겠지만 지중해의 맨 끝, 지금의 스페인 지역을 얘기하는데 그 당시에는 땅끝 마을이었습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땅이 바로 다시스였는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그 땅끝 마을 까지도 배로 모든 교역을 주도하며, 물건을 이곳 저곳으로 팔면서 큰 경제적인 이익과 부를 챙긴 것입니다. 지중해 모든 경제의 흐름을 장악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면서 그걸 통하여 경제 강국이 된 곳이 바로 두로와 시돈 이었습니다. 그런 경제 강국이 된 나라, 무역을 통한 풍성하고 부유한 삶을 살게 된 나라인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는가를 오늘 말씀은 두 가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혼합주의로 요약되는 우상숭배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거룩한 속성의 여호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풍요와 부유함을 위해서 이곳저곳에 경제 교역을 통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다 보니까 세계 각국의 재물이 들어오는 것과 함께 세계 각국에 혼합종교와 우상이 함께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각양 각생의 우상들이 두로와 시돈에 들어오면서 겉으로는 잘 먹고 잘 살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영적으로는 온통 우상이 가득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지면에 있는 열방은 바로 지중해 지역의 많은 나라들인데, 그들과 무역과 교류하는 것을 그냥 무역을 한다 그러지 않고 음란을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두로와 시돈이 돈의 흐름을 쫓아 풍요와 부유를 붙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돈을 모았지만, 그것과 함께 영적인 음란함, 즉 종교 혼합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도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풍요와 부유함을 절대 가치로 두고 살아갔기에, 종교와 신앙 경시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겁니다. 결국 풍요와 부요함을 신과 같이 여기고, 내 삶의 절대가치인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위해서는 종교를 섞고 혼합하고 우상을 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던, 이슬람을 믿던, 힌두교를 믿던, 기독교를 믿던 그게 뭐 큰 차이가 있냐… 우린 다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에게 신앙은 부수적이고 하위개념이자, 멤버십 같은 액세서리인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닌 다른 것을 절대 가치로, 상위 개념으로, 인생을 걸고 열심을 내기에, 종교가 혼합이 되던, 우상숭배를 하던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심지어 우상을 섬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두로와 시돈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가져온 풍요로움과 만족과 하나님 없는 안전과 평안을 찾는 모습이 결국 하나님이 이 모든 복을 부어 주셨음을 망각하고 신앙을 수단화하고 도구화 하는 것입니다. 풍요와 그들의 부요함의 절대 가치를 위해 종교와 신앙을 하위 개념으로 부수적 사용 개념으로 경시한 삶, 우상숭배와 혼합 주의가 가득하게 만든 것이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고 멸망한 이유입니다. 두 번째, 두로와 시돈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바로 영적 교만함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교만하게 된 모습을 한 마디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였느냐…” 하나님 없이 돈만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내가 정한 대로 내가 뜻한 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돈이 많으니까 모든 게 내 뜻대로 이루어지며 내가 정한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착각하는 것, 그게 바로 두로와 시돈의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일한 결과로 내가 모든 것을 얻는다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되고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만, 나의 열심과 노력이 도구는 될 수 있으나 절대 공식과 같은 결과를 내를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풍성함을 주시는 분이 계시고 부유함을 주시는 분이 계시며, 나에게 평안함을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게 신앙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두로와 시돈의 풍요로움과 부요함은 그 모든 게 내가 열심히 해서 나온 결과물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죠. 해상 무역을 통해 바다를 장악했으니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 있다 착각하며, 넘치도록 많은 돈이 있으니까 내가 모든 것을 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과 같이 나의 부요함과 풍요로움이, 나의 영화와 평안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제대로 모르는 게 바로 교만한 인생입니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내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교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의 영적 교만과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심판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바다 위에 하나님의 손을 펴사 온 나라를 흔드시며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시고, 기쁨과 평안이 다 사라지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들의 경제 시스템이 다 무너지고, 교역할 물건을 팔 항구들이 다 없어지게 만드시고, 통곡과 눈물만이 가득한 심판이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 믿는 신앙을 상대화 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격하시키지 마십시오. 종교 혼합 주의에 빠지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하나님 믿는 신앙은 절대 가치에, 상위 개념에 number one으로 둘 때만 가능합니다.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인생에 부어진 풍요와 부요함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모두 하나님 때문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배제한 채, 내 노력과 열심, 내 재능과 능력이 이런 결과를 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때껏 산 것이 누구 때문인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적 겸손입니다. 이 정도 부요함과 풍성함 가운데 살게 된 것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 때문임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영적 겸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의 실력과 능력보다, 여러분들의 노력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신 것을 인생에서 순간 순간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노력하고 열심을 낸 것이 귀하지만, 내 능력과 실력도 있지만, 그거보다 훨씬 많이 부어지는 것이 있을 때, 그때는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건 하나님이 주시는 거구나…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구나…기억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에 여기까지 왔음을 철저히 믿으며, 내 인생의 풍요와 부요함의 원인을 오직 주님께 돌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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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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