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늘 좋지 않은 삐딱한 시선으로 오해 받고 꼬리표를 달고 다니듯 비판 받고 지냈는데,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또 하나는 그의 과거, 즉 초대교회의 신실한 집사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살인자라는 이 꼬리표가 그에게 늘 달렸습니다. 그의 과거 때문에 사도 바울에 대해서 평생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우리 앞에 나와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팔짱 끼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어디를 가나 사도바울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부끄럽고 내놓고 싶지 않은 과거를 나누면서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는지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이 good news라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상태가 얼마나 처절한 절망이었는지에 대한 bad news를 철저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Bad News를 모르는 상태로 good news를 알 수는 없는 겁니다. 그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의 Bad News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이 변한 Good News를 간증과 같이 전하는 고백이 오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정한 복된 소식인 십자가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그의 숨기고 싶은 과거, 정말 하나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 부끄러운 과거를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그의 예전의 모습을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려는 데 앞장선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유대교를 향한 열심은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고 전통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종교에 매우 열심인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그 열심은 바른 열심이 아니라 잘못된 열심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종교적 열심은 사람들을 죽이는 열심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덤덤하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면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바라보며 저들은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전통을 무너뜨리는 나쁜 사람들, 죽여야 될 사람들도 프레임을 씌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의 이름으로 열심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가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사울이 죄책감이 있었겠습니까? 돌로 쳐 죽겠는데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어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이 천사같이 변했던 스데반 집사를 죽이면서 눈 깜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게 잘못된 종교에 열심히 가져오는 폐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죄책감은 커녕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자가 바로 예수님 만나기 전 사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열심이 본질을 이탈하게 되면 항상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 부작용은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고, 부끄럽게도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고 다른 여러 종교에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금 현재에는 여러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종교 폭력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의 열심이 왜곡되고 변질되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며 죽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시대는 돈과 맘몬이 신의 자리에 올라간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특정 종교를 갖지 않지만 돈을 신으로 섬기면서 돈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종교의 자리에 올라가서, 돈을 얻는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종교적 열성과 열심과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 대신, 사람들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소망 없던 살인자, 잘못된 종교 열심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알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를 택하여 부르셨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자유게 하시고 의롭게 하실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갈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그의 삶에 이미 씨앗으로 뿌리고 계셨다는 겁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의 아주 유명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게 복음의 핵심이자 사도 바울의 산 간증인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 뒹굴고 있고 예수님을 찾지도 않는데 구원의 선물을 먼저 완성하신 겁니다. 나를 어머니의 태중에서 먼저 정하시고 나를 구별하 이 사명을 위해 이미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게 됐고 그걸 통하여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바뀌면서 인생을 거는 한 가지 복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그가 온몸으로 깨닫게 된 겁니다. 이방인의 사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거에 대한 분명한 부르심의 확신이 생긴 겁니다. 나의 그 부끄러운 과거를 다 덮고도 넘는 주님의 흘러 넘치는 은혜가 나에게 임했기에, 예수 보혈 붙들고 완전히 뒤집어진 인생이기에, 내 남은 삶은 주님께서 부르신 사명,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인생을 걸고 올인하게 된 겁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뜻과 계획이며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는데 내가 부름 받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 모든 것이 변하고,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사명을 받은 후 한 첫번째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마음에 새기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뛰어 나가도 될 사람이 됐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당장 가서 일하고 사역하고 그래야 될 거 같은데, 이방인들을 찾아가 내가 이렇게 변화되었다고 간증하며 뛰어 나갔어야 되는데 사도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바나바가 데려올 때까지 3년간 아라비아와 다소에 머물며 웅크리고 철저하고도 친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만나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광야를 비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 어쩌다 보니까 내가 광야로 떠밀려 갑니다. 이런 비자발적인 광야 생활에는 늘 불편과 원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발적으로 광야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만나며 그분과의 친밀함을 누리며 웅크리는 겁니다. 광야라는 곳은 아무것도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확성기로 들리는 곳임을 온몸으로 체득한 겁니다. 그래서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풍성하고 충만한 주님과의 친밀함과 교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먼저 충분히 경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 받은 자가 해야 될 첫 번째라는 거예요. 큰 은혜 받은 자가 내적 준비 없이 뛰어다니고 갑자기 모든 일을 다 맡아서 하다가 탈진하고 변질되고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은혜 받고 내가 뜨겁습니다…그럴 때일수록 일에 뛰어다니지 마시고 일과 사역보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가 충만해지고 풍성해지고 친밀해지는 데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과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새벽 기도가 자발적으로 광야에 나오는 시간입니다. 남들은 자고 있을 때 깨어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광야로 나와 예수님과 독대하고 만나는 친밀한 시간입니다. 자발적인 아라비아 사막의 경험이 누려지는 시간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주님과 독대하며 주님과 친밀함으로 내면을 든든히 세우는 시간입니다. 일상에도 이렇게 내가 자발적으로 광야로 나오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하는 특별한 일상 속에서의 영적 훈련들과 습관들이 다 그런 겁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그 어떤 모든 것들이 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한 해 일주일간의 구별된 선교 여행이 바로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내가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을 함께 목도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Bad News가 있어야 Good News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은 후가 분명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 원합니다. 그 부끄러움과 수치를 넘어 주님이 주신 은혜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부끄러움과 연약함과 가리고 싶은 과거를 다 덮고도 남은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나에게 부어짐을 삶으로 체험하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부어 주신 은혜 가운데 선명히 붙들려 조율 받으며 주님의 사랑 가운데 오늘도 친밀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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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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