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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고난 주간을 통하여 십자가 사건을 현재화하며 내면화하는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형을 선고받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해골이라 칭하는 골고단 언덕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기를 꺼려하는 가장 참혹한 곳, 이 죽음의 언덕 골고다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은 사형으로 죽는 총살형과는 다릅니다. 총으로 죽는 것이 그나마 십자가보다 나은 것은 그 죽음의 고통이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형은 단번에 죽지 않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도 고통인데 죽어 가는 고통을 온몸으로 당하시며 서서히 죽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을 지옥고, 지옥을 경험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루 종일 온몸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다 감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 가셨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장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며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라고 갈라디아서는 증언합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내 죄값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 가운데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몸에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통해 두 가지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하는데 첫 번째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고백, 두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행악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그 십자가 위에 죄패가 붙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입니다. 죄패라면 반역죄, 대역죄…이런 말을 써야 할 거 같은데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겁니다. 그것도 그냥 히브리어로만 쓴 게 아니라, 히브리와 로마와 그리스어 3개 국어도 번역까지 해서 써 놓은 겁니다. 그것의 의도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라는 죄인이 무슨 죄로 죽었는지를 알게 하는 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부분을 하늘의 시각으로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유 없이 고통 당하시며 서서히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지만, 그 십자가 위해 죄패가 3개 국어로 써 있으면서 예수님의 죄목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 전 세계에 통용되는 로마어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써놓음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두가 알게 한 셈이 된 겁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인간의 눈으로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의 십자가 시간조차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 세상에 선명히 선포하는 도구로 쓰신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모르는 로마 라틴어와 헬라 그리스어를 아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누군가를 선포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가 주일 예배를 통해 배웠지만 매주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렸던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소리쳤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왕이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의 로마 왕이 우리의 진짜 왕이라고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죽어 가시는 십자가 위에서 그 죄패를 통해 진짜 왕이 누구신가를 선명히 드러내시는 겁니다. 모든 나라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 선포하시는 겁니다. 온 천하에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되심을 선포할 거라는 것을 어떤 인간도 계획하고 상상하거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기도, 우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놀라운 하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우리 머리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한 차원의 그림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고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두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혼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게 아니라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과 같이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여기에 함께 달려 죽어가는 이 두 사람을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행악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행악자가 죽음의 언덕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 두 사람은 2000년 전에 본인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행악자이기도 하고요 동시에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두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두 행악자는 마지막에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다르게 결론짓게 되는데 한 사람은 영생을 누리게 되고, 한 사람은 영벌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 좌편과 우편에 달린 이 행악자들의 차이는 그들의 죄의 무게 차이나, 그들의 공로나 선행의 차이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향해 비방하며 소리쳤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겉으로는 구원이란 얘기를 했는데 그에게는 자기 죄의 회개도 없고,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단지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라며? 우리를 구원해라고 소리치고 있었죠 반면에 다른 행악자는 죽어가면서 구원이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겸손히 한마디를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 붙들 죄인과 예수 붙들지 않는 죄인, 이 둘의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정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는 겁니다. 모든 인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이 두 죄인 중에 한 그룹이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모두 죽음의 언덕에서 죽게 되는 인생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죽음의 언덕에 와서 본인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존재들이에요.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우리 죄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남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받음, 영생 얻음의 비결은 오직 하나, 죽음의 언덕에서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전 예수님께 구원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예수 이름 붙든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죽음의 언덕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갈 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며 그분을 붙든 자, 거절하고 예수님을 붙들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언덕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죽어가는데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비방하며 손가락질하며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고, 내미신 손길을 거절하며 영원히 죽는 자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영생과 영벌을 가르는 차이는 단 하나, 그 죽음의 언덕에서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손을 내미느냐, 내미신 주님의 손을 거절하는냐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선해서, 남들보다 죄가 가벼워서, 이만큼 괜찮게 살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똑같이 죽음의 언덕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걸 믿으며 그의 이름을 의지한 죄인인 겁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한 일에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예수, 죽음에서 나를 건져 주신 구원자에게 있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복음을 선포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예수님만이 우리 왕이심을 고백하며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나를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손을 내밀며 그의 이름을 붙들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자가 바로 나라는 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믿고 선포하기 원합니다. 나를 죽음의 언덕에서 건져 주신 그 십자가 사랑만을 붙들고 예수 이름의 능력을 붙들고 예수 안에서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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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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