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본인이 전했던 순전한 복음이 물타기를 시도해서 자꾸 왜곡과 변질이 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사 복음과 다른 복음에 자꾸 갈라디아 교인들이 흔들리고 젖어 들어 본질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이 무너져도 다른 복음을 좀 조심해라 분별해라…좀 신사적으로 말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경고 말씀은 굉장히 셉니다. 센 정도가 아니라 이게 좀 너무 격해서 극단적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꼭 이렇게 강력하고도 극단적인 언어를 써야만 됬을까?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condemned이니까 저주 대신 정죄를 받을지어다…로 완곡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한글에는 없는 eternally가 분명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이것을 직설적으로 번역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영원히 정죄받을 지어다…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이건 한글 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센 경고 말씀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극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강력 경고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다른 복음은 끝이 조금 다른 미미한 차이가 아니라 구원과 영생의 관련 있는 본질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해서 구약 성경을 통해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는 자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부인한 건 아니었는데,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 여긴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한 방법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세상과 우상을 겸하여 예배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배 드리고 세상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붙들고 우상도 붙들었던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굉장히 심하게 질책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당하게 고개 빳빳이 들고 대들듯이 대답합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섬기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게 뭐 그렇게 큰 대수입니까? 그게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아니 하나님 왜 이렇게 빡빡하게 그러십니까?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늘 한결 같은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찌르는 말씀으로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예배하지 않는 거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거라는 것임을…..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의 강력한 경고도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은 예수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십자가 복음을 부인했다면 유사 복음이나 다른 복음에 사람들이 빠져들거나 미혹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데, 문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믿기는 하는데 그걸로 구원받는 게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을 지키거나 율법을 지키는 이런 것들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으로 같이 붙드는 겁니다. 왜 많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으로 자꾸 이탈하게 되는가 하면 이 차이가 뭐가 큰 문제이고, 뭐가 큰 대수냐고 가볍게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양념과 같이 뭐 좀 더 치는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겠냐는 착각에 빠진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강력 경고하며 강조해서 얘기하는 것이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겁니다. 다른 복음에 빠지고 젖어들면 너희는 영원히 저주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만 붙들지 않으면 그 복음은 가짜라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고 수용하고 있는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게 예전 초대교회도 문제였고 지금이 시대에도 계속 우리에게 있는 심각한 도전이자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로 보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중의 삶은 좀 빡빡하게 하시지 말고 좀 놔두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선명하게 붙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선명히 붙드는가의 싸움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을 추가하고 첨가하거나 다른 것을 자격 조건으로 두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결론짓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중에, 사람을 먼저 인식하고 의식하고 사람의 기쁨 되기를 먼저 구하는 삶이 자연스럽고 익숙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얻기 원하고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원하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보다 먼저 붙들고 그분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절대 가치로 두고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게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게 잘못됐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좋게 하는 것이 삶의 절대 가치가 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 모두도 이런 유혹에 늘 빠지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신앙 생활할 때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훌륭하다는 소리 듣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칭찬받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넘버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자, 예수님의 칭찬을 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에 피곤한데 왜 새벽기도에 왜 나오셨습니까? 나오신 여러 가지 동기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우리가 선포하고 붙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고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사람에게 기쁨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기쁨 구하기에 내가 이 자리에서 있다는 것을 선명히 고백하며 붙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과 만나는 교제가 기쁘고 다른 것들이 따라와야 하는 겁니다. 이 우선순위와 영적 질서가 뒤바뀌게 되면 계속 헷갈리게 되고 계속 본질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만 선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100%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건 어떤 것도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 하나로 충분한 구원, 예수 보혈 하나로 충분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충분한 구원을 선명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만 섬기고 예수 십자가 복음만을 선명히 붙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단단히 붙들려 살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예수 이름 외에는, 예수 보혈 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않겠다, 다른 것을 자격 조건으로 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한 기준 아래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을 기쁘게 하며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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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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