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1장 말씀은 다윗 왕이 했던 여러 일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굉장히 악한 행동을 계속해서 하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다윗왕을 경고하면서 12장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덮어졌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였고 사람의 눈들은 다 덮은 거 같이 보였는데 하나님에게는 하나도 덮어지지 않았고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시는데 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적어도 1년은 지난 후에 지금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 사이에 다윗왕의 의해 우리야가 죽었고 장례를 치렀고 밧세바를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았고 그 밧세바가 아기를 낳게 되니 적어도 1년이란 시간은 지난 겁니다. 그게 11장과 12장 사이에 간격이고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기다려 주신 겁니다. 다윗 왕이 스스로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년이 지나도 다윗왕은 회개하지 않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악한 일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눈을 가렸으니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고 시치미 뚝 되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다윗이 그렇게 잘못하고 나서 바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구나 생각하시면 안 되고 기다리시다 기다리시다 마침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으셔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 왕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회개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나단 선지자를 다윗왕에게 들어야 하는 쓴 소리를 하게 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고뇌와 갈등을 가지고, 두려움과 떨림을 뒤로 하고 다윗왕에게 마침내 나왔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왕은 예전에 영적으로 민감하고 하나님께 순전했던 그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왕은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져 있고 둔감해져 있었습니다. 듣기 좋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들어야만 살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바로 선지자가 가지고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철저하게 가리고 있으면서 문제의식이 없고,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죄를 드러내는 원인이 될 수 있는 우리야를 이유 없이 간접 살인을 했기 때문에, 왕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게 되면 나단 선지자도 죽을 확률이 굉장히 많은 겁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둔감하고 죄를 덮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나가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 다윗 왕 앞에 가서 왕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도록 부름 받는 자가 나단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선지자에게는 왕과도 백성들과도 창조적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가능하면 가까이 있는 게 좋습니다. 서로 얼굴 보기도 싫고 외면하고 싶고 그러면 은혜가 서로 담기지 않아요.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가 좋아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반드시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간격이 있어야 되냐면 창조적 긴장관계를 주는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는 어디까지만 친해져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보다 더 친해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가셔야 돼요. 만약에 내가 우리 목사님하고 이렇게 친해져서 하나님보다도 더 친해진다 그러면 창조적 긴장관계가 사라지는 것이죠. 그러면 그 목회자를 통하여 듣기 싫어도 나를 살리는 소리는 못 듣고 듣기 좋은 소리 밖에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하고 친하고 사람들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게 중요한데 어떤 사람들과도 하나님보다 더 친해지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고 가장 친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복 중의 하나가 뭐냐면 사람들과의 관계와 친밀함이 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2년간의 삶을 통하여 내가 가장 친해야 되는 분은 하나님 이시구나…라는 것을 믿음의 사람들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해도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간격을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간을 주고 그 사이에 예수님이 딱 들어가 계시지 않으면 이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이 창조적 긴장관계를 가지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적절하게 친해지는 게 좋습니다. 신앙 생활 할 때 목회자와 창조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여 들어야만 사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관계, 그 진리의 쓴소리를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 서로가 살아나며 믿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과 친한 성도 되는 것임을 꼭 붙드십시오. 나단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명령이 죽을 수도 있는 얘기라는 것을 알고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윗 왕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다윗왕에 가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바로 전하기 전에 1-6절까지 긴 이야기 하나를 전합니다. 왜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직접 왕의 죄를 얘기하지 않고 그 긴 예화를 꺼내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왕이 자신을 돌아보고 비추어 보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자신을 비춰보지도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철저히 둔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완전 마비되어 나단 선지자가 왜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벽 예배 중에 말씀이 선포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비춰보는 빛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는 대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모든 영적 감각과 영적인 민감함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나온 반응은 참 웃기고도 슬픈 반응입니다. 크게 화를 냈고, 그 사람을 죽여야 된다고 막 열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다윗 왕이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인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 이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화가 많이 났는가? 겉으로 봐서는 왕으로서 정의롭고 의로운 분노였고, 불쌍한 사람을 품는 거룩한 분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윗의 분노는 정의롭고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나단의 경고를 자신의 마음에 비춰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이자 그 얘기를 듣고 마치 남의 얘기 듣듯이 듣고 있는 영적 무감각의 현주소일 뿐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지금 자기 죄는 둔감하게 그리고 남의 죄는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정도로 화가 났는가 하면 이 일을 행한 자가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말할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양을 뺏어 가지고 대접한 일이 잘못한 일은 분명하나 죽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법에 따르면 4배로 갚아 주면 되는 일이었는데, 왜 다윗은 그렇게 화가 나서 이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있고, 그 적용을 자신에게 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분노의 대상은 다윗왕 자기 자신이어야 되는 것인데,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남의 죄에 이렇게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이렇게 다윗왕이 크게 노하고 죽여야 된다고 열을 내고 있는 그 현장에 나단 선지자를 찬 물을 끼얹듯이 한 마디도 선포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아마 이 순간 다윗은 아마 인생의 가장 시계가 천천히 가는 슬로우 모션과 같은 시간, 아니 시간이 멈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시간이 그에게 경고로 임한 것입니다. 그 부자가 당신이고 그 빼앗은 죽어야 마땅한 그 자가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하늘로 부터 정확하게 주시는 거예요. 당신이 그 사람이다…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 십자가 주변에서 뭘 하는지 모르고 예수님을 향하여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자, 소망 없이 살아가는 어둠의 사람,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결박된 죄인의 괴수가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씀 앞에 우리가 엎드리면 사는 거고 그것을 남의 얘기로 들으면 죽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핑계의 기회와 정죄의 기회로 날려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신 말씀을 나에게 비춰 보이는 대신 남에게 비춰보며 화를 내며 저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비춰 보십시오. 내 생각을 붙드는 대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영적 감각이 살아나고 영적으로 깨어 있고 민감해져서 다윗과 같이 회개의 기회를 날려버리며 무너지는 안타까운 삶을 단절하십시오. 다윗을 반면교사 삼아 당신이 그 사람이다…그 말씀을 내가 받고 고꾸라질 때 나를 살리는 복된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살아 있어 말씀을 통해 이런 변화가 내 삶에 선명하게 일어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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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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