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가 계속되는 연장 선상에서 구스 땅에 임하는 심판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위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계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스라는 나라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이디오피아입니다. 이디오피아는 애굽 바로 옆에 있었던 땅인데 강으로 말미암아 애굽만큼이나 풍성한 삶을 살았던 나라입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가 그렇게 잘 산다 말할 수 없지만 이 당시에 이디오피아는 굉장히 풍성하고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구스 땅이란 이처럼 풍성함과 풍요를 상징하는 나라인데, 오늘 말씀의 시작은 슬프다는 애곡으로 시작됩니다.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라는 것은 바로 구스 땅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삶 자체의 분주한 소리입니다. 경제가 활성화되어 사람들이 일하러 다니는 소리, 풍성한 잔치 소리가 가득한 풍요의 소리입니다. 이처럼 환경과 조건이 풍요로운데, 경제가 활성화되어 날마다 날개치는 소리가 나는데 왜 그 땅이 슬프다는 겁니까? 분명한 단 한가지 이유…그 땅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물질과 조건의 풍요로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가 잘 돌아가는 소리만 나면, 눈에 보이는 물질과 환경만 풍요로우면 된다는 그들의 착각,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과 상관 없이 풍요로움만 추구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슬프다는 겁니다. 구스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이 없는 만족을 추구하고,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삶이 직면하는 심판입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구스 땅, 이 땅에서 풍요로움과 풍성함에 빠져 살아가는 그 끝이 결국 다 멸망하고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잘못된 길로 질주하는 구스의 끝이 보이니까 슬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구스 땅에 임한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 대신, 주변 나라를 등에 업고 문제를 타개 하려 하는 삶에 대한 심판입니다. 구스 땅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피하는 대신, 주변 나라들의 등에 업혀,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 피하고 타개하려고 하는 삶입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였고 구스에 전쟁을 압박하고 치러 내려오려는 상황입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앗수르에 대항해서 강이 흘러 나누어 지는 나라, 즉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의 등에 업히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스가 강물이 흘러 나누인 나라인 애굽에 사신을 보내는 겁니다. 그들의 근본적 문제는 위기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압박과 압력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달려가는 대신, 주변 나라들에게 달려가고 세상 나라들의 힘을 의지하고 붙들려 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결과 구스에게 임하는 심판의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드러나죠. 하나님 대신 붙들었던 풍성함과 풍요로움이 꽃이 떨어지듯 떨어지며, 짐승들이 약탈 하듯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노력을 해도 결국 심판의 때가 임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힘 대신, 주변 나라 애굽의 힘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 구스의 심판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구스의 심판을 엄중하게 예언으로 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남유다가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이방 나라인 구스와 차별 없이 똑같이 망하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전혀 비추어 보지 않고, 이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삶, 마치 하나님이 없는 자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 구스와 마찬가지로 강대국 애굽의 힘을 빌려 직면한 나라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되심과 보호하심을 전혀 믿지도 알지도 못하고 이방 나라들과 똑같이 우매한 결정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구스와 같이 남유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그냥 눈에 보이는 힘, 군사적인 힘을 의지하여 문제를 타개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무관하게 그저 잔머리를 쓰고 계산하여 애굽에게 손을 벌리고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한 결과 구스와 마찬가지로 배신당하여 망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피하며 하나님의 힘을 붙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가져오는 힘, 세상을 의지하는 힘은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무너지게 만든다, 그게 심판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구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끝에 중요한 결론이 숨겨져 있습니다. 구스, 이디오피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주셨지만, 그 심판 뒤에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심판의 강력한 경고로 멸망하게 되는데, 그 끝은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게 될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멸망하고 종결될 거 같은데, 그 마지막 때에 구원의 날이 이렇게 임하게 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마지막 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때에 하나님 편에서 있지 않으면 심판이지 하나님 편에서 있으면 구원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구스 백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붙들고, 이 세상만 붙들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왔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을 여시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면 그 가운데 회복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셔서 생명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마지막 때에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인종과 모든 국가를 초월하여 여호와께 드릴 예배를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게 될 그 놀라운 회복에 함께 동참하게 하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 심판의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함께 그들의 회복과 구원의 메세지를 동시에 선언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은 반드시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이 풍성하고 풍요로운 것 자체가 문제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풍요로움이 하나님 안에서 풍요로움과 풍성함으로 나아가야지,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과 풍성함을 추구하고 붙들면 그게 문제가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과 풍성함이 하나님을 모르게 만든다면 그것들이 절대화되면서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에 빠지면,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없는 출구를 찾으려 뛰어 다닙니다. 계산하고 머리를 굴려서 주변의 힘 강대국의 힘을 빌려 내가 살려고 계속해서 정치적인 저울질을 하는 삶을 살아가다 반드시 망하는 겁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온 열방이, 하나님 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바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시온산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이 놀라운 초대에 감격과 기쁨으로 반응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놀랍고도 분명한 말씀을 품고 하나님을 통과한 풍요로움을 구하며, 위기 가운데 하나님에게 피하며,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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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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