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사람들,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본인이 직면하고 당하고 나서야 돌아오는 사람들, 말씀 듣고도 안 돌아오고 그렇게 직면하거나 당하고도 돌아오지 않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15장과 내일 말씀 16장에 등장하는 심판에 직면한 모압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배운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고는 주변 나라들이자 이스라엘과는 무관한 민족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모압은 물론 이방 나라이긴 하지만 이스라엘과 아예 무관한 나라가 아니라 조상이 비슷한 형제 나라였습니다. 모압의 시초는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도망간 후 자기 딸들을 통해 얻은 아들들을 통해 나라가 시작되는데 그 첫째 딸을 통해 얻은 아들이 세운 나라가 모압, 둘째 딸을 통해 얻은 아들이 세운 나라가 암몬입니다. 그러니까 모압은 이방 민족이지만 저 위로 올라가면 혈연에 공통점이 있는 소위 말하는 형제 나라이자 굉장히 가까운 민족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역적으로 거리적으로 가까웠지만 모압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으며, 신앙적으로 완전히 이스라엘과는 결이 다른 이방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적어도 성경에는 두 세 가지가 증언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모압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롯이 대표하는 패러다임입니다. 롯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눈에 제일 좋은 거라고 선택한 게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거기는 얼마 있다 망하는 곳인데, 자기 눈에는 그게 좋은 거라고 선택한 어리석음입니다. 롯의 후예인 모압 백성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신들의 눈에 좋은 것을 끊임 없이 선택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모압 백성들의 혈통이고 이방 나라가 되는 그들의 삶의 패러다임이었다는 겁니다. 두번째는 모압의 이스라엘을 향한 악한 태도와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을 때 모압은 굉장히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출애굽 할 때 길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압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가 먹히지 않고 오히려 그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되니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음란한 여인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패망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24000명이 죽음을 당한 그 사건의 중심에 모압이 있는 겁니다. 혈통의 뿌리로 봐선 어떻게 보면 형제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모압은 역사적으로도 삶의 패턴으로도 하나님에게 점점 멀어져간 백성이자, 하나님과 무관한 나라와 이방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가 임했을 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이방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두 가지의 큰 특징으로 나타나는데, 하룻밤에...와 엄중하게…입니다.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복해서 “하룻밤에…”가 강조합니다. 모압 알과 모압 기르는 서울&부산, 혹은 뉴욕& 엘에이 같은 모압의 대표적 두 도시인데, 그 두 도시가 하룻밤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장 큰 도시들, 가장 튼튼하다고 생각한 그 요새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겁니다. 하룻밤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물론 전조증상이 있긴 하지만 예고 없이 하룻밤에 모든 게 무너지게 된 심판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번에 다 쳐서 심판하시기에 하룻 밤에 망하고 하루 아침에 황폐해질 거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 그 심판이 무겁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벼운 심판은 없지만, 심판 중에도 경중이 있어서 가중처벌과 같이 가중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모압에게 임한 심판이 바로 그 가중 심판, 무거운 심판이라는 것을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엄중했는지 2절부터 마지막까지 구구절절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정신줄을 놓고 혼비백산 할 정도였고, 모든 백성들이 소리 지르고 울부 짓고 있는 겁니다.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고 거둘 게 없으며, 피가 가득하고 죽음이 가득한 땅, 그게 모압에 임한 하나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모든 게 무너진 심판, 여러분 이렇게 중하고 무겁게 임한 모압의 심판 사이에 주목해야 말씀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사야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짖는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란 일차적으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방 민족으로서 심판을 당하는 모압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압의 심판 한 중간에 이 말씀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아픈 마음을 가지고 모압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과 탄식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심각한 국가적 재난, 하나님이 치시는 심각한 심판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압과 그 백성들이 여전히 찾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그들이 붙들고 찾는 대상은 세상이고 우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산당에 올라가 우상을 찾고 우상에게 나아가고 우상을 붙들고 울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세상과 우상을 향하여 여전히 달려가고 붙들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중한 심판을 직면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정신 못 있는 그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 입니다. 이게 심판을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는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자 눈물입니다. 모압 백성만 그렇게 안타깝고 답답합니까? 우리들도 모압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경고해도 듣지 않고, 심판을 당하고 무너져도 돌아오지 않는 모압이 내 모습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경고와 채찍 가운데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찾는 건 사람이고 세상이며, 여전히 붙드는 것은 우상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시며 답답한 마음으로 “참 너희들 안타깝다. 그렇게 당하고도 돌아 오지를 않는구나.”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답답하고 안타까우신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정확하게 분별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는 내 눈에 봐서 좋은 것을 고르면 망하는 인생입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고른다는 게 소돔과 고모라인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 때문에 삶에서 삶에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채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하나님이 치실 때 얼른 정신차리고 두 손 들고 잘못했습니다…고백하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 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압의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모압의 어리석음을 반면 교사 삼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며 확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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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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