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앞에서 이미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주셨던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이사야의 주변 나라들을 향한 심판과 경고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와 세계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열방이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게 합니다. 또한 이렇게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이 계속되는 것은 bad news에 대한 직면이 없이는 good news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본질이 소망 없는 어둠임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본질이 심판을 향해 질주하는 어둠임을 직면하지 아니하면 빛이신 예수, 복된 소식인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복음이 내 안에 받아들여질 수도 영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멸망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 이유는 바벨론이 단순히 그 시대에 있었던 한 나라 바벨론을 넘어서는 훨씬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 하는 바벨,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린 채 정글에서 힘의 논리와 생존의 논리만을 위해 살아가는 짐승의 나라 바벨론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바벨론을 해변 광야라 명하고 있습니다. 왜 짐승의 나라 바벨론을 해변 광야라 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 소위 말하는 바벨론에 대한 그들 영적 상태를 비꼬며 지적하시는 모순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해변과 광야라는 말은 같이 갈 수 없는 모순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변은 고대 시대의 풍요와 넘침에 상징입니다. 그래서 모든 고대 문명은 다 강을 끼고 발생을 했고 물이 있다는 것은 특별히 중동 지방에서는 생명 줄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해변가의 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메마르지 않고 죽지 않고 풍요와 넘침을 공급하는 수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변은 풍요로움과 넘침이 가득한데 바벨론을 해변의 광야라고 모순과 같이 지칭한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와 풍성함이 가득한 해변에 있는데 속으로는 메마른 광야 같은 곳이 바로 바벨론이 처한 영적 현실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많이 누려도 하나님이 빠진 인생은 속이 다 메마르고 공허한 해변 광야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풍요 속에 빈곤, 해변 광야가 바로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간 짐승의 나라 바벨론의 현주소인 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고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의 끝인 바벨탑,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이 짐승과 같이 내 이익을 위해 약육강식의 논리로 모든 것을 죽이고 뺏는 짐승의 나라 바벨론으로 살아간다면 해변의 광야이고 결국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교만하게 살고 있는 바벨론에 임하는 혹독한 심판을 예고하시는 겁니다. 혹독한 심판이란 메데라는 나라가 급 부상해서 하루 아침에 바벨론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심판입니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러 올라가 폭상 망하게 하실 것을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어떤 심판을 하실 지 미리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메대, 페르시아의 손에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멸망시키는 사건을 우리는 과거형으로 바라보니까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만, 그 당시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는 시대에는 이런 일은 정말 있을 확률이 0%에 불과하다, 정말 있을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바벨론을 누가 그렇게 한번에 무너뜨릴 수 있느냐? 이런 혹한 묵시가 말이 되느냐…사람들은 소설을 쓴다며 이사야의 예언을 무시했을 겁니다. 그런데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강대국 바벨론에 임할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한 실체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에 장차 있게 될 짐승의 나라, 해변 광야인 바벨론이 어떻게 심판 받고 무너지게 될 것일지 분명한 실체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해변 광야인 바벨론을 심판하실 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하듯이 그 모든 곳이 함락되고 부서지고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함성으로 하루 아침에 무너지듯, 하루 아침에 바벨론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미래의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이사야는 그것을 예언하는 조차 두렵고 떨리는 심판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한반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루 아침에 초토화되는 그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하는 멸망 자체를 보는 게 너무나 처절하고 혹독해서 너무 두렵고 떨렸다는 겁니다.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임박한 여인이 해산을 하는 고통과 같이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바벨론의 심판을 예언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두려움을 주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그날이 오는 것은 실체 이기에 지금 돌이키고 돌아오라고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심판의 당사자인 바벨론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 앞에 뭐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세운 바벨론 나라가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죽음과 멸망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그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며 잔치하는 일이 잘못된 일도 아니고 틀린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다가올 때를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데 모든 것을 쏟는 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의 때를 망각하고 둔해지며, 임박하게 다가오는 그 날을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면 죄가 되는 겁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가 임할 때 사람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며, 먹고 마시며 그들의 일상에 그냥 충실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 충실한 게 잘못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나라 바벨론은 해변 광야입니다. 바벨론과 같이 나의 영적 현주소가 해변 광야, 속빈 강정,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놓친 백성은 겉으로는 아무리 풍요롭고 화려해도 결국 속이 텅 빈 고아 같고, 공허함과 메마름이 가득한 광야 같은 겁니다.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고, 풍요롭고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다 메마르고 텅 빈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변 광야와 같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실 것을 혹독한 묵시로 주셨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이사야의 혹독한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경고를 마음에 새기면 새길 수록 내 안에 소망이 없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직면하고 내 밖에서 나를 건질 소망과 빛이 와야 함을 믿고, 복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빛, 참 소망, 참 생명만을 붙들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사야가 전하는 이 혹독한 묵시의 때가 실체로 오고 있음을 알고 그 날을 바라보며 대비하고 준비하며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믿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게 중요하며 그것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며 그것을 위해 보냄 받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변 광야와 같은 인생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꼭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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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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